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92화 (92/189)

〈 92화 〉 마녀가 없는 동안에 (15)

* * *

알마와 함께 노예상의 거점에서 무사히 돌아오고 나서 며칠 뒤, 질의 파티는 지도와 함께 알마가 가져온 정보를 테이블에 올려두고 고민 중이었어요.

알마가 가져온 서류 더미에는 노예상들의 주요 거점, 이용자 명단, 도구의 쓰임새 등등….

노예상에 관한 모든 것이 적혀있었다고 봐도 될만한 방대한 정보가 서류 더미에 적혀있었어요.

이 서류 더미를 의뢰소에 가져가기만 하더라도 랭크가 단숨에 두 단계는 오를만한 수준이었죠.

그런 거치곤 의리를 지키고 먼저 질의 파티에 먼저 보여준 알마가 대견하기도 해요.

얼마 전만 해도 구멍에서 빠져나올 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었으니까요.

“그러니까, 매달 한 번씩 이 녀석들의 거점이 바뀐다는 거잖아? 들키면 저번처럼 바로 무너뜨리고….”

“본거지는 리니스의 지하도시가 확실한데, 여기 적힌 대로라면 정말 말 그대로 본거지라서 이걸 알린다고 해도 쉽게 공격하지 못할 거에요.”

질과 라피아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 중일 때, 알마만이 조용히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서류 더미를 구경하고 있었어요.

잔해 속에 혼자 남아있을 때 이미 거점 안에서 실컷 혼자서 보다가 왔을 수도 있겠지만, 정보를 다 알고 있기에 혼자서도 많이 고민했고, 따라서 더 이상 나눌 이야기가 없는 것일 수도 있겠죠.

“야, 사실 이런 정보를 보여준 이유는 따로 있는데 말이야.”

“네? 굳이 저를 보면서 말할 필요가 있는 이유에요?”

평소에 자신을 안 좋게 보는 알마가 자신을 보면서 이유가 따로 있다고 말하면 궁금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이러면 꼭 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잖아요.

“어, 네가 그토록 찾는 마녀…. 탈리안 선생님이 잡혀있는 곳이랑, 무슨…. 우왁?!”

“탈리안 언니가 잡혀있는 곳이라고요?! 어딘데요!!”

질은 탈리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달려가서 알마의 멱살을 잡고 흔들기 시작했어요.

질의 순하고 겁이 많은 성격상 누군가의 멱살을 잡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텐데 말이에요.

그동안 얼마나 질이 탈리안을 그리워했을지 다 행동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 같아요.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렇지만, 라피아가 옆에 있는데도 전혀 신경을 못 쓰고 있으니까요.

알마가 이런 정보를 바로 공개하지 않은 건 질과 라피아와의 관계가 좋지 않더라도 둘의 사이에 문제를 일으킬만한 것이라 그랬을 수도 있어요.

당장에 라피아의 표정만 보더라도 떨떠름한 것처럼 미간을 찌푸리고 있거든요.

그걸 바로 건너편에서 눈치를 보고 있으니….

둘의 사이가 나빠지든 말든 알마에게 있어서 아무 일도 아니겠지만, 그 사이를 자신의 손으로 망치는 건 또 다른 일이니까요.

“아, 진정해! 흔들지 좀 말고!”

“…아! 죄, 죄송해요! 이럴 생각이었던 건 아니었는데…!”

질은 바로 사과를 했지만, 사과가 향하는 방향은 묘하게 알마와 라피아 둘 모두에게 가는 듯했어요.

알마는 조금 짜증을 부리며 뒤에 미리 준비해뒀던 가방을 뒤적거렸지만, 라피아는 멋쩍게 작은 미소만 지을 뿐이었어요.

질이 그토록 바라던 탈리안의 위치를 알게 됐는데 침착을 유지하는 건 못 할 짓이기는 해요.

라피아의 앞에서 탈리안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는 약속을 어긴 건 아니라지만, 질의 마음속은 상당히 불편하겠죠.

이 어색한 분위기는 라피아가 질에게 괜찮다고 허락을 해주고 나서야 조금 정리가 되었죠.

질이 알마에게로 시선을 돌리자마자 라피아가 굳은 표정을 급하게 풀어버리는 거야 말할 것도 없었지만요.

“아까는…. 미안했어요. 어쨌든 말해주세요. 탈리안 언니가 어디 있는지.”

“일단 이게 정보의 전부는 아니야. 그렇지만 함정일 수도 있으니까 꼭 여기 쓰인 게 탈리안 선생님이 아닐 수도 있어.”

