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91화 (91/189)

〈 91화 〉 마녀가 없는 동안에 (14)

* * *

거점 출구 주변에 노예상들과 노예가 꼼짝없이 묶여버린 이후, 질의 파티 이외에도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어요.

차림새만 봐서는 흑기사와 비슷해서 어딘가의 기사단이라고 생각할 모습이었죠.

기사단도 보통 기사단은 아닌 것 같은 것이, 새하얀 갑주에 백금색의 화려한 장식이 박혀있거든요.

한두 명도 아니고 기사단 전체가 왔다고 해도 믿을 수준의 수가 거점에 찾아왔으니 질은 놀랄 수밖에 없었어요.

그야 의뢰소에 연락했는데 이런 기사들이 찾아올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그렇지만 놀라는 질과는 달리 라피아만큼은 그 정체를 알고 있는 듯했어요.

“황궁 기사단…? 잡아갈 사람이 많아서 그런가?”

“황궁…. 저 잠깐 물어볼 게 생겼어요!”

“잠깐, 질! …물어볼 거라니 생판 처음 보는 사람들밖에 없을 텐데.”

질은 라피아가 멈춰 세우기도 전에 기사단이 가득한 곳으로 달려갔어요.

그러니 질을 잡으려던 손만 부끄러워질 뿐이었죠.

기사단의 사람 중 하나의 앞에 도착해서도 질은 급한 숨을 가누지 못했어요.

“저, 저기요! 혹시 부기사단장님 이름이, 아, 뭐였더라…! 아, 아브? 아비! 아비 맞나요?!”

“아비? 그보다 당신은…. 이번에 거점을 토벌해주신 분이시군요. 협조 감사드립니다.”

기사단원은 갑주 때문에 허리를 숙이기 불편한지 검을 든 손을 가슴팍으로 끌고 와 일자로 세웠어요.

그들 나름의 인사법인 것 같은데, 질은 처음 보는 인사에 당황했는지 허리를 90도까지 꺾어 인사했어요.

“아, 그, 그것보다 부기사단장님은!”

“어느 부대의 부기사단장님인지는 모르겠지만, 왜 찾으시는 건지 말해주시겠습니까?”

“네? 어, 그러니까…. 언니가 부기사단장님이랑 친해서…. 근데 안 들어온 지…. 조금, 오래돼서….”

익숙한 이름이다 싶었는데, 예전에 한번 탈리안에게 찾아왔던 아비를 떠올렸나 보네요.

같은 황궁 기사단원이라면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거예요.

질이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만약 황실 기사단의 아무한테나 말이라도 해놓는다면 나중에 연락이 닿을 가능성도 있잖아요?

“으음, 원래 이런 말을 해드리지는 않습니다만…. 오늘 의뢰를 통해서 해주신 일이 있으니 조금만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정말요!?”

말해준다는 게 무엇을 말해준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기사단원은 질의 기대에 부응해 설명을 시작했어요.

“저희는 외부 선전용 기사단입니다. 황궁의 기사단은 저마다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종류로 나누자면 총 3가지가 되어있습니다. 먼저 외부 선전을 위한 가디언. 두 번째로 황궁 기사단의 실체인 시크릿 나이츠. 세 번째로 황제의 명만을 받들어 수행하는 직속 기사단이 있는데, 직속 기사단은 존재만 알려졌을 뿐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저, 그게 부기사단장님이랑 무슨 상관이….”

질의 질문은 충분히 있을 만했어요.

부기사단장에 관해 물어봤더니 뜬금없이 기사단의 종류에 대해 말하니까요.

이에 기사단원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어요.

“그렇기에 죄송하지만, 가디언은 나머지 기사단과 교류가 아예 불가능합니다. 속사정을 알 수 없다는 겁니다.”

“네? 그럼 왜….”

“한마디로 저희 가디언 내부에서는 다른 기사단에 아비라는 부기사단장님이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럴 수가….”

질은 기사단원의 말에 다시 라피아가 있는 곳까지 돌아왔어요.

황궁의 기사단이라면 뭔가 특별한 정보라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했을 텐데, 아무 소득도 없었으니 발걸음에 힘이 빠져있었죠.

그리고 그걸 눈치챈 라피아는 알면서도 모른 척을 해줬어요.

“궁금한 건 해결됐어?”

“아, 아니요….”

