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마녀가 없는 동안에 (1)
* * *
“뭐, 뭐야?”
갑자기 쳐들어온 불청객에 서 있던 라피아는 화들짝 놀라 침대에 걸터앉은 모양새가 되었어요.
질은 우스운 모습으로 넘어진 라피아를 신경 쓰지도 않고 그 품으로 달려들었어요.
얼떨결에 질을 안고 침대에 눕게 되어버린 라피아는 한 사람이 더 있다는 걸 눈치채고 그쪽을 바라봤어요.
“어, 이, 이게 무슨 상황인지 나한테 설명 좀 해줄래…? 너는 누구고?”
“아, 안녕하세요. 벨루아 알마라고 해요.”
라피아는 질의 등을 토닥이며 알마와 통성명을 했어요.
무슨 일인지 자세한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라피아의 표정은 안 좋아지기만 했죠.
“마녀가 그런 편지를 남겼다고….”
“저, 어떻게 해야 해요…?”
“마녀가 죽은 건 아니잖아, 왜 그렇게 울상이야.”
“그렇지만! 편지 내용에는…!”
시간이 지나도 자신이 돌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죽을 수도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에요.
질을 그렇게나 아끼는 탈리안이 일부러 돌아오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있다면 피치 못할 사정이 있거나, 탈리안이 임무에 실패해 죽었을 경우밖에 없으니까요.
“진정해, 진정하고…. 알마, 미안하지만 질을 잠깐 부탁해도 될까?”
“저야 괜찮지만, 어디 가시려고요?”
“리니스에 불온한 움직임이 있다면 아버지한테 보고해야 해. 리니아 가문은 크롬웰 가문의 정적이니까.”
입양되긴 했지만, 라피아도 귀족이었죠.
게다가 갈 곳 없는 자신을 받아준 사람이라면 그 은혜를 갚아야 하는 것도 맞아요.
질이 지금 제대로 된 사고가 불가능한 상태에 놓여있더라도, 옆에 알마가 있으니 잠깐 자리를 비우는 정도라면 괜찮은 거겠죠.
하지만 질은 그러길 원하지 않았어요.
자신을 좋아하는 라피아가 있어서 의지하러 왔는데 바로 자기 일을 하러 가겠다니, 당연하겠죠.
“나중에 가면 안 돼요? 지금 언니마저 옆에 없다면, 저는…!”
다만 그 부탁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애절하고 처절해 보였기에 라피아는 방을 나서려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안아주고 몇 번이나 괜찮다며, 안심하라고 속삭이듯 위로해준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나는 게 가능했죠.
그럼에도 질은 라피아의 옷소매를 잡고 쉽게 놔주지 않았어요.
결국, 라피아가 억지로 손을 떼어놔야 했어요.
“오래 안 걸리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알마.”
“네?”
“…질한테 열쇠를 넘겨줘도 되지만, 사용하지는 못하게 해줘. 한눈팔면 어디로 갈지 몰라.”
“알았어요.”
라피아가 걱정하는 것은 가장 최악의 경우로 질이 탈리안을 찾기 위해 리니스의 지하도시로 향하는 것이겠죠.
탈리안이 어디에 향했는지 아예 모르고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질은 이전에 발자르에게서 탈리안이 지하도시에 향했다는 것을 들었었어요.
이 사실을 라피아는 모르겠지만 만일이라는 일이 있을 테니까요.
결과적으로 라피아의 걱정은 틀리지 않았어요.
“자.”
라피아가 나가자마자, 알마는 질에게 다가가 잊고 있던 열쇠를 건네주었어요.
조용히 받아든 질은 한동안 손에 놓인 열쇠만 뚫어져라 쳐다봤죠.
알마가 보기에 질은 언제든 이 방을 빠져나가 탈리안을 찾으러 갈 것처럼 보였어요.
“미리 말해두는데, 라피아 씨도 그랬지만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은 하지 마. 특히 선생님을 찾으러 가는 건 더 하지 말고, 그건 죽으러 가는 거랑 똑같으니까.”
그래서 미리 경고해둘 겸 질에게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말라고 했지만, 질은 고개를 삐딱하게 들고 알마를 쳐다봤어요.
이때 질의 눈은 훈련장에서 봤던 알마의 눈보다 더 공허해 보였죠.
“…언니는 저를 미워하고 있으면서, 왜 못 가게 막는 거예요? 가서 죽는다고 해도 신경 쓰지도 않을 거면서….”
“나랑 한 약속은 어떻게 할 건데? 사람들을 돕겠다면서, 다 거짓말이었어?”
“탈리안 언니가 없는데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질에게 세상의 전부는 새로 생긴 가족인 탈리안이라고 봐도 될 거예요.
그런데 세상을 잃어버렸다면 다른 사람들을 구한들 그게 무슨 소용이겠어요.
