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89화 (89/189)

〈 89화 〉 마녀가 없는 동안에 (12)

* * *

“노예들이 탈출했다!!”

순찰병의 외침을 시작으로 슬리브스터의 거점은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어요.

라피아가 지하 감옥의 문이라는 문은 보이는 족족 다 깨부수고 다녔기에 노예들이 슬금슬금 빠져나왔거든요.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설명해주는 일은 알마가 전부 도맡아 해야 했어요.

질은 그 수많은 노예를 하나하나 붙잡고선 탈리안의 인상착의를 말하며 물어보기에 바빴으니까요.

처음에는 구해줘서 고맙다는 말도 하며, 질문에 대답까지 해주던 노예들이었지만 가면 갈수록 노예들은 도망치기에 바쁜 모습이었어요.

탈출이 늦어질수록 다시 붙잡힐 가능성이 커지니 질에게 어울려줄 시간이 없는 거예요.

게다가, 초커 때문에 명령 한 번이면 노예들은 멈춰서야 하니까요.

무엇보다 가장 먼저 탈출하던 노예가 벌써 순찰병에게 들켰으니 급한 거야 어쩔 수 없죠.

“지르니트!! 너도 좀 도우라고!!”

그렇지만 혼자서 모든 노예에게 소리치고 안내하려니 힘이 벅찼는지, 알마가 질에게 다가와서 따지기 시작했어요.

감옥 하나당 노예가 적게는 4명에서 많게는 10명이 넘는 곳도 있었으니 꽤 힘들었을 거예요.

꼭 그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의뢰는 뒤로하고 탈리안을 찾는 데에만 온정신을 쏟아붓는 질이 좋게 보일 리는 없겠죠.

“탈리안 언니에 대한 정보를 얻기 전까지는 안 돼요!”

그렇다고 해서 질이 알마의 말을 듣고 안 듣고는 별개의 문제에요.

애초부터 질은 이를 위해서 의뢰를 수락한 것 같으니까요.

오늘만큼은 모든 사람이 아닌 탈리안만을 돕고, 구출해내기 위한 질인 거예요.

“너 진짜, 마녀가 이런 허접한 곳에 갇혀있었을 것 같아?”

“이전에 했던 의뢰에서 노예상 중 한 명이 이곳에서 비슷한 사람을 봤었다고 했었잖아요!”

“그게 마녀라는 증거가 어디 있냐고 이 멍청한…!”

어느 정도 뒷받침이 될만한 정보가 있어서 이런 행동을 보이는 거겠죠.

하지만 출처가 노예상이라서 그런지 믿음직스럽지는 못하네요.

비슷한 사람이라고 했기에 노예상이 말했던 사람이 탈리안이 아닐 수도 있는 거고요.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알마는 질의 팔을 낚아채고 지하 감옥의 출구 쪽으로 데려가려고 했지만, 얌전히 잡힐 질이 아니었어요.

“알마 언니가 이곳에 탈리안 언니가 잡혀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요!”

“일단 이곳부터 정리하고 보라는 거잖아! 왜 너만 편하게…!”

“둘 다 그만해, 이곳에 마녀는 없으니까.”

“…라피아 언니?”

둘의 말싸움을 멈춘 건 라피아였어요.

지하 감옥의 저편까지 다녀오면서 보이는 노예라는 노예는 전부 풀어주며 돌아온 거였죠.

몸싸움으로 번지려던 말싸움을 말렸으니, 타이밍 하나는 기가 막힌다고 해도 될 정도예요.

그런데 질은 숨기고 있던 사실을 들켰다는 죄책감 때문인지 라피아를 똑바로 쳐다보질 못했어요.

“예전에 미궁에서 있었던 일 기억하지? 네 체향을 맡고 널 찾아냈던 일. 여기선 마녀의 냄새는커녕, 잔향조차 나지 않아.”

“그렇지만….”

확실히 냄새 쪽에서는 라피아를 따라올 사람이 없기는 해요.

미궁에서 약 만 오천 명의 입학생과 몬스터들 사이에서도 질의 냄새를 맡고서 찾아낼 정도의 후각을 가졌잖아요.

질도 그 대단함을 알고 있기에 뭔가를 더 말하려다가도 그만둔 거예요.

“알마, 먼저 올라가서 열심히 싸우고 있는 흑기사 좀 도와줘.”

