〈 100화 〉 마군주 베리아 (1)
* * *
흑기사가 사라지고 조금의 시간이 지나서, 소환이 끊어진 걸 눈치챈 질은 마기노를 물리치자마자 움직임을 멈춰 한동안 제자리에 서 있었어요.
짧았던 몇 개월이라고 해도 자신과 몇 번이고 함께 싸워주었던 소환수였으니까요.
마음의 정리를 마친 질이 파티원 모두를 불러모았을 때는 공중에 멈춰선 문의 파편이 슬슬 움직이려 할 때였어요.
루니도 시간을 끌어버린 탓에 흑기사가 남겨둔, 시간을 멈추는 힘이 점점 약해져 가고 있었거든요.
“마기노가 또 나타나면 들어가기 어려워지니까 얼른 들어가요!”
“잠깐만! 들어가면? 들어가면 나올 방법은 있는 거야?!”
그런데 급한 마음에 소리치던 질에게 들어간 뒤의 일을 걱정하는 알마에요.
연속되는 전투로 인해서 파티가 상당히 지쳐있으니, 안쪽에서 갇혀버린다면 방법이 없긴 하니까요.
짜증이 섞여 있긴 하지만 이번 질문은 꼭 필요한 질문이기는 해요.
“될지는 모르겠지만,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 빨리!”
“믿는다고…!”
안쪽으로 들어가는 데에는 그렇게 고생을 했는데, 나오는 건 방법이 있다니 이유를 모르겠지만 질의 말에는 힘이 담겨있었어요.
적어도 파티원들을 믿게 하려면 당장의 거짓말을 해서 속이려는 느낌은 아니었죠.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모두가 문 안쪽으로 달려들어 갔어요.
그리고 운이 좋게도, 루니와 질이 들어온 것을 마지막으로 문이 빠른 속도로 완전히 수복되어 들어왔던 곳이 막혀버렸죠.
안쪽으로 들어오자마자 라피아가 제일 먼저 마기에 대해 말을 꺼냈어요.
들어오기 전에는 희미한 불빛 덕분에 뭔가가 보이기라도 했다면, 문 안쪽은 그 불빛조차 없어 어둠에 눈이 완전히 적응하기까지 기다려야 했거든요.
“어떻게 이런 독한 마기가…. 질, 불빛 좀 비춰줘.”
라피아의 부탁에 질은 자그마한 불꽃을 손 위에 만들어 냈어요.
그러자마자 누가 봐도 수상해 보이는 것이 눈앞에 나타났죠.
“마기노를 불러내던 거, 이거 아니야?”
“혹시 모르니 부숴놓는 게 좋겠어.”
알마가 바로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대한 조각상에 대해 말을 꺼냈어요.
조금씩 익숙해지려던 찰나에, 윤곽 적으로나마 보이던 무언가에서부터 마기가 엄청나게 쏟아져나오고 있었거든요.
부수는 건 비교적 힘이 남아있는 라피아가 하기로 했죠, 다른 파티원은 장시간의 전투로 지쳐있었으니까요.
앞으로 나서서 자신의 피로 거대한 망치를 만들어 낸 라피아는 그대로 조각상을 향해서 휘두르려고 했어요.
네, 휘두르려고 했어요.
그러지 못한 이유는 질이 루니를 소환 해제한 뒤, 라피아의 앞으로 뛰쳐나가 조각상 너머로 달려갔기 때문이에요.
“야! 어디 가는데?!”
질이 만들어 낸 불꽃에 의지하던 알마는 자신의 가방에서 남아있던 마지막 하나의 마정석을 꺼내 들어 불빛을 비춰 쫓아가려 했어요.
바로 라피아에 의해서 저지당했지만요.
“왜 막는 거예요? 앞에 뭐가 있을지 알고!”
“…뭐가 있는지는 뻔하잖아. 우리는 이걸 부수는 게 먼저야.”
라피아의 말에 ‘아.’라는 짧은소리를 내며, 알마는 주먹에 너덜너덜해진 보호구를 벗어내고 새로운 보호구를 착용했어요.
