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 마녀 구출 작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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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미아의 파티는 한참을 걸어도 거점에는 도착조차 하지 못했어요.
질의 파티를 포함한 다른 파티는 보통 곧바로 남하하면서 거점에 잠입하거나 때를 기다리는 중이었는데, 크리미아의 파티만 서남쪽으로 우회하며 이동했기 때문이었죠.
덕분에 피로도는 점점 쌓여만 갔어요.
크리미아의 축복이 있더라도 무한정으로 쓸 수 있는 능력도 아닐뿐더러, 육체적 피로야 어떻게든 해결한다 치지만 정신적 피로는 해결할 방법이 없었거든요.
그래도 지도상으로는 총 거리의 반 정도를 넘어왔고, 적을 마주쳐도 항상 크리미아의 적절하면서도 자잘한 판단들 덕에 파티가 큰 피해를 보는 것은 면했어요.
다른 파티에 비해 이 정도면 상당히 노력했다고 봐도 될 테지만 벌써 시간은 해가 저물어 어두컴컴한 밤이 되어있었죠.
크리미아나 다른 파티원들이 아무리 복수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더라도 야간에 숲속을 걸어 다니는 것은 제정신이 아닌 위험한 짓이었기에 임시 야영지를 만들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프로비우스가 다가와 크리미아에게 말을 걸어왔죠.
“크리미아, 다른 파티는 교전을 시작한 파티도 있다고 하는데.”
“…그렇습니까. 저희는 내일 저녁부터 사냥을 시작하게 될 겁니다.”
크리미아는 상처를 입은 파티원의 치료를 도우면서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대답했어요.
그럼에도 꿋꿋이 프로비우스는 생각에 잠기며 크리미아의 말을 여러 번 머릿속으로 씹고 있었죠.
왜 그 시간대에 사냥을 시작하는지를요.
“아하, 어둠을 틈타 기습하려는 건가? 도망치려는 녀석들을 잡기에는 좋은 시간대이기는 하지.”
“그래서, 그게 전부입니까?”
“아니, 이야기나 좀 할까 해서.”
할 일이 없냐며 따지는듯한 따가운 눈초리로 쳐다보는 크리미아에게도 굴하지 않고, 프로비우스는 옆에 놓인 간이 의자를 가져와 앉았어요.
그 뻔뻔한 태도에 크리미아의 미간이 찌푸려지고 순간적으로 몸에 힘이 들어갔었나 봐요.
“아악?! 크, 크리미아 씨?! 조금만 살살…!”
“아!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크리미아치고는 화들짝 놀라 바로 파티원의 상처를 입은 몸에서 손을 떼었지만, 그 모습이 꽤 웃겼는지 킥하고 비웃는 프로비우스에요.
이야기를 하자면서 크리미아의 신경은 있는 대로 다 긁어놓네요.
“다른 분들이 바쁜 건 안 보이십니까?”
당연히 좋은 반응이 나올 수가 없어요.
당연히 프로비우스가 쉽게 포기할 리도 없었고요.
“좀 봐줘, 내가 오늘 제일 열심히 싸웠을걸?”
“그…! 아니, 생각해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네요.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으신 겁니까.”
근데 또 프로비우스의 말이 틀린 건 아니거든요.
프로비우스는 파티의 중앙에서 상황을 보고 위험한 파티만 골라 도와주는 역할을 도맡아 했으니까요.
그렇게 열심히 일해놓고도 또 일하라고 명령하기에는 미안했을 거예요.
“그냥 네 이야기나 들어볼까 해서, 당신도 궁금하지?”
“예? 아, 예, 그렇지만 모험가라면 서로의 사연을 캐묻는 건 예의에 어긋나서….”
상처를 입은 파티원은 상당히 예의 바르네요.
하지만 예의 바르고 아니고는 프로비우스에게 중요하지 않아요.
그건 프로비우스가 원하던 대답이 아니거든요.
“남자면 더 솔직해도 돼!”
“아! 따갑습니다! 왜 때리는 겁니까!?”
프로비우스는 맘에 드는 대답이 아니면 어깨를 ‘찰싹!’하고 때리는 버릇이 있어요.
이 파티원은 치료 중이라서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으니 더 따가웠을 거예요.
“프로비우스, 환자에게 그런 대우는 좋지 못합니다.”
“어쨌든 이야기해 줘.”
프로비우스의 끈질긴 부탁에 한숨을 내쉬는 크리미아에요.
“…들어도 재미없는 이야기입니다. 나이가 찬 여성이 성녀 후보라는 타이틀을 달고, 시간에 쫓겨 욕심을 부리다가 화를 당한 것이죠.”
