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 마녀가 없는 동안에 (3)
* * *
질이 라피아를 받아들이고 나서 다시 며칠의 시간이 흘렀어요.
처음의 2~3일간은 탈리안을 보지 못해 풀이 죽은 질을 어르고 달래느라 바쁜 라피아였지만, 그 뒤로도 흘러간 시간에 어울리지 않게, 라피아와 질의 사이는 좀처럼 진전될 것 같지가 않았어요.
일전에는 떨어지려고 해도 놓아주지 않았던 것을 떠올려보면 상당히 이상한 부분이에요.
질도 이를 모를 리가 없었어요.
분명히 그렇게 원하던 관계가 되었는데도 적극적으로 변하기는커녕 평소처럼 친한 언니 동생 사이로만 지내는 느낌만 받았으니까요.
때문에 궁금증을 참지 못한 질은 부엌에서 요리 중인 라피아 곁으로 가선 말을 걸었어요.
“언니 있잖아요, 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게 있어요.”
“응? 어떤 건데?”
칼질 도중이라 얼굴을 마주 보지 않고 대답하는 라피아에요.
도마 위에 올려진 재료를 보아하니 아직도 생생한 피가 흐르는 고기 같았지만, 질은 한번 쓱 보더니 관심을 꺼버렸어요.
어떤 재료라고 해도 라피아가 못 먹을 음식을 내주지는 않을 테니까요.
“언니는 저랑 이런 관계가 되면 하고 싶은 일들이 있었을 것 같은데, 왜 안 하는 거예요?”
질이 말하는 도중에 라피아의 탁, 탁, 탁하며 소리를 내던 칼질이 멈춰버렸어요.
그 상태로 움직일 생각을 않던 라피아는 슬며시 칼을 내려놓고는, 손을 씻고 질의 양어깨에 손을 올려 얼굴을 마주했죠.
“…, …질? 요리 다 해가니까 테이블에 책 좀 치워줄래?”
“혹시 어른들의 책에 나오는 그런 것들이에요…?”
그렇지만 질은 대답해주기 전까지는 절대 움직이지 않겠다는 것처럼 더 굳은 눈빛으로 질문해왔어요.
게다가 질이 꺼낸 다음 말이 ‘어른들’의 책이라는 것이라서 그런지, 라피아는 당황해서 뒷걸음질 치다 싱크대에 허리를 살짝 부딪치기까지 했죠.
“아니, 아니야! 나는 그런! 아니야!”
“어쩐지 언니가 절 보는 눈빛이 항상 곤란해 보였는데, 그래서였구나….”
“아니라니까!? 마녀는 대체 뭘 했길래 그동안 네가 그런 책을 읽게 놔둔 거야?!”
“집에 도서관이 작게 있으니까…. 방에 가져와서 읽다 보면….”
“어쨌든 아니니까! 얼른 가서 정리부터 해줘!”
본인이 했던 말을 빌려오자면, 탈리안도 사람이니까 도서관에 어른들의 책을 가져다 두는 건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어쩌다 한 번씩 읽고 싶어질 수도 있는 거죠.
그걸 질이 몰래 읽게 놔뒀다는 것이 실수였지만요.
어찌 됐든 라피아는 어렵게 부엌에서 어렵게 질을 쫓아냈지만, 그 궁금증은 저녁 식사가 시작되었는데도 사그라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언니, 왜 저랑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거에요?”
“너도 참 끈질기다. 그게 그렇게 궁금해?”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지는 질문 공세에 라피아는 포크로 접시에 올려진 고기만 콕콕 찔렀어요.
그러다 먹는 거로 장난치는 게 아니라며 질에게 잔소리를 들었지만요.
결국, 계속 졸라대는 질에게 모른 척만 할 수는 없던 건지 조심스레 포크를 내려놓고는 뒤에 있던 침대에 등을 기대며 대답해주었죠.
“뭐, 네가 싫어서 그렇다는 건 당연히 아니고…. 양심이 좀 아파져 와서.”
“양심이?”
“그럴 수밖에 없잖아! 좋아하게 됐다고는 하지만 너 아직 10살인걸? 외관에 속아서 넘어간 느낌이라니까….”
라피아의 말은 지극히 타당했어요.