탈리안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에 질의 눈은 차갑게 식었어요.

방금만 해도 알마를 향해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는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요.

쉽게 볼 수 없는 질의 정말로 화가 난 얼굴이었죠.

표정이 사라져 그림자가 드리운 그 얼굴에는 알마마저 겁을 먹을 정도였어요.

“야, 사, 사람 하나 죽일 눈이다…?”

“그게 무슨 말인지 제대로 설명해줘요.”

“먼저 이 서류부터 읽어봐, 설명은 그 뒤에 해줄게.”

“이건….”

질이 받아든 종이에는 첫 줄부터 의미심장한 내용이 쓰여 있었어요.

천천히 서류를 읽던 질은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점점 소리를 내서 읽기 시작했죠.

제일 중요한 부분을 찾아내기라도 한 것처럼요.

“…이 아래부터는 슬리브스터에서 섬기는 유일신 베리아 님의 말씀을 적은 것으로, 베리아 님이 직접 지명하신 노예는 철저한 감시와 관리하에 둘 것.”

“유일신 베리아? 처음 듣는데, 애초에 신은 태초신과 그 자식들을 포함해 4명밖에 없잖아. 새로 생긴 이단인가?”

라피아는 질이 어색해하지 않도록, 자신을 신경 쓰지 않도록 계속해서 아무렇지 않은 척 다른 곳에 관심을 쏟는 듯했어요.

그런 눈물이 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질은 라피아를 배려하기보다는 서류 안의 내용에 더 관심이 가는 것 같았지만요.

“…계속 읽어볼게요. 첫 번째, 해당 노예를 관리하려고 할 경우에는 마나의 봉인석이 잘 작동하고 있는지 다시 확인할 것. 두 번째, 노예를 구속기구에 끼운 뒤의 기억이 끊기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노예의 무사만 확인한 뒤 바로 방을 빠져나올 것. 세 번째, 노예를 관리했던 사람은 일주일 내로 지하도시의 베리아 님을 알현할 것. 네 번째, 노예는 주기적으로 지하 도시에 데려갈 것. 다섯째, 절대로 손대지 말고, 팔 생각도 하지 말 것.”

“알마는 노예를 보고 탈리안이라 생각한 거 같은데, 도대체 그 이유가 뭐야? 베리아라는 타칭 유일신이 고작 노예 하나를 아끼는 것 때문에?”

알마가 가져온 정보는 어딘가 나사가 빠진듯한 정보였으니 라피아가 이런 지적을 하는 것도 당연해요.

탈리안의 ‘ㅌ’자는 나오지도 않은 데다가, 노예를 아낀다는 말만 나와 있거든요.

게다가 지켜야 할 규칙에는 탈리안이라고 생각할만한 단서조차 없었어요.

그저 노예가 평범한 인물은 아니라는 것만 쓰여있을 뿐이니까요.

“슬리브스터 녀석들은 목줄만 있으면 노예를 힘도 못 쓰게 하는 게 가능해요. 게다가 언제가 되었든 잡은 노예는 팔리기 마련이에요. 그런데 절대 팔지 말라는 건 누가 봐도 이 노예는 특별하다고 광고하는 거랑 똑같다고요.”

그렇지만 알마 말에 따르면 이 서류에서의 노예가 슬리브스터의 유일신 취급을 받는 베리아라는 인물의 비정상적인 가호를 받는 것도 맞아요.

노예상이 노예를 팔지 않고 관리 감시만 한다니 말이 안 되는 일이죠.

이는 베리아와 노예가 특별한 관계에 있을 거라는 말이고, 주기적으로 베리아와 노예가 만나는 날에는 둘 사이에 일이 있다는 거겠죠.

중요한 건….

“그래, 그건 알겠어. 하지만 그게 마녀…. 아니 탈리안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느냐는 거야. 설령 탈리안이라고 하더라도 정보가 거짓일 가능성도 있고.”

재차 강조하지만, 라피아의 말처럼 그게 탈리안인지 아닌지는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었죠.

여기에 더해 알마가 입수한 정보가 거짓 정보일 가능성까지.

이런 중요한 서류를 알마가 찾아냈다는 것부터가 이상할뿐더러,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라면 노예상들이 놓치고 갈 리가 없으니까요.

“하아, 차례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말하려 했는데…. 일단 이 정보가 거짓일 가능성은 없어요. 거점 지하에 베리아라고 하는 녀석의 사진을 걸어놓고 의식을 치르는 장소도 봤으니, 적어도 베리아에 관한 내용은 진실일 거예요.”

