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 마녀 구출 작전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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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의 파티는 그 뒤로도 몇 시간을 계속해서 싸웠어요.
노예상들만 있었다면 늦어도 한 시간에서 두 시간이면 정리가 끝났을 거예요.
그런데 어째서인지 적들을 거의 다 처리해 갈 때쯤에 뿔 한 개짜리 마기노가 두 마리씩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었어요.
뿔 세 개짜리가 아니라 3명이 한 마리씩 맡아서 처리하면 되었지만 좀처럼 끝날 생각을 하지 않았죠.
한 마리를 처치하면 한 마리가 또 나오고, 두 마리를 한 번에 처리하면 다시 두 마리가 나왔어요.
“그래도 뿔 한 개짜리는 저 혼자서라도 상대할 수 있겠는데요…!”
“그렇게 생각하다 세상 떠난 놈들이 한둘이 아니야, 방심하지 마!”
“알마 언니는 꼭 상대해본 적이 있다는 듯이 말하네요!”
“당연하지! 처음 보자마자 상대한 거라, 내가 한 거라곤 움직임을 방해하는 수준이었지만!”
알마가 말은 저렇게 하지만, 질의 자신감은 자만심에서 나오는 게 아니었어요.
질의 마법은 책을 얻은 뒤로부터 종류가 다양해져 불의 마법뿐만 아니라 다른 속성의 마법까지 사용하는 게 가능해졌었어요.
물, 바람, 땅, 빛, 어둠.
탈리안이 없음에도 질의 실력은 탈 없이 올라가기만 했죠.
애용하던 불의 화살은 한번 목표를 정하면 빗나가더라도 다시 쫓아가는 필중의 마법으로 변해 있었고요.
방금 나타난 수많은 물방울은 엄청난 속도와 날카로움을 가져 마기노의 몸을 관통하는 의지대로 움직이는 아주 작은 포탄이었어요.
여기에 더해 노예상들을 움직이지 못하게 땅을 변형시켜 발과 다리를 묶어 제압하는 일도 가능해졌죠.
다가오는 적에게는 빛을 발해 상대방의 눈을 멀게 하거나, 형태를 이뤄 무기로 적을 베어내거나 구워내기도 했고요.
상대하기 벅찬 상대에게는 머리에 어둠을 둘러쌓아 시야는 물론, 후각과 청각까지 마비시키기까지도 했으니….
흑기사가 없더라도 이제는 뿔 한 개짜리, 아니? 두 개까지는 혼자서도 상대할 실력이 된 거예요.
“못 믿겠으면 믿을 수 있게 지금 당장 보여줄게요!”
질은 곧바로 책을 소환해 자신의 분신을 만들어 냈어요.
첫 소환 이후로 연습을 하지 않은 건 아닌지, 루니는 나오자마자 상황을 파악하고 질의 반대편에 서서 마기노를 자신과 질의 사이에 뒀어요.
제 자리에 선 루니를 본 질은 손에 파란 마나를 둘러 신호를 줬어요.
“환각 쪽의 마법은 아닌 거 같은데, 질이 두 명…?”
당황하는 라피아와 모두를 뒤로하고 신호를 받은 루니는 질보다 먼저 마기노에게 달려들어, 질과 똑같이 마나를 두른 주먹으로 마기노의 턱을 올려 쳐 공중으로 날려 보냈어요.
공중에 날려진 마기노에 맞춰서 같이 추격해온 질은 마기노의 복부에 주먹을 꽂아 넣었는데요.
주먹이 한번 마기노에게 닿을 때마다 마나가 폭발해 추가적인 데미지를 주었고, 그 폭발은 질이 무언가의 장치를 만들어두었는지 푸른 화염으로 바뀌어 마기노를 집어삼키고 있었어요.
루니도 같은 방식으로 마기노를 주먹으로 강타하기 시작해, 한 번으로는 끝나지 않는 묵직한 연격이 시작되었어요.