이건 라피아가 질을 좋아하게 된 이유부터 알아봐야 하지만, 질의 외관부터 살펴보면 이미 다 큰 어른과 비교해도 다를 게 없거든요.
키만 좀 작을 뿐이지, 지금의 질을 어딜 봐서 10살짜리 어린 아이라고 생각하겠어요?
“그러니까 언니는 지금, 제 나이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는 거네요?”
“…응.”
라피아는 확인차 되묻는 질에게 힘없이 대답하고는 작게 한숨을 흘렸어요.
“…제가 혼자 있는 게 무섭다고 할 때는 멋지게 꼬셔놓고, 이제 와서?”
하지만 라피아의 이런 태도가 질에게는 마음에 안 들 수밖에 없었어요.
탈리안에게서 받던 만큼 주겠다고 하기에 라피아의 제안을 받아들인 거였으니까요.
그런데 고작 나이가 신경 쓰인다고 망설이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실망이 클 수밖에 없겠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죄짓는 기분이라니까아?”
“그럼 제가 먼저 다가가면, 그러면, 죄를 짓는듯한 기분이 들지 않을 수 있는 거죠?”
질은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하고는 고개를 기울여서 지긋이 라피아를 쳐다봤어요.
며칠간이라지만 그동안 아무것도 해오지 않았으니 얼마나 답답했겠어요.
다가오기 힘들면 자신이 먼저 다가가겠다고 말할 정도라면요.
“뭐? 네가? 뭐 어떻게 하려고?! 내가 뭘 원할 줄 알고?!”
“제 몸 아니에요?”
“아! 진짜! 아니라니까! 내가 네 몸을 원하고 있었으면 진짜, 진짜로! 나 진작에 병사들한테 끌려갔을지도 몰라!”
질이 오해를 해도 단단히 해버린 데다, 생각을 고칠 마음도 전혀 없어 보여요.
그러면서 한입 크기로 잘라놓은 고기를 입에 넣는 걸 보니 여유까지 있는 것 같네요.
“진짜…. 아니에요?”
“난 그냥 너랑 같이, 네 옆에 있는 게 좋을 뿐이야. 그냥 그런 일상을 지내고 싶은 거지! 너도 마녀랑 있을 때 그러고 싶었을 거 아냐?”
“하지만 언니, 그렇다기에는 저를 보는 시선이….”
질이 무슨 말을 하든 라피아는 곤란할 수밖에 없었어요.
뱀파이어 중에서는 어린 편에 속하는 라피아라고 해도 나이가 10살이 넘게 차이가 나는걸요.
아무리 좋아하는 사이여도 질의 나이에 대해 조금만이라도 생각해버리면 지금처럼 돼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니래도?”
“그러고 보니까 오늘 흡혈하는 날 아니었어요? 지금 할래요?”
“지금은 밥부터 먹고….”
“…칫, 알겠어요.”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질이 계속해서 놀려대는 탓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라피아였어요.
오죽하면 그렇게 좋아하는 흡혈마저 식사가 먼저라고 뒤로 미루는 것 좀 보세요.
게다가 흡혈이라고 하면, 당연히 라피아가 분위기를 주도하는 상황이 자연스레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지금은 그마저 신경을 쓰지 못할 정도의 상황이라는 거에요.
이는 며칠 전부터 계속 고민해왔다는 증거이기도 하겠죠.
그래도 다행인 것이 있다면 질은 정도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었어요.
정도를 모르고 끝없이 놀린다면 아무리 자기를 좋아해 주는 사람이라도 화낸다는 걸 알고 있는 거죠.
식사 시간이 끝나고 정리까지 마친 뒤에 다가올 흡혈 시간에 복수를 당할 걸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말이에요.
모든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누워있던 질은 목으로 다가오던 라피아의 입을 손바닥으로 밀어냈어요.
“언니 양치는 확실히 한 거죠?”
“너 내 입한테 너무한 거 아니야? 오늘따라 왜 이렇게 예민해?”
덕분에 손을 치우며 질의 몸에서 입을 떼어놔야만 했어요.
식사 시간에도 그랬지만 온종일 라피아를 박박 긁네요.
아무리 라피아라도 몇 번이고 그러면 짜증이 날 만하죠.
“…지난 며칠간 언니가 저를 대했던 모습을 떠올려봐요. 옆에 있어 달라는 말이 정말 옆에 있어 달라는 뜻이 아니잖아요.”
