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69화 (69/189)

〈 69화 〉 벨루아 알마 (1)

* * *

약간의 소동이 일어난 저녁 식사로부터 며칠 뒤.

오늘은 아무래도 질에게 중요한 일이 있는 것 같아요.

“제복 구겨진 곳 없고, 리본도 안 흐트러졌고, 신발도…. 괜찮고, 가방 안에 학생증…. 다 있네!”

질은 몸 구석구석을 확인해보고, 한 바퀴 빙글 돌기도 하며, 모든 곳을 확인한 뒤에야 방을 나섰어요.

의외인 점이 있었다면 열쇠를 사용하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는 것이었죠.

평소라면 바로 열쇠를 사용해서 이동했을 텐데요.

굳이 이렇게 수고를 들여가며 질이 도착한 곳은 이전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던, 발자르의 개인실이었죠.

문 앞에 선 질은 옷을 다시 정돈한 뒤, 천천히 두 번 노크 했어요.

“들어오세요.”

안쪽에서 허락이 내려오고 질이 문을 열었을 땐, 발자르가 안경을 쓰고 서류들을 살펴보고 있었어요.

그 때문인지 질이 문을 닫고 들어와도 발자르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어요.

“발자르 선생님? 용건이 있으시다고 해서 왔는데…요.”

“일단 거기 앉도록, 요즘 네 보호자가 계속 일을 물어와서 곤란하니까.”

질의 보호자라면 탈리안 말고는 없죠.

일을 물어와서 곤란하다는 건 가져오지 않아도 될 일을 가져온다는 말일 거예요.

지금 탈리안이 하는 일이라면 마기노와 리니아 가문의 관계를 증명하는 일이에요.

전혀 쓸데없다고는 하지 못할 일이네요.

“탈리안 언, 선생님이?”

“…, …리니스에 가 본 적이 있을 테지. 그곳의 지하에 리니스와 맞먹는 크기의 지하도시가 생겨났다고 하더군.”

질이 언니라고 부를뻔한 일에 고개도 들지 않고 눈동자를 한번 질에게 향했다가 다시 서류를 보는 발자르였어요.

아직도 탈리안을 안 좋게 보는 건 여전한 것 같아요.

“와, 정말요?”

“감탄할 일이 아니다. 그 지하도시라는 곳은 온갖 범죄가 일어나는 무법지대니까.”

꾸짖는 듯한 말에 질은 조용해져선 발자르의 볼일이 끝날 때까지 방의 이곳저곳을 구경했어요.

혹시라도 일어서서 돌아다닌다면 그의 신경에 거슬릴까 봐 고개만 돌려가며 살펴봤죠.

발자르가 책상에서 일어난 것은 질이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려 할 때쯤이었어요.

“정신 차려라, 이곳에서 조는 녀석은 너밖에 없을 거다.”

“흐앗, 차거?!”

발자르는 졸고 있던 질의 뺨에 차가운 컵을 가져다 댔어요.

덕분에 소파에서 화들짝 놀라며 일어나는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줘야만 했죠.

“반응이 꼭 내 딸아이를 보는 것 같군.”

“선생님 딸도 있어요?”

“이제 막 2살이 됐지.”

“지금 2살이랑 10살을 똑같다고 하는 거예요!?”

전혀 그럴 것 같지 않다는 반응을 보이는 질에게, 발자르는 들고 있던 컵을 건네줬어요.

안에는 평소에 탈리안과 같이 있으면 쓴 것도 마실 줄 알아야 한다며 내주던 그 음료수가 담겨 있었죠.

음료수를 보자마자 인상을 구기는 질을 보고 발자르는 비웃듯이 웃었어요.

“크흠…! 어쨌든 네 보호자가 너를 잘 부탁한다며 선물로 준거거든, 아직 책상 뒤에 한 상자 넘게 있지. 입도 대지 않은 새것이니까 마시도록.”

“가, 감사합니다….”

질은 컵을 받아들고서 바로 테이블에 올려뒀어요.