“제가 왜 그런 잡일까지 해야…!”

지금껏 고생한 알마의 짜증은 정당했어요.

노예에게로의 상황 설명과 거점 안내, 그리고 이제는 순찰병과 노예상, 그 호위까지 상대하라는 일까지 도우라고 하니까요.

하지만, 정당했을 뿐이었죠.

그 정당함을 라피아에게 제대로 호소할 수 있는 힘이 알마에게는 없었으니까요.

평소와 다른 더욱더 붉은 눈으로 힘있게 노려보는 라피아의 앞에서는 그저 한 마리의 소동물인 거예요.

“가.”

“큭…!”

그래서 이런 짧은 한마디만으로도 알마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흑기사의 옆에 가야만 하는 처지인 거죠.

힘이나, 마법의 위력, 또는 실력적으로나 전술적으로나 라피아에게 이길 가능성이 하나도 없다는걸 알고 있으니까요.

알마가 사라지고 노예들도 어느 정도 빠져나가자, 라피아는 주변에 널린 나무상자 중에서 하나를 가져와 앉아선, 눈높이를 질에게 맞췄어요.

알마에게 대하던 눈빛과는 다른 조금은 상냥함이 깃든 그런 눈빛이었죠.

다만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라피아는 피를 뽑아내 자신과 질의 주변에 벽을 얇게 여러 겹으로 만들어 세웠는데.

아마도 이는 둘의 이야기가 방해받지 않기 위함이겠죠.

“질, 나만으로는 부족한 걸까?”

“…그렇지 않아요.”

질은 짧게 고민하다가 바로 답을 내놓았어요.

잠깐의 망설임이 존재하던 그 사이를, 라피아는 놓치지 않았죠.

그래서 재차 질에게 되물었어요.

“솔직하게 말해줘.”

그 어느 때보다 새삼 진지한 라피아의 얼굴을 보고는 질은 여전히 머뭇거렸어요.

사실 질이 슬리브스터를 만날 수밖에 없는 의뢰만 반복하는 모습만 보더라도 알 수 있어요.

그동안 탈리안을 찾는 데에 있어서 얼마나 애를 썼는지도요.

신용할 수 없는 노예상의 정보를 쉽게 믿고, 다른 슬리브스터의 거점을 뒤집으러 온 걸 보면, 질에게는 탈리안이 있어야만 한다는 걸 알 수 있죠.

“…라피아 언니가 있어서 저는 다시 일어서는 게 가능했어요. 언니는 저한테 둘도 없는 중요한 사람이에요. 가끔은 짓궂지만, 그래도 항상 고마운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일지도 몰라요.

숨기고 있는 속마음을 그대로 말했다가는 라피아에게 무슨 상처를 줄지 모르니까, 애매한 대답을 해서 질문을 회피해버리는 이유가.

다만, 라피아는 그 애매한 대답에도 질을 바라보던 시선을 땅으로 떨궈 손을 만지작거렸어요.

질이 일부러 그랬다는 것을 알 텐데도 화를 내지 않았죠.

“…응, 나도 항상 너한테 고마워.”

“네? 언니가 저한테 고마운 일이 뭐가 있어요?”

예상치 못한 라피아의 말에 질의 억양은 조금 화난 것 같이 들렸어요.

자신은 이렇게 라피아의 마음을 알면서도 탈리안을 찾으러 다녔는데, 고맙다고 말하니 어이가 없었을 거예요.

분명 라피아는 화났을 텐데, 왜 자신에게 고맙다고 하는 건지 이해가 어렵기도 할 테고요.

“당장에 날 받아준 것만 해도 그렇고, 너는 내가 모를 거라 생각했겠지만…. 내 앞에서는 일부러 마녀에 관한 이야기는 절대로 하지 않았었잖아. 내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있어도, 네 입으로는 절대 그러지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담담히 대답하는 라피아에요.

이에 확실히 화가 난 것처럼, 질은 따지듯이 큰소리로 말하기 시작했어요.

“그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잖아요. 저는, 저는 아직도 언니한테 미안해하고 있어요! 언니를 좋아하지만, 언니 덕분에 많은 걸 얻었지만!”

