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화 〉 마녀 구출 작전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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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기가 문 바깥의 공간을 빈틈없이 채웠을 때, 크리미아는 문 안쪽의 참상에 할 말을 잃어버렸어요.
신체 일부분이 참혹하게 찢겨나가 피를 내뿜고 있는 빨간 머리의 누군가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어요.
빨간 머리 뒤로 3구의 시체가 있었는데 형체를 알아볼 수 없도록 짓이겨져 있었기 때문이에요.
장기중 일부분이 삐져나와 방 안을 빨갛게 물들인 거야 당연하고, 벽면 이곳저곳에 튀긴 혈흔들까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빨간 머리만이 살아있던 것이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었어요.
정면에 파란 머리색의 소녀와 마주 보고 있는 데다, 한쪽 구석에는 기절했는지 죽었는지 모를 여자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거든요.
크리미아의 기억을 살펴보면 빨간 머리는 이전에 파티를 구성할 때 보았던 의뢰주, 아스티엘 라피아였어요.
그렇다면 라피아와 대치 중인 소녀는 말하지 않더라도 뻔하죠.
하지만 상항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알아보려면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가야 해요.
크리미아의 파티가 야영하기 시작한 새벽으로요.
그때 질의 파티는 모두가 잠든 틈을 이용해서 살그머니 감옥을 빠져나와 장비가 있는 곳까지 이동 중이었거든요.
“거봐요! 제가 뭐랬어요? 라피아 언니가 배신할 리 없다고 했잖아요!”
“어쩔 수 없었잖아?! 가짜들 사이에 진짜가 섞여 들어간 걸 우리가 어떻게 안다고 그래!”
“난 신경 안 쓰니까, 조용히들 좀 해! 이러다 들키겠어!”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대화하면서도 여러 감정이 묻어져 나오는 대화였어요.
아무래도 질의 파티가 감옥에 있는 동안 뭔가 일이 있었던 것 같아요.
가령, 빨간 초커 중에서 하나가 진짜였다거나 그런 일이 말이에요.
“이 한마디만 할게요. 이 의뢰가 끝나면 알마 언니는 라피아 언니한테 사과해야 해요!”
“치잇…! 알고 있다고!”
“조용히 하…!”
“전부 닥치라고 했을 텐데!!”
라피아의 말에도 조용히 하지 않아서인지, 눈치가 빠른 기사가 대신 소리쳤어요.
덕분에 한순간에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한참을 소리 없이 달려야만 했죠.
그 침묵 끝에 도착한 곳은 경매장 비품 창고라는 문패가 달린 방이었어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거 같으니 들어가서 갈아입고 나오시기 바랍니다.”
“…굳이 이런 곳에다 숨겼어야 했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른 곳은 너무 눈에 띄는 데다 검사도 잦아서, 비품 쪽은 자주 들락거리기만 할 뿐이지 자세히 살펴보지는 않거든요.”
라피아의 불만에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기사에요.
불만을 품는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어요.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갖가지 도구와 상스러운 옷들,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들이 담긴 소병들과 낙인을 찍을 때 쓰이는 인두까지.
경매장 창고답게 그렇고 그런 물건들이 줄지어 있었으니까요.
이런 살풍경한 곳에서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니 꺼림칙하겠죠.
“짐가방은 제일 안쪽에 크롬웰 가문의 문양이 새겨진 상자 안에 들어있습니다.”
“하아…. 알았어.”
장비가 안에 들어있고, 다른 갈아입을 곳도 마땅한 곳이 없으니, 하라면 해야죠.
그래도 방 자체는 생각보다 깔끔했어요.
정리가 잘 되어있었다고 해야 할까, 도저히 노예상들이 쓰는 창고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였죠.
먼지 한 톨 없이 정리하더라도 동선에 낭비가 없도록 차곡차곡 쌓아둔 걸 보면 이게 노예상의 거점이 맞는지 의심조차 될 거예요.
아, 그렇지만 단 한 가지.
이곳의 재정 상태가 꽤 좋지 않은지 조명만큼은 어둑해서 분위기가 썩 좋지는 못하다는 게 있겠네요.
“자, 얼른 갈아입고 나가자.”
“언니, 뭔가 가릴 게 필요할 거 같은데….”
“질, 더운물 찬물 가릴 때가 아니잖아, 시간이 없어.”
“그, 그렇지만 마차 뒤에서 갈아입을 때는….”
그러고 보니 질이 남들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 건 처음이네요.
질의 말대로 마차 뒤에서 갈아입을 때는 시간에 여유가 있어서 한 명씩 갈아입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받쳐주지 않으니까요.
모두의 앞에서 나체를 보여야 한다는 것인데, 라피아만 있으면 모를까 다른 사람도 많으니 망설이는 거겠죠.
하지만 이제 와서 부끄러워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에요.
속옷도 입지 않은 채로 중요 부위만 아슬하게 가려주는 옷을 입은 상태에서 벗기를 주저한다니.
물론 탈리안을 구하기 위해서 입었다곤 하지만, 지금 질의 모습이 건전하다고는 못할 차림새거든요.
