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 벨루아 알마 (4)
* * *
질은 도움을 받은 뒤로 옷을 스스로 입을 정도로는 상태가 꽤 괜찮아졌지만, 그럼에도 비틀거리며 걷는 건 여전했어요.
덕분에 알마의 침대를 독차지하며 간호를 받고 있었죠.
그래서 질은 몇 번이고 알마에게 미안하다고 했어요.
“차라리 고맙다고 해, 계속 미안하다고 하면 간호해주는 의미도 보람도 없잖아.”
“…으응, 알았어요.”
“그런데 욕조에서 나오기 전에 뭘 말하려고 했던 거야?”
분명히 중얼거리듯 말한 게 있었지만, 질은 말하기 싫은지 입을 꾹 닫아버렸어요.
어쩌면 머리가 어지러워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네요.
입만 닫았으면 모를까, 눈까지 감고 거부의 의사를 확실히 표현하니 알마도 굳이 캐물으려 하지는 않았죠.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언니는, 뭐 때문에 마법 학원에 왔어요?”
“응? 갑자기?”
“…불편한 질문이라면 답해주지 않아도 괜찮아요.”
자신은 알마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는데, 알마보고는 질문에 답하라니 마음이 쓰인 거겠죠.
질이 이렇게 착한 아이인 걸 모르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요?
옆에서 보기만 하면 모를 수가 없을 거예요, 한없이 착한 아이라는 것을요.
“아냐, 하나도 안 불편해. 난 그저 벨루아라는 이름의 집안에 먹칠하지 않기 위해서는 기본으로 소화해내야 할 소양이라 말하길래, 부모님 기대에 맞추려고 들어온 거니까.”
질문에 답한 알마는 질의 얼굴을 보며 반응을 관찰했어요.
이 대답에 만족하냐는 듯한 미소를 지으면서요.
정작 질은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작은 문제였어요.
얼핏 보기에는 자는 것과 차이가 없어 오해하기 딱 좋은 모습이었거든요.
“저는 사람들을 돕고 싶어서 들어왔어요. 재앙 때문에 마기노가 나타나고, 그 마기노에게 소중한 걸 잃어버리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그래? 그 나이에 그런 생각을 했어? 대단한걸.”
“언니는 제가 몇 살인지도 모르면서….”
“나보다 한참은 어린 꼬마라는 건 잘 알고 있지.”
몸을 돌려 눕기엔 아직도 상태가 좋지 않은지, 질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어요.
몇 번이고 꼬마가 아니라며 알마에게 주장하면서도, 하는 행동을 보면 언제까지고 꼬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네요.
아니면, 칭찬을 받아서 부끄러워서 그랬다면 꼬마가 아니어도 그럴 수 있으니 인정해야겠지만요.
누가 봐도 부끄러워서 한 행동은 아니잖아요?
“더 할 말이 있는 거 아니었어? 그렇게 이불을 덮고 있으면 안 들리잖아.”
그래도 알마의 말에 다시 이불을 목 아래로 내리는 질이에요.
이번에는 제대로 눈도 뜨고 있네요.
“언니, 저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겠어요.”
“지르니트, 제안이 있는데. 나랑 같이 의뢰로 조금은 위험한 실전을 경험해보는 건 어때?”
알마의 말에 약간은 두려움 섞인 눈을 하고는 ‘…위험한 실전?’이라며 되묻는 질이에요.
질이 위험한 실전을 겪어본 게 한두 번이 아니잖아요? 무서울 거예요.
저항 한번 하지 못했던 마기노와의 첫 조우, 미궁에서 위협적인 몬스터와의 추격전, 제르반과 함께 와르프에게 쫓긴 것, 가장 세다고 여겨지는 뿔 3개짜리 마기노에게서 도망치는 것.
마지막에서는 친한 사람이 목숨을 잃기도 했으니 더욱 고민이 되는 말일 거예요.
그럼에도, 고민 중인 질의 얼굴과 그 표정에서는 각오를 다지는 것과 같은 느낌이 묻어나왔어요.