탈리안이 마시는 거라고는 해도 본인 앞이 아니라면 마시지 않겠다는 건가 봐요.

그 정도로 맛이 없다는 것이겠지만, 탈리안이 직접 본다면 슬퍼하겠네요.

어쨌든, 발자르는 다시 자신의 책상으로 가서 서류 한 장과 잘 포장된 하나를 들고 질 앞으로 돌아왔어요.

“내가 왜 널 다시 불렀느냐 하면, 저번의 승급 시험이 흐지부지되었던 것 때문이지. 이걸 받아라.”

“저도 그 일 때문이라고 생각하고는 있었어요. 선생님이 저한테 볼일이 있다면 그것밖에 없으니까….”

질은 자신도 예상하고 찾아왔다며, 발자르가 건네주는 서류를 받아들고 읽기 시작했어요.

서류에 무슨 내용이 적혀있는지 질의 눈동자는 점점 커져만 갔죠.

꽤 놀랄만한 일이 들어 있는 것 같아요.

“…음, 많이 늦었지만, 제르반의 일은 유감이다. 설마하니 마기노가 나타났을 줄은 몰랐으니.”

“괜찮아요, 그런데 선생님…. 이거 진짜 괜찮은 거예요?”

“못 믿겠다면 이것도 열어봐라.”

발자르가 건넨 상자를 받아든 질은 곧바로 열지 못하고, 발자르를 빤히 쳐다봤어요.

딱히 해줄 말이 없던 발자르는 ‘뭘 쳐다봐, 얼른 열어보기나 해.’라고 할 뿐이었죠.

매정한 그 말에 질은 뾰로통한 얼굴로 상자를 열었어요.

그 안에는 질의 손바닥만 한 카드가 하나 들어있었죠.

“진짜, 인 거죠? 가짜 아니죠?”

“마법 학원에서 뿔 3개짜리에게 살아남은 학생을 [F] 랭크나 [E] 랭크에 둘 수는 없다는 판단을 내린 거겠지, 불만이라면 내가 특별히 [D­] 랭크로 내려달라고 건의해줄 수는 있다만.”

질은 카드를 보고서도 못 믿겠다는 듯이 이리 뒤집고 저리 뒤집어보면서 계속 확인했어요.

앞면에는 하얀 바탕에 질의 얼굴과 신상정보가 적혀있는 학생증과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어요.

이전의 학생증과 다른 게 있다면, 파란색의 검과 지팡이가 교차한 문양 위에 [C+]가 쓰여 있다는 것이었어요.

지금까지 쓰고 있던 학생증에는 [F] 랭크도, [E] 랭크도 쓰여 있지 않았거든요.

“아, 아니에요! 불만일 리 없잖아요!! 제, 제가 [C+]랭크라니….”

“보통 모험가 일을 하다가 굴러들어온 놈이 아니라면 [C+]랭크까지 올리려면 몇 년이 걸려도 부족한 일이니까, 운이 좋은 줄 알도록.”

발자르는 용건이 끝났다는 것처럼 다시 자신의 책상으로 가서 앉았어요.

깔끔하게 정리해두었던 서류를 다시 집어 들고 읽기 시작했지만, 질이 책상 앞에 서 있는걸 보고는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죠.

“먼저 쓰고 있던 학생증은 어떻게 해요?”

“아, 나에게 넘겨라, 알아서 처리해 줄 테니. 학생증으로 장난질을 치는 놈들도 있어서 아무 데나 막 버리면 안 돼.”

“장난질?”

발자르는 질에게 학생증을 내놓으라는 듯이 손을 앞으로 내밀었어요.

하지만 궁금한 걸 풀어달라는 게 먼저인지, 질은 학생증을 넘기지 않고 장난질이 뭐냐며 물어봤죠.

질의 건방진 태도에 발자르는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간단하게 설명해주기 위해 입을 뗐어요.

“…버려진 학생증을 위조해서 이곳에 숨어들려는 녀석도 있다는 거다. 그래봤자 다 들통나서 쫓겨나곤 하지만 말이지.”