땀으로 흠뻑 젖은 그 몸이 반들거리며 피부를 빛내는 걸 본다면, 나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예요.
질이 이런 쪽으로 내성이 전혀 없는 거야 어쩔 수 없지만….
하기야, 질이 거점에 들어온 뒤로는 시선이 고정되는 일이 없긴 했어요.
같이 다니는 사람들이 죄다 모험가와 마법 학원의 학생들이라 힘 좀 쓰는 덕분에 꽤 건강한 몸들을 하고 있으니까요.
먼저 벗기 시작한 다른 파티원들의 몸을 보게 되자마자 시선을 이리저리 피해버리는 것도 당연한 일이기는 해요.
“빨리 벗고, 빨리 입어버리면 되잖아?”
“우으…. 다음부터 옷을 갈아입는 의뢰는 절대 안 할 거야….”
눈물을 머금은 질은 재빨리 노예복을 벗었어요.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들었던 분을 풀려고도 했던 건지, 벗었다기보다는 옷을 찢어버렸다고 해야 더 맞겠네요.
어차피 다시 입을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런데 라피아가 그 장면을 보더니 멍하니 있다가 혼잣말로 중얼거렸어요.
“잠깐만, 이건 기회잖아…?”
“네? 무슨 기회…. 왜 그렇게 빤히 쳐다보는 거예요…?”
상자에서 바로 옷을 꺼내 들던 질은 라피아의 시선에 바로 고개를 돌려 물어봤어요.
등만 보이는데도 평소보다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게 익숙하지 않아, 집어 든 옷으로 몸을 가리면서요.
“아니, 질의 알몸…. 좀처럼 보기 힘든 건데…. 조금 어둡긴 해도 지금이라면 두 눈에 담아놓을 수 있는 거 아닌가…?”
위병 아저씨 여기에요.
여기 변태가 있어요.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빨리 갈아입어야 한다면서요?!”
질은 부끄러움에 소리치지만, 라피아는 그럴수록 더 눈을 고정해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했어요.
언제는 시간이 없다며 빨리 갈아입어야 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요.
그래도 라피아의 심정이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에요.
질은 그 어디에 내놓더라도 잘 커 주었다고 할 만큼 아름다운 외모와 몸을 하고 있으니까요.
다른 여자들에 비해서는 조금 키가 작지만, 문제가 될 정도로 작은 것도 아니고 아담하다 정도면 맞는 말이 아닐까요?
어쨌든 이런 질의 나체라면, 연인 관계에 있는 라피아로서는 한 번쯤은 보고 싶은 마음이 있을 거예요.
오히려 지금까지 참아온 게 대단하다고 칭찬해도 될 거예요.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보여줘! 마녀를 찾는 것도 중요한데, 나한텐 이것도 중요해!!”
“언니 제정신이에요?!”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다음은 없다고 생각한 건지 아예 질의 다리에 매달려 간곡하게 부탁하는 라피아에요.
추하네요.
그 와중에도 보여주기 싫다고 한 손으로는 옷을 껴안고, 한 손으로는 중요 부위가 보이지 않도록 가리는 걸 보니 질도 노력이 가상해요.
“둘이 뭐 하는 거야….”
둘이 실랑이를 벌이던 중간에 이미 옷을 완전히 다 갈아입은 알마가 끼어들었어요.
다른 파티원들은 입을 게 많아서인지 아직 갈아입는 도중인 것 같은데, 이러다 두고 가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알마! 너도 질의 알몸이 보고 싶지 않아?! 솔직히 말해봐! 질이 얼마나 이쁜데!!”
“언니 진짜 왜 이래요?!”
아무리 자신을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칭찬하니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겠죠.
때가 틀린 칭찬도 그렇지만, 헐벗은 질에게 매달려 보여달라고 애걸복걸하는 꼴이라니 말이에요.
그러니 알마가 한심하게 보는 것도 당연해요.
“아니…. 나는 한번 본 적 있는데?”
“…뭐? 언제!? 나보다 먼저 보여준 사람이 있다고?! 질!!”
“정말 이러다 늦겠어요! 알마 언니도 보지만 말고 도와줘요!!”
“그냥 보여주지? 알몸 하나 보여주는 게 뭐 어때서, 여자끼리인데.”
“저한텐 여자끼리가 아니라 다른…!”
“알마한테만 보여주다니 너무한 거 아니야?! 나한테도 보여줘!”
“언니 놀러 왔어요?! 언니도 얼른 옷 갈아입어요!!”
밖에서 기사의 한숨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지만, 라피아는 이 뒤로도 몇 분간 계속해서 매달렸어요.
그동안 주변에 누군가가 다가오지 않아서 다행이지 그랬다면 기사가 꽤나 고생했을 거예요.
“도대체 뭐 하시는 겁니까, 아가씨는…”
바깥에 망을 보고 있는 기사의 귀에도 안쪽의 소리가 다 들리고 있으니 약간은 한탄 섞인 말을 하더라도 이해해줘야죠.