마법사가 스스로 육탄전을 시도한다니 정말 모순적이지만 그 모습만큼은 가히 파괴적이었어요.
생각 이상으로 빠르고 치명적인 공격에 반격조차 못 하는 마기노의 모습이 불쌍하다 느껴질 정도예요.
이 모든 일련의 행동은 순식간에 지나갔어요.
지면에 착지한 질과 루니는 손에 남아있는 마나의 흔적을 털어내고 자신보다 늦게 떨어지는 마기노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으며, 서로 하이파이브를 했어요.
그리고는 알마를 바라봤는데, ‘내가 이만큼 강해졌는데, 이래도 방심할 것 같아?’라는 시선으로 바라봤죠.
“그래, 너 잘났다! 그래서 이 녀석들은 언제까지 기어 나오는 건데?!”
알마 역시 질에게 지지 않겠다는 것처럼 마기노의 얼굴에 주먹을 꽂아 넣으며 크게 소리쳤어요.
질이 보여준 것에 비해서 시각적인 효과는 덜했지만, 위력은 상당했는지 마기노는 그대로 벽으로 날아가 꽂혀버렸어요.
“아무리 그래도 노예상하고는 달라서 이대로 계속 싸우다간 이쪽이 먼저 지쳐서 나가떨어질 거야. 뭔가 수를 생각해야 해. 우리야 괜찮지만, 저 녀석들은 벌써 지쳤잖아.”
“그렇지만 마기노가 계속해서 나타나는 이유라고 해도 전혀 모르겠는걸요.”
라피아의 말도 일리가 있지만, 질이 주변을 둘러봐도 거대한 문과 넓은 공간 외에는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어요.
“뭐라도 해봐! 두 놈 또 나오고 있잖아! 마나라도 탐지해서 마기노가 들락거리는 통로라도 있는지 찾아보던가!”
“앗, 으…. 화해했으면서 맨날 나만 보고 뭐라 해…!”
“그야 여기 있는 사람 중에서는 네가 제일 만만…! 흠흠! 어쨌든! 뭐든 해봐!”
“만만하다고 했죠, 방금?!”
답답한 마음에 질보고 뭐라 한 거겠지만, 딱히 질의 마음에 드는 대우는 아니네요.
예전처럼 말싸움이나 하던 때보다는 훨씬 낫다고는 해도요.
알마는 뻔뻔하게도 다시 튀어나온 마기노를 다른 파티원과 협공하면서 입을 놀렸어요.
“젠장! 이 녀석 다른 놈들보다 더 끈질긴데!”
알마의 말대로, 마기노들은 나올 때마다 그 강함이 조금씩이나마 강해지고 있었어요.
이대로라면 지금껏 잘 싸워오던 모두가 위험해질 상황이었죠.
언제 뿔 두 개짜리와 세 개짜리가 나올지 모르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알마가 질을 만만하게 본 것을 숨기기위해 딴소리를 한 걸, 질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죠.
“알마 언니!!”
“질, 일단 진정하고…. 알마가 말한 것처럼 마기노가 나온 곳을 추적해보는 게 나을 거 같아.”
“…씨이, 알겠어요…”
작게 알마를 향한 불만을 중얼거리면서도 질은 라피아의 보호 아래 집중하며 방에 흐르는 마나와 마기 전체를 훑어봤어요.
별다른 특이점이 없는 바닥부터, 타일 아래, 벽과 그 너머도 살펴보고, 제일 수상하게 보이는 거대한 문도 살펴봤지만, 문의 너머로는 추적이 불가능했어요.
“아무리 봐도 저 문 말고는 이상한 게 없어요. 어떻게 할 거예요?”
“그럼 문을 열어야지!”
“그렇지만 저런 큰 문을 어떻게….”
“안 열리면 부숴버리면 돼, 일단 시도부터 해보자고!”
