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화 〉 마녀가 없는 동안에 (13)
* * *
“흑기사! 고생 많았어!”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지키고 있던 흑기사는 뒤에서 소리치는 라피아를 한번 바라보더니, 이내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향했어요.
그리곤 정면에서 날아오는 투척용 단도를 잡아내고는 다시 날아온 방향에 던져주었어요.
자신이 던진 단도가 목에 박혀버린 적은 비명 한번 못 지르고 쓰러져버렸죠.
“더 놀다 와도 되는데, 배려 참 고맙군.”
“좀 강해졌다고 아주 코가 하늘을 찌르네!”
분명 흑기사가 정리를 했는데도
지하 감옥과는 달리 계단에서 시작되는 복도는 도망치려는 노예들과 그들을 통제하려는 노예상, 그리고 흑기사에게 싸움을 걸어오는 파수병들로 혼란스러웠어요.
그런데 흑기사는 지친 기색이 전혀 없었죠.
주변에는 알마도 보이지 않는데도요.
“세르디어! 알마 언니는 어디 있어?”
“알마는 싸우다 보니 점점 멀어지더군. 지하 감옥으로 몰려드는 적들을 어느 정도 정리했을 때는 이미 사라진 뒤였어.”
“큰일이네…. 알마 언니가 싸우기 시작하면 눈에 보이는 게 없는 것 같았는데.”
질의 말이 맞아요.
알마는 싸울 때가 되면 평소에는 숨겨져 있던 자신의 성격을 주체하지 못하곤 했었어요.
어쩌면, 이게 알마가 모험가를 그만두고 마법 학원에 들어온 이유가 된 것일 수도 있겠네요.
질은 고민하다가 라피아를 한번 바라봤어요.
“응? 왜, 구하러 가려고?”
“배신하려는 사람이라고 해도 구하고 싶어요!”
“누구를 닮아서 이렇게 착한 건지.”
“그럼 먼저 이 복도부터 정리하자구요!”
질은 자신의 팔에 마나를 두르고, 주먹을 쥔 손에 마법진을 전개했어요.
그리고는 앞에서 적을 막아주고 있던 흑기사 너머로 달려가 하나하나 적들을 주먹으로 때려눕히기 시작했죠.
질의 주먹이 적에게 닿는 순간 마나가 폭발하며 적이 저 멀리 날아갔으니, 위력이야 말해서 뭐 하겠어요.
탈리안에게 배웠던 가속 마법도 쓰는 것 같은데, 이쯤 되니 좁은 복도 안에 푸른 섬광이 지나갔다고 해도 믿겠어요.
다만, 이런 식으로 육탄전을 벌이는 모습을 라피아는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조금 신기하게 보고 있네요.
“내가 안 도와줘도 되겠는데?”
“질이 그동안 놀고 지낸 게 아니니까 저 정도는 가뿐히 해내야지.”
“그래? 어떤 훈련을 하고 지낸 건지 궁금해질 정도네. 내 앞에선 힘든 티를 전혀 안 냈으니까.”
“가서 도와주는 게 어떤가, 네 말대로 그동안 나는 질과 네가 없는 동안 고생깨나 했으니.”
약간 비아냥대는듯한 말이지만, 실제로 라피아가 듣기로는 흑기사가 조금 투덜대는 것처럼 보였어요.
흑기사가 라피아를 싫어했다면 말조차 걸지 않았을 테니까요.
질과 나름 친한 흑기사가 말하는 것도 약간 서먹서먹한 것을 보면 라피아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도 그저 타인과 말하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일 거에요.
아니면, 솔직하지 못하거나.
“그래, 뒤에서 그…. 릴리아였나? 애랑 같이 잘 따라와.”
그걸 라피아가 아는지 모르는지는 둘째 치더라도, 태연하게 흑기사의 등을 툭툭 치고 질을 도와주러 가는 걸 보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어요.
“이봐, 릴리아. 안쪽에서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지 말해줬으면 하는데.”
“….”