“조금 더 자세히 말해줘, 이제 복수할 테니까 그 정도는 괜찮잖아?”
“그렇죠…. 저는 성녀 후보가 되기 전에는 그저 평범한 수녀였습니다.”
그녀가 평범한 수녀였을 때, 약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대략 4년 전일 거예요.
수녀원에서 잡일이나 하고 지내던 크리미아는 청소를 하다가 걸레 빤 물이 담긴 통을 엎질렀는데, 하필이면 그 장소가 좋지 못했죠.
수녀원장이 아끼는 카펫에 더러운 물이 흠뻑 젖은 거예요.
크리미아는 정말 한순간 만에 패닉에 빠졌어요.
항상 자신이 무슨 일을 하든 사고밖에 치지 못하고, 시키는 일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었으니까요.
그렇지만 아무도 없는 사이에 청소해서 점수 좀 따보겠다고 생각하자마자 이런 대형 사고를 칠 줄은 그 누구도 몰랐겠죠.
운도 따라주지 않았던 것이, 수녀원장이 다른 수녀들과 돌아오는 소리가 들려온 것이었어요.
수녀원장의 방에서 옴짝달싹 못 하게 된 크리미아는 애가 타서 더러운 물에 젖어 얼룩진 카펫을 붙들고 울기 시작했어요.
다행이라면 크리미아의 수도원에는 착한 사람들만 있었기에 이 정도 사고로는 화조차 내지 않겠지만, 그게 문제였어요.
항상 도움이 되지 않던 자신을 보고 점점 쓸모없는 인간이라며 자신을 스스로 책망하고, 하루하루 절망에 빠져들어 갔었으니까요.
결국, 크리미아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홍수가 난듯한 사고 현장을 수녀원장에게 들키고 말았어요.
“크리미아? 거기서 뭐 하고 있는 거죠? 카펫이랑 치맛자락은 왜 또 젖어있는 거예요?”
“그, 그것이….”
크리미아는 수녀원장을 바라보느라 카펫이나 치마는 제대로 확인도 못 하고 있었어요.
“제가, 수녀원장님의 카펫을 더럽혀버렸습니다….”
“무슨 소리인가요, 크리미아? 카펫은 깨끗한데요.”
“네? 무슨…. 어, 어어?”
일의 발단은 이때부터였어요.
방금만 해도 더러웠던 카펫과 치마가 젖어있기만 할 뿐이지, 전혀 더럽지 않았거든요.
그냥, 생수를 들이부은 것 같았어요.
크리미아는 수녀원장에게 몇 번이고 자신이 쏟은 물은 이런 깨끗한 물이 아니었다며 잘못을 고했지만, 수녀원장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그저 크리미아가 피곤해서 뭔가를 잘못 본 것이 아닐까 하고 하루 동안 푹 쉬게 해주었죠.
그 뒤로는 단순해요.
크리미아는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파악하기 위해 몇 번이고 같은 상황을 재현했어요.
당연하지만 수녀원장의 방이 아니라, 수녀원 바깥에서요.
한껏 더러워진 물을 양동이에 채워 손을 담가 그때와 같은 감정을 떠올려보기도 하고, 간절함을 가져보기도 했어요.
재현되지 않는다면 몇 날 며칠에 걸려서 아무도 모르게 밤에 빠져나와 연습했죠.
자신이 했던 일이라면, 그 기적과도 같은 일을 다시 재현해낼 수 있다면, 지금까지의 한심했던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있으니까요.
손이 불고, 트고,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고생하는, 그런 피나는 노력이 빛을 보기까지는 거의 반년이 걸렸을 거예요.
재능이 부족해 능력의 개화가 늦어진 거죠.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되자마자, 크리미아는 기뻐서 수녀원장에게 달려가 정화의 힘을 보여주었어요.
“크리미아…. 이건….”
“저, 저도 이제 쓸모 있겠죠?!”
“크리미아, 차라리 모르는 채로 지냈더라면….”
“원장님…?”
뭐, 알고 보니 수녀원장은 이미 크리미아의 재능을 알아보고 있었다는 이야기에요.
그녀의 출생의 비밀부터 해서, 버려진 이유, 그동안 어떤 잘못을 해도 너그럽게 넘어갔던 이유.
모든 것을요.
알게 되기까지의 시간이 꽤 많이 흘러갔지만, 이를 알게 된 이후 크리미아는 수도원에 있을 수 없게 됐어요.
아, 크리미아가 수도원의 사람들을 싫어하게 되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었어요.