자신의 말을 안 믿어줘서 짜증이 날 텐데도 알마는 다시 가방을 뒤적거리며 말했어요.

“정보가 진실이라면, 그게 탈리안이라는 증거는?”

라피아의 태도는 나쁘지 않아요.

계속해서 믿지 못하는 거야 짜증이 날 수도 있지만, 이건 적의 정보인 데다 사실 여부도 파악해야 하니까요.

그러니까 여러 가지 변수를 생각해야 된다는 게 라피아의 생각일 거예요.

“이걸 봐주세요. 노예를 관리하는 사람들이 남긴 탄원서에요. 읽어보면 알겠지만….”

“특별 취급당하는 노예의 관리역을 바꿔주세요…. 저는 이 노예랑 한순간이라도 같이 있기 싫습니다…. 뭐 이래? 아래에도 다 비슷한 내용이잖아.”

“그 제일 아래를 보면 ‘저건 모습만 소녀지, 속은 새까맣기에 알 수 없어 두렵습니다. 대신할 사람을 구해주세요.’, ‘외모가 비정상적으로 이쁜데도 왜 팔지 않는지 이해가 됩니다. 왜 데리고 있는 건가요?’, ‘왜 이 괴물을 고위직이 아닌 저희 같은 말단에 시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대충 감이 잡히지 않아요?”

“탈리안 언니일 거예요!”

갑자기 끼어드는 질 때문에 둘은 잠시 놀랐지만, 다시 대화를 이어갔어요.

만약 탈리안이라면 어떻게 구출할 것이냐, 주기적으로 장소가 바뀐다는데 어디 있는지 어떻게 알 것이냐….

이에 질은 탈리안이 아니라도 구할 가치는 있지 않겠느냐, 어차피 다른 단서도 없으니 구하러 가는 게 맞다 같은 말을 하며 반박했죠.

그런 복잡한 문제들 앞에서도 알마는 침착하게 하나하나 정보를 꺼내놓기 시작했어요.

개중에는 노예가 탈리안이라는 확정 정보와 함께 대륙에 널리 퍼진 슬리브스터의 거점들까지 있었는데요.

일단은 전직 모험가였으니 할만큼은 하겠다는 건가 봐요.

덕분에 탈리안을 구출하기 위한 작전의 기초는 거의 완성되었어요.

“대단한 정보 수집력이네, 진심으로 놀랄 정도야.”

“후후후…. 더 칭찬해도 되는데요?”

“질을 배신하지 않겠다면 더 칭찬해줄게.”

상황이 대충 정리되어 한숨 돌린듯한 라피아는 이제야 굳은 표정을 풀고 알마에게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어요.

거점에서부터 라피아와 알마가 서로 잘 떠들던 걸 보면 둘의 사이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그러니 알마가 어떻게 받아들이든지, 이 정도는 라피아에게 있어서 작은 장난에 불과한 거겠죠.

“아!! 좀 그만 놀리라고요!! 이런 정보까지 손수 가져와 주는 거 보면 이젠 그럴 생각 없다는 거 알잖아요!!”

“확실히…. 그래도 거점에서 말다툼할 때만 해도 저희 사이 나빴잖아요.”

어느 정도 수긍하면서도 거점에서 싸웠을 때의 일을 언급하는 질이에요.

자기 말로는 배신할 생각이 없다고는 하는데 질이 그걸 어떻게 믿겠어요.

질과 알마의 사이는 첫 단추부터 잘못 들어갔는걸요.

“야 너는…! 너 혼자 고생하는데 내가 나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있다고 생각해봐! 화 안 나겠어?!”

“그건 그렇지만…. 갑자기 왜 생각을 바꾼 거예요?”

이번에는 역지사지를 말하며 질을 설득해보려 하지만 이해가 안될 거에요.

왜 이제 와서 생각을 바꾼 건지 질에게는 의문밖에 없겠죠.

“갑자기라니, 그런 거 아냐. 다들 시간이 약이라고 하잖아. 그렇다기엔 조금 짧은 시간이지만, 그래도…. 아 어렵네…. 제르반을 잊어보려고. 언제까지 걔한테 얽매여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렇게 생각하니까 그동안 너한테 화내고 짜증 부린 게 미안해지더라니까.”

“그게 무슨….”

“그래서 화해의 선물로 가져온 거라고! 나도 제르반이 아니라 다른 남자랑 사귀어볼 생각이고….”