문을 열기로 한 이상, 할 일은 간단했지만, 문을 여는 사람은 질이나 라피아, 알마가 아닌 나머지 파티원들과 흑기사였어요.
다른 파티원이 실력이 모자란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대한의 전력을 낼 수 있는 것은 이 세 명이었으니까요.
문을 열 동안 마기노의 공격을 받아내면서 다른 누군가를 지켜낼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셋밖에 없을 거예요.
마기노와 싸우기 위해서라면 흑기사가 적격이기는 하지만, 문을 여는 것은 흑기사의 힘이 문을 열 때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질의 판단 때문에 파티원들을 돕게 됐어요.
“이 문, 힘만으로 열기에는…! 너무 무거운 거 아닌가요…!”
“그래서 도와주고 있잖나! 마나로 열리는 문도 아닐뿐더러, 주변에 문을 열 수 있는 도구 같은 것도 보이지 않으니 힘으로 열수밖에!”
“으으윽…! 차라리 부수는 게 낫겠어요…!”
아무리 밀고 당겨도 한 치의 변화도 없는 문 때문에 흑기사와 파티원들은 상당히 곤욕을 치르고 있었어요.
이 와중에도 질과 루니는 마기노를 혼자서 상대하면서 힐끗거리며 흑기사 쪽을 몇 번이고 훔쳐봤어요.
뭔가 도움이 될만한 게 없는가 살펴보는 눈치였죠.
“시간이 없으면 그냥 문을 부숴도 괜찮아요! 우리가 들어갈 정도로만 부순다면 문이 무너지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질이 소리치는 이유 중에는 옆에서 마기노를 상대하는 알마가 지쳐가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에요.
라피아는 아직 괜찮은 것 같았지만, 벌써 쓰러트린 마기노의 수만 하더라도 20마리가 넘어가고 있었으니까요.
느리지만 확실하게 모두가 지쳐갈 시기가 찾아오고 있었어요.
“애초에 이런 거대한 문을 힘으로 열어젖힌다는 건 무리가 있었지, 베어내겠다!”
질의 명령에 대답하듯이 흑기사가 검을 빼 들고는 힘차게 몇 번이고 베어내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어찌나 단단한지 문에 흑기사의 검이 닿아도 전혀 베어지지 않는 거예요.
그렇지만 별수 있나요? 베어질 때까지, 질의 파티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 생기기까지 베어내는 수밖에요.
좀처럼 깨질 것 같지 않던 문은 끝을 모르고 가해지는 공격에 금이 가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흑기사가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파티원들을 문 앞에 두고 질의 옆으로 달려왔거든요.
“질!”
“세르디어?! 루니, 나 대신 이야기를 들어줘!”
마기노를 상대 중이던 질은 갑자기 찾아온 흑기사에게 루니를 대신 보냈어요.
아무래도 전력을 내기에는 분신인 루니보다 자신이 더 적합하기에 이런 판단을 내린 거겠죠.
싸우다 말고 공중에서 내려온 루니는 흑기사의 앞에 섰어요.
“세르디어, 나를 보는 건 처음이지?”
“음, 그렇지. 탈리안 선생님과 같은 마법이라도 쓴 건가? 뭐라 부르면 되는 거지?”
“처음인데도 잘 알고 있네. 루니라고 부르면 돼.”
둘이 만나는 건 아무래도 이번이 처음인가 보네요.
여기에 더해 눈치 빠른 흑기사는 처음부터 루니가 할 이야기를 먼저 끄집어내려고 했어요.
“알았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은데, 문은 알 수 없는 힘으로 금이 가더라도 자동으로 수복되고 있다. 이대로라면 수복 속도를 무시하고 문을 부수더라도 무의미한….”
“그렇지만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세르디어도 뭔가 생각이 있어서 찾아온 걸 테니까.”
“…맞아, 이대로 모두가 지쳐간다면 얻는 것도 없이 패주할 것이 분명하니까. 하지만….”