오히려 크리미아는 수도원장에게 먼지 한 톨만큼의 원망도 갖지 않았어요.
감사한 마음을 가졌다면 모를까, 재능을 깨워버린 뒤라면 올바른 곳에 써야 한다며 나라의 부름을 받은 것뿐이었죠.
“그래서 그때부터 성녀 후보의 반열에 올라갔다는 이야기구나.”
“그렇습니다.”
“대단하네, 성녀 후보가 된 뒤의 일은?”
“방심해서 슬리브스터에게 잡힌 게 전부입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성녀 후보는 몇 가지 시련을 받습니다.”
귀찮을 텐데도 의외로 잘 대답해주네요.
크리미아가 말한 시련이라 봐야, 황궁에서 직접 내려주는 의뢰 같은 것 몇 가지와 대신전에서의 의뢰 몇 가지가 전부였어요.
어떤 의뢰이든 시련은 시간만 충분히 들이면 누구나가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이었어요.
감시인을 하나 끼고서, 얼마나 잘 해내느냐에 따라 성녀가 되는지 갈리는 것이었죠.
크리미아는 다른 성녀 후보생들보다 나이가 들었기에 더 노력했지만, 애초에 시련 자체가 시간이 많이 들어가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크리미아는 정말로 ‘끝물’이었죠.
그래도 나이에 맞지 않게 황궁에서의 시련을 모두 마치고 대신전에서의 시련을 착실히 수행해갔어요.
성실함에서는 따라올 자가 없다고 봐도 될 인내심이었어요.
능력을 개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진짜 성녀와 비견될만한 기적의 힘을 쓰는 게 가능하게 되었으니까요.
어쨌든, 그렇게 잘 지내고 있는데 타이밍이 좋지 않게 슬리브스터가 생겨난 거예요.
당연히 시련의 내용도 바뀌었는데, 변경된 내용은 슬리브스터에게 잡힌 노예들을 풀어주는 것.
그런데 파티에 새로 들인 모험가 동료가 문제였던 것이었어요.
“배신이라도 당했어?”
“네. 그 모험가는 슬리브스터를 자주 이용하던 변절자였습니다. 잠든 사이에 감시인을 죽이고 저를 슬리브스터에게 넘겨버린 겁니다.”
“황궁의 시련을 수행하는 데만 얼마나 걸린 거야 그럼?”
“글쎄요…. 이제는 상관없습니다. 다 끝나버린 일이 되어버렸으니까요.”
“그렇군. 저녁 먹지 않을래? 이야기하는 사이에 야영지는 진작에 다 만들어졌으니까.”
“…알겠습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야영지의 중심으로 가던 프로비우스는 갑자기 뒤돌아보며 크리미아를 빤히 바라봤어요.
뒷정리를 끝마치던 크리미아는 그 시선을 불쾌해하며 대답했어요.
“아직 할 말이 남아있습니까?”
“그 모험가라는 녀석, 어떻게 생겼어? 이름은?”
“당신이 처리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상대입니다.”
“일단 맡겨봐, 혹시 만날지도 모르잖아? 게다가 난 아직 전력을 보여준 적도 없는걸.”
“이름은 딥 카미라즈, 백발의 다크 엘프에 눈동자가 파랗기 때문에 본다면 쉽게 알아볼 수 있을 겁니다.”
익숙한 이름이네요.
제리의 용사 인생을 망쳐버린 장본인이에요.
제리에 이어서 크리미아까지, 후보생들만 골라서 사냥하는 걸 보니 신기할 정도예요.
“딥 카미라즈…. 그 녀석 몇 달 전인가? 수배가 떨어졌던 녀석인 거로 알고 있는데.”
“그랬습니까…. 하필이면 그를 만난 곳이 대신전과 성지 모두에서 떨어진 숲속이었기에….”
“뭐, 경험 부족이었다는 거네. 그래도 걱정 마 내가 잡아줄게. 이야기를 들려준 값이야.”
“괜한 오기는 그만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러다 죽더라도 저는 명복을 빌어드리지 않을 테니까.”
“아 괜찮아, 괜찮아. 자! 가자고! 배고프잖아!”
“잡아당기지 마세요!”
그래도 크리미아에게 친해진 동료가 생겨서 다행이에요.
적지에서 친한 사람도 없이, 동료도 없이 싸우는 것보다는 한 명이라도 있는 게 싸울 때 마음이 편하니까요.
애매하게 친하더라도 보통 사지에서 같이 구르다 보면 없던 정도 생겨나기 마련이잖아요? 한동안질 옆에서 짜증만 부리던 누구처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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