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벨루아 알마 (5)
* * *
질과 알마는 고블린의 둥지로 향하기 위해서 이번에는 세계의 남서로 향했어요.
‘실라’라고 불리는 산맥의 안에 굴처럼 얽히고설킨, 드워프들의 도시였어요.
제르반이 질을 보고 놀렸던 것도 드워프였었죠.
너무 작아서 그렇게 말했을지도 모르지만, 어린아이는 보통 성장에 박차를 가하기 전까지 통통한 살집이 있으니까요.
게다가 산골 마을에서 살며 여기저기 쏘다녔던 질이라면 다리 쪽에 과하지 않게 잘 다져진 근육도 있었을 거예요.
지금은 몬스터 덕분이라지만, 그 인형 같던 외모를 그대로 가져와 겉으로만 본다면 아름다운 여성으로 성장을 마쳤습니다.
아니, 정확하게는 아직도 성장 중이죠.
“와, 정말…. 작은 사라…. 무읍?!”
“실례되는 말은 하는 거 아니야.”
모험가 길드의 워프룸에서 빠져나온 질은 감상을 말하려다가 알마의 손에 입을 틀어막히면서 제지당했어요.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고 난 뒤에서야 알마의 손이 입에서 떨어졌죠.
“그래도 이렇게 시원한 건 의외예요.”
“내가 모험가 일을 막 하기 시작했을 때는 너보다 더 신기해했었지.”
역시 마법에 육체적인 힘으로만 대항하려면 그전부터 해온 경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죠.
그걸 감안하더라도 보이지 않던 제르반의 마법을 피해내는 건 신기에 가까웠지만요.
뭔가 나름대로의 요령이 있었을 거예요.
“어쩐지, 언니가 제르반 오빠를 상대할 때 이상하게 실력이 좋다 싶었어요.”
“…어, 응. 어쨌든 잠깐만 기다려, 입국 수속이랑…. 지도 받아올 테니까.”
“앗, 미안해요! 언, 니….”
제르반의 이름을 입에 담자마자 실수한 걸 알고서 바로 큰소리로 사과하려 했지만, 알마는 수많은 인파에 가려져 이미 이동한 뒤였어요.
원체 모험가 길드라는 곳이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로 시끄럽기도 했고요.
어쩔 수 없이 질은 북적이는 시장판과도 같은 이곳을 빠져나가기로 했어요.
질이 서 있는 곳이 벽에 가까운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 한가운데였으니까요.
가만히 있다가 이리저리 치이고, 매번 길을 비켜주는 것보다는 낫겠죠.
그렇다고 시장판의 도피처로 건물 밖을 선택한 것은 아니었는데요.
그늘지고 빛이 잘 들지 않는 데다가 습기가 찬, 건물의 한쪽 벽면 구석이었어요.
왜 굳이 이런 장소를 골랐냐 하면, 간단명료하게, 이 이외의 장소에는 사람이 가득했거든요.
“…왜 이런 곳에 있어? 제자리에 없길래 찾았잖아.”
알마가 질을 찾아냈을 때에는 질은 벽에 기대서 애꿎은 바닥만 발뒤꿈치로 치고 있었어요.
그래도 다행인 건 질에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분위기가 주변에 가득해서 그런지, 말을 거는 이는 없었다는 거예요.
질은 누군가라도 말을 걸어주었으면 할 정도로 심심했던 모양이지만요.
“다 된 거예요?”
“응, 자세한 건 가면서 설명할게. 보니까 잡혀있던 시간이 오래된 거 같아서…. 조금은 급하게 움직여야 할 것 같아.”
알마는 앞장서서 모험가 길드를 빠져나왔어요.
그리고는 길드 제일 가까이에 주차하고 있는 마차에 다가가선 마부에게 말을 걸었죠.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다 준비해뒀네요.
“산맥 안에 굴을 파놨다면서요? 근데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거예요?”
“보면 알잖아? 실라 내부는 도로포장이 잘되어있는 거. 그리고 실라 밖이라고 해도 우리가 갈 곳은 그렇게 먼 곳이 아니거든.”
질은 알마의 도움으로 마차 안에 올라타고선 신기하다며 내부를 구경하기에 바빴어요.
언제 출발했는지 눈치채지도 못할 정도로요.
마차는 지금껏 타본 적이 없으니 이렇게 구경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에요.
그동안 탈리안이 준 열쇠를 사용했기에 마차는 지나가는 것들만 구경해봤지 직접 타보는 건 이번이 처음일 테니까요.
마을에서도 마찬가지였을 테고요.
