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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86화 (86/189)

〈 86화 〉 마녀가 없는 동안에 (9)

* * *

이후 라피아는 질이 공부 중에 계속 질에게 방해를 걸어왔어요.

‘오후에는 없을 테니까, 오후에 하는 게 어때?’라면서 지금은 자기에게 어울려달라면서요.

그대로 무시하고 공부에 집중할 수도 있는 일이었지만, 질은 라피아의 말에 따르기로 했어요.

오늘따라 라피아가 평소보다 달라붙는 게 보였으니까요.

그렇지만 라피아가 집에서 자신에게 어울려달라고 한다면, 하는 일이라고는 그런 것밖에 없었죠.

마치, 민달팽이끼리 서로 얽혀서 침대에서 뒹구는 것 말이에요.

하지만 아까까지만 해도 자위니, 뭐니 했던 일 때문에 질은 꽤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고, 결과는 뭐….

질만 즐기지 못하고 실컷 괴롭힘당하는 것으로 끝나버렸다는 거였어요.

그렇게 라피아가 나갈 시간이 되자 질은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쉬며 다시 책상에 앉아 책을 폈어요.

꽤 익숙해진 모습에 씻고 나와서 옷을 갈아입던 라피아가 신기하다는 듯이 물어봤죠.

“질, 이제는 괜찮은 거야?”

“어떤 걸 말하는 거예요?”

“흡혈에는 꽤 익숙해진 것 같아서, 또 물어봐서 미안한데…. 어른이 될 준비는 아직이냐는 거야.”

어른이 될 준비라는 말에 단번에 무슨 말인지 이해한 것처럼 얼굴을 붉히는 질이에요.

등지고 있는 자세라, 이 모습을 들킬 리는 없겠지만요.

그럼에도 질은 뺨을 두 번 강하게 두들겨 정신을 붙잡으려 했어요.

그리고 대답하기 위해서 고개를 돌리니 라피아가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있었어요.

약간이지만 볼이 빨갛게 부어올라서 그런지 찐빵같이 보이는걸요.

얼마나 세게 때렸길래 붓기까지 했을까요.

“아, 음…. 그, 언니가 말했던, 흡혈할 때 하는 거로….”

“하긴, 그때 하는 것도 그거랑 다를 게 없겠구나. 알았어, 집 잘 지키고 있어!”

“네에…. 다녀오세요.”

라피아가 문을 닫고 나가는 걸 확인하고서는 정말로 갔는지 문 앞까지 다가가서 귀를 대고 걸음 소리까지 엿들었어요.

그리고는 방의 정중앙에 서서 손에 마나를 끌어모았는데, 그러자 탈리안이 갖고 있던 책이 나타나 질의 손에 툭 떨어졌죠.

“…카샤트.”

언젠가 한 번 들어본 적 있는 주문을 외자, 질의 앞에서는 검은색의 질척이는 진흙과도 같은 게 꾸물거리면서 점점 형체를 이루기 시작했어요.

조금의 시간이 지나면 진흙은 사람의 형태를 갖춰, 순식간에 또 다른 한 명의 지르니트가 만들어졌어요.

이건, 탈리안의 분신을 만들어내는 마법이네요.

언제 배워서, 언제 쓸 수 있게 된 걸까요?

“어, 아, 안녕…?”

질은 다 만들어진 자신의 분신을 보고 인사를 건넸어요.

인사를 받고도 대답이 없는 분신의 반응을 살피는데, 분신은 방의 풍경을 살피는 데만 바빴죠.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한 분신은 질에게 퉁명스레 말했어요.

“이런 일로 불러내지 말라고 했잖아.”

아무래도 이 상황이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아요.

질이 무슨 감정을 떼어내서 분신을 만들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불만이 많은 질이라면 그다지 좋지 못한 감정인 건 분명할 거예요.

“그치만, 미리 연습을 해둬야 나중에 문제없이 같이 싸우지….”

“알았으니까 그런 울상인 표정 하지 마, 나랑 똑같은 얼굴로 그러니까 이상해. 그리고 내가 기억이 완전하지가 않아서 그러는데, 그 책…. 탈리안 언니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를 본 거야?”