“알마는 어떻게 할래? 아직 안 보이는 거 보면 직접 찾거나 의뢰를 내야 할 것 같은데.”

이렇게 힘이 빠진 질을 보면 모를 수가 없으니, 일부러 화제를 돌린 것도 이해가 돼요.

그래도 알마를 찾지 않고 돌아간다면 여러 문제가 있으니 새로운 대화 주제로는 딱 맞네요.

“기분전환이 하고 싶으니까 조금만 찾아보기로 해요. 이 주변을 돌아다니다 보면 괜찮아질 것 같으니까….”

“…그래, 안아줄까?”

순순히 라피아의 말에 따라준 거야 좋은데, 질은 같이 걷는 것보다는 혼자 앞서나가는 걸 선택했어요.

보다 못한 라피아가 달콤한 미끼로 부르면 그제서야 뒤돌아봤죠.

목소리가 꽤 컸기에 뒷정리 중인 기사단원들에게 들렸을지도 모를 일이에요.

질도 그걸 아는지 뒤돌아본 직후의 얼굴은 새빨갰죠.

“네? 갑자기?”

“내가 이럴 때 위로해주려고 있는 거지.”

“여기는 사람들 보는 눈이 많으니까, 저기 건물 뒤로 가서 해줘요.”

그렇다고 거절할 이유는 없었나 봐요.

부끄러운 건 부끄러운 거고, 안기고 싶으면 안기는 게 맞죠.

사람은 욕망에 충실해야 해요.

“그래, 얼른 가자.”

게다가 이번은 라피아가 운만 띄워줬을 뿐이지, 어디까지나 질이 먼저 하자고 한 것과 같아요.

이 때문인지 라피아의 입꼬리는 귀에 걸릴 것처럼 올라갔죠.

이제서야 질도 한 걸음씩 다가오기 시작했다는 증거와 다를 게 없으니까요.

확실한 증거는 건물의 뒤편에 도착했을 때 라피아가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어요.

비록 속으로 탈리안을 생각하고 있다지만, 기사단원이 보이지 않게 되자마자 질이 라피아의 품 안에 제 발로 걸어들어왔거든요.

“웬일이야?”

질문이야 퉁명스럽게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환희의 노래를 부르고 있겠죠.

항상 다가가기만 하던 라피아였는데, 질이 먼저 다가온 건 처음이잖아요.

기뻐서 속으로는 소리를 지르고 있을지도 몰라요.

질이 품 안에 있는데도 제대로 안아주지 못하고 팔을 허공에 휘적이는 것만 봐도 알만하니까요.

“…언니를 믿으라고 했으니까, 믿어보려는 거에요.”

“좋은 마음가짐이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맛있는 거라도 사갈까? 재료 사서 핏츠 파이라도 해줄게.”

조금은 단순하지만, 질의 실질적인 나이를 생각하면 먹을 것으로 기분을 풀어주려는 방법은 잘 맞을 거예요.

그렇지만 예상외로 질은 먹을 것을 거부했어요.

그것도 자신이 좋아하던 그 핏츠 열매가 재료로 들어가는 파이인데도요.

“으응, 괜찮아요. 그런 것보다는 알마 언니만 찾으면 빨리 돌아가서 쉬고 싶어요.”

“전에 나보고는 핏츠 열매를 좋아한다더니 다 거짓말이었어?”

“…언니도 가끔 둔해 빠졌어요.”

질은 안겨있는 자세 그대로 고개만 들어 볼을 부풀리며 말했어요.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해서 기분이 나빴나 봐요.

둔하다니, 평소에는 질이 듣는 말이었던 것 같은데요.

“뭐? 내가 둔하다고? 도대체 어딜 봐서…어. 아, 설마 쉬고 싶다는 게 나랑 같이 있고 싶다는 말을 돌려 한 거였어?”

“…몰라요.”

라피아가 짐작한 게 맞는지 질은 다시 고개를 숙였어요.

적당히 알아들었다면 넘어가면 될 일을 또 이렇게 놀리다니, 라피아답기는 하지만요.

놀린 뒤에는 곧바로 눈을 가늘게 떠서 지긋이 바라보며 질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죠.

“정말이지, 이 귀여운 걸 어떻게 잡아먹어야 할까?”

“잡아먹는다니 저는 그냥…! 읏!?”