뭐, 라피아가 짜증이 나 봤자 질에게 정당한 이유가 있었을 때라면 별일 아니게 되는 것이지만요.
먼저 탈리안의 빈자리를 대신해 채워주겠다고 했던 라피아였는데 그러지 못했으니까요.
잘잘못을 따지자면 라피아가 훨씬 더 잘못했으니 입을 틀어막혀도 할 말이 없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는 알지만, 내 입장도 좀 생각해줘.”
“후회된다는 말이에요?”
“후회될 리가 있겠어? 지금까짓?!”
대답을 이어가던 라피아는 질이 누워있던 자리에 눕혀졌어요.
후회될 리 없다는 말, 그 말만 들었으면 되었다는 것처럼 질이 자세를 역전시켰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평소에 라피아가 자신에게 해주는 것처럼, 귀에 대고 속삭였죠.
“그럼 왜 저를 좋아하게 됐는지 알려줘요.”
“좋아하는데 별다른 이유가 필요한 건 아니야. 특히 내 경우는 별거 아닌 이유이기도 하고….”
“그러니까 그걸 말해달라구요. 왜 이렇게 답답하게 굴어요?”
은근히 답답한 모습을 보여주는 라피아 때문에 짜증이 난 것 같아요.
솔직히 이 며칠간 그 정도로 답답하게 했으면 질에게 한 소리 들을만하죠.
더 답답하게 했다가는 질에게 미움을 살지도 모르니까요.
“…처음으로 흡혈했던 날 기억해? 제리랑 시멜리인지 뭔지랑 의뢰하러 갔었던 날 말이야.”
“기억나요, 그때 언니 삐져서 캠프 밖으로 뛰쳐나갔잖아요.”
“삐졌다니, …어쨌든, 그때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서 바닥에 주저앉았던 일이 있었잖아.”
“설마….”
뭔가 짚이는 게 있던 질은 말을 멈췄어요.
검지만 펴서 자신의 입술에 가져다 댄 라피아를 봤기 때문이에요.
말해줄 테니까, 조용히 들어보라는 의미니까요.
“나보다 어린 네가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노력해서 내 기분을 풀어주려는데, 그때부터 약간 호감이 생겼다고 해야 하나? 그 뒤로는 네가 좀 귀엽게 보여야지. 만날 때마다 자꾸 호감은 가는데, 정작 넌 마녀를 좋아했으니 질투도 나니까…. 그렇다 보니 호감이 발전해서 좋아하게 된 거야. 옆에 두고 싶고…. 그랬다는 거지 뭐.”
정말 별거 아닌 이유인데도 질은 라피아를 보지 못하고 그 위에 엎어져 얼굴을 파묻고선 얼굴을 들지 못했어요.
탈리안이야 적당한 이유가 있었기에 ‘그래서 좋아하는구나.’라며 이해가 가능했다면….
라피아는 ‘네가 이랬었지만, 그건 계기였을 뿐 그냥 좋아!’라고 한 것과 같으니까요.
똑같은 반응일 수가 없는 거예요.
“…막상 듣게 되니까 부끄럽네요.”
“네가 말해달라고 한 거잖아?”
“그건 그렇지만…. 몰라요. 저 가만히 있을 거니까 피 빠는 건 언니가 알아서 해요.”
질은 얼굴을 라피아의 가슴팍에 비비적거리더니 이내 포기한 듯 몸에 힘을 뺐어요.
기분이야 좋겠지만 부끄러운 건 별개니까요.
“정말 알아서 하게 둬도 되겠어? 큰일 날걸? 저녁 식사 전부터 놀려대던 걸 전부 돌려줄 텐데?”
“…괜찮아요, 정말 언니가 그럴 생각이었다면 미리 저한테 물어봤을 거잖아요.”
“다 알고 있네, 건방지기는…. 그래도 오늘만큼은 실컷 놀림당한걸 돌려줄 거거든.”
“한 번만 봐주세요…. 저 맨날 당하고 사는 건 싫다구우으…. 제가 장난감이에, 흐아?!”
라피아는 질의 볼을 잡아당기다가 끌어안은 그 상태로 몸을 일으켜 세웠어요.
라피아는 침대 위에 앉아있고, 질은 라피아와 마주 보며 그 위에 앉아있게 됐죠.