“책에서도 봤었지만, 말없이 달리는 거 보니까 진짜 신기해요! 마정석은 만능이네요!”
“마차 처음 타보는 거야? 그동안 의뢰하면서 마차 타본 적 없어?”
“아, 저어…. 다른 이동 수단이 있거든요!”
“…그래, 멀미는 안 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네. 가는데 한두 시간 걸리니까 먼저 설명부터 할게.”
알마의 말에 질은 경청하는 자세로 고쳐 앉았어요.
지금까지 계속해서 변하는 바깥의 풍경을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거든요.
산 아래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넓은 굴과 높은 천장, 지나온 길을 가득 채우는 수많은 사람.
개중에는 이종족이 대다수라 신기한 종족도 볼 수 있었어요.
키는 자신이 탄 마차와 비슷할 정도로 큰 키를 가졌음에도 두 발로 서서 걸어 다니는 갯과 수인이라거나, 그에 반해 작은 몸집을 자랑하면서도 옆으로 펑퍼짐해 굴리면 굴러갈 듯한 드워프.
머리의 뿔과 등의 날개, 꼬리까지 달려있어 살아있는 역사라고도 불리는 드래고니안도 있었어요.
아쉽다는 티를 팍팍 내는 질이었지만, 나중에라도 다시 구경할 기회가 있을 테니까요.
“우리가 가는 둥지에 있는 고블린 수는 약 40마리에서 50마리야. 얼마 전만 해도 20마리였다고 하는데, 지금 잡혀있는 녀석 때문에 수가 갑자기 늘어났다고 해.”
“그 말은….”
“번식용으로 쓰인 거지, 운이 좋지 못한 녀석이야. 페어로 의뢰에 향했는데 파티원이 버리고 도망갔다고 하더라.”
“동료였을 텐데 버리고 가다니….”
“항상 일어나는 익숙한 일이니까 너도 뒤통수 맞지 않게 조심해. 마법 학원의 학생은 대부분 괜찮겠지만, 모험가라는 족속들은 쉽게 믿어서는 안 되는 녀석들이야.”
알마의 설명은 이제 막 시작되었기에 고블린의 둥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 입이 쉬는 순간은 찾아오지 않았어요.
그 과정에서 둥지에 잡혀있는 게 누구인지, 구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부 듣고 난 뒤의 질은 약간 놀란 눈치를 하고 있었어요.
조금이라도 더 일찍 도착했으면 하고 생각 중이던 질의 속마음이 다 드러났는지, 알마는 질에게 지금보다 더 빨리 갈 수는 없다며 말했죠.
아는 사람의 이름이라도 들은 것 같은 게 아닌 이상에야 이렇게 반응할 리가 없는데요.
조금의 시간이 더 흐른 뒤, 마차는 적당한 공터에서 멈춰 섰어요.
지금부터는 길이 포장되어 있지도 않고, 마차가 지나다닐 수 없을 만큼 길이 좁아지거든요.
무엇보다도 알마의 말을 들어보면, 둥지가 5분 거리에 있다고 하니 무리해서 더 다가가는 것도 못 할 일이에요.
“주변에 정찰 나와 있거나, 숨어있는 녀석 없는지 잘 살펴보면서 따라와.”
“잠시만요, 저 소환수를 다룰 줄 알아서 미리 소환해놓고 갈래요.”
“그건 또 의외인걸, 소환마법 잘 안 쓰는데.”
의외라고 말하면서도 질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주변의 경계에 신경 쓰는 알마였어요.
소환마법이 잘 안 쓰이는 이유는, 질이 읽었던 책에도 간단하게 나와 있었습니다.
가성비가 나쁘기 때문이에요.
소환수가 좋고 안 좋고를 떠나서, 계약을 할 당시에 소환자는 자신의 마나를 거의 전부 빼앗기거든요.
그렇다고 그 이후에 마나를 쓰지 않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고요.
성장 좀 했다 치면 그때는 유지에 들어가는 마나가 몇 배씩 올라가니 까다로울 수밖에요.
질이 특별한 거예요.
흑기사가 몇 번을 성장해서, 마나를 얼마나 뺏어가든, 그걸 버틸 마나가 있다는 거니까요.
“릴리아, 오랜만이야.”
어느샌가 질은 릴리아를 소환해내 인사를 나누고 있었어요.
이전에 마기노를 만났을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질과 손 인사까지 하면서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었죠.
정령이 소환을 거부할 만큼 뿔 3개짜리 마기노를 만났던 게 너무 비상식적인 상황이었던 거에요.
