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화 〉 마녀가 없는 동안에 (11)
* * *
“저 앞인데, 라피아 씨. 정말 이대로도 괜찮겠어요?”
“괜찮다니까 몇 번을 물어봐? 겉보기엔 경비도 없어서 잠입하기엔 편하겠네.”
“근데 이런 의뢰를 마법 학원의 학생들한테 맡겨도 되는 거예요?”
질의 파티는 대륙 동부의 하즈빈 대삼림으로 왔어요.
리니스에서부터 점점 퍼져만 가는 슬리브스터의 세력을 막기 위해서였죠.
약한 사람들을 노예로 만들어 팔고 다닌다는 점에서 슬리브스터는 모든 이들의 적이 되었는데요.
이 때문에 아직 배울 게 많은 마법 학원의 학생들에게도 의뢰가 내려오는 거였죠.
“학생이 이름대로 진짜 학생이 아니잖아, 학원에 전직 모험가가 몇 명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리고 알마의 말대로, 마법 학원의 학생 중에는 전직 모험가가 상당히 많이 껴있으니까요.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죠.
“듣는 사람 기분 나쁘지 않게, 이쁘게 말해.”
“서로 언제 덤벼들지 모르는데 기분을 신경 쓸 여유가 어디 있다고.”
라피아의 말에 대한 답으로 빈정거리면서 가방의 내용물을 다시 확인하는 알마에요.
사전 준비만큼은 역시 확실하게 하네요.
“너 진짜….”
“저는 괜찮으니까 의뢰에 집중하기로 해요. 안 그래도 상태 안 좋으시잖아요.”
“질 때문에 참는 줄 알아.”
알마는 라피아의 위협적인 태도에도 듣는 체도 하지 않고 거점의 입구로 보이는 동굴 앞에 섰어요.
거점의 기초가 되는 것이 동굴이라서 그렇게 표현한 것이지, 겉으로 보기에는 새로 만들어낸 건물이랑 똑같았거든요.
산을 깎아내고 파내서 무언가의 건물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노예상들의 건물이라고는 보이지 않을 정도의 화려한 귀족들의 건물처럼요.
“저번처럼 이 주변에 매복이 숨어있는 거 아닐까요?”
“이번엔 정말 버리고 갈까 봐 걱정이라도 되나 봐?”
“그럴 리가요. 지금은 세르디어도 있고, 라피아 언니도 있는데요?”
자신 있게 말하며 바로 흑기사를 소환해내는 질이에요.
흑기사의 옆에는 그 크기가 압도적으로 작은 릴리아도 함께 있었죠.
그런데 흑기사만 이름을 불러주면 릴리아가 삐지지는 않는 걸까요.
“건방지기는…. 들어간다. 전방은 내가 살필 테니, 후방이랑 좌우 잘 살펴.”
“조용히 하세요. 들키면 어쩌려고 그래요?”
알마는 질의 비아냥에 한숨을 쉬고서 활짝 열려있는 문 안으로 들어갔어요.
숨죽이고 걸어간 동굴 안은 외관만큼 화려한 복도의 모습을 하고 있었어요.
벽에는 횃불 대신 램프가 달려있어 어두운 복도를 비추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복도에는 사람은커녕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죠.
“기껏 어두운 곳만 골라 숨어왔더니, 아무것도 없잖아.”
“안쪽에서 소리가 들려오는데, 사람이 좀 많은 거 같아. 다 거기 몰려있다고 생각해도 되겠어.”
“그럼 경매 중인 건가.”
“타이밍이 좋지 않은데, 끝날 때까지 기다릴까? 이대로 들어가면 노예들을 상대해야 할거고, 난리 통에 노예를 사러 온 사람에 섞인 노예상들이 공격해올 수도 있어.”
“기다린다니, 어디서? 노예를 생각해주는 건 좋은데 우리가 당할 가능성도 생각해요.”