당하고 사는 게 싫다던 질이었지만, 안겨있는 듯한 모양새를 보니 오늘도 이기는 건 물 건너간 것 같아요.
애초에 피를 빨리는 역할이니 이길 수가 없지만요.
“네가 말했잖아, 옆에 있어 달라고 한 말이 말 그대로의 의미가 아니었다고. 네가 유혹한 거니까, 나도 꽤 참고 있었다는 걸 알려줄게.”
“…후으, 알겠어요.”
“자세 편하게 잡아, 다리 불편하잖아.”
“…다 됐, 흐읏!”
자세를 정돈하자마자 라피아의 이빨이 예고도 없이 질의 하얀 목을 찔렀어요.
고통에 찬 신음이 잠깐 흘러나왔지만 익숙하다는 듯이 라피아를 꼭 안아 참는 모습을 보여주었죠.
“항상 처음은, 아파서, 읏…. 진짜 적응이 안 되네요….”
라피아는 손가락으로 질의 등을 톡, 톡하고 두 번 두드렸어요.
“힘 빼라니, 말이 되는…. 소릴…! 하아, 하으….”
미리 정해놓은 수신호였는지 등을 두드린 것만으로도 질은 그에 대한 답을 내놓았어요.
하지만 이어지는 손길에 질은 당황해서 소리칠 수밖에 없었어요.
“하…. 으읏, 평소랑, 다르잖아요! 왜, 시작부터 이렇게…. 히익?! 어, 어딜 만지는 거예요!?”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됐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었는데. 안돼?”
흡혈 도중 허벅지부터 엉덩이까지 손을 천천히 움직였는데도 뻔뻔하게 말하는 것 좀 보세요.
이러니 질이 소리치지 않을 수가 없을 거예요.
가만히 놔뒀다면 어디까지 갔을지 모를 일이잖아요.
“안되는 게 당연하잖아요!? 너무 빠르다고 해야 할까…. 그런 건 시간이 좀 더 지난 뒤에….”
“질, 애늙은이 같아. 요즘 누가 그런….”
책으로 모든 것을 배워왔기에 그런지, 질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 조금은 늙어 보이는….
아니, 돌려 말해서 뭐 하겠어요? 라피아의 말처럼 애늙은이 같은 말을 했어요.
그 말을 듣고는 부끄러운 걸 아는지 항상 그렇듯, 얼굴을 붉게 물들였죠.
“윽…. 언니가 이상한 거예요! 갑자기, 갑자기 그렇게 만지는데 안 놀랄 수 있겠어요?!”
“아아, 알았어, 알았어! 그럼 다른 건 되는 거지?”
“다른 거?”
“여기.”
소리치는 질을 달래며 라피아가 엄지로 가리킨 곳은 입술이었어요.
만지는 게 안 되는데 키스라니, 아까까지 나이가 신경 쓰인다며 질과의 스킨십을 망설이던 라피아는 어디 갔는지 모르겠네요.
어쩌면, 질이 그동안의 불만을 말했기에 일부러 이러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어요.
“읏?! 이, 이건…. 그러니까…. 그걸, 말하는 거죠? …허락, 할게요.”
라피아가 입술을 가리킨 그 행동이 불만을 잠재우는 것이기도 하니, 당연히 질은 거부할 리가 없었어요.
무엇보다 흡혈로 인해서 없던 흥분까지 생겨났을 테니까요.
호기심이 일었을 거예요.
기대감이 커졌을 거예요.
처음은 탈리안과 하고 싶다고 속으로 간직해둔 계획이 있었겠지만, 탈리안이 자리를 비운 지금이라면 못할 것도 없겠죠.
“흐흥~ 그래야지. 그래도 싫다면 싫다고 말해, 네가 싫은 건 하지 않을 거니까.”
“뭐라 말할지 알면서 그러는 건 너무해요….”
“내가 이래서 널 좋아할 수밖에 없어.”
“그게 무…. 으믓, 응….”
질은 일방적으로 당하고는 있지만 싫어하는 기색 없이, 어설프더라도 라피아의 장단에 맞췄어요.
질은 시작부터 점점 달아오르던 몸 때문에 진작에 숨은 가빠져 있었어요.
그런데 여기에 질이 처음이라는 것에 대한 배려라는 것이 일절 없는 라피아 때문에 호흡이 제대로 되는지조차 의심이 갈 정도였죠.
