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 마녀 구출 작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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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의 파티는 크리미아가 봤던 거대한 공간과 마주했어요.
하지만 크리미아가 막 도착했을 때와는 달리, 마기에 잠식되어 이성을 잃어버린 거점의 노예상들과 파수병들이 엄청나게 많은 것 또한 볼 수 있었죠.
그 수가 질이 끌어모았던 파티의 수와 맞먹듯이 많아 보였으니 굳게 닫혀있는 문은 고사하고, 저 수많은 적을 어떻게 처리할지부터가 걱정이었어요.
혹시라도 적이 있지 않을까 걱정하며 조심히 내려왔기에 망정이지, 탈리안을 찾았다는 마음에 달려왔으면 바로 들켜서 준비도 못 한 채 싸우기 시작했을 거예요.
질의 파티는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아무리 실력이 고만고만한 적들이라도 수에 압도되고, 마기에 잠식되어 있으니 그 힘만큼은 절대로 무시할 게 못 되니까요.
“무작정 힘을 믿고 뛰어들기엔 상당히 무리가 있어 보이지?”
“어떻게 하려구요? 정말 아무것도 없는 탁 트인 공간이라 싸우다가 숨을 곳이나 피할 곳도 없어 보이는데….”
“이런 건 어떤가요, 계단으로 통하는 입구가 넓기는 하지만 우리 인원으로 충분히 막을만한 넓이거든요. 마법이나 특수한 고유 능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뒤에서 엄호하고, 그 외는 앞에서 어그로를 끄는 거예요.”
벽 뒤에서 적들을 훔쳐보던 파티원이 하나 제안을 해왔는데, 발상 자체는 상당히 괜찮아요.
어쩌면 이 방법 외에는 없다 싶을 정도로요.
알마도 이에 동의하는 듯했어요.
“천천히 수를 줄여나가자는 거네, 한꺼번에 많은 양을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니까.”
“조심해야 할 게 있다면 적도 원거리 공격을 할 수 있는 녀석이 있다는 것 정도?”
당연하다면 당연하지만, 마기에 잠식된 사람이라고는 하더라도 기본적으로는 조종당하는 사람이에요.
주변의 마기노나 마군주가 있어서 그 뜻대로 움직이니까 지성이 아예 없다고는 못하거든요.
간단하게 명령받은 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이라 보면 편하겠네요.
증폭된 힘으로 명령받은 것을 최대의 효율로 뽑아내는 것, 그것이 마기에 잠식된 사람의 할 일이니까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돼, 나랑 질이 막아줄 테니까.”
“아…. 언니도 쓰기에 따라 달라지는 능력이었죠.”
라피아의 피를 여러 형태로 변형시키는 능력은 만능이라고 칭해도 될 정도이니까요.
어떨 때는 검으로, 어떨 때는 적을 구속하는 구속구로, 어떨 때는 상대방에게 투척하는 바늘과도 같은 것으로.
그러니 이번에 라피아가 후방으로 나선다고 해도 질이 쉽게 납득할 수밖에요.
“준비됐으면 바로 시작할까요.”
“아, 잠깐만! 나 싸우기 전에 피를 좀 보충해야 되거든. 질, 알지?”
파티원 중 한 명이 재촉하자마자 라피아는 질에게 눈치를 줬어요.
이렇게 눈치를 줄 때 라피아가 원하는 거라고는 한 가지밖에 없죠.
“앗…. 저, 적어도 알마 언니나 다른 분들이 안 보이는 곳에서….”
질도 짐작하듯이, 출발하기 전에 약속했던 흡혈을 말하는 거예요.
그렇지만 라피아는 질에게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어요.
적어도 뒤를 돈다거나, 계단 위로 조금만 올라가면 될 텐데.
빨리하고 싶은 마음에 재촉하는 말만 할 뿐이었죠.
“그럴 장소가 없는 거 알잖아?”
“언니는 다른 사람들한테 풀린 얼굴을 보여주는 게 얼마나 부끄러운지 모르잖아요!”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지만, 보여주기 싫으면 우리가 뒤돌 테니까 걱정 말고 해.”