“의뢰라는 건 말이지? 사람들이 ‘저 좀 도와주세요~’, ‘이거 해주세요~’하고 도움을 청하는 걸 정리해둔 거랑 똑같아.”
“그러니까, 의뢰를 하기만 해도 사람들을 돕는 거랑 똑같다는 말이에요?”
“맞아. 그리고 굳이 위험한 의뢰를 해보자는 건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고….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본다면 너도 뭔가 새롭게 느끼는 게 있지 않을까 해서.”
“위험에 처한 사람을….”
이것도 맞는 말이죠.
지금까지는 질이 직접 위험한 상황에 처하기만 했었지, 다른 사람이 위험한 상황인 걸 본 적은 없잖아요.
위험에 처한 사람을 보고서 질의 생각이 어떻게 바뀔지는 모르겠지만요.
“내가 하려고 미리 봐둔 의뢰가 몇 개 있거든, 내일 가서 같이 골라보자. 오늘은 푹 쉬고.”
“언니는 어디서 자려구요…?”
푹 쉬라는 말에 질은 넓은 침대를 혼자 차지하고 있는 것에 의문과 걱정을 품고 물어봤어요.
그렇잖아요? 침대에는 자신이 간호받는다고 누워있는데 알마는 어디서 잔다고 하는 건지 궁금할 거예요.
침대가 혼자 쓰기에는 꽤 넓어 보이기는 해도, 둘이 자는 데에는 약간 부족할 크기였으니까요.
하지만 그런 질의 걱정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처럼, 알마는 불을 끄고서는 질의 옆의 자리로 기어들어 누워버렸어요.
“응? 당연히 네 옆이지, 이거 내 침대잖아.”
“아…. 언니가 안 불편하다면….”
약간은 부대끼지만, 그래도 워낙 좋은 품질의 침대라 그런지 잠자리에 들기에는 부족함이 없었어요.
게다가 지금껏 혼자 자온 알마는 당연히 불편할 거라 생각했던 질의 말을 부정하는 것처럼, 알마는 질보다 더 빨리 잠들어버렸으니까요.
그렇지만 알마에 비해 질은 잠자리에 드는 게 더 힘들었어요.
혼자 생각할 것이 남아있었는지, 말똥말똥한 눈을 하고선 한참을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죠.
“…언니 자요?”
어쩌다 한번 너무나 조용한 기숙사의 방이 어색하고 지루했는지, 질은 알마를 한두 번 불러보았지만요.
당연히 곤히 자고 있는 알마가 대답할 리가 없었어요.
그런데 질은 자고 있는 알마의 얼굴을 한번 바라보고는 상체만 일으켜선 힘겹게 입을 떼기 시작했어요.
“언니, 만약…. 제가 승급시험을 다른 날에 봤었다면…. 제르반 오빠는 죽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제가 도와달라고 하지만 않았어도, 제르반 오빠는 지금도…. 언니랑 사이좋게 지내고 있었을지도 몰라요…. 미안해요…. 저 때문이에요. 제가….”
제르반의 죽음에 대해 사과하기 시작했네요.
그의 죽음을 극복한 것과 다른 사람이 그 죽음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보는 건 다른 문제이니 그럴 수 있겠지만요.
장례식이 끝난 뒤에도 이렇게 그의 잔재를 마주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닐 거에요.
그래서 이렇게, 알마가 잠든 뒤에서야 울면서 사과를 하고 있는 거겠죠.
알마가 깨지 않도록, 정말 작은 소리로요.
질은 이 뒤로도 계속해서 사과하다가 울다 지쳐 자신도 모르게 잠들었어요.
아침에 잠에서 깬 알마가 눈이 왜 그렇게 팅팅 부었냐고 물어봤을 때, 질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사과하다가 감정에 복받쳐 울었다고 말하기에는 그럴 용기도 없고, 울었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러웠을 테니까요.
의뢰소에 도착한 둘은 접수원으로부터 종이 몇 장을 받아내고는 주변의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어요.
질이 준비된 걸 본 알마는 방금 받은 서류를 테이블 위에 쭉 늘어뜨렸죠.