“왜? 나는 마냥 기다리자고만 하지는 않았어. 그리고 기다리기 딱 좋은 곳이 있잖아.”
알마와 짧은 작전회의를 하던 라피아는 의뢰소에서 입수한 지도를 펼쳐 보였어요.
지도로 검지로 가리킨 곳은 노예들을 가둬놓는 지하 감옥이었죠.
“가는 길에 만나는 순찰병만 조심한다면 그곳만큼 기다리기 좋은 곳은 없어.”
“퇴로도 없고 노예들이 몰려있는 곳인데, 좋은 곳이라고요?”
“노예들이 명령을 듣고 움직이기 전에 노예상을 먼저 제압해버리면 될 일 아니야? 걔네도 노예상 명령을 듣기는 싫을 테고.”
“말은 쉽지, 노예들이 듣고 싶어서 듣는 게 아니잖아요. 걔네 목에 달린 초커 때문에 몸이 멋대로 움직이는 거지. 게다가! 조력자는 의뢰가 끝날 때까지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했다고요.”
“말했잖아, 나를 믿어.”
상당히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하는 라피아를 보니 들어오기 전의 숙취는 어디 갔는지 궁금해지네요.
그런데 한창 이어지던 작전회의를 끊고 질이 말을 걸어왔어요.
“저어…. 언니들 작전회의는 좋은데요….”
“응?”
“저기 있는 노예가 우릴 본 거 같은데….”
질이 가리킨 곳에는 허름한 차림의 노예가 오른쪽으로 꺾이는 복도의 끝, 그러니까 벽 뒤에서 고개만 내민 채로 질의 파티를 훔쳐보고 있었어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는 질을 보고서 놀란 건지 바로 벽 뒤로 모습을 감췄지만 이미 알마도 라피아도 다 본 지 오래였어요.
“진짜잖아? 목에 찬 빨간 초커…. 어떻게 빠져나온 거지?”
“함정일지도 몰라, 애초에 우리가 고작 노예 하나를 눈치 못 챘다는 것부터 이상해.”
“그럼 세르디어가 갔다 와줄래?”
“…어쩔 수 없지.”
실컷 떠들기 시작한 알마와 라피아를 두고 질은 흑기사에게 부탁했어요.
가만히 놔두면 노예를 보러 가기는커녕 이 자리에서 계속 떠들기만 할 것같이 보였거든요.
동시에 혹시라도 흑기사만으로 보내면 위험할까 봐 릴리아에게 말해 흑기사의 뒤를 봐주라고 말했죠.
흑기사가 처음으로 계약한 소환수라 그런지 여러 가지로 챙겨주는 모습이네요.
“으아…! 흡?!”
다만, 노예가 보기에 흑기사가 꽤 무서웠었나 봐요.
공포에 질려 흑기사를 보자마자 소리를 지르려고 했지만 바로 입을 틀어막혀버렸어요.
흑기사가 해를 끼칠 생각이 없으니 조용히 하라는 말을 건네도 진정할 기미가 없자, 흑기사는 설득을 포기하고 그대로 노예를 기절시켜 질이 있는 곳으로 데려왔어요.
“기절시킨 건 조금 과하지 않았을까…?”
“이 방법 외에는 따로 생각나는 게 없더군. 다른 노예상들에게 들키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어.”
“그건 그렇지….”
세르디어가 기절한 노예를 벽에 기대도록 앉혀놓아야 계속 떠들던 라피아와 알마의 시선이 겨우 집중됐어요.
언제 이렇게 사이가 좋았다고 잘 떠들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요.
“머리카락이 새하얀 거 보니까 교회 쪽 인물인가 본데?”
“슬리브스터 놈들 꽤 막 나가네요.”
“뭐,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한테까지 의뢰가 내려올 리가 없지.”
“어떻게 할 거예요? 밖에 뒀다간 위험할 수도 있는데, 그렇다고 깨워서 같이 이동하는 것도 배신자를 두고 다니는 거랑 똑같아요.”