“뭔지도 모르면서 너무 쉽게 배려하는 거 아니에요?! 그, 소, 소리도 참기 힘든 일인데…!”
억울하다는 손짓 몸짓을 해가며 따지는 게 이보다 불쌍해 보이는 경우는 없을 거예요.
다른 사람 앞에서 쾌감에 져 신음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니, 그 누구라도 싫겠죠.
“왜 배려를 해줘도….”
“그래도 질, 들어봐. 이건 내 사심이 아니라 진심을 내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야. 알잖아?”
“그건, 그건 그런데요! 그래도오…!”
“도대체 뭐길래 우리한테 보여주기 싫다는 거예요?”
“라피아 언니가 힘을 내려면, 피를 빨아야 하는데…. 그 피를 빨 동안 기분이 엄청나게 좋아서…. 저도 모르게 막…. 얼굴도 풀리고, 소리도 나오고….”
“아하~? 그러니까 그거잖아? 자기 위로할 때랑 똑같다는 거?”
“알마 언니!?”
그런데 여기 있는 파티원들은 다들 겪어볼 건 다 겪어본 나이라는 건지 자기 위로라는 말을 꺼내며 질을 놀리기도 했어요.
놀린다기보다는 귀엽게 본다는 말에 가깝겠지만, 질에게는 놀림당하는 것과 다를 게 없을 테니까요.
이 반응들에 버티다 못한 질은 결국 라피아의 품에 가서 안겨버렸어요.
“반응이 너무 어린데요? 혹시 나이가?”
“15살 아래라던가 그런 거 아니에요? ”
“근데 흡혈만으로 그렇게 기분 좋아질 수 있는 거야?”
“왜, 알마 너도 빨려보려고? 말해두지만 난 맛있는 피 아니면 안 마셔. 그리고 질을 놀리는 건 그쯤 해둬.”
라피아는 자신의 허리를 안고 있는 질의 팔에 힘이 꽤 들어가 있는걸 보고 중재를 해줬어요.
그제야 모두가 질에게 미안하다며 사과하고는 망도 봐주고, 뒤돌아있을 테니 편하게 하라며 배려까지 해줬죠.
이런 친절함에도 아무런 대답조차 못 하고 촉촉해진 눈을 숨기기 위해 빨개진 얼굴을 라피아의 몸에서 떼놓지 않았지만요.
자신으로부터 거리가 멀어진 것을 확인한 라피아는 천천히 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곁에서 떼놓았어요.
아무리 부끄럽더라도 탈리안을 구해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자신을 떼놓는 라피아의 손길을 거부하진 않네요.
질도 이럴 때 보면 참 대단해요.
“나중에 내가 쟤네 다 혼내줄 테니까 너무 삐져있지는 말고.”
“…몰라요.”
“혹시라도 큰소리를 내면 안 되니까, 오늘만 손으로 네 입 좀 막을게.”
“…마음대로 해요.”
질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라피아는 질을 벽으로 몰아 왼손으로 살포시 질의 입을 덮었어요.
천천히 덮이는 손의 온기에 일순간 흠칫거렸지만, 이내 날카로운 송곳니가 파고드는 감각에 고통 섞인 신음을 흘렸어요.
그렇지만 항상 그렇듯이 얼마 안 가서 곧바로 온몸의 힘을 빼고 라피아에게 안겨, 멍한 눈으로 허공만 보게 됐어요.
질은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중간중간 전신을 달리는 듯한 찌릿한 느낌에 부끄러운 소리를 내기도 했어요.
확실히 다른 사람에게 보였다간 얼굴이 빨개지다 못해 터져버릴 수도 있을 부끄러운 광경이기는 해요.
몇 번이고 반복한 탓에 쉽게 몸을 맡겨버리니 흡혈이라는 행위뿐만 아니라, 이제는 쾌감에도 익숙해진 것 같아요.
애초에 방금 거부한 이유도 다른 사람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기 싫다는 것뿐이지, 흡혈을 거부한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번에는 질의 생각보다도 흡혈이 길어졌어요.
이대로면 온몸의 피가 다 빨려버리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길고 길었죠.
하지만 흡혈 시간이 길어질수록 질이 받는 쾌감은 길어지기만 했으니 저항하는 것도 할 수 없었어요.