아직 탈리안이 죽었다고 확정이 난 것은 아니지만, 메시지를 보면 상당히 위험한 상태인 것은 확실했어요.
이러나저러나 탈리안이 자리를 비운 기간만 하더라도 벌써 2주가 넘어버렸고요.
“선생님이 이런 널 보면 참 잘한다고 하겠다.”
“언니가 뭘 안다고 그래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질이 억울해할 만해요.
어렵게 얻은 새로운 가족을 또다시 빼앗기게 생겼는데, 이성도 붙잡지 못한 채로 화를 내는 게 당연하죠.
마을도 잃어버리고, 가족까지 잃어버린 트라우마에서 아직 다 헤어나온 것도 아닐 거에요.
그러기에는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했죠.
“선생님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은지 상상이라도 해보는 건 어때? 너처럼 이성을 잃고 죽으러 갈 것 같아?”
알마는 이런 질의 이성을 되찾아주기 위해 자신이 생각했던 것과 비슷한 방법으로 말을 건넸지만….
상황도 다르고, 나이도 다르니 먹힐 리가 없었어요.
애초에 질은 알마가 아니니까요.
“그러니까 찾으러 가겠다고 하잖아요!”
“네 실력으로 가봤자 그냥 개죽음이라고 말하고 있잖아!”
남은 길은 서로가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일만 남아있었죠.
그래도 병원에서처럼 알마가 분을 못 이기고 먼저 덤벼들지는 않았어요.
애초에 장소가 라피아의 방이다 보니 치고받고 싸우는 건 민폐인걸 알고 있던 거에요.
질은 아닌 것 같았지만요.
“왜 자기 생각만 강요하는 건데요!? 나보고 도대체 뭘 어쩌라는 거야!”
“닥치고 가만히 있으라고! 그게 그렇게 하기 힘든…! 으픕?! 너, 너 이 꼬맹이가!!”
화를 내며 베개를 집어 던졌거든요.
평소에 잘만 쓰던 존댓말도 하지 않고 반말로 바뀌어버려 소리치는 걸 보면, 질의 상태가 얼마나 안 좋은지 알 수 있었어요.
베개를 치우고 화를 내려던 알마는 이어서 날아오는 또 다른 베개에 몸을 비틀어 피했어요.
“맨날, 맨날 나만!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데! 이럴 때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야 돼?! 더 잃기 싫다고!!”
“이, 젠장…! 그만하지 못해?!”
주변에 집어 던질 베개와 쿠션이 사라지자마자 질은 이제는 작은 탁자에 놓인 물건을 집어 들었어요.
작은 향수부터 박쥐 인형, 서랍에 들어있던 잡동사니까지 손에 잡히는 모든 걸 던져버리기 시작했죠.
알마가 맞든, 맞지 않든 말이에요.
방은 이미 라피아가 돌아오면 뒷목 잡고 쓰러질 수준으로 엉망이 되어 있었어요.
알마에게 맡기고 간 라피아의 선택은 좋지 못했네요.
“그만, 하라고오!!”
“이거, 놔아…! 앗?!”
결국, 천천히 다가오던 알마에게 양손을 구속당해 그대로 바닥에 넘어뜨려지는 질이었어요.
넘어져서도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는 질의 모습에 알마는 손을 높이 들어 올렸어요.
그리고는 강하게, 질의 뺨을 때렸죠.
방 안에 ‘짝!’ 소리가 울려 퍼지도록.
질은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강하게 맞은 것 같았어요.
몇 초간 자신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았죠.
뺨을 맞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천천히 눈물이 고이더니 그대로 펑펑 울기 시작했어요.
“…나도, 나도오! …내가 약한 거, 알고 있단 말이야아! 왜 나만, 나마안…. 나만 가지고 그래!! 가족도! 마을도! 제르반 오빠도! 이제는 탈리안 언니까지!!”
저항을 그만두고 신세 한탄을 하는 모습을 보게 되자 알마는 질의 위에서 내려와 한숨을 쉬었어요.
새우처럼 등을 구부려서 옆으로 누워 울기 시작하는 질이 퍽 안쓰럽게 보였을 거예요.
위로하는 방법을 모르는 건지, 위로할 생각이 없는 건지, 알마는 그저 옆에 앉아서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죠.
이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을 깨준 것은 시간이 지나 돌아온 라피아였어요.
“방이 왜 이렇게…. 둘이 싸웠어?”
“…생각보다 충격이 큰 것 같더라고요.”
“고생했어, 바쁘지 않아? 가봐도 돼. 질을 돌봐준 건 나중에 보답할 테니까.”
“옆에서 봤으면 보답해주겠다고 말하지는 못할 텐데….”
그 말대로 질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지만, 뺨을 때렸으니 돌봤다고 보기에는 어폐가 있어요.
때문에 돌아갈 준비를 하면서도 씁쓸하게 웃어 보이는 알마였어요.
