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화 〉 마녀가 없는 동안에 (10)
* * *
“그런데 질, 라피아 언니는 언제 돌아오는지 알고 있어?”
몇 시간이고 책을 읽던 루니는 갑자기 질에게 라피아의 귀가 시간을 물어봤어요.
잠깐 나갔다 온다고 했지만, 좀처럼 돌아오지 않아서 걱정된 걸지도 모르겠네요.
“라피아 언니는 갑자기 왜?”
“왜냐니, 언니한테 나를 보여줄 거야?”
라피아가 걱정되었다기보다는 자신을 보이는 게 더 걱정이 되었었나 보네요.
하기야 집에 돌아왔는데 질이 두 명이 되어있다면 라피아도 꽤 놀라겠어요.
아니면, 좋아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데 숨기고 싶은 루니와는 달리 질의 생각은 다른가 봐요.
책을 내려놓고 의자 등받이에 기대선 고개만 뒤로 꺾어 루니를 쳐다보는데, 왜 숨겨야 하냐는 듯한 표정이에요.
“굳이 숨길 필요가 있을까?”
질의 말을 들은 루니의 표정은 말 그대로 ‘그게 말이야? 방구야?’라는 표정이었어요.
“이미 라피아 언니한테 도서관에 대해서도 말했는걸?”
“루니가 라피아 언니를 못 믿는 건 아닌데, 그래도 약점과 관련된 비밀은 감춰둬야 한다고 생각해.”
“…알았어,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이유가 있는 거겠지. 내가 하는 말이니까.”
루니의 말에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며 수긍하는 질이에요.
애초에 자신이 하는 말과 다를 게 없으니 거기에 대고 ‘그건 아니야!’라고 말하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하죠.
“조금은 신기한 감각이네. 루니가 있고, 루니랑 똑같은 질이 있는데 내가 생각한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건…. 둘 다 같은 사람인데도 말이야.”
“근데 나눠진 순간부터는 다른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거 아니야?”
“그런…. 가?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너라는 자각이 있….”
루니가 말을 이어가려는 순간, 현관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어요.
놀란 마음에 질과 루니는 현관문 쪽을 바라봤죠.
루니의 소환을 해제할 생각도 못 한 상태로 말이에요.
“지이이~일! 언니 왔다아~!”
“아! 해, 해제…!!”
어딘가 들떠 보이는 라피아의 큰 소리에 질은 급하게 루니를 곁눈질로 쳐다보고는, 루니 쪽으로 손을 뻗어 작게 중얼거리며 소환을 해제했어요.
그 손짓에 루니는 순식간에 검은 연기가 되어 질의 손바닥으로 빨려 들어갔어요.
다행히 라피아는 현관에서 신발을 벗느라 루니가 사라지는 모습을 볼 수 없었죠.
“어, 언니 늦었네요!”
“으응~ 친구랑 쪼오금 마셨어~”
귀가가 늦은 이유가 술을 마셨기 때문인가 보네요.
한 번도 술을 마신 적을 보여준 적이 없는 라피아가 취할 정도로 마셨다면 꽤 친한 친구겠죠.
라피아의 취한 모습도 그렇지만, 온몸에서 술 냄새가 진동하기에 현관까지 나온 질이 모를 리가 없었어요.
“윽! 술 냄새! 얼마나 마신 거예요?”
“쪼끔 마셨다니까? 쪼오~끔.”
많이 안 마셨다면서 손사래까지 치며 부정하는데 걸음걸이가 비틀거리는 거로 봐선 전혀 그렇지 않았어요.
게다가 갑자기 질을 안아버려서 당황하게 했으니 평소의 모습과는 전혀 다르죠.
그럼에도 넘어지지 않으려고 열심히 중심을 잡는 질이 안쓰러울 정도예요.
그나마 침대로 데려오던 도중이라 바닥에 카펫이 깔려있어 다행이었어요.
“어, 언니! 위험하잖아요!”
“오늘따라 질한테서 맛있는 냄새가 나는거얼~”
“네?! 지금 흡혈할 건 아니죠?! 하려면 적어도 술에서 깬 뒤에 해요!”
라피아의 상태가 좋지 못한 건 누가 봐도 알 수 있어요.
그런데 이런 제정신도 못 차리는 라피아가 지금, 질의 피를 빤다면 정도를 지키지 못할 수도 있을 거예요.