흡혈이 끝난 건 질이 졸음을 느끼고 눈이 감기기 직전이 되어서였어요.
“고생했어, 끝이야.”
“너무, 너무 오래 걸렸잖아요….”
너무 오랜 시간 흡혈을 해서 그런지, 질은 바로 바닥에 주저앉았어요.
그렇지만 이 정도로 오래 걸릴 것이었다면 진작에 질의 부탁을 들어줬어도 되는 게 아니었을까요.
“미안해, 이번에는 좀 오래 싸울 것 같았거든. 일으켜 세워줄까?”
“아, 아니 괜찮…! 하읏?!”
“뭐, 뭐야, 왜 그래?”
라피아가 질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워주려 했는데, 생각도 못 한 소리를 내버린 탓에 라피아가 놀라버렸어요.
“그렇게 빨아대면…. 어딜 만져도 민감하다구요….”
“빨아대다니! 마셨다고 해줘, 남 듣기 이상하잖아!”
“언니 때문이잖아요!”
둘이 티격태격하는 소리에 멀어졌던 알마와 파티원들이 돌아왔어요.
이래서야 질과 라피아가 보통 사이는 아니라는 걸 다 알게 됐겠죠.
본인들도 그다지 숨길 생각이 없는 걸 보아하니 별로 상관이 없는 이야기 같기는 해요.
“다 했으면 이제 싸워도 되겠어요?”
“안될 게 뭐야, 전력으로 엄호해주지! 자리 잡아!”
라피아의 지시에 모두가 미리 사전에 정해둔 자리에 위치했어요.
파티가 준비를 끝마친 걸 보고 라피아는 손가락을 깨물어 상처를 내고는 흘러나오는 피로 손바닥에 간단한 그림을 그려냈어요.
그리고 그림이 다 그려진 손바닥을 공중으로 향하자마자 박쥐 한 마리가 나타났죠.
모두가 생각하던 박쥐의 모습에서는 상당히 이미지가 다른, 조금 크기가 크고, 귀여운 모습의 박쥐였어요.
“설마 그 애가 예전에 말했던 사역마에요?”
“어? 응, 한 번에 알아보네? 얘가 적들을 여기로 데려와 줄 거야.”
“신기하네….”
사역마는 라피아가 명령을 내리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넓은 곳으로 날아가 적을 공격했어요.
그저 단순해 빠진 사역마였다면 라피아도 소환하지 않았겠죠.
어쩐지 공격하는 방식도 라피아와 닮은 구석이 있는 게, 기동성을 살려 날카로운 발톱으로 긁거나 찌른 뒤 도망쳐오는 전투 방식을 활용했기 때문이에요.
그 모습을 본 질은 뭔가 잊은 걸 떠올린 것처럼 급하게 공중에 마법진을 그려냈어요.
마법진에서는 뭔가 불쑥하고 튀어나오더니 이내 무거운 무언가가 바닥에 ‘쿵!’하고 착지했어요.
“세르디어! 나오자마자 미안한데, 앞에서 몰려오는 사람들 좀 상대해줘!”
“이건 또 무슨…. 일단 해주기는 하겠지만….”
“부탁해!”
뜬금없는 흑기사의 등장에 파티원들은 눈을 동그랗게 떴어요.
라피아나 알마야 익숙해서 그렇다 쳐도, 다른 사람들은 처음 보는 광경이니까요.
하지만 전투가 시작된 이상 잠깐이라도 놀랄 시간은 없었어요.
사역마에게 공격당한 적들이 질의 파티를 눈치채고 달려오기 시작했거든요.
체격 차이와 단단한 장비로 인해 제일 앞에 서야 했던 흑기사는 접근하는 적들을 방패로 쳐내거나 검으로 베어 하나하나 처리했어요.
자신의 몸만 한 방패를 휘두르면 거센 바람이 일어 뒤에 있던 적도 같이 날아가 버렸고, 묵직한 검이 내려쳐 지면 그대로 바닥에까지 검흔이 생겨 일도양단을 내버렸어요.
솔직하게 말하자면, 흑기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해도 될 거예요.
소환수라서 마나만 있다면 지칠 일도 없을 테니까요.