“말 안 해도 알아, 질도 그렇지만 나는, 세르디어…. 네가 정말 강력한 기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
“…, …일부러 숨기고 있던 건 아니지만 어떻게 알았지?”
“나랑 질을 너무 얕보는 거 아니야? 나는 네 계약자인 동시에 가족이고 친구인걸.”
자신 있는 표정을 하면서도 자신에게 뭔가 숨기고 있었다는 것 때문인지 약간의 서운함이 담겨있는 것 같았어요.
일부러 숨긴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과정이야 어찌 됐든 결과가 그러니까요.
“…방금만 하더라도 여기서 그 패를 보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애초에 나는 계약대로 네 명령을 듣고, 널 지키기 위해 소환된 거니까. 지금으로서는 불필요하다고 판단했지.”
“응, 그런데 이 앞이 중요해. 너무 중요해서, 놓치면 안 되는 사람이 있어.”
“탈리안 선생님인가?”
“…맞아. 그러니까 어떤 제약이 있더라도 그 기술을 사용해서 문을 부숴주었으면 해.”
“그 기술을 쓴다면 나는 모든 힘을 소비하고, 소환이 끊어져 한동안…. 아니 오랫동안, 네 옆을 지키지 못할 거다. 그래도 괜찮은 건가?”
“질이랑 나랑 어떻게든 해볼게, 라피아 언니도 있고, 알마 언니도 있는걸. 지금은 네가 그렇게 해주는 게 날 도와주는 거야.”
“…알았다.”
루니의 간곡한 부탁에 흑기사는 방패를 등에 메고, 투구를 벗어 집어던지고는 루니와 함께 문 앞으로 향했어요.
투구가 땅에 떨어지며 경쾌하면서도 거친 소리가 났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죠.
문에 도착해서는 파티원이 루니의 말을 듣고는 질을 도와주러 갔어요.
그야 홀로 남아 마기노와 싸우는 질이 지게 되는 일은 없겠지만, 지치기는 할 테니까요.
파티원들이 사라지자 흑기사가 미리 높게 치켜든 검으로 마기와 마나가 한데 모이기 시작하며, 머리카락을 휘날리게 했어요.
보통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어요.
마기와 마나는 완전히 반대되어, 서로가 밀어내는 특성이 있으니까요.
검에 모여든 마기와 마나는 언뜻 보면 시간이 멈춘 것처럼 보이면서도, 뒤엉킨 것처럼 섞여들어 검의 모양 자체를 이질적으로, 또 거대하게 만들었어요.
“루니, 나는 네가 말한 가족이 되어달라는 말에 당황했었다.”
“그걸 이제 와서 말하는 거야?”
“뜬금없이 네 성을 붙여주며 이름을 지어줬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었는지 모르는가 보군.”
“근데 결국 가족이란 단어를 이해할 시간을 달라고 보류해달라고 했었잖아.”
“정령에게 가족이라는 개념은 생소한 것이니까, 아직도 나는 가족이란 이해하기 힘든 단어야.”
“그래서 싫었던 거야?”
흑기사는 대답하길 망설였어요.
“설마, 네가 날 불러내서 훈련하게 되는 날엔…. 훈련 말고도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보내게 되었으니 싫다기보다는….”
“그런 느긋한 것도 싫지는 않았지?”
루니의 질문에 입꼬리만 올려서 피식한 흑기사는 좀처럼 꺼내놓지 않던 속마음을 드러냈어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정령계에 있던 때보다 마음에 들었었어. 가족보다는 친구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다고 할까. 즐거웠, 었다.”
아무래도 지금까지처럼 본심을 숨기고 투덜댈지, 이제 곧 헤어지게 되니 숨기지 않고 다 꺼내놓을지를 고민했던 것 같아요.
그래도, 후회 없는 선택을 한 것 같아 다행이네요.
