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85화 (85/189)

〈 85화 〉 마녀가 없는 동안에 (8)

* * *

다시 알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의뢰를 진행하던 나날.

모처럼의 쉬는 날인데도 질은 책을 펴서 공부하고 있었어요.

책의 종류는 정말로 다양했어요.

시간의 왜곡이나 과거와 현재, 건강한 육체를 위한 생활 습관, 스태프의 활용법, 뱀파이어의 생태에 관해, 각인의 식을 더욱 활성화하는 법.

중간에 이상한 책이 들어가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질이 뭔가에 열심히라는 것만큼은 사실이었어요.

“무슨 책이 그렇게 많아?”

“저번에 말해줬었잖아요? 저희 집 2층의 도서관에는 없는 책이 없다고요. 다 거기서 가져온 거예요.”

“흐흥, 그렇구나. 근데 이 책은 왜 있는 거야?”

라피아가 집어 든 책은 당연하게도 ‘뱀파이어의 생태에 관해’라는 책이었어요.

이 책에 나온 내용을 살펴보자면, 남아있는 뱀파이어 혈통은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는다고 해요.

분명 라피아를 뜻하는 거겠죠.

라피아가 살던 뱀파이어의 마을은 전 대륙의 뱀파이어들이 모여 살던 일종의 뱀파이어들의 작은 국가라고 해도 될 정도였거든요.

이런 정보가 어떻게 자세하게 다 적혀있느냐고 한다면, 제일 최근에 발행된 신간이거든요.

“이거 출판사도 적혀있지 않고…. 마녀의 도서관엔 이런 책이 많아?”

“그, 그게…. 탈리안 언니의 도서관에선 없던 책도 바로바로 만들어져서…. 원하는 게 있다면 금방….”

“아, 기억났다. 저번에 플랑이랑 싸우고 돌아올 때 말해줬었지? 근데 나에 대해서 알고 싶은 거야? 그럼 직접 알려줄 수도 있는데 말을 하지.”

“저, 그러니까, 흡혈을 시작한 뒤로 밤에 잠이 잘 안 와서요….”

그러니까 흡혈로 인해 생긴 부작용에 대해서 알아보려고 이런 책을 구했다는 거네요.

그나저나 탈리안의 도서관도 참 대단해요.

원하는 책이 있다면 바로 만들어주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주인이 없는데도 멀쩡히 기능하고 있으니까요.

탈리안의 집은 도서관 하나만으로도 가호의 힘이 잠든 미궁과 같은 장소네요.

“으응, 아직도 그런 거야? 이렇게 오래갈 리가 없는데….”

“어, 어쨌든 저 더워져서! 씻고 올게요!”

“어? 어어…. 음, 그래.”

라피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충 대답하고는 어질러진 책상을 대신 정리해줬어요.

질이 뭐에 쫓기는지 알 수는 없겠지만, 씻고 온다는 말에 저런 표정을 지을 필요가 있었을까요.

정리를 대충 마친 뒤에는 화장실에서 멀찍이 떨어져 질의 책 중에서 하나인 ‘건강한 육체를 위한 생활 습관’을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어요.

때때로 화장실에서 질의 콧노래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는데, 그럴수록 라피아는 귀를 틀어막으려 했어요.

절대로 듣지 않겠다는 것처럼요.

질이 나온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뒤였죠.

머리를 말아 올려 수건을 감싼 채로 개운하다는 듯이 걸어 나오는 질을 갑자기 불러세웠어요.

“질, 이리 와서 앉아봐.”

“네?”

무슨 일인지 전혀 짐작이 가는 게 없지만, 라피아의 말이니 일단 따르고 보는 질이었죠.

“무슨 일이에요?”

“내가 웬만해서는 간섭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화장실에 들어가서 씻는 척하면서 혼자 즐길 때는 소리를 조금만 줄여주면 안 될까?”

“혼자, 즐긴다니…. 언니 무슨, 말을 하는 게? 아니, 하는 거예요…?”

라피아의 말을 듣자마자 얼마나 당황했는지 혀까지 꼬여서 말을 잘못해버리네요.

혼자 즐긴다는 건 뭘 말하는 걸까요.

“모를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너 너무 티 나거든…. 그럴 거면 차라리 나보고 도와달라고 해. 어설픈 호기심은 그다지 좋지 못하니까….”