흑기사는 질과 친해질 시간이라도 있었지만, 릴리아는 아니니까요.
“그래서? 걔는 어떻게 싸울 수 있는 건데?”
“땅에서 풀이나 넝쿨을 자라게 해서 움직임을 멈추게 하거나…. 씨뿌리기랑 넝쿨을 채찍처럼 쓴다거나….”
“씨뿌리기? 그건 뭐야?”
이상한 기술 이름에 주변을 경계하던 알마에게 빈틈이 생겨버렸어요.
그만큼 네이밍 센스가 꽝이었다는 의미일 거예요.
“예전에 한 번밖에 못 본 거라서 잘 설명은 못 하겠지만, 조금 잔인한 기술이에요….”
“뭐…. 그래. 방금도 말했지만 조심해서 따라와. 함정이 있을 수도 있어.”
자세를 낮추고 천천히 걷던 알마는 갑자기 멈춰서서 공중을 바라보더니, 질을 자신의 옆에 오게 했어요.
그리고는 허리춤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 아무것도 없는 곳에 던져버렸어요.
단도가 나무에 박히는 소리와 함께 찌직 거리는 찢어지는 소리도 같이 났는데, 그 순간 질이 서 있던 자리 뒤에서 거대한 나무토막이 공중에서 줄에 묶여 무서운 기세로 떨어졌죠.
그대로 갔다면 뒤통수가 깨졌을지도 모르는 일이에요.
그런데 함정이 끝난 줄 알고 일어서려던 질을 알마가 또 붙잡았어요.
“아직이야, 저 앞에 하나 더 있어.”
“아, 네에….”
모험가다운 일면을 보여주어서 그런지, 질도 별다른 불만 없이 조용히 따르는 모습이에요.
아직 해도 중천에 떠 있고, 잡혀있는 사람만 무사하다면 괜찮다면 천천히 가도 문제가 될 건 없겠죠.
질은 조금 애가 타는듯하지만요.
“그대로 함정이 끝이라 생각하고 앞으로 갔다면 이 앞에 빠졌을걸?”
알마가 다음으로 해제한 함정은 나무토막이 떨어진 위치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람 하나가 빠져서 나올 수 없는 큰 구멍이었어요.
발로 툭툭 건들고 나니 순식간에 지면이 저 아래로 푹 꺼져버렸죠.
그 아래에 날카로운 죽창 같은 것이 없는 걸 보면 포획용 함정 같았어요.
그야 나무토막에도 추가적으로 위협적인 무언가를 달아놓지 않았으니까요.
이곳의 고블린들은 적을 죽이기보다는 살려두고 이용하는 습성이 있는 것 같아요.
“언니 멋지네요….”
“뭐? 에이, 무슨 소리야 갑자기?”
“그냥, 그런 게 있어요!”
“쉬, 쉿! 큰소리는 내지 마…! 안 그래도 함정을 부수면서 와서 들켰을지도 모르는데 위치라도 발각되면…!”
“미, 미안해요….”
하지만 이런 알마의 걱정은 하지 않아도 충분했었어요.
둥지에 도착하기까지 주변이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조용했거든요.
입구에도 파수의 고블린이 5마리가 나와 있는걸 빼면 특별한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어요.
함정이 유별나게 많았다는 것과 그 함정의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았다는 것 정도.
신인 모험가라면 당했겠지만 알마같은 모험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그럴 일이 없었어요.
“그냥 어디서든 볼 수 있는 고블린들 같기도 하고….”
“어떻게 들어갈 거에요?”
언덕의 수풀 뒤에 숨어서 굴을 내려다보는 알마에게 방법을 물어보지만 알마는 쉽게 답을 내놓지 못했어요.
여러 가지 생각해야 될 문제들이 있으니 그런 거겠죠.
파수뿐만 아니라, 굴 안에 있는 고블린과 굴 밖에 나간 고블린 모두를 생각해야 될 테니까요.
“네가 말했던 씨뿌리기라는 기술이 보고 싶은데. 물론 그 전에 넝쿨로 고블린들의 입을 막아야 해.”
“동료를 부르지 못하게 하라는 말이죠?”
나름 괜찮은 방법이에요.
땅에서 기습적으로 넝쿨을 만들어 순식간에 구속해버린다면 저항하는 것도, 동료를 불러내기도 쉽지 않겠죠.
그 사이에 씨뿌리기라는 기술을 쓴다면 완벽히 제압할 수 있을 거예요.
질이 말하기를 잔인한 기술이라고 했으니, 효과 역시 의심하지 않아도 될 거고요.
작전부터가 괜찮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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