다른 파티원도 같이 앞으로 몰려와서는 알마와 함께 라피아의 옆에 섰죠.
“뭐 하는 거야?”
“조각상이 꽤 커 보여서, 혼자 부수기 어려워할 것 같아서요.”
“오지랖은.”
툴툴대면서도 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네요.
뭐, 라피아 혼자서 조각상을 부수기에는 버거운 크기이기는 해요.
천장의 높이를 기억하나요? 그 천장에 닿을 정도로 엄청나게 크거든요.
조각상이야 알아서 부술 테니, 그 너머로 달려간 질을 보도록 해요.
질은 달린 지 얼마 안 되어서 멈춰 섰어요.
마기 속에서도 은은하게 풍겨오는 익숙한 마나의 냄새가 상당히 진해진 것을 느꼈거든요.
마나의 냄새가 아니라 어둠에 익숙해진 시각에 의지하더라도, 더 이상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길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된 거예요.
자신의 눈앞에 그토록 바라던 탈리안이 있었으니까요.
그럼에도 질은 섣불리 다가가질 못했어요.
탈리안의 모습은 그야말로 처참하기 그지없어, 자신이 알던 모습과는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두 손은 수갑과 비슷한 것이 착용 되어 있고, 사슬로 머리보다 위로 끌어 올려져 구속되어 있었어요.
고개는 푹 숙여 보여줄 생각을 않았고, 온몸에는 손톱으로 긁은 것 같은 상처와 채찍으로 맞은듯한 상처가 가득했어요.
상처를 훤히 볼 수 있었던 이유는 질이 잠입하기 위해 입었던 노예복을 탈리안도 입고 있었기 때문이에요.
중요 부위만 간신히 가리는 그 노예복이었지만, 탈리안의 것은 조금 더 헤져서 그 기능조차 제대로 해내고 있지 못했어요.
이런 처참하고 무기력한, 질을 구해냈을 때와는 다른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거든요.
그럼에도 상처나 헝클어진 머리 말고는 전체적으로 깨끗한 상태에 이질적인 느낌을 받은 질이에요.
“…언니.”
자그마한 소리로 탈리안을 불러보지만, 미동조차 없어요.
“…탈리안 언니.”
한 번으로 포기할 질이 아니죠.
단순히 지쳐서 잠든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이름이라도 부른다면 혹시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어줄지 어떻게 알겠어요.
그렇지만 이번에도 아무 반응이 없었어요.
“언니, 눈 좀 떠봐요….”
질은 계속되는 부름에도 반응을 하지 않는 탈리안의 모습에 겁이 났어요.
만약, 만약에라도 자신이 알고 있는 탈리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라면?
마나는 틀림없이 탈리안이지만, 얼굴은 머리카락에 가려져 제대로 확인을 못 했으니까요.
질은 두려워졌어요.
“언니 맞잖아요…. 왜 안 일어나요? 언니….”
그래서 길게 늘어뜨려진 머리카락을 손등으로 조심히 옆으로 치워 탈리안의 얼굴까지 확인해봤어요.
얼굴만큼은 아무 상처도 없는 걸 보고는 양손으로 탈리안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계속해서 불렀어요.
하지만, 그 어떤 방식으로 탈리안을 부르던지 좀처럼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았죠.
정말, 죽은 것처럼요.
“뭐가, 뭐가 문제인 거예요…. 말해줘요, 언니…. 왜 안 일어나요…? 아파서…. 아파서 그래요?”
아무 대답도 없는 그 모습에 정말로 죽은 건 아닌지 탈리안의 코 밑으로 손가락을 대보기도 했어요.
다행히도 탈리안이 죽은 것은 아니란 걸 알아챈 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보기만 해도 아픈 상처에 아끼고 있던 포션을 꺼내 발라주었어요.
원래라면, 마시는 게 효율이 제일 높은데 상황이 상황이니까요.