“아니, 아니! 아니아니아니!! 언니! 저, 저는 진짜! 씻기만…!”

그래도 질이 이렇게 말을 더듬으면서 당황하는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네요.

씻는 것 외에 화장실에서 할 수 있는 게 과연 뭐가 있을까요.

없을 거예요.

억지를 부려 있다고 하더라도, 반신욕이라거나, 족욕 같은….

그렇지만 이것들도 다 씻는다는 것에 포함되는 거니까요.

“질, 거짓말은 나쁜 거야. 혼자 한 거 맞지?”

“으읏, 우으으…! 해, 했, 안 했어요!! 언니가 뭘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절대 안 했으니까요!!”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완전히 들켰다고 광고를 하는 것과 똑같은 거 아닐까요?

게다가, 거짓말은 나쁘다고 라피아가 미리 말해두었는데 발뺌하는 건 좋지 못한 선택이에요.

“부끄러운 건 알겠는데, 네가 책에서 봤던 것들은 재미를 위해 각색된 것들도 있고, 옳고 그른 방법에 대해서는 적혀있지 않았을 거야.”

“언니 아까부터 이상한 말만 하고 있잖아요, 도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거예요?!”

부끄러움을 이겨내지 못한 질이 기어이 큰소리까지 내자 라피아는 곤란한 얼굴로 한숨까지 내쉬었어요.

거짓말을 했다고 화를 내지는 않으니 다행이지만요.

뭐 때문에 이렇게 질이 부끄러워하는지는 몰라도, 라피아는 질을 좋게 타일러 교육하고 싶은 생각이 가득한 것 같아요.

“하아…. 그래,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화장실에서 자위할 바에는 나한테 도와달라고 해. 올바른 방법을 알려줄 테니까.”

“자, 잣?! 콜록!? 크흡!”

이제는 말하다가 사례까지 들어선, 아주 숨이 넘어가겠어요.

그래도 라피아 몰래 하고 있는걸 단번에 들켰으니 기침 정도는 할만하죠.

오히려 도망치지 않는 질을 칭찬해야 될 거예요.

“아니, 그…. 부끄러워 할만한 거 아니니까 너무 그러지 말고. 나까지 부끄러워지잖아.”

“…언제부터예요.”

아예 고개를 숙인 채로 대화를 이어가는 질의 모습에도 라피아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요.

부끄러워하는데 ‘얼굴 보고 이야기해!’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대로 다시 대화를 이어가야만 했을 거예요.

“사실 네가 여기 머무를 때부터 눈치채곤 있었는데, 눈감아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나도 참기 힘들기도 하고….”

“역시 언니가 참기 힘든 게 본심이죠?! 어떻게 하지이…. 나 이제 시집 못 가아….”

거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는 말이네요.

그 사실에는 별로 놀라지 않는 걸 보면 했다는 걸 들켰다는 게 질에게 중요한 사실인가 봐요.

그렇지만 질의 말대로 라피아가 조금이나마 흑심이 있어서 이번 기회에 말을 꺼낸 게 아닐까요.

“풉, 시집…. 으흠! 여하튼 그런 게 아니라, 너도 올바른 방법을 알아야 할 거 아니야. 계속 세게 하면 나중에는 큰 자극이 아니면 작은 자극에는 만족 못 할 수도 있으니까 그래.”

“언니 진짜…. 진짜 부끄러운데, 이게 부끄러울 일이 아니라구요…? 이렇게 수치스러울 바에 죽어버리는 게 더 나을 거 같다구요!”

“올바른 지식을 갖기 위해서니까, 너무 그러지 마. 그리고 혹시 해서 물어보는 거지만, 샤워기로만 해본 거지? 다른 건 아직 사용해본 적 없지?”

아무리 올바른 성교육을 위해서라지만 지금만큼은 서로가 부끄러울 상황이네요.

방법에 관해 물어보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요.

이제는 아예 웅크린 채로 엎드려서는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는데 귀까지 빨개져 있네요.

“아으으! 어, 없어요오…. 그렇지만 갑자기 왜…”

“얼마 전에 장난식으로 괴롭히다가 허벅지 쪽에 있는 네 성감대를 건드린 일이라거나…. 엉뚱한 스위치를 건드려버린 내 탓도 있으니까. 이번 기회에 제대로 알려주겠다는 거야. 너 최근에 화장실에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나더라고.”