기사는 ‘이렇게 되면 실력행사를 해서라도…!’라는 라피아의 말소리가 들을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실패로 끝나버린 것처럼 밖으로 나온 질의 파티 가운데에서 기죽은 라피아를 볼 수 있었어요.
“다음부턴 그냥 안 넘어가요! 제가 싫다고 하면 하지 않기로 했잖아요!”
“지금도 충분히 혼내고 있다고 생각해….”
자기보다 힘이 몇 배는 더 센 라피아를 어떻게 저지한 건지 모르겠지만, 나오면서부터 질에게 혼나고 있던 모습을 보니 당분간 자제심을 잃는 일은 없겠죠.
이렇게 라피아를 혼내는 것도 평소라면 못 볼 모습이기는 한데, 이곳 환경이 사람의 짜증을 돋우는 곳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네요.
질은 축 처진 라피아의 모습에도 신경 쓰지 않고 설명을 시작했어요.
“어쨌든 지금부턴 3명씩 두 개조로 나뉘어서 탐색하기로 해요. 당연하지만, 알마 언니랑 라피아 언니랑 저로 한 조. 나머지 세 분이 한 조. 저희는 1층을 살펴볼 테니까 여러분은 지하를 탐색해주세요.”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할게요.”
“최대한 전투는 피해 주세요. 적을 쓰러트려도 기절한 적이나, 시체는 숨기는 거 잊지 마시구요.”
짧은 지시를 내리고 바로 팀이 나뉘어 1층을 탐색해봤지만, 질의 파티가 뭔가를 찾는다는 일은 전혀 없었어요.
가득한 노예들만 실컷 봤다면 모를까 아무것도 없었죠.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라면 너무 수월하게 1층을 탐색하고 다닌 덕분에 1층의 지도는 거의 완벽히 그려냈다는 점이었어요.
문제가 되는 게 있다면 1층의 탐색에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해서 해가 중천에 떠버려, 더 이상 쉽게 돌아다닐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었어요.
“이제 어떻게 할까.”
“2층을 돌아볼까요? 지하에 갔던 분들은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아직 탐색 중인 거 같으니까요.”
“그럴 바엔 지하를 빠르게 같이 확인해보고 2층이나 그 위층을 살펴보는 게 나을 거 같은데.”
“그것도 그렇네요, 1층보다 넓어서 오래 걸리는 걸 수도 있고….”
할 일이 정해진 이상 지하로 내려가는 거야 길도 몇 가지 없고 간단했어요.
게다가 지하로 내려가자마자 타이밍 좋게 다른 파티들이 거점을 공격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질의 파티를 방해할 사람도 없었죠.
지하를 탐색하는 건 정말로 식은 죽 먹기였어요.
미리 내려갔었던 파티원 중 한 명이 큰 부상을 입었다는 것만 제외한다면요.
전투는 피하라고 했었는데 완전히 피하기는 어려웠나 봐요.
하기야 적지 한가운데에서 들키지 말고 탐색을 진행하라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죠.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는 큰 두목, 뱀이라면 골판지 상자 하나만으로도 해내겠지만….
이 파티원들은 뱀이 아니잖아요?
“이대로 계속해도 괜찮겠어요? 힘들다면 미리 거점 밖으로 빠져나가 있어도 괜찮아요.”
걱정하는 질의 말에도 파티원은 ‘의뢰비를 선불로 받았지만, 옆에서 지켜본 거로 짐작하건대 중요해 보이니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라면서 옆에 있기를 부탁했죠.
눈썰미 하나는 좋네요.
그렇지 않았다면 질의 파티에 들어오지 못했을지도 모르죠, 자신의 파티에 넣는 사람일 테니 모두를 꼼꼼하게 살펴보진 못하더라도 한 실력 하는 사람만 골라 파티에 넣었을 것에요.
어쨌든, 미리 내려와 있던 파티원들 덕분에 지도는 거의 반이 채워져 있었어요.
이들 말로는 지하에는 묘하게 순찰을 돌고 있던 파수병이 많았다고 하네요.
“그리고 특이한 복도를 발견했는데, 아쉽게도 우리 중에는 마법에 능한 사람이 없어서 장치를 파훼하는 것조차 할 수 없었어요.”
“특이한 복도?”
“급조한 지도지만 여기를 보면…. 여기, 이 복도만 가면 앞으로 나아가는데도 제자리걸음인 경우가 있었거든요. 뭔가 마법이나…. 장치 같은 게 있는 것 같은데 전혀 몰라서 일단 두고 있었어요.”
“그럼 제가 나설 때네요!”
자신 있게 소리친 질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어요.
무언가의 장치를 풀어버리는 데에는 적잖은 시간이 걸렸지만, 적어도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일은 사라졌거든요.
복도 뒤로는 더 아래로 향하는 길고 긴 계단이 있었어요.
게다가 계단 아래에서는 파티원 전부가 눈치챌 정도로 마기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죠.
질도 알고, 모두가 알아버렸어요.
이 아래에 이번 의뢰의 진정한 목적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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