흑기사는 이미 쓰러진 적들을 확인 사살하는 라피아를 보면서, 릴리아에게 말을 걸었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입도 없는 릴리아가 어떻게 말을 하겠어요.
“후우, 아직도 말을 못하는 건가….”
고개만 갸웃거리는 릴리아의 반응에 한숨을 흘리고는 조용히 라피아의 뒤를 따르는 흑기사였어요.
아무래도 이 세계의 언어는 물론, 정령어도 잘하지 못하는 모양이에요.
먼저 앞서나가던 흑기사는 잠시 이상함을 느끼고는 뒤를 돌아봤는데, 뒤에서는 릴리아가 쓰러진 적들을 넝쿨로 묶어 벽 쪽에 기대어 놓았어요.
질의 명령을 받은 것 같지만, 덕분에 흑기사는 릴리아의 걷는 속도에 맞춰 걸어야만 했죠.
그렇지만 그마저도 오래가지 못했는데, 질의 파티가 조금은 분위기가 다른 노예상과 마주쳤기 때문이에요.
“이 쥐새끼 놈들이…. 네 년들 때문에 얼마나 큰 손해를 봤다고 생각하는 거야!”
다짜고짜 소리를 질러대는 모습에 질은 순간적으로 겁을 먹었어요.
저렇게 큰 키를 가졌는데 피부마저 까무잡잡한 사람이 화내면 무서운 게 당연해요.
하지만 곧바로 한 발을 내디뎌, 오히려 노예상에게 소리쳤어요.
“알마 언니는 어디 있는 건가요!”
“그렇게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걸 보니 실력이 꽤 좋은가 보지?”
“당신 같은 노예상 한 명쯤은…!”
“질, 질! 잠깐!”
다른 적에게 그랬던 것처럼 달려들어 육탄전을 시도하려던 질이었지만, 곧바로 라피아에게 손목을 잡혀 제지당했어요.
질과 소환수들은 몰라도, 라피아만은 다른 분위기를 내뿜는 남자의 수상함을 눈치챈 거겠죠.
사실 남자의 모습만 보더라도 알 수 있었어요.
거점을 떠들썩하게 만든 주범과 마주하고 있는데, 정작 남자는 무장도 하지 않은 채로 질의 파티 앞에 서 있으니까요.
“조금만 조심히 접근하자, 저 녀석 실력을 숨기고 있어.”
차분한 조언에 고개를 끄덕이는 질이에요.
질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나자, 흑기사가 앞에 서서 자신의 몸만 한 방패를 들었죠.
“작전회의는 끝났나? 어떤 녀석이든 덤벼오지 그래, 내 친히 선공은 내어줄 테니까.”
“노예상 주제에 건방지기는, 우리가 한 번에 덤벼들어도 이길 자신이 있다고?”
“쫑알쫑알 시끄러워! 그만 떠들고 덤비라고! 아니면 이쪽에서 공격하길 바라는 거냐!”
바람 지나가다시피 한 작전회의도 기다려줬으면서, 말을 걸어오는 건 상대해주기 싫은가 봐요.
이 남자가 질과 라피아랑 안면이 있는 건 아니니 기다려준 의리가 없긴 하지만요.
그렇지만 이렇게 자신만만하게 큰소리치는 걸 보면 뭔가 있기는 하겠죠.
“말 안 해도 공격할 텐데, 성격도 급하시지!”
“그 기세만큼은 합격점이다만!”
그렇다고 이 남자와 온종일 얼굴만 바라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라피아는 팔에 상처를 내고는 남자에게 빠르게 접근했어요.
보통의 적이라면 라피아가 자해를 하는 모습을 보고 당황해서 대처하지 못했겠지만, 남자는 바로 자세를 낮게 잡았어요.
어떤 방식으로든 공격이 들어올 것을 예측하고 언제든 피할 수 있게 한 거예요.
역시 만만한 적은 아니네요.
라피아는 팔을 휘둘러 상처로부터 줄줄 흐르는 피를 공중에 흩뿌리고는, 그대로 원뿔 모양의 가시 모양으로 바꿔 남자에게 날렸어요.