질도 그게 걱정되니 열심히 손으로 자신의 목 부위를 손으로 가리고 있는 거겠죠.
“질! 언니가 싫어?!”
“시, 싫은 건 아닌데요! 그래도 제정신일 때 하는 게! 히약!?”
하지만 라피아는 목을 물지 못하자 순식간에 질을 제압해서 넘어뜨리고는 귓불을 물어버렸어요.
깨문 게 아니라 아프진 않았겠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질을 방심시키기엔 충분했을 거예요.
덕분에 소름이 끼쳐 방어가 약해진 질의 손을 잡아 이전과 같이 머리 위로 올려버렸어요.
“이것 좀 놔주세요, 정말…!”
“언니는 실망햇서…. 질이 언니를 거부하다니이…. 흑, 흐윽….”
누가 보더라도 거짓으로 울고 있는데, 질에게 이게 먹힐 거라고 생각했나 봐요.
술을 마셔서 그런지 아예 사람이 바뀌어버렸네요.
질은 앞으로 라피아가 술을 마시지 못하게 감시를 잘해야겠어요.
“술 깨면 해도 된다니까요?! 왜 굳이 지금 하려는 거에요!”
“후우, 후욱…. 질이 너무 사랑스럽고…. 맛있는 탓이야…!”
눈이 완전히 맛이 간 라피아를 보고 더욱 격렬하게 저항하는 질이었지만, 술이 들어가서 제한이 풀린 건지 꼼짝도 하지 않았죠.
오죽하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라피아의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가서 아플 정도였으니까요.
“지금은 사랑스럽다고 들어도 기쁘지가 않은, 아팟…!”
그리고 라피아는 순식간에 질의 목을 물어 흡혈을 시작했어요.
항상 그렇듯이 처음에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파고드는 고통에는 적응하지 못했나 봐요.
하지만 이번에는 뭔가 달랐어요.
질의 기분이 좋아지기까지의 텀이 짧아졌다고 해야 할까요.
“하, 읏…. 안된다고…. 했는데에…!”
이유는 몰라도, 질의 몸은 순식간에 달아올라 전신에 힘이 빠져나갔어요.
라피아도 그걸 눈치채고 질을 구속하던 손을 놓아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죠.
이런 부분에서는 또 술에 취하기 전과 다를 게 없다는 게 놀랍네요.
습관적인 걸까요.
덕분에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정신을 못 차리는 질이에요.
이번에는 참는 것도 힘이 드는지, 질은 카펫에 주름이 잡혀 구겨질 정도로 꽉 쥐었어요.
그 모습에 라피아는 뭘 잘했는지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잠시 질의 목에서 떨어졌어요.
“쓰읍…. 어때? 오늘 언니가아~ 힘 좀 써봤, 읍…. 우욱….”
입가의 피를 닦으며 자신만만하게 웃던 라피아는 갑자기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헛구역질을 했어요.
질도 평소보다 강력한 쾌감에 휩쓸리다가 헛구역질을 하는 걸 보고선 얼굴이 새파래졌죠.
무슨 일이 일어날지 다 알고 있는 듯해요.
“화, 화장실! 화장실로 가요!”
질은 정신은 깨어났지만, 아직 진정되지 않은 몸으로 라피아를 부축했어요.
대단한 순발력이네요.
“으엑, 흡…. 피랑 술이랑 섞이니까 이상해애….”
변기의 코앞까지 황급히 달려왔는데도 불구하고, 라피아는 제자리에서 주저앉았어요.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질의 피 때문인지 누가 본다면 어디 아픈 사람인 줄 알겠는데요.
“그러니까 왜 이렇게 술을 마셔서…! 다음에 또 이러면 정말 혼나요!”
“우욱…! 자, 잠…. 웁, 브웨엑…!!”
들을 시간조차 사치라는 것처럼 라피아는 바로 달려가서 변기를 붙잡고는 속을 게워내기 시작했어요.
빨간색과 주황색, 사이사이로 보이는 작은 건더기들이 변기 물에 퐁당거리며 빠지는 모습과 리얼한 소리가 질의 표정을 찌푸리게 했어요.
“으으, 나는 절대로 술 안 마셔야지….”
“어윽, 끄흡…. 하아아…. 씹, 후우. 지일…. 물 좀…. 가져다…. 오에엑, 에엑! 허윽….”