그러니까, 알마가 제르반을 계속 마음에 품고 있기에는 힘들기만 할 테니 다른 남자를 만나보겠다는 말이네요.

다른 남자를 만난다면 이제 질을 적대할 필요도 없다는 의미겠죠.

그동안 적대해온 행동도 전부 의미 없는 일이 될 테니 화해의 선물로 이런 정보들을 찾아왔다는 건데, 시기가 잘 안 맞물리기는 하네요.

어쩌면 거점 지하에서 이 일로 고민을 많이 했었기에 거점에서 탈출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렸던 걸지도 몰라요.

“그래도 너무 뜬금없지 않아요? 저 알마 언니랑 같이 잤던 날을 제외하면 좋은 기억도 없는데요?”

당연히 첫날밤을 제외하면 쭉 말다툼으로 신경전만 벌여왔으니 좋은 기억이 있을 리가요.

그걸 알기에 이렇게 선물을 준비해온 거겠지만요.

정말 어쩌다 얻어걸린 선물이겠지만, 이걸 그대로 질에게 가져온 게 어디에요.

이에 대해서는 라피아도 같은 생각인 듯했어요.

“근데 나도 이 정도면 화해 선물로는 충분하고도 남는다고 생각해. 보니까 질 성격에 알마 너한테 시비를 먼저 걸진 않았을 텐데, 이 정도면 받아줘도 된다고 생각해.”

“그렇죠?! 그렇다니까! 이 정도면 화해 선물로는 충분하지 않아? 그리고 뜬금없는 게 아냐, 내가 그동안 어린애를 상대로 뭐 하는 건가 싶었었어. 네 겉모습 때문에 제르반을 빼앗긴 기분이 들어서 그렇지.”

웬일로 자기편을 들어주는 라피아를 보니 기뻤는지 큰소리를 내는 알마에요.

“그야 정말 고마운 정보지만, 화해하려고 가져왔다는 건 좋게 봐줘서 넘어간다지만…. 제르반 오빠를 생각하면 알마 언니는 좀, 최악이네요.”

“그건 나도 같은 의견이야, 질이 장례식에 다녀온 게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다른 남자랑….”

둘의 말처럼 알마의 발언이 조금, 쓰레기 같은 발언이기는 했어요.

자기 입으로 평생을 갈 인연이었다고 했는데, 얼굴을 언급하며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질 생각을 하겠다고 한 거니까요.

친구로서는 노력이야 가상하게 쳐주겠지만 여자친구로서는 질의 말대로 최악이네요.

“아!! 진짜 화해하겠다는데 왜 또 이렇게 시비들이야!! 지금도 제르반을 생각하면 마음 아픈 건 똑같다니까?! 잊어보려고 노력하겠다는 거잖아!”

“잊지도 못했는데 다른 남자랑 만나서 꽁냥거리시겠다는 거잖아요. 저라면 슬플 거예요. 제르반 오빠가 불쌍해.”

“이 꼬맹이가…! 그러는 너는 뭐 잘한 거 있어? 너도 탈리안 선생님이 사라지자마자 라피아 씨랑 붙어서 꽁냥거리고 있잖아!”

“그, 그건!”

알마가 이렇게 나오면 질도 딱히 할 말이 없어지기는 해요.

탈리안이 아직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상황에 라피아와 붙어서 꽁냥거리고 있으니, 어쩌면 알마보다도 더하다면 더하다고 말 할 수 있을 거예요.

물론 질은 라피아가 먼저 꼬셨고, 알마는 스스로 하겠다는 점이 다르긴 하지만요.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질을 대신해 라피아가 변호해주었어요.

“질은 아직 어리잖아, 옆에서 보호해줄 사람이 필요해. 질은 내가 부탁해서 내 옆에 있는 거고.”

“불리하니까 나이를 방패로 삼는 거예요?! 어쨌든 나는 준비해온 선물 다 줬으니까요!! 약속한 날에 안 나오면 다음 기회는 언제일지 모른다는 거 알아두라고요!!”

여기 있다가는 더 말려들어 갈 거라 생각한 건지 알마는 자리에서 일어서 라피아의 방에서 나갔어요.

아무래도 더 있다간 질과 라피아의 공격에 버티지 못할 것 같았던 거겠죠.

그래도 모든 게 다 준비가 됐어요.

이제는 탈리안을 구하러 가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질은 무사히 탈리안을 구해낼 수 있을까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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