질은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며 부정하던 도중에 라피아가 자신의 입술을 엄지로 쓱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곤 뒤로 물러나 주변을 살펴봤어요.

아무것도 없는 걸 재차 확인하고 나서야 라피아에게 갑자기 따지기 시작했는데, 둘 사이에 통하는 뭔가의 신호였나 봐요.

“언니 제정신이에요?! 저쪽에 기사단 분들도 있는…!!”

“알 바야? 네가 다 잡아서 출구 쪽에 뒀잖아. 이 근처로는 안 올 거야, 걱정하지 말고 이리 와.”

‘이리 와’라는 말에 질은 뒤로 도망치는 발걸음을 멈춰버렸어요.

거의 개 취급을 당하는 것 같지만, 몇 번이고 몸을 섞기 전에 들었던 말이니 반사적으로 반응하는 것도 어쩔 수 없을 거예요.

“시랑 때를 가리세…!”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말로만 벗어나길 원하다가도, 가볍게 입맞춤을 해오는 라피아 때문에 금세 조용해졌어요.

도망갈 구석을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던 손도 잡혀서 벽으로 밀어붙여 지니 방금까지 시끄러웠던 게 일부러였던 건가 싶어요.

지금까지 그래왔으니까, 이번엔 먼저 다가갔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부끄러울 것 같아서.

“나를 믿어볼 거라며? 믿어봐.”

잠깐의 입맞춤 뒤에 다시 떨어져서 시선을 맞춰오는데, 라피아의 얼굴로 이렇게 빤히 바라본다면 저항할 생각도 사라질 거에요.

실제로도 가만히 있지만, 라피아가 잡은 손에 힘을 줘서 절대로 놓지 않으려고 하니까요.

방금만 해도 싫다고 말했으면서 정작 시작하고 나니 얌전해지네요.

라피아도 이를 눈치채고는 더 이상 억지로 밀어붙이는 건 그만두고 반응을 관찰하기로 했나 봐요.

“…저, 항상 궁금하던 게 있어요.”

“응? 나한테? 왜 안 물어보고 지금에서야 물어봐?”

“언니, 저랑 같이 살게 된 이후로는 작은 키로 돌아온 적이 없잖아요. …매번 올려다보기만 해야 해서 목 아파요. 작은 키로는 안 돌아오는 거예요?”

그러고 보니 라피아의 작은 모습을 좀처럼 보기 힘들었었죠.

개인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키가 큰 편이 여러 가지 이유로 편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매번 흡혈하거나 피를 마셔야만 변할 수 있는, 알고 보면 번거로운 능력이기도 하니까요.

“…, …말해야 해?”

“말하기 어려운 거 아니라면 말해주세요.”

“그으러니까 말이지? 너랑 이런저런 일을 하려면 키가 큰 편이 이미지적으로 좋으니까….”

우물쭈물하며 말하기를 편의상 그런 건 아닌 것 같아요.

당당하던 눈빛도 어딘가 힘을 잃은 것처럼 질의 시선을 피하니 뭔가 다른 이유가 있겠네요.

“예를 들면요?”

“키가 작은데 언니라 불리는 건 어색하다고 해야 할까…. 키스나 흡혈을 할 때도 모양새가 안 살고….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생각될 것 같아서….”

“저한테 어른스럽게 보여야 하는 거예요?”

질은 이해가 잘되지 않았는지 되물어봤어요.

어른스럽지 못하다고 생각될까 봐 걱정된다는 것은 나이가 위인 라피아로서는 당연한 걱정이에요.

그리고 그 생각에 기여하는게 가장 큰 것으로는 겉으로 보이는 외관이 제일이죠.

요컨대, 라피아는 작은 모습을 보이면 어른스럽다고 보이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던 거에요.

지금까지 질에게 어른스럽게 보였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솔직하게 말해서! 그렇지 않으면 조금, 그렇단 말야! 말로 설명하려니까 어려운데,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그러니까 그냥…. 작은 모습은 나중에 보여줄 테니까 지금은 모른 척해줘.”

“…이번만이에요. 다음에는 꼭 보여줘야 해요.”

제대로 답해주지 않아서 답답했는지 질은 확답 대신 약속을 받아내기로 했어요.

이유야 어찌 되었든 질이 원하는 건 작은 모습의 라피아를 보는 것이었으니까요.

“알았다니까, 그러니까 얼른 하던 거 마저 이어서…. 잠깐만, 무슨 소리 안 들려?”