분신이 말하는 걸로 봐서 지금 질이 들고 있는 책은 탈리안이 메시지로 남겨두었다고 말했던 레플리카인가 봐요.

그렇다면 플랑을 이긴 것도 이상할 일이 아니에요.

“아니, 아직. …무서워서 책만 가지고 나왔어.”

“…그래. 네가 그렇다면 할 말은 없지.”

짧은 대화를 마치고 나면 둘의 사이에는 어색한 정적만이 남았어요.

질이 분신을 만드는 마법을 연습하기 위해 불러낸 것일 텐데, 상태를 보아하니 실패는 아닌 것 같거든요.

그렇다면 소환은 성공적이라는 거에요.

문제가 있다면 이 뒤에 질이 뭘 할지 생각을 해두지 않았다는 점이겠죠.

“있잖아, 난 널 뭐라 부르면 되는 거야? 원래 이름대로?”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분신 쪽이었어요.

이름, 중요하죠.

앞으로 분신과 함께 싸운다면 없어선 안 될 거예요.

중요한 순간에 이름을 불러야 하는데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면 헷갈릴 테니까요.

그렇다고 해서 전투 중에 ‘부탁해, 또 하나의 나!’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잖아요?

“어, 응! 나는 뭐라 불러야 해? 언니처럼 새로운 이름이라도 지어줄까?”

“글쎄…. 같은 기억을 가지고 내가 나라는 자각도 있는데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 되는 건 좀 그렇네.”

분신의 말도 틀린 건 없어요.

원본의 기억과 감정을 그대로 가지고 만들어졌잖아요? 그러니 자신은 지르니트 페어차일드 그 자체인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니 거부감이 드는 게 당연하겠죠.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게 싫으면, 자스가 지어준 별명도 싫은 거야?”

“…동생을 잊지 못했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네가 먼저 언급할 줄은 몰랐어.”

“너도 나인데 굳이 숨길 이유가 없잖아?”

“그건, 그래도 그 별명은….”

망설이는 분신에게 너무 대충 지은 별명이라 싫은 거냐며 물어보는 질이에요.

얼마나 대충 지었길래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까요.

“아니, 듣기에는 좋은 별명이니까 괜찮아.”

“그래, 그럼 앞으로 루니라 부를게!”

“어쩌다 역할 놀이를 하다가 생각난 별명으로 불리게 된 건지….”

이름이 정해지자마자 루니는 책들이 널브러진 책상으로 가서 하나를 집어 들었어요.

기억이 온전하지 못하다고 했으니 질이 뭘 하려고 했는지 알아두려고 그러는 것이겠죠.

“아! 나 방금까지 그러니까…. 어, 뭐라 말해야 되지?”

“아냐, 네가 어질러놓은 책들을 보니까 기억났어. 지금까지 네가 공부한 만큼의 결과가 없다는 것도.”

“그건 잊어줘도 되는데.”

탈리안과는 정반대의 모습이네요.

분신이라면 원래 본체에게 대들지 못하는 게 정상인데 말하는 것마다 이렇게 투덜대고, 공격적이라니.

마법에 덜 익숙해서, 완성도가 낮아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요.

분신을 만드는데 들어간 재료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을 거예요.

마나라거나, 마법식이라거나, 떼어낸 감정의 일부라거나, 이런 것들 말이에요.

“지금의 모습을 유지한 채로 영원히 살아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란 걸 너도 알면서도 공부하고 있는 거잖아.”

꽤 어려운 걸 공부하고 있었네요.

불로장생, 아니 불로영생을 위해 마법을 연구하고 있었나 봐요.

이 때문에 책상에 여러 가지 책을 가져다 두었던 거겠죠.

몇몇 책은 왜 골라온건지 모르겠지만요.

뱀파이어의 생태라거나 건강한 생활 습관이라는 책은 불로영생에 도움이 되기엔 부족하잖아요?