그리고는 아프지 않도록 약간의 진통 효과가 있는 마법을 구사해, 상처 부위에 가져다 대었죠.
그런데 질의 왼편에서 잘그락거리는 소리가 났어요.
“누, 누구예요?!”
“…흐으, 들어본 적 있는 목소린데….”
약간은 쉰 소리가 섞였지만, 왼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이전에 질도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였어요.
“그 목소리…. 아이펠, 뭐더라…. 어쨌든 당신이 왜 여기에?”
아이펠슈에였어요.
제르반이 죽은 것을 모조리 질의 탓으로 해선, 질을 정신적으로 몰아가던 그녀예요.
하지만 이렇게 탈리안과 같이 잡혀있다는 것은….
“하하, 기억해주니 영광이네…. 너는 탈리안이 데려왔던 꼬마였던가…? 이런 곳까지 찾아오다니 많이 컸네.”
“왜 여기에 있냐고 물어봤잖아요! 아니, 아니야. 탈리안 언니가 말했던 동료가 당신이었을 텐데…. 당신이 나보고 말했잖아요! 당신은 강하다고! 근데 왜 같이 붙잡힌 거야! 그렇게 나보고 잘난척하며 강하다고 말할 정도라면!! 탈리안 언니라도 도망치게 했어야지!!”
그때 들었었던 말들이 아직도 신경이 쓰였는지, 질은 아이펠슈에를 향해서 원망의 말들을 쏟아냈어요.
정작 본인은 듣는 체도 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요.
“…그냥 우리가 상대하려던 년이 무지막지하게 강했을 뿐이야. 그리고 너도 여기 들어온 이상…. 쉽게는 못 빠져나갈 거야.”
“그게 무슨…!”
“…봐, 그년이 눈치챘어. 난 다시 기절한 척이나 할란다. 애 써봐, 꼬마.”
질이 뭐라고 물어보기도 전에 아이펠슈에의 말소리는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어요.
대신에, 질의 뒤쪽에서 비명이 들려왔죠.
질의 파티가 있던 쪽에서요.
무언가 위험한 일이 생긴 건 맞지만, 질은 황급히 일어서서 달리려 하자마자 고민이 됐어요.
지금껏 애타게 찾아 헤맨 탈리안의 옆에 있을 것인지.
지금껏 자신을 돌봐준 라피아의 곁에 있을 것인지를요.
사실 이 고민은 하나 마나였어요.
탈리안은 오랜 시간동안 잡혀있었음에도 잔 상처만 입었을 뿐, 분명히 살아있으니까요.
반면에 힘으로 뚫고 들어온 이상 라피아는 ‘적’에게 있어서 처리해도 상관없는 침입자인 거예요.
그걸 알게 됐을 때, 질은 이미 라피아를 향해 달리고 있었어요.
그런데 이상하죠.
도착했을 때에는 적은 안 보이고, 파티원끼리 싸우는 장면만이 보이는 거예요.
게다가 이미 한 명은 상체와 하체가 분리되어 장기를 바닥에 흩뿌리고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어요.
라피아와 알마는 상황 파악조차 제대로 못하고 파티원을 공격하려는 걸 최대한 막는 중이었고요.
하지만 원래 그럴 실력이 아닐 텐데 적대감을 드러내는 파티원은 라피아와 알마가 힘을 합쳐 막기에 생각보다 버거웠어요.
수에는 장사가 없다고 하지만, 3 대 1인 상황에서도 1이 밀리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증명 중이었죠.
“정신 차리라고…!”
가까스로 라피아가 반격에 나서 검을 사용해 대각선으로 파티원을 베어내려 한 순간에, 적대감을 드러내던 파티원은 갑자기 움직임이 멈췄어요.
적어도 라피아는 파티원을 죽일 생각까진 없었을 거예요.
그런데 파티원이 멈췄던 몸을 더 내밀어 검이 치명상을 입히다 못해 이미 쓰러져있던 파티원과 똑같이 이등분 내게 되었죠.
