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벨루아 알마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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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고블린의 둥지에 간 이유는 정말 단순했어요. 토벌 의뢰가 내려와 있었으니까, 정말 그뿐인 이야기에요. 실라의 산맥 주변에 굴을 파고 정착한 고블린의 무리가 있으니 토벌해주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내용이었거든요.
그런데 20마리라는 작은 세력의 고블린들이라고는 해도, 혼자서 그 많은 수를 어떻게 상대하겠어요. 용사…. 후보생일 뿐인 제가요.”
제리는 이전에 그렇게 싫어하던 용사 후보생의 칭호를 자신의 입으로 말했어요.
라피아가 말할 때는 그렇게 듣기 싫어하며 화까지 냈을 정도였는데, 이러고 있는 걸 보니 다시 모험가나 학생, 더 나아가 용사로 일어서기는 무리일 것 같네요.
다시 일어선다면, 그야말로 용사로서의 첫걸음을 내딛는 일이 되겠지만 웬만해서는 불가능할 거예요.
“그래서, 실라의 모험가 길드에서 파티를 구했는데. 그게 화근이었던 거에요. 그 파티원들에게 배신당하고 버려질지 몰랐으니까.”
“역시, 말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네. 계속해서 말해줘.”
말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면, 살아남기 위해 제리를 버리고 도망쳤다던 파티원들의 말을 의미하는 거겠죠.
제리는 배신당했다, 파티원들은 살아남기 위해 버렸다.
알마는 이번 일을 단순히 포인트만 얻으려고 한 게 아닌가 봐요.
“…그렇지만 저는 모든 게 그들의 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지르니트도 알다시피, 라피아와 의견충돌이 잦았던 만큼 지금까지의 나는 상당히 제멋대로였으니까. 배신당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고밖에.”
“배신당할 빌미를 제공해준 것은 네가 멋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제리가 이번 일로 큰 상처를 입어서인지 상당히 객관적으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네요.
조금만 더 일찍 깨달았다면 정말로 용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이곳저곳 많이 더럽혀지고 상처 입은 몸으로서는 이젠 불가능한 일이겠지만요.
제대로 서는 것조차 불가능할 테니까요.
제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저 말을 이어갔어요.
“파티원들은 저를 포함해서 총 3명이었어요. 한 명은 딥 카미라즈라는 이름의 다크 엘프, 다른 한 명은 지니라 헤네벨이라는 이름의 드워프.”
“응, 그건 미리 전해 들었어. 정보에 틀린 건 없는 것 같아 다행이야.”
“헤네벨 씨는 별로 문제랄 게 없었어요, 문제가 된다면 딥 카미라즈. 저와 유독 의견충돌이 잦고 함정이 있어도 모른척하며 파티원을 위험에 빠트리는 짓을 했거든요.”
“왜 그런 짓을…?”
“둘이 가지고 있는 고가의 장비나 아이템을 빼앗기 위해서이거나, 아니면 그런 행동을 즐기는 부류의 모험가일 수도 있어.”
질이야 모험가 생활을 해보지 않았기에 모르겠지만, 그 생활이란 건 깨끗하기만 하지는 않아요.
살아가기 위해서 돈을 벌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모험가 일을 하는 것이 그들이에요.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으니까, 그러니 어쩌다가 질 나쁜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 일이죠.
문제가 있다면, 모험가들에게는 이게 어쩌다 한번이 아니라 꽤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는 거에요.
“맞아요, 실제로도 카미라즈는 내가 고블린에게 잡히기 직전…. 언덕에서 나를 발로 차서 고블린 굴의 입구 앞으로 굴러떨어지게 했거든요.”
알마는 카미라즈가 이번 일의 주축이라는 것을 듣고 나서 헤네벨에 대해 물어봤어요.
네가 당할 동안 헤네벨은 뭘 했냐는 의미겠죠.
굳이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알만한 이야기겠지만요.