그래도 건강한 생활 습관이라는 책은 정해진 수명 내에서 오래 살게 도움은 줄 거 같네요.

“뭐어…. 응, 그렇지. 그래도 탈리안 언니가 나쁜 거야! 평생 옆에 있을 수 없다던가 그런 말을 하니까!”

질이 말하는 걸 보니 불로영생에 관한 공부를 해왔던 것은 꽤 오래됐었나 봐요.

그런데도 별다른 진척이 없다는 건 꽤 슬픈 일이네요.

“내 앞에서 거짓말하지 마, 그냥 네가 언니의 옆에 있고 싶을 뿐이면서.”

역시 자기 자신이라서 그런가 어떤 말이 진짜고 어떤 말이 거짓말인지 기가 막히게 잘 구분하는 거 같아요.

모르는 게 이상하죠.

탈리안만 하더라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분신이 다 알고 있었으니까요.

“아하하…. 그것도 맞아. 그래도 이번에 언니가 레플리카를 건네줘서 더 심해진 것뿐이지, 공부는 그 전부터 하고 있었는걸?”

“그래서? 이렇게 떠들기만 할 거야? 저번에 플랑하고 싸울 때 미끼로 썼던 것처럼 뭐라도 시켜봐.”

플랑하고 싸운 건 질이 아니라 루니였었나봐요.

어쩐지, 상당히 이상했었어요.

아무리 싸움 도중이라고는 하지만 질답지 않게 전투 도중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거든요.

전투 중에는 계속 침착한 얼굴로 임했으니, 그게 질이 아니라 루니였다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에요.

“그럼 별건 아니고, 나랑 책 좀 같이 읽어줄래?”

“…뭐?”

그저 책을 같이 읽어달라는 말에 루니는 할 말을 잃어버렸어요.

그야 다른 할 일도 많을 텐데, 자신을 불러내서 부탁하는 일이 책 읽기라니 어이가 없을 거예요.

물론 탈리안의 분신들이 도서관 운영이라는 일을 맡았지만, 이는 탈리안이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거였어요.

질은 탈리안과 만난 뒤로 마기노에게로의 복수와 사람들을 돕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니 루니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아, 아니! 언니의 책에 적혀있는 거 보면 말야?! 네가 한 경험이나 기억도 다 공유할 수 있다고 했어! 그러니까 효율을 조금 올려볼까 해서…!”

그렇다면 플랑이 루니를 땅에 처박았을 때 겪었던 그 고통마저도 다 느껴졌었다는 말이겠네요.

게다가, 화염구에 타버린 것도요.

“할 말은 많은데 참는 거 알지? 이번만이야.”

“응! 책 여기 더 있거든? 좋아하는 책으로 읽어줘!”

어느샌가 양손 위에 여러 종류의 책을 들고 루니에게 내미는 질이에요.

방금까지만 해도 손에 아무것도 없었는데, 어디서 가져온 걸까요.

“어디…. ‘원소학개론’, ‘늙지 않으려면 해야 할 101가지’, ‘몸을 맑게 해주는 체조’. 책 이름이 다 왜 이래?”

“뭐든 도움이 되는 건 다 읽어둬야지!”

“그래…. 원소학개론이 그나마 낫겠다.”

루니는 제일 두꺼운 책을 들고 침대 쪽으로 걸어갔어요.

질은 이상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죠.

지금까지 자기는 침대에서 책을 읽었던 적이 없을 텐데, 자신의 분신이 침대로 간다면요.

“왜 거기로 가? 거실 테이블도 있고, 책상도 있고, 부엌의 식탁도 있는데….”

그런데 루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예상외의 것이었어요.

“불만이 많아서 그래. 오늘의 루니는 눕고 싶은 기분이야.”

“오늘의 루니…?”

이제는 도대체 어떤 감정을 재료로 해서 루니가 만들어진 건지 궁금할 정도예요.

불만이 많았다가, 질에게 맞춰주었다가, 이제는 귀여운 척까지.

“루니는 지르니트지만, 실리아 언니처럼 개성이라도 얻고 싶은 거야.”

“아, 으응….”