“뭐, 때리기라도 했어?”
“뺨 한 대 때리니까 서러웠는지 그대로 소리치면서 울다 지쳐 잠든 거예요.”
날카로운 라피아의 말에 알마는 흠칫거리면서도 거짓말을 하지 않았어요.
자신은 어쩔 수 없었다…. 라고 말하고 싶은 거겠죠.
아니면 단순히 때렸는데 뭐 어쩔 거냐며 뻔뻔하게 있는 것일 수도 있고요.
“옆 방에 다 울려 퍼졌겠네…. 그 정도는 봐줄게, 방 꼬라지를 보니까 그것도 쉽진 않았을 거 같으니까.”
“미궁에서 만났었을 때라면 달려들고 봤을 것 같은데, 지금은 안 그러니 의외네요.”
필요 이상으로 질을 감싸고 도는 라피아를 비꼬기라도 하는 듯이 말하는 알마에요.
비꼬거나 말거나, 라피아는 잠든 질을 침대에 눕히고선 분주히 움직이며 방을 청소하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마녀도 그렇고 약속한 것도 있었으니까 과보호를 했다고 말할 수밖에. 그리고…. 마녀는 질에게 전부야. 마녀가 사라진다면 질은 그대로 무너져버릴걸. 옆에서 봐온 게 있으니 그 정도는 알아. 오히려 뺨 한 대 때려서 잠재운 건 잘한 거지.”
“저에게는 제르반이 전부였어요. 지르니트를 돕다가 죽어버렸지만요. 자기만 소중한 걸 잃어버렸다는 듯이…!”
맞아요, 알마도 소중한 걸 잃어봤으니 질이 마지막 남은 가족을 잃을 수도 있다는 말은 그다지 효과가 없을 거예요.
반대로 알마의 화를 부추기는 꼴만 되었는걸요.
방을 나설 준비를 하다가도 돌아서며 소리치는 것도 그렇고, 목소리에 억울함이 가득 담겨있네요.
청소 중이던 라피아는 박쥐 인형을 집어 들고는 ‘이거 네가 던진 건 아니지?’라며 물어봤어요.
일순간 튀어나온 살의가 담긴 표정에 알마는 겁을 먹고 아니라 답했어요.
아니라는 대답에 바로 험한 표정을 풀고 제자리에 인형을 돌려놓는 라피아였죠.
“뭐 어쨌든…. 너한테 제르반이라는 애가 중요했나 본데, 하나만 물어볼게. 제르반이라는 애가 죽었을 때, 넌 바로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일어설 수 있었어? 아니잖아, 그런데 왜 질한테는 아무렇지 않기를 강요하는 거야?”
“…지르니트 때문이니까요! 지르니트만 아니었다면 나는 이런, 누군가를 잃는다는 감정을 몰라도 됐었으니까요! 겉으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어떻게 용서할 수가 있는데요!”
알마도 나름의 억울한 이유가 있기는 해요.
마기노에 의해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은 그 원인조차도 마기노에게 있고, 원망의 대상도 마기노로 좁혀져요.
어느 날 갑자기 알 수 없는 이유로 나타난 게 마기노이니까요.
하지만 알마의 경우, 제르반이 질을 돕다가 생겨버린 일이니 ‘질만 아니었다면’ 같은 말도 할 수 있게 되어버린 거예요.
질이 다른 날에 승급 시험을 치렀더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니까요.
“그래, 그렇게 원망이라도 하지 않으면 버티기 힘든 거겠지. 이해해.”
“당신이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알마는 라피아와의 신경전 끝에 방에서 나가버렸어요.
시종일관 차분히 방을 청소하던 라피아와는 달리 알마는 화만 잔뜩 나서 돌아갔네요.
그마저도 남들이 보기에는 도망치는 모양새처럼 되어버렸지만, 이 모습을 볼 사람이 어디 있다고요.
그렇죠? 뭐, 그런 알마는 내버려 두도록 해요.
라피아는 잠든 질을 쳐다봤어요.
곤히 자고 있어 조용한 숨소리만 들려오니 방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라곤 생각 못 할 모습이었죠.
라피아가 방을 치우기 전까지는 정말 개판이 따로 없었으니까요.
그래서 적당히 치웠는데도 더러워 보였다는 게, 얼마나 날뛴 건지 짐작이 되는 부분이에요.
게다가 한번 눈길이 질에게로 향한 라피아는 청소는 이미 뒷전이었어요.
한동안 조용히 질을 바라보던 라피아는 질의 볼을 한번 살짝 꼬집고선, 옆에 앉아 턱을 괴고 머리를 쓰다듬어줬어요.
혼자 두게 해서 일어난 일이 꽤 마음에 걸렸나 봐요.
질도 악몽을 꾸는 건지 표정이 꽤 좋지 않기도 했고요.
그렇게 아침까지 시간이 흘러갔어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