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벨루아 알마 (2)
* * *
“몸은 어쩌다 그렇게 커버린 거야?”
“이름 모를 몬스터한테 당했어요. 몬스터를 처리하는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죽고 나서 막, 부풀다가 순식간에 가스를 뿜어내더라구요.”
한차례 연습을 마치고 질과 알마는 휴식 시간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가에 대해서 이야기 중인 것 같아요.
연습장의 벤치에 가깝게 붙어 앉은 걸 보면 연습 도중 사이도 꽤 가까워졌나 보네요.
일단 아는 사이이기도 하니까요, 금방 친해질 수 있었겠죠.
“고생이었겠네, 그래도 연습하는 거 보니까 그동안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거 같더라.”
“언니는 그동안 뭐하고 지냈어요?”
“나는…. 집 밖에 나온 게 너무 오랜만이라서, 한 게 없네.”
집밖에 나온 게 오랜만이라는 말에 질은 고개를 갸웃거렸어요.
미궁에서 봤었던 알마의 모습은 집에 처박혀 있기에는 어울리지 않는 성격을 하고 있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어째서인지 상당히 차분하고 가라앉은, 그런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어요.
게다가 묘하게 눈에 초점이 잡히지 않아, 어딘가를 보고 있더라도 무엇을 보고 있는지 모를 것 같은 눈을 하고 있었죠.
이는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닌 질도 눈치를 챌만한 수준이었어요.
“…무슨 일 있었어요?”
“그냥, 그럴 일이 있었어. 연습 더 할 거야?”
당연하겠지만, 알마는 속사정을 말하기 싫다며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그리고는 질의 손을 잡아 일어나는 걸 도와줬죠.
“언니가 도와준 덕분에 많이 나아졌지만, 아직 스태프를 다루는 게 익숙하지가 않아서….”
더 캐물어도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아는 질은 손에 쥔 스태프를 보며 말했어요.
“너처럼 마나를 잘 다루는 애가 익숙하지 않다는 건 이해가 잘 가지 않네, 잠깐 만져봐도 될까?”
“물론이죠, 얼마든지!”
“호들갑은, 어디 보자…아? 크읏?!”
그런데 건네받은 스태프를 들자마자 땅에 떨어트려 버렸어요.
스태프를 떨어트린 그 손에는 탈리안 특유의 잔향이 감돌고 있었어요.
마치 질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스태프를 쥐는 것을 거부하는 듯했죠.
“너 그 스태프, 어떻게 쥐고 있던 거야? 잡기만 해도 내 마나를 갉아먹는 느낌이 드는데….”
“그럴 리가 없는데…. 다시 만져보실래요?”
아무렇지 않게 스태프를 주워드는 질을 기가 막힌다는 듯이 쳐다보면서 좀처럼 생기 없던 눈동자에 힘을 줬어요.
그리곤 스태프를 건네오는 질의 손을 피해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어요.
질에 눈에도 알마의 손에 불길하게 자리를 잡은 마나가 보일 텐데요.
“하지 마. 안 만질 거야. 만지지 못하게 해두는 건 봤어도 마나를 갉아먹는 스태프는 처음이네, 어이없어.”
한 번이지만 그 꺼림칙한 느낌을 또 받고 싶지는 않은지 손사래까지 치며 거부하는 알마에요.
어쩔 수 없이 스태프를 다시 품 안으로 가져온 질이었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죠.
“그럼 저 누가 알려주지도 못하면, 멍청하게 매일매일 혼자서 연습만 해야 되는 거예요?”
“널 도와줄 다른 사람은 없어?”
“라피아 언니는 집안일이 있어서 2~3일간 안 들어온다고 했고, 탈리안 언니도 중요한 일 때문에 집을 비웠어요.”
과연, 그래서 아침에 방을 나올 때 라피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거네요.
탈리안이 자리를 비우는 거야 임무를 수행한 시점부터 보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고, 굳이 따지자면 거의 매일 집을 비우고 다녔었으니까요.
“일에 집중하고 싶다면서 도서관까지 문을 닫아버렸으니까….”
알마에게 들리지 않게 도서관도 운영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중얼거리는 질이었어요.
당장이라도 안겨서 어리광을 부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테니까요.
탈리안이 없다면 도서관의 분신들에게라도 붙어있어야 하는데, 그마저도 하지 못하니….
그래도 이렇게 참고 있는 것은 탈리안이 지금의 일을 최대한 빨리 끝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어서일 거에요.
“3명이 같은 방을 쓰는 거야? 아니 근데 어떻게 너 같은 꼬마애를 두고, 다 자기 일만….”
“꼬마 아니라니까요!!”
“자, 사탕.”
“감사합니다!”
꼬마라는 말에 발끈하다가도 알마가 건넨 사탕의 비닐을 까서는 바로 입에 집어넣는 질이에요.