알마의 말에 라피아의 반응이 시원찮은 건 물론이고, 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알마를 흘겨봤어요.
“응? 넌 왜 나를 그런 게슴츠레한 눈으로 보는 거야?”
“배신자 입에서 배신자 소리가 나올 줄은 몰랐거든요.”
“아…. 언제 배신할지 모르는 배신자가 배신자 소리해서 미안하게 됐네!”
알마도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언제 질을 배신해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했었죠.
그렇다면 라피아와 질의 반응이 이해가 가네요.
“저는 데리고 다니는 편이 나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 사람, 힘이 그렇게 세 보이지는 않으니까요.”
“나도 비슷한 생각이야, 교회 쪽 사람은 정말 높은 사람이 아니라면 딱히 위협적이지 않거든. 여자라면 특히 치료 쪽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으니까.”
“그럼 릴리아보고 데리고 다녀달라고 할게요.”
릴리아는 질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눈치껏 노예를 넝쿨로 감아 들었어요.
그리고 다시 거점 안으로 진입하려는데, 질이 걸음을 떼려던 순간 이상함을 눈치챈 거예요.
“언니들, 지금 놀러 왔어요? 언제부터 사이가 좋았다고 그렇게 서서 이야기만 하는 거예요!”
질의 말대로, 라피아와 알마가 제자리에서 대화를 그만둘 생각을 않고 있던 거였어요.
그런데 질의 잔소리에도 둘은 뭐가 잘못되었냐는 시선으로 질을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어요.
알마만 그런다면 모를까, 라피아까지 알마와 같은 반응을 보이니 질은 답답하기 그지없었죠.
“진짜! 의뢰하러 왔는데 이야기만 하고 있으면 어쩌자는 거에요!”
“아니, 근데 솔직히 긴장감이 너무 없다고 해야 할까…. 적이 보이질 않으니까 그럴 기분이 안 들어서. 으음, 아니야. 미안해. 질.”
곧바로 사과하며 질의 기분을 맞춰주는 라피아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한껏 기분이 나빠진 질은 흑기사와 릴리아를 불러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거든요.
하지만 아무리 경매로 인해 노예상들이 바쁘다고는 해도 저렇게 경계도 하지 않고 나아가면 위험할 텐데요.
이는 라피아도 같은 생각이었나 봐요.
“질! 그렇게 막 나가다간 위험해!”
“마나로 확실하게 살펴 가면서 가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미, 미안하다니까? 우리 일단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야…!”
“이 길로 가면 나오니까 따라오기나 해요!”
화가 단단히 난 것 같아요.
그나저나 어떤 방식으로 사용하는 건지는 몰라도, 질의 마법도 그렇지만 마나를 사용하는 방식이 날이 갈수록 진화하네요.
라피아도 알마도 모르는 사이에 착실히 뭔가를 해내고 있기는 한 것 같아 다행이에요.
그렇지만 탈리안의 책을 얻고도 이런 성장이 없다면 그야말로 재능이 없는 거겠죠.
어찌 보면 당연히 있어야 할 성장이에요.
“그러면 거점에 들어올 때도 그렇게 들어왔으면 굳이 조심하지 않았어도 됐던 거 아니야? 빨리 좀 말하지.”
“제가 뭐하러 알마 언니한테 좋은 일을 해요?”
“저 말하는 싸가지….”
뒤따라오며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알마한테 비아냥대는 것도 잊지 않는 걸 보면 화가 났더라도 이성적인 판단은 가능한 것 같아요.
그렇다면 굳이 라피아가 질을 걱정할 필요는 없겠어요.
질 역시 자신의 실력에 대해 일말의 의심조차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이, 지하 감옥으로 향하던 도중 몇 명이고 노예상이나 순찰병의 미리 알아채곤 했죠.
그들을 처리하는 건 알마와 실컷 떠들던 라피아가 손수 나서서 처리해야만 했지만요.