가쁜 숨에 정신이 몽롱해지는 순간에도 라피아를 껴안은 그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가 등에 상처가 날 것 같았어요.
어쩌다 한번 잠깐의 쉬는 시간을 준다고 하더라도 몇 초가 지나지 않았어요.
“…원래 이렇게, 길게 하는 거예요?”
“그럴 리가, 지금 네가 허락해준 게 이것밖에 없잖아.”
안은 상태로 하고 있던 게 영 불편했던지 자세를 바꿔 질을 침대에 눕혔어요.
하지만 계속 이어가려고 하자 질이 고개를 돌리며 거부했어요.
“언니, 그, 조금…. 피 맛이 느껴져서….”
“아, 아? 어, 그건 어쩔 수 없는데…. 정 불편하면 입이라도 헹구고 올까? 앞으로 나랑 하려면 자주 그럴 텐데 어쩌지.”
“그, 그래도! 자세 바꾸기 직전에는 피 맛이 많이 연해져서 괜찮았어요….”
질의 애매한 대답에 라피아가 입꼬리를 올리고 소리 없이 웃기 시작했어요.
그리곤 평소처럼 놀리는 듯한, 안 놀리는 듯한 경계를 지키며 분위기를 헤쳤죠.
“흐응, 솔직하게 말해. 잠깐 쉴 시간이 필요했던 거 아니야? 아니면….”
“…아, 아니면 뭐요! 언니가 뭘 생각했든지 그건 아닌데요?!”
“그래? 그럼 계속해도 되는 거지?”
“아, 우으…. 다음에 해요…. 오늘은 마저 흡혈하고 끝내는 걸로….”
그만하자는 말에 아쉬운 티를 내면서도 의외로 쉽게 떨어지는 라피아였어요.
흡혈을 마저 하자고 했지만, 오늘분은 충분히 받았다며 질과 함께 화장실로 향했죠.
그리고는 입가를 씻으면서 내일의 일정에 대해 말하는데, 라피아의 입에서 알마의 이름이 나왔어요.
“있잖아, 질. 그 알마라는 애는 조심하는 게 좋아.”
“어제도, 그저께도 괜찮았는데요?”
“말하는걸 잊고 있었는데 걔는 속으로 아직도 널 용서하지 못했더라고, 너 때문에 제르반인지 뭔지 하는 애를 잃었다면서.”
“그렇, 구나…. 알았어요.”
알마에 대해서는 모든 고민이 해결됐다고 생각하고 있었겠지만, 라피아와 알마 사이에 오간 대화를 듣지 못했으니 그랬겠죠.
정신을 차리고 며칠간 다시 알마와 함께 의뢰에 같이 나가면서 별일이 없었기에 괜찮았을 거라 생각했을 거예요.
하지만 질이 알마에 대해 고민에 빠지기도 전에 라피아가 방해해왔어요.
“그리고 이제 착한 어린이는 잘 시간이야!”
“으아?! 뭐, 뭐 하는 거예요!?”
“뭐하기는? 내가 친히 안아 들고 침대까지 모셔다드리는 거지. 약속 잊었어? 이제는 따로 자는 게 아니라 한 침대에서 같이 자기로 했잖아.”
너무나도 가볍고 쉽게 질을 들어 올리고는 화장실에서 빠져나와 침대로 데려가려니 꽤 놀랐겠죠.
본인 말로는 ‘안아 들고’라고 했지만, 남이 보기에는 공주님을 안듯이 안고 있으니까요.
안 그래도 방금까지 질의 기준에서 부끄러운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이렇게 또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게 된다면 부끄럽기도 할 거예요.
“그, 그건 알아요! 그래도 이런 방식으로 안아주는 건 이상하잖아요?! 걸어갈 수 있으니까 놔주세요!”
“말은 그렇게 해도 몸은 가만있는 걸 보니까, 몸이 더 솔직하네.”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이건 떨어질까 봐…!”
“네에~ 그러시겠죠~”
그래도 탈리안이 없는 자리를 라피아가 나름대로 잘 채워주는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지금처럼만 시간이 흘러간다면 최악의 경우로 탈리안이 돌아오지 않더라도, 질이 잘 지낼 수 있게 되겠죠.
별다른 사건사고나 문제만 없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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