“헤네벨 씨는, 카미라즈가 돌변하는 것을 보고는 바로 도망쳤어요. 그래서 카미라즈랑 헤네벨 씨 둘 다 모습을 감춘 거예요. 그리고 그 뒤, 뒤에는…. 뒤에….”
그 뒤의 일에 대해서는 딱히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기억을 되살리던 제리는 순식간에 얼어붙었어요.
몸 전체가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없이, 눈동자도 굴리지 않고 조용히 숨만 쉬었죠.
그러다가 조금씩 떨기 시작하더니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어요.
원래는 두 손으로 가리려고 했던 것인지, 오른쪽 팔이 움직였지만 있을 리 없는 손으로 가리는 건 불가능했죠.
제리도 그걸 눈치채고는 왼손으로 오른팔을 감싸 쥐었어요.
손톱이 파고들어 피가 날 정도로요.
“나, 나는….”
아플 텐데도 그만두지 않고 계속해서 힘을 주는 걸 보니 꽤 많은 일을 당했던 것 같아요.
질이 그걸 보고 억지로 말려 세웠지만, 쉽게 그만둘 것 같지 않았어요.
“예상은 했는데…. 의사 선생님 불러올게.”
알마가 자리를 떠나도 제리는 자해 행위를 멈출 것 같지 않았어요.
계속되는 자해 행위는 자신이 무슨 일을 당했는지 물어보지 않아도 뻔한 것을, 괜히 물어봐 놓고 자리를 피한 알마를 원망하는 것만 같았죠.
“제리 씨!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제발…!”
그렇지만 이런 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제리는 좀처럼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어요.
가면 갈수록 저항 심해져 새어 나오던 피는 줄줄 흘러 침대 시트를 적실 정도가 되었거든요.
그래도 알마가 의사를 불러오기에는 충분한 시간을 벌어주었어요.
의사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나선 병실 밖으로 나와 바닥에 주저앉아버렸죠.
아무리 팔 한 쪽, 다리 한 쪽이 없다고는 해도 용사 후보생이었으니 힘들었을 거예요.
알마는 그런 질을 병원 밖의 벤치로 이끌었어요.
한숨 돌리는 질을 보고 나선, 갑자기 알마가 말을 걸어왔죠.
“아직도 남을 돕고 싶은 마음은 그대로야? 저 제리라는 아이한테는 미안하지만, 지르니트. 네가 실수라도 하는 날엔 저 꼴이 될 수도 있어.”
담담하게 말을 건네오는 알마의 모습에 질은 그저 알고 있다고만 대답했어요.
“그게 다가 아니야, 제때에 지켜내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의 저런 얼굴과 감정을 받아들여야 해.”
“그것도 알아요….”
이런 식으로 차갑고 냉정하게 말을 건네오는 것은 알마만이 가능했어요.
탈리안은 뭘 하더라도 질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워서 하지 못할 말들일 테니까요.
알마랑은 이제 막 친해지기 시작한 서먹한 사이잖아요.
“그래도 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네가 위험해지는 일을 몇 번이고 반복해야 해, 지켜내지 못하면 그 대가를 마주해야 해.”
“그렇다고 가만히 놔둘 수는 없는 거잖아요! 저는, 저도 소중한 걸 잃어버렸다는 고통은 알아요! 그래서 더 내버려 둘 수가 없는 거예요!”
질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마도 알 거예요.
자세한 사정까지는 이야기해 준 적이 없으니 뭘 잃어버렸는지는 모르더라도, 재앙으로 인해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이 많거든요.
그렇기 때문일 수도 있어요.
너만 소중한 걸 잃어버린 게 아니니, 더 큰 각오가 필요하다고 다그치는 이유가.
“만약, 제리가 다친 일이…. 네가 제대로 지켜내지 못해서 생긴 일이라고 가정한다면?”
“그건! 그건…. 그래도 저는 사람들을 도울 거에요! 제르반 오빠가 제대로 지켜낼 수 있어서 절 도망치게 한 건 아닌…! 아!”
제자리에서 일어서서 알마의 앞으로 이동한 질은 더 큰소리로 맞받아치려다가 실수로 제르반의 이름을 언급했어요.