순간 자신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도 모를 거예요.
알마가 미소를 지으며 입안에서 사탕을 열심히 굴리는 자신을 보고 있는걸 눈치채서야, ‘아, 아니, 아니에요! 저도 다 컸다구요!’라며 소리쳤어요.
“슬슬 집에 돌아갈 시간인데, 계속 연습할 거야?”
알마의 말에 고개를 올려다본 질은 하늘이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것을 봤어요.
시간이 흐른 걸 알게 된 질은 약간의 고민에 빠져있었어요.
신세를 지고있는 라피아의 방에 돌아간다고 하더라도, 라피아는 본가에 가 있을 거예요.
그렇다고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도 탈리안은 집에 없는 데다가, 재판이 끝난 뒤의 시멜리는 항상 탈리안의 옆에서 떨어지질 않았으니….
결국, 어딜 가든 질은 혼자였어요.
“아까 다 나가 있다고 해서 그러는 거야? 집에 아무도 없으니까?”
열심히 고민 중이던 질은 알마의 말에 작게 끄덕이고는 다시 생각에 잠겼어요.
그러면서 스태프의 끝부분으로 지면에 낙서를 하는 모습이 알마에게는 퍽 불쌍하게 보였을 거예요.
손으로 그린 게 아니라 처참하게 일그러진 그림이라 뭘 그린 건지는 알아보기 힘들었지만요.
“…그럼, 내 방에 와서 잘래? 내가 알기로 하루, 이틀은 괜찮을걸.”
“네? 정말요? 괜찮아요?”
누구나 홀리는 질의 매력이 여기에서도 실력을 발휘하고 있네요.
자신의 방에 다른 사람을 들여 재운다는 것은 어지간해선 어렵고 불편한 일이니까요.
그게 이 학교에 입학한 학생들이라면 더욱 그럴 거예요.
당장 방을 빌려준 라피아만 하더라도 이사장의 딸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고, 지금은 없는 제르반도 귀족 집안의 자식이었으니까 말이죠.
굳이 귀족이 아니더라도, 꽤나 잘 사는 집안의 자제들일 거예요.
게다가 알마는 항상 행동에서 귀티가 났으니, 다른 이들보다 잘나면 잘났어도 못나진 않겠죠.
그런 잘난 집에서 자란 사람이 불편함을 감수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에요.
“어린애를 밖에 두고 가는 것도 죄책감이 든다고 해야 하나, 혼자 있으면 집에도 안 들어가고 훈련장에서 계속 연습만 할 거지?”
“아, 아아, 아닌데요!”
알마의 말대로 혼자 두고 갔으면 날이 깜깜해져도 가로등의 불빛에 의지해 연습하고 있을 예정이었나 봅니다.
아무리 새로운 장비에 익숙해져야 한다고는 해도 무리하는 건 좋지 않은데 말이에요.
그래도 알마가 데려가 준다니 다행이네요.
“아니기는, 나 성적이 좋아서 방도 좋은 거 쓰거든. 따라와.”
“네!”
알마의 기숙사는 라피아의 기숙사의 정 반대편에 있었어요.
마법 학원의 서쪽, 이사장이 특별히 꾸며놓은 은의 화원이 창밖으로 보이고, 기숙사 뒤편에는 작은 휴식 공간과 함께 넓고 넓은 바다가 보이는 곳이었죠.
방에 들어오자마자 질은 창밖으로 처음 보는 경치를 눈에 담기 시작했어요.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게, 질은 그동안 마법 학원에서 자신의 행동 범위 안에서만 걸어 다녔었거든요.
“그렇게 신기해? 너도 기숙사에서 생활하고 있을 텐데, 익숙한 풍경 아니야?”
“아, 저, 동쪽 기숙사에서 지내거든요! 동쪽은 건물만 많으니까….”
“응, 그건 그렇지. 서쪽에 비해서 너무 삭막한 느낌은 있어.”
알마는 질의 말에 대충 대답하면서 방 안의 옷장에서 몇 가지 옷을 꺼내 들었어요.
‘어딘가에 앉아있어라, 편하게 있어라, 불편해하지 말아라.’ 같은 말을 해주지 않아서 그런지, 질은 멀뚱멀뚱 서서 알마에게 말을 거는 것 이외에는 할 일이 없었죠.
그렇다고 질이 조용하고 소극적인 아이라면 모를까, 원래부터가 산골 마을의 소녀였잖아요.
가만히 있으려니 몸이 근질거렸을 거에요.
“근데 뭐 하는 거예요?”
“응? 훈련장에서 땀 흘렸을 텐데 씻어야지, 옷 빌려줄 테니까 따라 들어와.”
“네?! 같이 씻는 거예요?”
먼저 화장실에 들어가려는 알마를 보고 질은 놀라서 되물어봤어요.