그야, 예비 배신자인 알마와 즐겁게 떠드느라 질의 기분을 상하게 했으니까요.
이 정도의 사소한 일은 스스로 나서서 해야죠.
“이 계단 아래가 지하 감옥이에요.”
“꽤 깊이 들어왔네, 오는데 시간이 꽤 걸린 거로 봐서는 경매가 끝났을지도 모르겠는걸.”
“잠시만 기다려보세요.”
질에게 한마디 듣게 된 후로는 의뢰에 관한 내용을 제외하고 알마와 한마디도 나누지 않던 라피아에요.
지하 감옥까지 내려오기까지 꽤 시간을 소비했으니 그 점이 걱정되었던 거겠죠.
그렇지만 이번에도 역시 기다려보라고 말하고는 일순간 눈을 감고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어요.
아주 찰나의 순간에 마치 심장이 뛰는 듯한 마나의 파동을 퍼뜨린 질은 다시 눈을 뜨고 경매는 아직 진행 중이라고 말했어요.
“아직 진행 중이라니, 방금 뭐한 거야?”
“거점 전체에 통로를 따라 마나를 퍼뜨렸어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약한….”
“거점 전체라니 너, 여기가 얼마나 넓은 줄 알고 그런 짓을….”
“괜찮아요, 저 타고나서 차고 넘치는 게 마나니까요.”
타고났다는 말에 라피아는 할 말을 잃었어요.
마나고 뭐고, 아직 기분이 나쁘다는 게 질의 표정에서 다 드러났기 때문이에요.
“…질, 집에 돌아가면 풀어줄 테니까 일단 화 풀면 안 될까?”
“저한테 이 의뢰는 중요해요! 의뢰할 의지를 보이지 않은 건 언니들이잖아요!”
“왜 중요한데?”
“그거야…! 그건, 그러니까….”
짜증을 내던 질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어요.
뭔가를 말하려다가도 입을 뻐끔거리기만 하며 주저하는 모습에 라피아는 이상함을 느꼈어요.
그렇다고 굳이 깊게 생각할 필요도 없었죠.
질이 라피아에게 숨길만 한 이야기라면 단 하나, 마녀인 탈리안에 관한 이야기밖에 없으니까요.
라피아도 그걸 잘 알고 있었어요.
“…마녀구나.”
“아, 저, 제가 일부러 숨기려던 건…!”
“배려는 고마운데, 전에도 말했잖아? 너랑 가까워진다는 선택을 한 건 나야. 그러니까 괜찮아.”
방금까지 화를 냈다고 생각하기 어려운 허둥대는 모습에 라피아는 질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었어요.
그러곤 앞을 가로막고 있던 문을 힘으로 잡아 뜯어 열어버렸죠.
두꺼운 철문과도 같은걸 한 번에 열어버린 것을 보고 모두가 놀랐어요.
부서지는 소리는 분명 금속의 것인데, 기운 없이 종이처럼 찢어져 버리니 그럴 수밖에요.
하지만 이래서야 미리 세워두었던 계획인 ‘잠입’의 기본을 무시해버린 거 아닌가요?
“지금부터 노예들을 전부 해방하고 혼란을 틈타서 노예상을 전부 족칠 거야.”
“네…?”
“적 거점 한가운데에서 연극 한 편 찍어내더니, 기분이 나빠져서 그런가 과격해지셨네.”
비꼬아대는 알마를 향해 라피아는 입 다물라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어요.
지금껏 의뢰를 해온 게 다 마녀를 찾기 위해서였다는데, 자기 몰래 전 여자 친구나 찾고 다닌걸 알게 되면 기분이 나쁘지 않을 수가 없을 거예요.
겉으로는 자신이 선택한 일이라며 괜찮은 척을 하더라도 그 속이 어떨지는 이미 불 보듯 훤하죠.
다만, 이게 의뢰에 나쁜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면 좋겠네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