내용으로만 봐서는 사람을 도우려는 꺾이지 않는 의지와 행동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뭐,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거겠죠.
하지만 알마의 앞에서 제르반의 이름을 꺼내면 안된다는 걸 질도 알고 있었기에, 말을 완성할 수 없던 거에요.
게다가 알마의 입에서 나온 말도 상당히 예상외의 것이었죠.
“…말 잘했어, 사실 새벽에 네가 하는 말을 들었었거든. 난 너 때문에 사랑하던 사람을 잃어버렸어. 너만 아니었다면, 제르반은 살아있었을 건데.”
“일어나 있었다구요…?”
그리고 쏟아져나오는 원망의 말들에 질은 제대로 된 말조차 못 하고 뒷걸음질 치게 된 거예요.
넘어지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얼마 안 가 다리 힘이 풀려 쓰러질 것만 같은 상태에요.
“저는, 그래도, 언니한테…. 미안해서….”
“알아, 알지. 그렇지만 사실이잖아. 너만 아니었어도 난 지금도 제르반과 함께 지내고 있었을 거야. 두달이라는 짧은 시간이었더라도 나는, 제르반밖에 없었는데….”
질이 새벽 동안 사과를 얼마나 오랫동안 했는지, 얼마나 진심을 보였는지에 대해 다 알고 있다는 알마에요.
그럼에도 자신이 제르반을,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는 사실만큼은 변하지 않는다며 원망했어요.
제르반을 떠올리는 질의 눈은 촉촉해지고, 대답은 제대로 하지도 못해 거의 울먹이다시피 중얼거리기 시작했죠.
“아니, 아니에요…. 제가 잘못하긴 했지만…. 저도 노력, 했어요…. 제르반 오빠를 죽게 하지 않으려고…. 저만 살아남는 건 싫어서…. 같이 살아남으려고…!”
“너 때문에 나는 반쪽짜리가 되어버렸어. 제르반의 장례식을 봤을 때의 내 마음이 어땠는지 알아? 네가 이런 감정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불가능해. 넌 누군가를 도울 자격이 없어.”
“그걸 왜 언니가 정하는 건데요! 누구를 돕고 싶다는 생각쯤은…! 으읏?!”
당하고만 있으니 억울했는지 질은 소리를 질렀지만 그마저도 못하게 저지당했어요.
알마가 한 손으로 질의 턱을 잡고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거든요.
그렇지만 질은 알마의 손을 뿌리치는 것은 생각도 못 하고 있었어요.
자신을 바라보는 알마의 얼굴이 너무나도 진지했거든요.
“말했잖아, 이런 감정을 수없이 받아들이고 마주해야 해. 그걸 제대로 해내지 못한다면 남들의 눈에 네가 행하는 도움은 그저 위선일 뿐이야.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남들의 기분을 생각하지도 않고 남들을 돕고싶다는 자신의 욕망만을 채우려는 위선자.”
말을 마치고는 차가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알마의 모습에 질은 후들거리던 다리에 힘을 줬어요.
자신의 턱을 잡고 있는 손을 뿌리치고, 울먹이려던 것도 멈추기 위해 눈을 비비고,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기 위해 그녀의 시선과 시선을 마주했죠.
모든 게 느렸지만, 그 행동에는 굳은 의지가 담겨있는 것 같았어요.
뭔가 마음속으로 결심을 굳힌듯한 모양이었어요.
“…하지만, 하지만! 위선도 선이에요! 저는 더 이상 누군가를 잃는 것도 싫고,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못 본 척하고 도망치는 것도 싫어요! 제가 하려는 게 위선이라면, 위선인 그대로 언제까지나 모두를 도울 거에요!”
“위선도 선이라고…. 그 위선에 상처 입을, 나와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지 어떻게 알고? 네가 앞으로 걸어갈 길은 험해. 너도 알잖아, 주변에서 이런 말을 들어본 게 처음도 아닐 텐데. 어쭙잖은 각오로 하다가는 언젠간 꺾일 거야. 내가 장담할 수 있어.”