움직일 수 없게 하려고만 했을 텐데, 어찌 됐거나 파티원을 죽여버린 거예요.
바닥에 엎어져 피를 토하는 파티원은 정신이 들었는지 피를 토해내며 ‘왜…. 왜…?’같은 말만 반복했어요.
점점 숨이 멎어가는 파티원의 모습에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던 라피아였지만, 상황은 이걸로 끝이 아니었어요.
갑자기 등 뒤에서 라피아와 알마의 보호를 받던 파티원이 무기로 라피아의 배를 찌른 거예요.
“젠장…! 도대체 뭐 때문에…!”
“마기 때문인가!? 이 녀석이고 저 녀석이고 다들 정신이 이상해져선…!”
질은 탈리안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가가질 못했어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전혀 이해를 못 하고 있어서 머리에 과부하가 걸린 것 같아요.
동료끼리 싸우다니 말로만 들어왔지, 질은 처음 보는 광경이니까요.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지!?”
“아프니까…! 빨리해…!”
“그걸 버티고 있는 라피아 씨도 대단하네!”
알마는 자신의 배를 관통한 무기를 부여잡아 움직임을 묶고 있는 라피아를 보고 감탄하며, 파티원을 주먹으로 쳐 날려버렸어요.
그렇지만 동시에, 파티원이 잡고 있던 무기까지 같이 뽑혀 나가 라피아의 상처에서는 믿을 수 없는 양의 피가 쏟아져나왔죠.
옷을 흥건하게 적시고서도 바닥에 고일 정도의 양이 쏟아져 나왔어요.
“아으윽…! 크흡…!”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전에는 저렇게 강하지도 않았는데…!”
“저 녀석 아직 안 끝났어…! 자세 잡아…!”
아무리 그래도 이런 중상을 입은 라피아를 보고서 모른 척을 할 수는 없었는지, 질은 알마의 앞을 가로막았어요.
“지르니트?!”
“제가 못 움직이도록 막아놓을게요!”
질은 말을 마치고선 빠르게 스태프로 땅을 몇 번 두드려 다시 일어선 파티원을 주춤하게 만들더니, 이내 파티원의 발밑에 있는 지면이 울렁거리며 모습을 다양하게 바꿔, 그 몸을 구속하기 시작했어요.
“그럴 힘이 남아있었다면 진작 와서 도와줬으면 좋았잖아!”
“…이래 보여도 다른 분의 비명을 듣고 바로 달려온 거예요.”
“마녀는 어쩌고 여기로 온 거야?”
투덜대는 알마는 가볍게 무시하고 질에게 투정 부리듯 물어보는 라피아에요.
아무래도 말도 없이 탈리안에게 달려갔던 것이 꽤 서운했었던 것 같아요.
“탈리안 언니는 무사하니까 괜찮아요. 그리고 탈리안 언니 말고도 한 명이 더 잡혀있었는데, 그 사람이 말하기로는…. 탈리안 언니와 그 사람을 잡아넣은 사람이 저희를 눈치챘다고 해요.”
“그럼 저 녀석들이 갑자기 이상해진 것도 다 그 녀석 탓이라는 거야?”
“네, 저번에 언니가 가져온 정보…. 베리아였나요? 그 사람일 거예요.”
대답은 했지만, 라피아의 마음에는 들지 않는 대답이네요.
라피아가 상황 설명을 바란 게 아니었을 거예요.
“그리고 라피아 언니도 그런 서운한 표정 하지 마세요! 저도 언니가 걱정돼서 이렇게 달려온 거잖아요!”
그래도 질이 눈치가 없는 건 아니라서 곧바로 말해주네요.
상황 설명보다 먼저 말해주었으면 100점이었을 텐데 아쉬워요.
“…내가 언제 서운해했다고 그래?”
“저한테는 언니도 중요해요! 제가 누구 덕분에 다시 일어선 건데요!? 몇 주간 옆에 있어 준 언니 덕분이라구요!”