“뭐야, 부끄러워서 그래?”
“…언니는 안 부끄러워요?”
“꼬마한테 몸을 보여서 부끄러울 게 있을 것 같아? 뭐야 그 표정은? 소리 지르나 했는데 왜 그렇게 쳐다봐? 아니지, 어딜 보는 거야? 얼굴이 아닌데? …내 가슴?”
알마가 꼬마라 불러서 그랬는지는 몰라도, 질은 ‘네가?’라고 말할 것 같은 표정을 하고 가슴을 쳐다보고 있었어요.
‘정말로 부끄러워할 부분이 없다고?’ 같은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죠.
그도 그럴 것이, 미궁에서 제르반에게 놀림당하였던 전적을 살펴보면….
알마의 가슴은 탈리안보다도 작아, 없다고 해도 무방할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거든요.
제르반의 평가가 후했던 것일 뿐, 잘못을 바로잡아 말하자면 ‘무유[無?]’.
“…지르니트, 싸움을 거는 건 아니지?”
“아, 아니에요! 가, 갑자기 안 부끄럽네! 얼른 들어가서 씻자구요!”
“지르니트!”
“언니 얼른 들어오세요!”
알마가 질에게 소리를 지른 이유에는 별다른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어요.
자신의 가슴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쳐다본 것도 그렇지만, 알마와는 다르게 질의 성장한 몸은 현격한 차이를 보여주었기 때문이에요.
알마의 아예 존재하지 않는 수준의 가슴과 작은 키, 그에 반해 가장 빛이 발할 때의 몸으로 성장했음에도 아직도 성장 중인 질의 몸과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는 가슴.
그 격차에서 오는 부끄러움이 막 알마의 가슴 속에서, 아니 마음속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에요.
분에 못 이겨 질을 불렀지만, 욕실에 들어간 뒤로는 질은 재빨리 옷을 벗으며 못 들은 체를 했어요.
“언니 안 들어오세요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는 알마가 걱정되었는지, 질은 욕실에서 고개만 내밀어 말을 걸어보기로 했어요.
가만히 서 있던 알마는 작은 목소리로 질에게 중얼거렸지만 들리지 않았죠.
화는 충분히 잠재운 것 같았어요.
도발에도 일부러 넘어가 주다가 자신의 페이스로 상황을 끌어오던 그 알마니까 침착을 되찾는 건 별로 문제가 될 건 아니겠죠.
그렇지만 질이 들리지 않는다고 되묻자마자 알마는 큰소리를 냈어요.
마치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해서 화를 내는 듯했어요.
“그, 몬스터…! 어디서 만날 수 있는 거냐고!”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온 말도 질이 듣고 아무 반응도 하지 못할 것이었죠.
가슴에 그렇게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을 줄 몰랐다는 듯이 가만히 있으니까, 알마는 얼굴을 붉히고 또다시 소리쳤어요.
가만히 있으면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겠다는 것처럼 옷을 아무 데나 벗어 던져두고 욕실 안으로 들어온 알마였어요.
“돼, 됐어! 못 들은 거로 해!!”
“언니…. 제가 만난 몬스터는 학원의 미궁에 있는 건데, 둥지가 있는 방이 무너져서 더 못 만나요….”
“윽, 그, 그래…. 들어가자…. 이 주제로 더 얘기하다간 나만 비참해질 것 같아….”
희망이 사라져버리는 말에 알마의 어깨는 힘이 빠져 축 처졌어요.
몬스터의 힘이라도 빌려서 키우고 싶을 만큼 절박했던 모양이에요.
“괜찮아요, 언니! 제가 읽던 책에서는 만지면 더 커진다고 했었…!”
안 그래도 처음 만났을 때부터 기운이 없어 보이던 알마가 더 힘들어하니, 질은 책에서 읽었었던 지식을 이용해 격려했어요.
별로 쓸모있는 정보 같지는 않았지만, 이걸 듣고 난 알마는 푹 숙였던 고개를 옆으로 기울여 질을 쳐다보며 말하기 시작했죠.
“그걸 몇 년이나 했는지 알아? 자그마치 7년이야. 여기서 퀴즈, 내가 몇 살이게?”
“여, 열일곱 살…?”
“틀렸어! 21살이야!! 그것만 해본 줄 알아? 우유도 꾸준히 마셔보고, 소문으로 좋다는 몬스터나 식물의 분비물도 발라보고 했단 말이야!”
“언니, 지, 진정해요!”
저 작은 신체에 21살이라니, 라피아라는 선례가 있어서인지 질이 그다지 놀란 기색을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보다는 성장이 멈춘 자신의 몸에 한탄하는 알마를 달래는 일에 바쁜 질이었어요.
옷은 다 벗었는데, 씻는 건 조금 더 뒤의 일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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