“알고 있어, 정령을 이루는 것은 오로지 마나가 전부. 세르디어의 몸, 갑주, 검, 방패, 기억까지도.”
“그래, 그러니까 그때는 내가 세르디어가 아닐 수도 있어.”
“…다음에 만날 때 세르디어가 어떤 모습을 하더라도, 나한테는 세르디어야.”
“그것참 고맙군. 아, 그렇지…. 이거 받아.”
흑기사는 놀고 있던 왼손으로 허벅지에 달린 레그백을 뒤적거리더니 마정석과 비슷한 보석 몇 알을 루니에게 건네주었어요.
루니는 보자마자 이 보석이 뭔지 알아챈 것 같아요.
“메모리얼 스톤? 네가 어떻게 이걸…? 탈리안 언니만 만들 수 있는 거로 아는데?”
“내가 자리를 비웠던 한 달간의 이야기를 담아뒀으니 보고 싶을 때 보도록 해. 너와 같이 보냈던 일상이나 정말 여러 가지를 담아두었으니, 심심하진 않을 테지.”
“언제부터 가지고 다닌 거야…?”
“탈리안 선생님이 예전에 말하더군, 루니 너는 앞으로 마기노와 싸울 일이 많아질 테니까 가지고 있으라고. 소환수인 나는 너를 지키다가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면서.”
“그렇, 구나. 언니가….”
탈리안은 자신이 사라지더라도 질의 미래를 생각해서 해놓는 일이 상당히 많네요.
말 그대로 정말 아낀다는 느낌을 받게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요.
그게 성장을 위한 일이든, 이별을 맞이하기 위한 준비이든, 안전을 위한 것이든, 그 어떤 것이라고 하더라도요.
“루니, 때가 되었으니 물러서.”
“…고마워 세르디어.”
“흥…. 다시는 못 볼지도 모를 위험한 기술을 쓰라는 게 가족보고 할 말인지는 다시 생각해봤으면 하는군.”
“…미안해.”
검이 검이 아니게 된 것 같은 모습을 했을 때, 흑기사는 가볍게 검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쳐 문을 일도양단했어요.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후폭풍도 없었으며, 베어낸 문의 파편들은 남들 보기엔 공중에서 완전히 멈춰있는 것처럼 보였어요.
그럼에도 검이 지나간 그곳은 확실하게 질의 파티가 한 번에 들어가고도 남을 크기의 구멍이 생겨있었죠.
문에 구멍이 생겨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도 잠시, 루니는 점점 소환이 불안정해져 앞에서 투명해져 가는 흑기사를 봤어요.
“처음부터 너를 위해 배워온 기술이니 그런 표정 짓지 마.”
“…네가 기억 못하더라도, 내가 기억하고, 절대로 기억나게 해줄 테니까.”
“후후, 기대하지.”
흑기사는 기대한다는 말을 하며 소환 이래 보여주지 않던 밝은 미소를 지어줬어요.
지금까지의 흑기사를 볼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탈리안을 위해서 문을 부숴달라는 부탁을 한 루니의 마음속은 상당히 복잡할 거에요.
꼬마 기사였던 때부터 시작해서, 이름을 지어주고, 실리아가 혼낼 때 옆에서 도와주려다가 같이 혼나기도 하며, 함께 탈리안을 상대하며 합을 맞추기도 했으며, 따로 같이 훈련을 하고 나서는 집에서 정말 특별할 것 없는 일상을 보내기도 했을 거예요.
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서, 그런 일들을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으니까요.
오직 탈리안을 구하기 위해서.
흑기사에게 가족이 되어달라고 했는데 말이에요.
루니는 흑기사의 소환이 완전히 끊어지고 나서도 한동안 그 자리를 지켰어요.
부서진 문에서 느껴지는 흑기사의 강렬한 마나는 금방 사라질 것 같지 않았으니, 이런 감상에 젖는 잠깐의 시간 정도는 가져도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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