그래도 질은 마나 운영과 효율을 신경 써서 흑기사를 몇 차례 뒤로 오도록 하고 파티원에게 적들을 맡기기도 했어요.
순식간에 엄청난 수의 적들을 처치했지만, 아직 많이 남아있거든요.
그리고 당연하게도, 접근하지 않고 원거리에서 마암석을 사용해 마법을 사용해 공격하는 적들도 있었어요.
생각보다 강한 위력에 질이 마나 배리어를 펼치면, 라피아가 배리어에 무리가 갈 공격들만 따로 자신의 능력과 사역마를 이용해 적의 공격을 상쇄시키기도 했죠.
다른 파티원들도 알마와 합을 맞춰 흑기사에게 부담이 되지 않도록 미리 수를 줄여놓기도 했고, 부상을 입으면 바로 뒤로 빠져서 치료하는 것으로 침착하게 전투를 이끌어갔어요.
이 모습이라면 제대로 된 전투라고는 이번이 처음인데 꽤 잘 싸운다고 평가해도 될 거예요.
비교적 질과 라피아가 편해 보이기는 해도 원거리에서 들어오는 공격을 전부 막아주고 있으니 파티의 역할 분배가 잘 이루어졌다고도 할 수 있었어요.
매번 앞으로 나가서 직접 싸우던 라피아가 뒤로 빠진 건 의외였지만요.
“그런데, 저번의 그 소환수는 왜 안 부른 거야?”
“릴리아 말하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 소환수가 흑기사만 있는 건 아니었죠.
왜 따로 흑기사만 불러낸 건지 라피아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는 거겠죠.
전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거니까요.
“어, 전에 보니까 그 녀석이 있었다면 방어 진지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도 그렇네요.
릴리아의 능력이라면 넝쿨을 이용해서 적들이 접근하는 방향이나 길목을 제한할 수도 있을 거예요.
“그 생각을 못 했네요. 근데 아직은 서로 잘 맞지 않아서…. 남는 시간이 있으면 따로 불러내서 연습하고 있어요.”
이전에 크리미아를 구해냈을 때를 생각해보면 릴리아가 질의 말을 거부한다던가, 반항적인 모습은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요.
뭔가 사이에 일이 있었던 건가 보네요.
“그렇구나, 하나 질문해도 돼?”
“지금은 여유가 있으니까 물어봐도 돼요.”
참 대단하죠.
탈리안이 새겨준 각인, 탈리안이 들고 다니는 책의 레플리카, 두 가지만 있는데도 10살이라는 나이에 이런 장소에서 잘 싸워내고 있는걸 보면요.
탈리안이 말했었죠, 잠재된 마나의 양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요.
“이제 사람을 상대하는 거에는 별로 감흥이 없나 봐?”
“그건 아니에요, 나쁜 사람이니까 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이렇게 바로 사라지는 걸 보니 마음이 불편하긴 하네요.”
“불편하긴 하구나? 뭐…. 죽은 사람이 바로 재가 되어 사라지는데 보기 좋은 그림은 아니지.”
“마기에 잠식되면 다 그런 거예요?”
“마기에 대해서는 강의를 대충 들었나 보네? 마기노와 계약을 하거나, 마기노가 내뿜는 마기에 잠식되면 저럴 수밖에 없어.”
그렇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대화까지 하면서 느긋하게 파티원을 보호하는 모습을 보니 이제까지 질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어요.
보통은 후방에서 지원을 하더라도 정신없이 이 사람 저 사람 돌봐주기에도 바쁠 텐데 말이에요.
1인분을 하다못해 과장 좀 보태서 3인분까지 잘 해내고 있으니 얼마나 대단한가요.
“대충 들은 게 아니라…. 아니에요. 일단 집중할래요.”
사람을 죽여서라는 이유로 마음이 불편하기도 하겠지만, 모두가 노력하는 와중에 떠들려고 하니 불편한 것도 있을 거예요.
뒤에서 열심히 보조해주는 역할을 맡았다면 더 방심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자신의 작은 실수 하나로 파티원이 다칠 수도, 죽을 수도 있으니까요.
무엇보다 이 전투가 끝나려면 엄청나게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 같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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