“그러면 그렇지! 뻔한 공격이다, 애송아!”
모두가 예상했듯이 라피아의 예측 불가능한 공격을 너무나도 쉽게 피해버린 남자였어요.
몸을 살짝 뒤로 뺀 남자는 곧바로 반격을 위해 라피아의 목덜미를 잡으려고 했지만 만만치 않은 적이라고 해서, 라피아가 못 피할 수준은 아니었어요.
간발의 차로 피해낸 라피아는 오히려 남자를 도발했죠.
“나 하나만 공격하러 왔겠냐, 이 깜둥아!”
“깜둥이라고? 이, 이 찢어발길…! 크윽! 이번엔 마법이냐!”
약간, 인종 차별적인 말인 것 같지만요.
남자는 날아온 마나탄을 손으로 튕겨내 애꿎은 벽만 파괴되도록 했어요.
마나탄을 맨몸으로 쳐내는 것을 보니까 일반인은 아니라는 게 확실해졌네요.
“너 정체가 뭐…! 큿!”
“노예를 잡고 팔아넘기는 놈한테 적이랑 느긋하게 떠들 의리가 있다고 생각하냐!”
라피아의 예상 불가능한 공격도 가뿐히 피해버리고, 기습적인 마나탄도 맨몸으로 튕겨 내버리며, 라피아가 아슬아슬하게 막아낼 공격을 하는 인물이 많겠어요?
전혀 아닐 거에요.
라피아가 어떻게든 반격을 하기 위해 아껴 쓰던 검을 만들어냈지만, 그 검 역시 발로 라피아의 손을 차버려 놓치게 하고는 자기가 잡아버렸어요.
“무기 한번 신기한 걸 쓰는데! 어디 한번 네 무기에 당하는 기분도 느껴보라고!”
남자는 새빨간 검을 치켜들어 내리치려고 했어요.
이런 위기의 순간에도 라피아는 당황하지 않고 자신을 향해 휘둘러지는 검으로 손을 뻗었어요.
저러면 베일 텐데요.
“가만히 당할까 보냐!!”
그렇지만 라피아의 외침에 검이 형체를 잃어 팔과 옷을 흥건하게 적셨어요.
아무래도 이번에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는지, 그대로 라피아에게 어퍼컷을 맞으며 뒤로 물러나는 남자였죠.
분명히 제대로 주먹이 꽂히는 느낌이 있었는데 쓰러지지도 않는다니 적이지만 대단해요.
“크큭! 크흐흐! 좋아, 좋다고! 그런데 그 뒤에 있는 녀석들은 안 덤비는 거냐?”
사실, 질이 라피아를 도와주고 있지 않은 건 아니었어요.
적이 눈치채지 못할 수준으로 얇지만, 견고한 마나 배리어를 만들어 라피아에게 씌워주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1대1의 싸움에 섣불리 끼어들었다가는 합이 맞지 않아 사고가 날 수도 있으니까요.
질과 라피아라면 모를까, 흑기사와 라피아라면 같이 싸워온 경험이 전무하니 쉽게 끼어들 수가 없는 거예요.
“나 혼자만으로도 충분하거든!”
“말했지만 기세만으로는…!”
여유 넘치던 남자가 다시금 라피아에게 덤벼들려고 할 때, 건물 내부가 크게 흔들렸어요.
엄청난 진동과 무언가 터지는 소리, 당장이라도 건물이 무너질 것 같다는 전조와도 같아 보였죠.
“젠장, 한창 달아오를 때에! 빠져나갈 시간인가!”
“네 동료가 한 짓이냐!”
“적하고 너무 친하게 지내려는 거 아니냐? 스스로 알아보던가!”
그렇게 말하고는 남자는 순식간에 여기저기 얽히고설킨 복도 저편으로 사라져버렸어요.
당장에 건물이 무너질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저렇게 달려가는 걸 보면 믿는 구석이 있을지도 몰라요.