“여기 있는 의뢰들은 하나같이 다 긴박한 의뢰들이야. 그나마도 내가 늦장을 부린 사이에 다른 사람들이 몇 개 주워가서 지금은 3개밖에 없지만.”
책상 위에 나열된 종이는 총 6장으로, 두 장씩 포개져서 3곳에 나뉘어있었어요.
위에 있는 종이에는 의뢰의 간이 설명이, 아래의 종이에는 지도와 상세한 설명이 적혀있었죠.
질은 하나하나 종이를 살펴보기 시작했어요.
제일 먼저 살펴본 것은, 사람과 비슷하면서도 급격한 개체 수의 증가로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고블린의 둥지에 들어가야 하는 임무였어요.
그 둥지에 토벌하러 갔다가 되레 잡혀버린 모험가를 구해내야 한다는 내용이 주된 의뢰의 내용이었죠.
너무 오래 방치되어버리면 쓸모없어진 모험가는 그대로 먹혀버린다는 내용이었어요.
“그걸 고르려면 반대로 네가 잡힐 수도 있다는 걸 명심해.”
“…네.”
다음으로 살펴본 것은 산적으로 인해 골머리를 썩이는 마을의 구제 의뢰였어요.
마기노에 의해 살아갈 곳이 사라져 산적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처리해달라는 것이었어요.
처리, 말 그대로 죽여달라는 것이었죠.
“이런 일은 기사단이….”
“그건 여러 이유가 있어.”
이런 일을 왜 기사단이 아닌 의뢰로 내놓았느냐 하면, 기사단이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산적의 수가 적어서 기사단을 움직이면 금전적으로 손해를 본다느니, 고작 산적을 처리하는 수준 낮은 일에 기사단을 쓸 수 없다느니….
알마는 그런 하찮은 이유가 있다고 설명해주었죠.
“그리고 보통 모험가에게 맡겨진다면, 산적은 포획되지 않고 다 죽어 나가는 편이야.”
모험가는 자신의 목숨을 내걸고 의뢰를 하는 사람들이에요.
어지간히 실력이 좋지 않은 이상에야, 산적을 포획하겠다는 멍청한 생각은 하지 못하죠.
항상 그렇듯이, 안일한 생각을 가지고 모험을 하다가 자신이 죽어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이건 질도 마찬가지이고, 질도 알고 있는 사실이기에 딱히 불만은 없었어요.
“세 번째는 안 봐도 될 거 같아요. 고른다면 이 두 개 중 하나로 할래요.”
“나는 세 번째 의뢰가 너한테 제일 필요하지 않을까 고민 중이었는데, 구호 물품을 마을에 전해다 주는 거 말이야.”
“작은 마을은, 아직 보기 힘들 거 같아요. 지금은 몸을 움직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작은 마을을 보면 자신의 마을이 떠오를 것 같아서 거부하는 거 같아요.
그렇지 않다면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는 상대적으로 편한 의뢰니까요.
누군가와 싸워야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알마도 무슨 일이 있겠거니 넘겨짚고서는 질에게 선택지를 주었어요.
“…알았어, 그럼 고블린으로 할래? 아니면 산적?”
“고블린으로 할게요. 산적은, 사람을 죽인다니…. 저한테는 아직 무리일 거 같아요. 의뢰 랭크도 [D+]잖아요. 고블린은 [D]인데….”
“응, 그런 생각은 나쁘지 않아. 오히려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가, 적을 앞에 두고 허점을 보이는 것보다는 몇 배는 더 낫지. 자신의 한계를 아는 건 중요해.”
“칭찬일 텐데, 칭찬 같지 않네요….”
알마는 아침부터 풀 죽어있는 질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고선 접수원에게 갔다 온다며 기다리라 했어요.
그런데 저번에는 파티를 짜고 갔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둘이서만 가는 것으로 합의가 된 모양이네요.
그래도 문제가 될 건 없을 거예요.
고블린의 둥지란 비교적 좁은 굴이니까 많이 몰려다닌다면 기습당할 틈만 더 주는 거라고 봐도 될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알마의 결정은 나쁘지 않았어요.
다른 파티원이 없더라도 잘 해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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