“아, 알았어…. 그만해, 알아들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탈리안 언니는 가족이라서 챙기는 거고! 라피아 언니는 사, 사, 스, 사, 사랑하니까…! 그러니까 챙기는 거라구요!”
많이 서운해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라면 합격점이에요.
둘만 있을 때라면 모를까 타인이 있는 앞에서 칭찬해주는 게 얼마나 부끄럽고, 기분 좋은 일인지 모를 거예요.
그만큼 말해주는 사람이 자신의 좋은 점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알 수 있고, 타인의 앞에서 말하는 부끄러움을 참고 말할 자신감을 가졌는지 알 수 있으니까요.
“지금 사랑싸움할 때야?”
당연하게도 그 모습을 보는 건 아무리 친구 사이라도 못 할 짓이기는 해요.
엄청 느끼하고, 오글거리고, 못 볼 걸 본 것처럼 고개를 돌리게 되겠지만….
“알마 언니는 조용히 해요! 저한테는 중요한 일이니까!”
“너, 너…. 감옥에서의 일에 대한 복수를 하는 거야?”
웬일인지 질이 화를 내며 알마를 다그쳤어요.
질에게 있어서 중요한 일인 건 맞지만 큰소리까지 내며 조용히 하라고 할 일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말이에요.
감옥에서 무슨 말을 들었기에 이렇게 화내는지 모르겠네요.
“푸후흐…! 아, 아아…! 웃으니까 배 아파…! 어윽, 크읏…!”
“못살아 정말, 포션 남은 거 있는데 쓸래요? 회복이 왜 이렇게 느린 거예요?”
“평소라면 금방 회복했을 텐데, 저 녀석이 공격한 건 이상하게 회복이 느려.”
“피라도 빨면 빨라질 것 같아요?”
“괜찮아, 하루에 너무 많이 빨면 그것도 좋지 않아. 비장의 수도 남아있고. 중요한 건 저기서 발버둥 치는 녀석을…. 뭐야 왜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거야?”
질이 묶어둔 파티원을 본 라피아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걸 이상하게 봤어요.
이상함을 느끼고 질을 불러보려 했지만, 바닥에 주저앉아있던 라피아는 억지로 일으켜 세워지듯 뒤편으로 날려졌어요.
던져진 라피아는 알마가 날린 뾰족한 무기와 함께 제자리에 못 박음 되었죠.
“언니?! 흐윽!”
불행하게도, 이번에는 알마가 베리아에게 당한 것 같아요.
라피아를 집어던진 알마는 바로 질에게 주먹을 날렸지만, 가까스로 스태프로 막아내는 게 가능했어요.
잠깐이나마 조용하더니 베리아에게 당했을 줄 누가 알았겠어요.
다른 파티원들이야 몰라도 알마나 라피아가 당하지 않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요.
어쩌면, 이대로 모두가 잡혀버리거나 죽어버린다는 최악의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겠네요.
“기다, 기다려요! 당신 베리아라고 하는 사람이죠?!”
질은 알마에게 대화를 시도했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어요.
대신에 스태프로 막아내기 버거운 묵직한 발차기가 돌아왔다면 모를까.
지금껏 베리아가 파티원의 몸을 빼앗았을 때는 모두 힘이 엄청나게 좋아졌었으니까요.
그렇지만 공격이 계속해서 들어오는 와중에도 질은 포기하지 않았어요.
질리도록 대화를 시도했죠.
“왜 저한테서 탈리안 언니를 빼앗아가려고 하는 거예요! 당신이 슬리브스터를 만들었다면, 왜 이렇게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는 건데요!”
맹렬한 공격에 배리어를 펼쳐가며 방어를 해도, 한 번의 공격에 그 단단하던 배리어가 유리 파편처럼 흩어져 깨져버렸어요.
마법으로 지면을 융기시켜 막아봐도 금방 산산이 조각나 부스러기가 되어 공중에 흩어져버렸죠.
스태프로 공격을 흘리려고 해도 그 힘을 온전히 흘리는 것조차 불가능해 팔이 저렸어요.