“알아, 항상 나한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는 거. 마녀를 마음에 품고 있으면서도 나한테 의지하고 있는 게 미안하다는 거잖아? 게다가 네가 나한테 좋아한다는 감정은 품고 있어도 사랑이라는 감정은 없는 것도 알고 있어. 아직은 짧은 교제이기도 하니까.”

짧은 교제라도 질이 라피아를 받아들인 뒤로 거의 한 달이라는 시간이 지나가고 있어요.

한 달이라는 시간, 동거하는 보통의 연인들이라면 서로의 대부분을 알만한 시기에요.

게다가 마냥 라피아에서 질에게로만 통하는, 일방통행의 교제도 아니었고요.

질도 라피아를 연애의 대상으로 보기 위해서 노력했었죠.

나이에 맞지 않는 일에 어울리기까지 하면서요.

하지만 질은 이 긴 시간 동안 마음속으로는 탈리안을 잊지 못해서, 잊을 수가 없으니까, 이렇게 의뢰를 수행하며 그 흔적을 찾아다녔던 거에요.

그러니 얼마나 미안했겠어요.

이 어린 나이에 둘을 신경을 쓰려니 어디 한쪽으로 미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일 거예요.

계속해서 라피아를 속인다거나, 탈리안에게로 향할 마음을 라피아에게 부딪힌다거나, 그런 일이 되지 않아서 다행인 거죠.

대신에 이렇게 울먹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 거에요.

“다 알면서…. 다 알면서 왜 받아주는 거예요…. 왜 저를 이렇게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거예요…! 이렇게 힘들걸 알았다면 차라리 그날 언니가 저한테 손을 내밀어주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언니도 미련해요…! 왜 이런 저한테 화 한번 안내고….”

질은 모든 걸 알면서도 받아주는 라피아가 미워서 화도 내고, 도움의 손길을 내어준 라피아를 탓하기도 했어요.

소리치다가도 흘러넘치는 눈물을 보이기 싫어서 옷소매로 계속 눈 주변을 비비기도 했고요.

그런 질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서 안아준 라피아였어요.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 말했었잖아? 마녀가 없는 동안 너를 내 거로 만들어 보이겠다고. 이 모든 건 내가 원해서 일어난 일이야. 하지만 그동안에 네가 힘들다면 그만둬도 돼. 그만둔다고 하더라도 나는 널 버리거나 하지 않아. 제일 아끼는 친동생처럼 챙겨줄 거야.”

“언니 이상한 거 알아요? 왜 저한테 이렇게 잘해주는데요? 제가 뭐라고 이렇게 챙겨주는 거예요!”

질의 말대로예요.

아무리 질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라피아가 질을 위하는 모습을 본다면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게 될 정도였죠.

라피아에게 있어서 질이 도대체 누구길래, 어떤 사람이길래.

“내가 전생에 사랑이란 걸 받기만 했지, 주는 걸 못해보고 죽었거든. 그래서 한이 맺혔나 봐. 그런데 널 만나다 보니까, 너한테는 정말 한없이 줘봐도 괜찮겠다 싶었거든.”

“전생…?”

“어, 으음…. 그건 말해도 못 믿을 테니 안 알려줄 거야. 어쨌든 믿음이 부족하다는 말이지? 내가 하나하나 너의 좋은 점을 말해주면 믿어줄래?”

“그게 무슨….”

질이 궁금해해도 라피아는 대답하길 꺼리며 말을 돌렸어요.

그리고는 항상 볼 수 있었던 장난기 넘치던 얼굴로 자신이 마음에 들었던 질의 매력을 하나씩 말하기 시작했죠.

“매~번 말하지만, 네 피가 맛있는 점도 있고…. 캠프를 했을 때의 일도 있고, 네가 하는 행동들이 귀여워서 그런 점도 있지. 묘하게 배려심이 넘치는 점이라거나. 마녀와의 관계만 제외한다면 평범하기만 할 뿐인 소녀가 비상식적인 외모를 가진 것도 있어. 집에서 공부할 때 내가 달라붙어도 짜증을 한 번도 내지 않는 점…. 흡혈할 때 싫다고 말하면서도 몸은 솔직해서 끝까지 어울려주는 점. 그리고 또 네흡?!”

“그, 그만! 부끄럽게 뭐 하는 거예요!”

처음 시작했을 때도 그렇지만, 라피아의 말은 좀처럼 끊길 생각을 하지 않았어요.