“사람을 이렇게 괴롭혀놓고 멋대로 부려먹기나 하고…. 에휴….”
불평불만을 다 하면서도 물은 떠다 주네요.
그런데 정작 라피아는 계속해서 토해내느라 정신이 없네요.
라피아가 정신을 차린 것은 몇 번이고 더 속을 게워낸 후였어요.
“으…. 미안, 물도 못 마시겠어….”
“누구를 만났길래 이렇게 마신 거예요?”
“친구는, 친구인데에…. 조금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서…. 그래도 게워내니까 좀 깨는 기분이야.”
친구인데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니 이렇게 모순적인 말이 또 있을까요.
게다가 그런 어려운 사람과 제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마셨다는 건 또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잘했어요, 정말 잘했어요.”
“…어쨌든, 방금은 미안해. 솔직히 지금도 너한테서 평소보다 더 맛있는 냄새가 나거든.”
아까 그렇게 빨아놓고 아직도 부족한가 봐요.
질이 비꼬며 말해도 듣는 체도 하지 않는 걸 보니 꽤 괜찮아진 것 같네요.
아니면 대꾸해줄 기력이 없는 걸 수도 있겠죠.
“입가심하기 전까지는 절대, 절대! 안되니까요!”
“아, 알아….”
“그리고 저 내일 의뢰 때문에 알마 언니랑 슬리브스터의 거점 중 하나를 습격하러 가야 해요.”
“아흐으…. 나, 나도 갈게. 내일쯤이면 괜찮아질 거야. 지금도…. 아까보다 훨씬 나으니까.”
씻지도 않은 채로 침대도 아니고 바닥에 드러누운 라피아는 훨씬 낫다고 말하지만,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고 있는걸 보면 아무래도 거짓말 같아요.
완전히 거짓말은 아닐 거에요.
변기에서 꼼짝하지 않던 때는 대화조차 못 했으니까요.
“따라오는 건 상관없어요. 그렇지만 이미 파티는 저랑 알마 언니로 신청해놔서 보수는 없을 텐데, 괜찮아요?”
“네가 걱정돼서 그러는 거니까 보수 같은 거 없어도 상관없어.”
“으응…. 그럼 얼른 씻고 자요!”
솔직히 내일도 라피아의 상태가 그다지 좋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런 상태의 라피아라도 알마나 질보다 강하기는 하겠죠.
다만 상대가 상대인 만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겠지만요.
그걸 알고 있기에 질도 별다른 말 없이 수긍하고 라피아의 등을 받쳐 일으켜 세우려고 했어요.
하지만 질의 손길에 라피아는 격렬하게 저항했어요.
“아아~ 시러어! 힘들어, 귀찮아아….”
그 모습이 마치 장난감을 사주지 않는다고 바닥에 드러누워 떼를 쓰는 어린아이와 똑같았죠.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질의 손도 뿌리치고 고개를 좌우로 저어, 가기 싫다는 의지를 보이니 다르게 표현할 말이 없겠어요.
“얼른 일어나세요! 언니한테서 술 냄새랑 싫은 냄새가 진동을 한다구요!!”
굳이 구토 냄새라고는 하지 않는 걸 보면 이것도 꽤 신경 써서 해준 말이겠죠.
그럼에도 라피아는 상처받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앉아선 고개를 푹 숙였어요.
“히잉…. 질 너무해애….”
“다음부터 술을 마시고 들어오면 저 집에 돌아가서 자고 올 거니까요!!”
“어, 어어…? 그런 말을 할 정도로 싫었어? 미안해…. 금방 씻고 나올 테니까 잘 준비 해둬!”
라피아는 집에 돌아가서 자겠다는 질의 말에는 진심으로 충격을 받은 건지 질을 안아주려다가, 냄새난다는 말이 떠올랐는지 우물쭈물하는 모습을 보이며 바로 화장실로 향했어요.
술에 취한 사람을 상대하는 건 그게 누구든 간에 피곤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누가 오더라도 지금은 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다음날, 자고 일어난 라피아는 의뢰 지역 가까이에 도착해서도 머리가 깨질듯한 두통에 신음을 흘렸어요.
좀처럼 나아지질 않는 모습에 질과 알마는 목적지를 코앞에 두고 라피아에게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죠.
라피아가 이 상태라면 파티가 잘 굴러갈지 걱정이네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