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79화 (79/189)

〈 79화 〉 마녀가 없는 동안에 (2)

* * *

질이 깨어난 건 아침에 해가 뜨고 난 뒤였어요.

라피아의 방에 건너왔을 때가 오후 6시쯤이었으니, 꽤 오래 잤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아니면 일어나고도 일어나지 않은 척을 했을 수도 있고요.

“일어났어?”

“네…. 알마, 씨는요?”

어제 곁에 있어 달라고 했던 말에도 매정하게 자리를 비웠던 라피아를 보고도 놀란 기색이 하나도 없네요.

그러곤 바로 알마는 어디로 갔는지 찾는 질이에요.

하지만 일어나자마자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찾는다면 좋아할 사람이 어딨겠어요.

“뭐야, 밤새 옆에 있어 줬는데…. 이런 노력도 몰라주고 알마부터 찾아?”

“…제가 필요로 할 때는 없었잖아요.”

그래도 질이 이렇게 나오면 라피아는 할 말이 없죠.

덕분에 알마와 싸우고, 뺨까지 맞고, 울어야 했으니까요.

그걸 알아서 그런지 바로 사과를 하는 라피아에요.

“그건…. 미안해. 그래도 지금부턴 옆에 있어 줄 테니까 화 풀어.”

“저, 이제 어떻게 할까요. 방에서 짐 싸서 나갈까요? 언니도 언제 돌아오는지 모르는데…. 계속 여기 있는 건 민폐잖아요.”

>:(

지금의 질은 생각이라는걸 하지 않고 말을 하는 것 같았어요.

입에서 나오는 대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대로 한 번 더 생각하지 않고 바로바로 말하는 것 같았죠.

“민폐라니 그렇지 않아, 왜 말을 그렇게 해?”

“언니는 저를 좋아하는데 저는 안 받아주잖아요. 저 엄청 나쁜 애잖아요. 언니가 어떤 마음을 가졌는지 알면서 그동안 모르는 척하고….”

라피아한테 왜 이렇게 바보 같냐고 말하는 것 같네요.

호감을 느끼고는 있어도 받아주지 않는데 이렇게 잘해주고 있으니까요.

이런 걸 보면 사실, 라피아는 뱀파이어가 아니라 끝이 없는 사랑을 실천 중인 신적인 존재가 아닐까요?

“이제 와서 신경 쓰는 거야? 괜찮아, 네가 마녀를 좋아하는 거 알고 다가간 거니까. 내가 그 정도도 모를까 봐?”

“언니는 왜 이런, 못돼먹은 저한테 잘해주는 거예요?”

그러니 질이 의심을 갖는 거야 당연했어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가 이렇게 항상 괜찮다며, 좋아한다며 말해준 적이 있기나 했을까요.

물론 질의 부모님이나 탈리안을 제외하고요.

이유라도 알려준다면 질의 궁금증이 풀리겠지만, 당분간 라피아는 이유를 말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어요.

“마녀에게서 너를 빼앗고 싶을 정도로 좋아한다고 말하는 거로는 부족해? 당장 행동으로 보여줄까? 육체적으로.”

“아, 아니에요. 그렇다면…. 제가 조금 더 나빠도, 언니는 그대로 받아줄 거란 말이에요?”

아직도 라피아의 말을 믿기에는 어려움이 있는지 질은 다시 한번 물어봤어요.

자신이 라피아에게 더 모진 짓을 하더라도, 그래도 받아줄 것인지를요.

전혀 믿지 못하는 듯한 질의 모습에 라피아는 질을 상체만 일으켜 세워 안아주었어요.

그리곤 자신이 있다는 듯이 목소리를 높여 말했죠.

“당연하지, 게다가 지금은 마녀도 없으니까 그동안에 너를 완전히 내 거로 만들 기회도 있는 거잖아?”

“탈리안 언니는 죽지 않았을 거예요. 단지, 돌아오는 데 시간이 걸릴 뿐일 거예요…. 탈리안 언니가 돌아온다면, 저는…. 그땐 라피아 언니랑 있는 것보다 탈리안 언니랑 있는걸 더 좋아할 거에요. 이렇게 말해도 언니는 제가 좋아요?”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만큼, 질은 라피아의 마음을 시험하는 듯한 말을 늘어놨어요.

끝에는 다시 탈리안의 곁으로 돌아갈 거라면서요.

그럼에도 라피아는 질을 놔주지 않고 등을 토닥여주기까지 했어요.

“그땐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놓아줄게, 친구로 지내면 되는 거지 뭐.”

제일 어려운 말이기는 해요.

이성끼리도 아니고, 동성끼리 사귀는 것부터가 어려운 일이에요.

거기다가 헤어지는 것도 마음 편하게 바로 놓아주는 데다가, 헤어진 뒤에는 친구처럼 지낸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죠.

이는 질도 같은 생각이었어요.

“저는,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언니한테 미안해서 친구로 지낼 자신이 없어요….”

“걱정 마! 내가 누군데? 마녀가 없는 동안에 확실하게 널 내 거로 만들어 보일 테니까, 반드시.”

그래서 이번에는 보란 듯이 질과 잠깐 멀어진 뒤 얼굴을 가까이해서 마주 보는 자세로 진지하게 말해왔어요.

탈리안이 돌아와도, 절대 넘겨줄 생각이 없다고 말이에요.

“…지금 부끄러운 말을 하는 건 반칙 아니에요?”

애초에 질이 라피아에게 호감이 없던 건 아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라피아가 진심을 보인다면 부끄러워 할 수밖에요.