성감대까지 나왔으면, 나올 거 거의 다 나왔어요.

자위, 샤워기로만, 허벅지 성감대…. 절정만 나오면 나올 거 다 나오는 거예요.

“아우으…. 적어도, 적어도 다음에 해요! 굳이 지금 할 필요는…!”

부끄러움에 참지 못한 질은 다음에 하자며 도망치는 것을 선택했어요.

의외인 점이 있었다면 라피아가 바로 허락해버렸다는 것이겠죠.

하지만 아예 양보할 생각은 없는지 시간제한을 걸어놨어요.

“알았어. 단! 시간은 다음번의 흡혈이 다가올 때까지야.”

“너무 짧지 않아요? 며칠 안 남았는데에….”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까 아무리 질이 어리광을 부려도 라피아는 뜻을 굽히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라피아의 너무 과한 걱정이지 않을까 해요.

질은 충분히 생각할 머리가 있는 아이니까요.

“이게 다 너의 올바른 교육을 위해서야, 지금은 마녀도 없잖아.”

“알겠어요….”

“착하네. 근데 내가 너 화장실에 갔을 때 책 여러 가지를 읽어봤거든.”

“그 전에 저 머리부터 말리고 와도 될까요?”

“어어, 물론이지. 미안 너무 오래 붙잡았네. 갔다 와.”

부끄러움 덕분인지 질이 머리를 말리는 데 걸린 시간은 조금 길어졌어요.

평소라면 금방 끝내고 나와선 라피아의 곁에 가서 안겼을 테니까요.

결국, 보다 못한 라피아가 먼저 다가가야 했어요.

“아직도 말리는 거야? 그렇게 부끄러웠어?”

“언니! 언니는 절 놀리는 게 그렇게 재밌어요?”

“네 반응이 조금 재밌어야지.”

하긴 누구라도 질을 한 번만이라도 부끄럽게 만들어본 적이 있다면, 그 모습을 잊지 못할 거에요.

성숙하면서도 약간은 앳된 티가 나는 외관으로 행동은 10살에 가깝도록 행동하니 쉽게 잊을 수가 없죠.

반대로 그 반응을 즐기기 위해 라피아처럼 몇 번이고 놀린다면 모를까, 적어도 가만히 두진 않을 거예요.

“언니는 저를 너무 좋아해서 탈이에요. 그만큼 절 좋아하고 있다는 거겠지만.”

“가끔 네가 무슨 책을 읽는지 궁금해진단 말이야, 점점 뻔뻔해져.”

“그래서 제가 싫어져요?”

뻔뻔해진다는 말에 질은 장난기 어린 얼굴로 더 뻔뻔한 대답을 내놨어요.

그랬더니 벽에 기대고 서있던 라피아가 의자에 앉아있는 질의 뒤까지 와서 끌어안았죠.

“아니, 변해가는 너도 마음에 들어.”

“간지러워요.”

“응.”

질은 라피아의 머리카락 때문인지 고개를 약간 비틀면서도 이외의 별다른 저항은 하지 않았어요.

짧은 대답을 듣고 난 질은 더 가만히 라피아에게 안긴 채로 가만히 있었어요.

머리를 말리다 만 채였기에 꽤 축축할 텐데도 둘은 이 상태로 움직이질 않았죠.

“저 머리 마저 말리고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슬슬 머리를 말리려는 모습에 라피아는 안고 있던 팔을 풀어줬어요.

“그래, 오늘은 어디 안 가지?”

“오늘은 책만 읽으면서 공부할 예정이에요. 언니는요?”

라피아는 질의 머리가 헝클어질 정도로 세게 쓰다듬다가 그대로 손을 올린 채로 생각에 잠겼어요.

질은 라피아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그 손을 살그머니 잡고는 천천히 내려놓았죠.

“아, 미안. 오후에 약속이 있어서 잠깐 친구 좀 만나러 갔다 올 건데, 혼자 있기 싫다면 같이 가도 돼.”

“으응…. 마음 같아선 따라나서고 싶지만, 그런 장소까지 같이 한다면 언니가 불편할 것 같아요. 언니 친구분도 그렇고요.”

“너무 착하다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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