아마도, 아니 분명히 따로 준비해놓은 도주로가 따로 있을 거예요.
라피아는 남자를 따라가려다가도 뒤에서 질이 기다리고 있는걸 눈치채고는 다시 돌아왔어요.
그 모습을 보고 질은 들고 있던 스태프를 양손으로 꽉 쥐고는 시선을 라피아 쪽으로 향했죠.
라피아가 먼저 말을 걸어오길 바라는 것 같았어요.
“질, 어쩔래? 일단 거점 밖으로 나갈까?”
“그게 나을 거 같아요. 알마 언니가 걱정되긴 하지만 어디 가서 쉽게 죽을 사람은 아니니까요.”
알마를 버리고 가기로 했네요.
질이 매정하게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올바른 선택이에요.
일단 상황을 알기 위해서라도 밖으로 나가야 하는 건 맞거든요.
“그럼 빨리 나가자, 지금 거점 밖도 조용하진 않을 거야. 도망치는 노예랑 잡으려고 뛰쳐나온 노예상들도 있을 테니까.”
“밖에서도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거네요. 그때는 제가 노력할게요!”
노력해보겠다는 말이 기특했는지 급한 상황에서도 질에게 착하다며 칭찬하고는 같이 밖으로 달리기 시작했어요.
밖으로 나가자는 선택이 올바르긴 했는지, 거점은 쉴 새 없이 흔들렸어요.
천장이 무너질 듯이 계속해서 먼지와 돌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렸고, 출구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알 수 없는 굉음이 안쪽에서 들려왔죠.
그리고 출구를 눈앞에 두고 있을 때, 질의 파티는 멈춰 설 수밖에 없었어요.
라피아의 예상대로 노예상들이 노예들을 붙잡아 놓고 모여있었거든요.
“아직 저희를 눈치채진 못한 것 같은데, 소리를 들어보면 안쪽에서 점점 여기까지 무너지고 있는 거 같아요. 언니, 어떻게 할까요?”
“온전히 너의 판단에 맡기도록 할게.”
“그럼 세르디어랑 같이 저를 조금만 지켜주세요. 언니가 남겨준 책에 도움이 되는 마법이 많았거든요.”
망설일 시간이 없어, 잠깐의 고민 끝에 질이 내린 결론은 어떠한 마법을 쓸 테니 그동안 지켜달라는 것이었어요.
생각보다 자신 있게 말한 것으로 봐서 효과는 확실할 거예요.
그게 아니라면 질은 말조차 꺼내지 않았을 테니까요.
하지만 라피아의 표정은 애매했어요.
믿음이 가질 않는 건지, 아니면 질에 대한 믿음은 충분하지만 다른 부분에서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는 건지 모를 표정이었어요.
“그, 미안한데….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내 앞에서 마녀 이야기는 금지야.”
어쩐지, 자신을 믿으라고 했는데 바로 탈리안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니까 행동을 고쳐줘야 해서 그랬던 거네요.
“아, 앗…. 아, 으, 네! 그래야죠! 알았어요! 어쨌든!”
“걱정 마! 확실히 지켜줄게.”
갑작스런 질투에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이던 질이 급하게 대답을 하고 나서야 만족스러운 얼굴을 하는 라피아에요.
위급한 상황에서조차 질투한다니, 다른 의미로 인간적이라서 보기 좋지만요.
질은 대답을 하고 나서 곧바로 집중하기 시작했어요.
거점의 바닥 타일 틈새에서 마나가 스멀스멀 휘청이듯 올라와서는, 질이 쥐고 있는 스태프에 모여들었어요.
흙먼지가 자욱해 숨을 쉬는 것조차 어려운 곳에서 마나의 빛이 가득하니 밖에서 안을 들여다본다면 들킬 것만 같았죠.
그럼에도 그런 걱정을 무시하게 할 정도로, 질이 만들어내는 이 상황 자체는 아름답기만 했어요.