“나도 너잖아, 나도 이러고 싶을 때가 있는 거야! 지금 웃긴다고 생각했지?! 속으로 ‘나지만 저러니까 봐주기 힘드네.’라던가 생각했을 거 아니야!”

마지못해 수긍하는 질 때문에 발끈하는 루니예요.

부끄럼을 잘 타는 건 질이랑 완전히 똑같네요.

그럴만한 행동을 했다는 자각 역시 있는 것 같은데, 굳이 개성을 챙기려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아니, 어, 응…. 미안…. 근데 그래서야 실리아 언니랑 똑같잖아….”

“그래도 너랑 나랑 완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말투까지 비슷하면 좀 그래…. 그러니까 루니는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못 버티겠다는 거야. 이번이 두 번째지만, 지금 난 내 눈앞에 있는 널 보는 것만으로도 거부감이 들어.”

“거부감….”

“깊게 생각하지 마, 루니도 신경 안 쓸 거거든. 그리고 루니는 이 마법 때문에 새삼 탈리안 언니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게 됐어.”

그래도 지르니트는 어디 안 간다고, 탈리안을 좋아하는 마음은 그대로네요.

“지금은 옆에 없어서 아쉽지만, 탈리안 언니가 많이 대단하긴 하지. 엄청난 실력으로 언젠간 반드시 돌아올 테니까.”

“응, 정말 대단하지. 따라올 사람이 없을 거야. 마법만 그런 게 아니야, 똑똑한 것도 그렇고, 외모도 그렇고, 모든 면에서 다 그럴 거야.”

서로 탈리안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던 도중, 질은 갑자기 입을 다물었어요.

왜인지 모르게 찜찜한 얼굴을 하고서는 곧바로 침대에 누워서 책을 읽고 있는 루니의 표정을 읽기 시작했죠.

당연히 루니 역시 질의 시선을 느꼈기에 ‘왜 보는 거야?’라며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지금 생각난 건데 아무리 내 분신이라고 해도, 언니랑 있을 때는 절대로 절대로 소환 안 할래.”

아무래도 질은 루니에게 위기감을 느낀 것 같아요.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고, 탈리안에 대한 감정도 똑같으니 탈리안의 옆에서는 소환하지 않겠다는 거겠죠.

그야, 자신에게로 와야 할 탈리안의 관심이 루니에게도 나눠질 테니까요.

자기 자신에게 질투한다니, 질도 대단하네요.

“그래도 돼. 어차피 네 기억도 내 기억인걸. …그거 알아? 난 네가 지금까지 어디서 뭘 했는지도 저언~부 알고 있어. 그러니까 너무 나한테 막 대하지 않는 게 좋을걸?”

“이, 이익…! 뭐 하는 거야?! 얼른 책 읽어!”

루니가 뻔뻔하게 말하는 모습에 질은 할 말을 잃고 마저 책을 읽으라면서 잔소리를 했어요.

어딜 어떻게 보더라도 루니는 장난식으로 말한 것 같은데요.

그래도 질과 똑같은 얼굴로 루니가 능글맞게 웃는 걸 보면 본인으로서는 열 받을 수밖에 없겠죠.

“방해한 게 누군데 그래…. 아니 근데 넌 어떻게 분신한테도 못 이기는 거야? 맨날 탈리안 언니나 라피아 언니한테 진다고 억울해하면서.”

“시, 시끄러워! 계속 그렇게 건방지게 굴면 다시 소환 해제할 거니까!!”

“아, 응. 그러든지. 나야 책 안 읽어도 되고 편하고 좋지.”

“아아악!! 짜증나아아!!”

이전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질이 말로 누군가를 이긴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요?

분명 실력 면에서는 열심히 성장 중이기는 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상하게 대화를 할 때나, 특히 사람 간의 관계에서는 이길 것 같은 느낌이 전혀 없네요.

게다가 분신이라는 루니도 이상해요.

똑같은 질인데, 질이 아닌 듯해요.

역시 재료로 쓰인 감정 쪽에서 문제가 있는 거겠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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