덕분에 억지로 질이 라피아의 품속에서 떨어져나와 입을 틀어막아야 했죠.

그래도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힘으로 막는 게 아니라, 살포시 덮는 듯이 막은 거라 기분은 나쁘지 않았겠네요.

“푸흐흐, 아직 안 말한 건 엄청 많은데 나중에 말해줄게. 이런 데서 할 이야기는 아니니까 집에 돌아가면, 그때.”

“그건 사양할게요…. 그리고 그, 언니는 저한테 이미 충분히 차고 넘치는 사람이에요. 그러니까 언니를 제대로 좋아할…. 사랑할 수 있을지는 조금만 더 같이 지내본다면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하지만, 탈리안 언니랑은….”

마음속의 말을 숨기려던 아까와는 달리, 이번에는 전부 털어놓으려던 질이었지만 라피아가 말을 못 하도록 다시 강하게 껴안아 버렸어요.

“그걸로 충분하니까 더 말 안 해도 돼. 그동안 나 모르게 마녀를 찾고 다녔다는 사실에 심술이 나서 해본 말이야. 말하지 않아도 네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

라피아는 자세가 편안한 자세는 아닌지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하는 질을 보더니 품에서 풀어줬어요.

“…저는 내일도, 그다음 날도 탈리안 언니를 찾으러 다닐 거에요.”

질리지도 않고 라피아의 진심을 확인하고 싶은가 보네요.

그동안 라피아는 처음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정말 한시도 질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어요.

설령 라피아가 옆자리를 비운다고는 해도 미리 양해를 구하거나, 자리를 비운 시간이 하루를 넘지 않았죠.

그러니 진심을 보여준 라피아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나쁠 만도 한 말이에요.

라피아의 진심만을 확인하기 위한 말이었다면 모를까, 탈리안까지 언급했으니까요.

“응, 알아.”

이런 질의 짓궂은 질문에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해주는 라피아에요.

사람은 아니지만, 다른 의미로 사람의 범주를 벗어났네요.

그렇지만 라피아의 짧고 단호한 대답 때문인지 질의 질문은 계속해서 이어졌어요.

확신을 주지 못한 것 같아요.

아니면, 몇 번이라도 더 듣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이렇게 이기적이어도 괜찮은 거예요?”

“응, 괜찮아.”

역시 방금과 같이 대답해주는 라피아의 모습에 질의 표정은 좋지 못했어요.

괜찮냐고 묻는 말에 괜찮다고 답하는 게, 정말 괜찮다는 뜻일 리가 없잖아요.

마음이 불편할 거에요.

“전 탈리안 언니가 돌아온다면, 언니의 마음을 배신할지도 몰라요.”

“내가 선택한 일인걸, 악으로 깡으로 버텨야지.”

“멍청해….”

계속해서 심기를 불편하게 할만한 질문에도 태연하게 대답해오는 라피아에요.

그래서인지 질은 작은 소리로 라피아를 욕했지만….

“맞아, 멍청해.”

그 작은 목소리로 자신을 욕한 것도 듣고 바로 수긍해버렸죠.

이건 질도 예상 못 했을 거예요.

“뭐라는 거에요! 부정해야죠! 언니는 안 멍청해요!”

“푸훗, 그래.”

발끈하며 자신이 했던 말을 번복하는 질이 꽤 귀엽게 보였겠죠.

질의 양 볼을 살짝 꼬집어 잡아당기는 걸 보면 분명해요.

“하디 마세요…. 슬슬 알마 언니랑 세르디어를 도우러 가야….”

“응? 그럼 이제 날 좀 믿어주는 거야?”

“언니를 못 믿는 게 아니에요. 저를 못 믿어서 그런 거지….”

“날 믿으면 문제 없는 거잖아? 믿고 따라와.”

라피아는 질의 앞으로 나아가 만들어 뒀던 벽을 허물고 손을 내밀었어요.

갑자기 허물어진 벽 때문에 빛이 새어 들어오는데, 그게 질에게는 라피아에게서 후광이 쏟아지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르겠어요.

명색이 뱀파이어인데 빛에 쌓여있다니 모순적이지만요.

그래도 질의 눈에 담기는 라피아가 꽤 마음에 들었나 보죠.

“평소에는 장난치기 바쁘면서 이럴 때만 믿음직스럽게….”

중얼거리면서도 손을 잡는 걸 보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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