“소리?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팍, 팍, 팍…. 뭔가 파내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데.”

“그러게요, 집중하니까 그렇게 들리는 것 같기도…. 어어, 언니! 저, 저기!”

작은 소리지만 집중해서 들어보면 점점 소리가 커지고 있었어요.

그러다 무너진 건물 주변의 잔해가 살짝씩 들썩이는 걸 눈치채고는 질이 손가락으로 가리켰죠.

뭣 때문에 그런지 알 수 없는 상황이기에 일단은 질도 라피아도 전투태세에 임해 건물의 잔해 앞에 서 있었어요.

잔해 앞에 서서 변화가 일어나길 잠시간.

이내 잔해는 땅속에서 뭐가 밀쳐낸 것처럼 뚜껑 열리듯 옆으로 굴러갔어요.

“푸하! 후우! 살겠다…! 응? 뭐야 왜 둘이 내 앞에 서 있어?”

잔해를 치우고 구멍 속에서 튀어나온 건 알마였어요.

뜬금없는 등장에 질과 라피아는 눈동자만 움직여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죠.

그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알마의 안부를 물어봤어요.

“…알마 언니? 괜찮은 거예요?”

“너 왜 거기서 나타나는 거야?”

…질만 안부를 물어본 것으로 하죠.

라피아야 뭐 친하거나 친하지 않은 상태를 애매하게 유지 중이었으니까요.

아니, 관계가 좋고 나쁘고는 상관 없을 거예요.

관계만 따지자면…. 됐어요.

어쨌든 알마는 라피아의 질문에 기분이 상한 듯 불평을 말하며 손을 내밀었어요.

잡고 꺼내 달라는 의미겠지만요.

“제가 몬스터에요? 나타난다니, 너무한 거 아닌가.”

“언니 지금까지 거점 안에 있던 거에요?”

“안에서 살아있던 것도 대단한데, 살아서 빠져나온 것도 대단하네.”

그런데 꺼내 달라는 손짓에도 둘은 서로 떠들기에만 바쁘고 꺼내줄 생각은 하지도 않았죠.

질도 안부까진 물어봐 줘도 직접적인 도움을 줄 정도는 아니었나 보네요.

“웬일이래, 칭찬까지 하시고. 어쨌든 보여줄 게 있으니까 나 좀 꺼내달라고요!”

결국, 답답함을 느낀 알마가 홧김에 소리를 질렀음에도, 둘은 역시 도와주지 않았어요.

끝까지 도와줄 기미가 없어서인지 알마는 혼자서 구멍을 빠져나와야 했죠.

안간힘을 쓰며, 바둥거리며 구멍에서 빠져나오려는 모습은 추하기 짝이 없었어요.

얼굴은 열이 올라 질이 부끄러워 할 때보다 빨개졌고, 구멍에서 빠져나온 뒤로는 헥헥거리며 개보다 더한 모습이었거든요.

어쩌면 개와 비교하는 게 개에게 실례일 정도로요.

“그래서 보여줄 게 뭔데요?”

“…안 도와줬으니까 안 말해줘.”

궁금한 마음에 물어본 질을 매몰차게 대하는 알마에요.

솔직히 이렇게까지 지친 상태의 알마라면 그냥 알마의 가방을 빼앗아서 보면 될 일인 것 같은데요.

거기까진 생각이 닿지 않았던 것 같아요.

“제가 배신자를 왜 도와줘요?”

알마와 사이가 안 좋아진 이후로 배신자 이야기만 꺼내는 걸 보면 영 불편한가 보네요.

정말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같이 다닌다는 느낌이에요.

“너 진짜…!”

“그만하고 돌아가자, 나도 알마 네 덕분에 흥이 깨졌어.”

짜증을 부리려던 알마를 두고 라피아 역시 질의 손을 잡고 자리를 뜨는 모습인데요.

하기야, 라피아는 질과의 관계가 더 깊어질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리게 된 거니까요.

지금만큼은 알마가 밉더라도 어쩔 수 없죠.

“아니, 좋아할 만한 물건도 가져왔더니!다 나한테 왜 그러는 건데?!”

억울하다는 듯이 소리쳤는지만 알마는 온 힘을 다해 구멍을 빠져나오느라 거점을 떠나는 둘의 모습을 보기만 해야 했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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