지금껏 질이 알던 알마가 내는 힘이라고는 절대로 믿어지지 않는 수준이에요.
다른 파티원을 공격하는 것도 마음에 걸려서 제대로 하지 못해 구속하는 것으로 끝났는데, 알마를 공격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어요.
한때는 자신을 진심으로 공격하고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지금이야 화해해서 같이 싸워주는 동료라는 인식이 있으니까요.
결정적으로, 지금의 질에게는 한없이 강해진 알마에게 반격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워요.
마치 실력과 힘이 오를 대로 오른 전성기의 알마를 상대하는 것 같아, 방어만으로도 벅찼거든요.
“당신이 원하는 게 뭐길래 저한테서 매번 가족을 뺏어가는 거냐구요!!”
“…가족?”
한 단어에 반응한 알마는 기괴한 소리를 냈어요.
알마만의 목소리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섞인 듣기 거북한 목소리였죠.
“후훗, 아하하, 하하하하! 너만 있다면, 탈리안도 이 몸에게 드디어 이름과 몸을….”
“이름…? 당신 베리아라는 사람이 아닌 건가요?”
자기만 알고 있는 이야기만 하니 질이 못 알아듣는 것도 당연하지만, 방금 한 말로 인해서 베리아가 뭔가 꾸미는 일에 대해서 질이 한몫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네요.
그런데 여러 명의 목소리가 한 번에 높게 째지듯이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꽤 섬뜩하게 들려올 텐데, 겁먹지 않고 물어보는 질도 어지간하네요.
“감히 이 몸의 이름을 부르기에 가지고 놀다 죽여주려고 했지만, 이러면 이야기가 다르지. 이리 오거라, 꼬마야.”
“질!! 이 녀석이랑 말 섞지 마!!”
갑작스런 일격이었어요.
하지만 베리아는 뒤에서 공격해오는 라피아를 눈으로 좇지도 않고, 그저 손만으로 검을 잡아내고는 앞으로 끌고 와 바닥에 패대기쳤죠.
“아쉽구나, 소리만 내지 않았더라도 한 번쯤은 당할 공격이었을 텐데….”
다행이라면 바닥에 닿기 직전에 라피아가 낙법으로 데미지를 최소화했다는 점이에요.
그런데 라피아는 다시 덤벼들지 않고, 질처럼 대화로 이끌어가려고 방향을 바꾼 것 같아요.
카미라즈에게서도 적과 친하게 지내려고 생각하지 말라는 잔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요.
“너, 마녀…. 아니, 탈리안이랑 같은 녀석이지?”
“꽤 재밌는 말이구나, 근거는?”
탈리안이랑 같다니, 마녀를 말하는 걸까요?
이전부터 말이 조금씩 나오기는 했죠, 소문도 돌았고요.
질이 붙인 것 같던 마녀라는 칭호도 마법 학원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쓰고 있었고, 마군주가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받았으니까요.
“내 마을을 태워버린 그 녀석과 똑같은 마기를 내뿜고 있는데 내가 모를 것 같아?!”
하지만 라피아가 하는 말을 들어보면, 마녀라기보다는 마기노와 마군주를 말하는 것에 더 가깝겠네요.
“이 몸을 제외한다면…. 벌레들 편에 붙었다가 이 몸에게 잡혀버린 세 명 외에 딱 한 명밖에 없지, 마을을 직접 불태울 녀석이라면 말이야.”
“무슨 말이에요? 탈리안 언니랑 같은 녀석이라니….”
“질, 한마디만 하겠는데, 이 상황에 와서까지 모르는 척은 그만했으면 좋겠어. 너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잖아? 탈리안이 재앙을 일으키고 나타난 마군주라는 거.”
마법 학원의 모두가 그렇듯, 라피아도 탈리안을 마군주라고 알고 있었나 봐요.
사실 여부는 둘째 치더라도 모두가 그렇게 믿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죠.
무엇보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듣고 있는 베리아의 모습을 보면 라피아가 한 말이 거짓이라고 보기에도 어려운 일이에요.