질이 서 있는 곳에도 변화가 있어, 발을 딛고 있는 부분에는 마법진이 크게 전개되어선 정말 기적을 부리는 모습이었으니까요.
“일류 모험가라 해도 믿겠는데.”
“질을 지킨다고 하지 않았나, 떨어지는 잔해가 없는지 집중해라.”
“잔소리는, 너도 뚫어져라 봐놓고선.”
“…흠!”
흑기사는 라피아에게 잔소리를 하려다 되려 자신이 당하고는 헛기침을 했어요.
하급 정령이라면 모를까, 상급 정령도 매료시킬 장면이라니 질도 대단하네요.
게다가 주변에서 떠들어대는 데도 집중을 흐트러뜨리지 않아요.
탈리안이 남긴 책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길래 이런 성장을 이뤄낸 걸까요.
“자, 밖으로 나가죠!”
그런데 갑자기 질이 집중을 멈추고 스태프로 땅을 몇 번 두드리더니 출구 쪽으로 향했어요.
“어? 마법 안 썼잖아, 괜찮은 거야?”
“마법은 언제든 준비되어 있어요. 그전에 미리…. 기회를 좀 주고 싶어서요.”
“기회? 무슨…. 일단 네가 준비됐다니까 나가기는 하겠는데….”
아직도 이해가 안 된다는 것처럼 따라나서는 라피아에요.
“그래도 다행히 제가 집중하는 동안 건물이 무너지진 않았네요!”
“어? 아냐, 몇 개는 흑기사가 대신 맞아주긴 했어. 눈을 감고 있어서 몰랐으려나.”
“정말요?! 세르디어! 괜찮아?!”
출구로 향하던 도중 질이 놀라며 흑기사를 돌아봤지만, 멀쩡하게 걷고 있는 흑기사만이 있을 뿐이에요.
애초에 건물의 잔해 같은 게 흑기사의 갑옷에 타격을 줄 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네요.
괜한 걱정일 거예요.
봐요, 흑기사도 괜찮다고 하는걸요.
“멀쩡하잖아. 신경 쓰지 마.”
“으응…. 그래, 그럼 미안한데 조금만 더 도와줄래?”
“미안할 거 없어, 평소에 비하면 한 것도 없으니까.”
흔쾌히 부탁을 들어주는 흑기사의 대답에 질은 거점의 밖으로 발을 내디디면서 모든 사람의 관심을 끌 정도로 큰소리를 질렀어요.
“노예상 여러부우운!! 지금이라면! 참회의 기회를 드릴게요오오!!”
질의 엉뚱한 소리를 듣고 난 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어요.
‘저 여자는 뭔데 알 수 없는 말을 하는 걸까.’, ‘저 쓰러져가는 거점 안에서 아직도 나올 사람이 남아있었다고?’, ‘노예상도 노예도 아닌 것 같은데 어디 있다 튀어나온 거야?’
정말 여러 가지의 반응이 있었죠.
개중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무기를 꺼내 들어 싸우려는 사람도 있었어요.
노예에게 명령을 내려 자신을 지키게 하려는 사람도 있었고요.
“질, 아무래도….”
“정말, 나쁜 사람들은 어쩔 수가 없다니까요.”
출구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갑작스런 상황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했고, 질의 말에 대답하는 사람도 한 명도 없었어요.
그래서인지 뾰로통한 얼굴로 거점을 나오기 전처럼 스태프로 땅을 탁, 탁하고 두드렸죠.
“응? 방금 뭐한 거…? 야?”
라피아의 궁금증은 곧바로 풀렸어요.
출구 주변에 모여있던 사람들의 발밑에서 순식간에 뻗어져 나오는 수많은 검은색의 촉수.
그 촉수들이 꿈틀거리며 노예상과 노예를 가리지 않고 구속해버리니 상황은 누가 나설 것도 없이 정리되었어요.
온갖 비명과 괴성이 숲을 시끄럽게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고 곧 모두가 기절해버렸죠.
의외로 의뢰를 마무리하는 건 다른 사람이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오늘은 웬일로 질이 마무리를 했네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