누구나가 그렇듯이, 낯간지러운 말을 들으면 이런 반응일 수밖에 없잖아요.

그것도 자신을 좋아하니까, 마음에 들도록 노력하겠다고 하니까요.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니었어요.

확답을 요구하면서도 재차 질을 부끄럽게 하는 말을 연속으로 들려주었죠.

“푸흐흐, 이제 대답만 해. 네가 옆에 있어 달라고만 한다면, 나는 네가 죽기 전까지…. 아니 네가 죽은 뒤에도 사랑해줄게.”

계속되는 애정 표현에 질은 시선을 피해 고개를 돌렸어요.

“…저는 누군가를 잃어버리는 게 싫어요. 더는 못 버틸 것 같아요. 언니는 제 옆에만 있어 줄 거예요? 제가 더 슬퍼하지 않게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거예요?”

“당연하지, 네 솔직한 본심을 말해.”

망설이는 모습의 질은 그동안 수없이 봐왔기 때문에 라피아는 슬슬 답답했을 거예요.

그래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라피아는 질을 그대로 침대에 넘어뜨려 눕히고선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을 재촉했어요.

눕혀지면서 머리카락이 약간 헝클어졌기에 라피아가 손수 정리해주었죠.

그 손길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던 질은 작게 대답하기 시작했어요.

“옆에 있어 주세요…. 아빠나 엄마, 동생…. 제르반 오빠…. 탈리안 언니가 그랬던 것처럼 절 두고 떠나지 말아 주세요….”

“물론이지, 언제든 네가 말만 한다면 네 옆에 있어 줄게.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너랑 같이 있을게.”

“미안해요…. 저는 정말…. 언니한테 이러면, 안 되는데, 그래도 버리지 말아 주세요…. 탈리안 언니가 아니라면 언니밖에 없어요….”

자신이 원하는 게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서도 붙잡을 수 있는 게 라피아밖에 없으니, 질의 선택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어요.

그걸 알기에, 라피아도 별말 없이 질을 받아주는 거예요.

오히려 마녀가 없는 지금이 아니라면 또 언제 질을 손에 넣을 기회가 언제 올 줄 알고 거절하겠어요.

씁쓸하지만, 받아줄 수밖에 없는 거예요.

항상 더 좋아하는 쪽이 지는 건 어느 세상이든 똑같으니까요.

“절대 어젯밤처럼 널 혼자 놔두지 않을게, 마녀…. 아니 탈리안이 일찍 돌아온다고 해도 너만 괜찮다면 절대로 손에서 놔주지 않을 거야.”

라피아는 미안해서 울기 시작한 질의 눈물을 닦아줬어요.

혼자 남는 건 두렵고 무서운 것이라고 각인이 박혀있으니까요.

이런 선택지밖에 남아있지 않으니까.

“정말 미안해요…. 대신 언니가 바라는 거라면…. 뭐든지 내줄게요.”

그 때문에 지금은 약간 질이 말실수를 한 것 같네요.

뭐든지 내어준다니, 10살 꼬마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닌 것 같은데요.

이것 봐요, 분위기를 잘 잡고 있던 라피아도 당황했잖아요.

“그, 있잖아…. 뭐든지라는 건 조금 위험하지 않을까?”

“언니가 원하는 거라면 제 피라거나…. 제가 언니를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뭐? 혼자 화장실에 숨어서 하는 건 잘만 하더니…. 엉뚱한 데서 순해 빠졌네, 큭큭….”

라피아의 말에 곰곰이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던 질은 몇 초가 지나서야 라피아에게 부끄러운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얼굴을 붉게 물들였어요.

“어, 언니는! 저랑 그런걸 하고 싶은 거예요?! 아니 근데 언니는 어떻게 제가 혼자 한걸 알고 있는 거예요?!”

“푸흡, 푸흐흐! 아하핫, 하아…. 나중을 기대해.”

“말도 안 해주고…. 그래도 진짜, 진짜 하려는 거구나…. 어떻게….”

질은 자신을 실컷 비웃는 라피아의 모습에도 부끄러워서 화내는 것도 하지 못하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렸어요.

하긴 어린 질에게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니까요.

당연히 부끄러움도 있겠지만, 호기심도 있어서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거겠죠.

“어쨌든 질, 약속할게. 탈리안이 돌아올 때까지 너를 내 거로 만들어 보이겠다고. 절대로 혼자 두지 않겠다고. 약속한 거니까, 절대 어기지 않을게.”

“고마워요, 저, 그러니까…. 라피아 언니, 사, 사랑…. 해요.”

재차 약속을 다짐하는 라피아에게 뜸을 들이며 힘겹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질이었어요.

질은 지금의 자신이 라피아에게 보답으로 줄 만한 것이 사랑한다는 말밖에 없었을 거예요.

그렇기에 부끄러움을 참으며 머뭇거리면서도 힘을 내서 한 말이었겠지만, 라피아에게는 상당히 큰 효과가 있었죠.

덕분에 라피아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도 손 틈 사이로 질을 내려다보면서 한껏 숨을 들이마시기도 하며, 한숨을 푹푹 쉬기도 했어요.

“아…. 쓰읍…. 후우….”

“왜, 왜 그래요?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요? 하지 말까요…? 아니면 정말 언니가 원하는 게 제 피랑 몸이라면 지금 줄 수도…!”

“아, 아니야! 마음에 들어, 들어서 문제지….”

“아, 그럼 다행이구요…. 근데 마음에 들면 왜 그래요?”

아마, 질은 끝까지 라피아가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절대로 모를 거예요.

알게 되는 날이 온다면 순수했던 질이 사라지고 난 뒤겠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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