소리치는 질의 모습에도 굴하지 않고 차분히 그 앞길을 걱정해주는 알마에요.
사실, 걱정보다는 매도와 저주에 가까운 말이에요.
알마의 표정만 보더라도 차분하지만, 노골적으로 질을 적대하는 게 다 드러나고 있거든요.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면 안아줄 거예요,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으면 편히 쉬게 해주고 다시 일어서게 할 거예요, 위험해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구해줄 거예요! 제가 다치고 죽을 것 같은 상황이 온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아요!”
말을 마친 질은 너무 큰 소리로 질러대서 그런지 한번 숨을 가다듬었어요.
그리고서 알마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했지만, 알마는 무표정한 채로 질을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죠.
하지만 질은 알마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제대로 마주 보고 있었어요.
알마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내가 당장 너를 밀어 넘어뜨려서 때린다고 해도, 그 생각이 변하지 않을 자신이 있어?”
“그걸로 제 생각이 변하지 않는다는 걸 증명할 수 있다면 맞아드릴…! 으극?!”
질의 허락이 떨어지자 알마는 바로 어깨를 밀쳐 넘어뜨리며 바닥에 쓰러지게 했어요.
그리고 거의 누워있다시피 하는 질의 위에 올라타 완전히 저항을 못 하게 깔고 앉았죠.
바닥이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지만 딱딱한 돌바닥이라 옷이 해지고 살이 쓸렸을 텐데, 질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이제부터 자신을 때릴 알마가 떨떠름하게 여길 정도로 흔들림 없는 눈길로 바라봤죠.
“…각오해.”
겁 하나 먹지 않고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질에게 알마는 주먹을 쥔 팔을 올려 들어 위협했어요.
그럼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같은 시선을 보내오는 질의 모습에 반대로 알마가 표정을 구겼어요.
누가 봐도 당하는 쪽은 알마가 아니라 질인데도요.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처럼, 알마는 주먹을 내리쳤어요.
사람의 몸에서 난 게 아닌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죠.
“언니…?”
하지만 질의 얼굴은 멀쩡했어요.
얼굴뿐만 아니라 팔이나 어깨, 가슴…. 전부 멀쩡했죠.
알마의 주먹은 질의 몸이 아니라 바닥을 때린 것이었어요.
이러니 마법과 마법이 부딪혀 폭발하는 것과 비슷한 소리가 날만 하죠.
왜 자신을 때리지 않았는지 얼빠진 얼굴로 궁금해하는 질을 놔두고 알마는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네가 정말 그럴 자신이 있다면, 말뿐이 아니라 행동과 결과로 나를 이해시켜봐. 네가 주는 도움들이 위선이 아니라고, 증명해봐.”
“반드시 그럴게요, 약속할게요!”
일단은 알마가 인정해줬다는 사실에 기쁜 것인지, 질은 기쁜 표정으로 대답했어요.
그러거나 말거나 알마는 바닥을 친 손을 쥐고는 다시 병원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죠.
“이건 아무래도 포션을 쓰기엔 포션 값이 아까울 거 같네.”
“다 까졌잖아요?! 같이 갈 테니까 얼른 가요!”
그렇지만 알마의 발걸음을 멈춰 세우고, 다친 손을 잡아채고는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질이 앞장서서 병원으로 이끌었어요.
이 행동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이 알마는 미간을 찌푸리면서 물어봤어요.
“넌 방금 널 때리려고 한 사람을 걱정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언니가 저를 때렸어도, 저는 지금이랑 똑같이 언니를 걱정했을 거예요!”
“하, 참…. 기가 차네….”
이 당돌한 대답에 알마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웃었지만,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아녔나 봐요.
뒤도 안 돌아보고 자신을 이끌어주고 있는 질의 뒤통수를 보며 비웃는다기보다는 기쁜 일이 있어서 웃는 것처럼 미소를 지었거든요.
그나마 잘 마무리된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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