“언니…. 무슨 말이에요? 탈리안 언니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아무리 라피아 언니라도 그런 말을 하는 건 용서할 수 없어요.”
못 믿겠다는 듯이 라피아로부터 조금씩 멀어지며 말하는 질이 안쓰러울 정도예요.
다른 모두가 탈리안은 마군주가 맞다고 하는데, 자신이 본 탈리안은 그와 어울리지 않는, 그 누구보다도 인간적인 사람이었으니까요.
표정만은 침착해 보이지만, 그 속은 이미 뒤죽박죽으로 엉켜 생각의 정리조차 어려운 상황일 거예요.
상황이 점점 나쁘게만 흘러가고 있어요.
“질….”
“후후훗, 자신이 어떤 존재 옆에서 지내는지도 모르고, 멋대로 가족이라 생각했었다니…. 생각지도 못한 즐길 거리가 생겼구나.”
“…그 반응, 마군주라고 생각해도 되는 거겠지?”
조심스레 되묻는 라피아를 본 베리아는 조금씩 웃기 시작하더니, 숨을 한번 가다듬었어요.
그리고는 한 손을 가슴팍에 대고, 남은 손은 정면으로 내밀어 손바닥이 보이도록 펼쳐 보이며 입을 열었어요.
알마의 옷차림이 드레스였다면 상당히 잘 어울릴만한 몸짓이었죠.
“숨겨서 무엇하겠느냐. 이 몸이 오만의 종족, 탐욕에 빠진 마기노를 이끄는 마군주, 베리아다. …음, 흠? 이 몸은 가슴이 조금 작구나.”
“그 새끼는 어디 있어! 내 마을을 태워버린 아가레스, 그 자식은 어디 있냐고!!”
“아가레스? 이 몸이 그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냐. 아직도 넘어오지 못한 마군주끼리는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나 있는데, 찰나의 동맹으로 이 세계로 통하는 문을 만들어 냈다고 해서 저기 잡혀있는 되다만 어중이떠중이들과 같은 취급은 하지 말거라.”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궁금한 것은 다 해결되었느냐? 선물을 가져와 준 보답으로 무례하게 구는 것도 눈감아주고, 귀찮은 것을 무릅쓰고 대답해주었지만…. 슬슬 저 아이의 몸을 빼앗아야 하니 끝맺었으면 하는데 말이야.”
“…질을 건드리겠다고?”
알마처럼 몸을 빼앗겠다는 베리아의 말에 라피아는 질의 앞에 서서 길을 가로막았어요.
정작 보호를 받아야 할 질은 아무것도 없는 깜깜한 어둠 속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버려, 지금의 상황을 파악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보였지만요.
라피아가 수신호로 질에게 싸울 준비를 하라거나, 몸을 보호하라고 해도 반응이 없었거든요.
“질, 질이라 하는구나. 하지만 이름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애칭이겠지. 너한테도 상당히 아끼는 아이인가?”
“미리 말해두겠는데, 건드리면 가만히 안 둬.”
“호오, 이 몸의 실체조차 보고 있지 못하면서 그런 말을 해도 되는 것이냐? 아니…. 순순히 비켜줄 것 같지도 않고, 슬슬 이 몸에도 익숙해졌으니 조금이나마 놀아주도록 할까.”
“좋은 마음가짐이, 질?!”
라파아의 몸에서 새빨간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질은 라피아와 알마의 사이를 가로질러 다시 탈리안이 잡혀있던 곳으로 달려갔어요.
그나마 라피아가 싸울 준비가 되어있던 상태라서 베리아의 질을 채가려는 손을 쳐낼 수 있었지만요.
베리아가 말한 것처럼 몸에 익숙해진 것인지, 아까와는 또 다른 실력을 보이는 베리아 때문에 라피아는 질을 신경 쓰고 있을 수만은 없었어요.
그저 알마가 죽지 않도록 전력을 내면서도 섬세하게 싸우는 수밖에 없었죠.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