“그렇구나…. 저 가 볼게요!”

이제는 쓸모없어진 학생증을 발자르에게 건네준 질은 잔소리에 앓는 소리를 내며 대충 대답하고 방에서 뛰쳐나오려고 했어요.

하지만 바로 목 뒤의 옷깃을 잡혀 제지당했죠.

“어이! 기다려!”

“케흑?! 흐윽…! 아무리 선생님이라지만 왜 옷을 잡는 거예요!”

덕분에 목이 세게 졸렸던 질은 몇 번이고 기침을 해야 했어요.

발자르는 멋쩍게 미안하다며 사과를 하고는 벽 한쪽의 캐비닛을 열어 질의 키를 넘는 길이의 얇고 긴 선물 상자를 꺼내 건네주었어요.

뜬금없는 선물을 받은 질은 상황을 파악하려고 열심히 머리를 굴려봤지만, 도저히 생각나는 게 없었죠.

발자르에게 선물을 받을 정도로 친한 사이였던가요?

“내가 준비한 선물이 아니니까, 그런 기분이 나쁘다는 표정은 짓지 마라. 듣자 하니 약속을 했다던데, 시험에 합격해서 랭크를 올리면 선물을 주겠다고.”

“아, 아앗!! 맞아요, 스태프를 선물 받기로 했어요!!”

발자르가 귀를 틀어막을 정도로 기뻐하며 소리친 질은 그 자리에서 바로 포장을 뜯기 시작했어요.

포장을 다 풀어서 나타난 것은 질의 예상대로 자신의 키보다도 긴 스태프였어요.

막대는 재질부터가 고급스러운 데다가 얇아서 잡기 편하게 되어있었지만, 얇다고 해서 부러질 것처럼 약하지는 않았어요.

여기에 더해 너무 단조로워 보이지 않게끔 스태프의 머리 부분에는 마정석을 조각내어 보름달을 만들어 달아놓았죠.

감싸듯 장식되어있는 마정석의 끝에는 금제 테두리를 따라 별도 달려있었어요.

한눈에 봐도 질이 선물해주었던 책갈피를 의식해서 만들었다는 게 다 티가 날 정도였죠.

“…이보세요, 지르니트 학생. 바닥 꼬라지를 한번 보시겠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기뻐하는 질에게 발자르가 손가락으로 바닥을 가리켰어요.

이리저리 스태프를 돌려가며 구경하던 질은 그제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게 됐죠.

바닥에 너덜너덜하게 찢어져, 널브러져 있는 포장지와 스태프를 감싸고 있던 비닐들.

고의는 아니었다지만 발자르의 개인실을 지저분하게 만든 거였어요.

“치, 치울 거에요! 그냥, 너무 기뻐서…!”

“내 방이 아니라 밖의 쓰레기통을 이용해주면 고맙겠군.”

“치잇….”

기뻐할 시간도 주지 않는 발자르에게 삐진 질은 포장지를 한데 모아들고선 바로 개인실에서 빠져나왔어요.

나오기 전에 테이블에 남아있던 쓴 음료수를 보고는 잠깐 멈칫했었지만, 그대로 두고 나온 걸 보면 마실 생각은 없어 보였죠.

탈리안이 이걸 본다면 슬퍼하겠네요.

질은 가지고 나온 포장지를 복도의 쓰레기통에 던져넣었어요.

평소라면 쓰레기통의 앞까지 가서 혹시라도 튕겨 나오지 않게 직접 손으로 넣었겠지만, 지금은 선물 받은 스태프에 관심이 더 갈 테니까요.

그래서인지 질이 향한 곳은 학원의 훈련장이었어요.

하지만 훈련장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있었어요.

“뭐야, 너도 쓰려고?”

질은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드는 그 모습에 갸웃거리다가도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어요.

“근데 너, 나 본 적 있지 않아?”

“모르겠어요, 익숙한 느낌은 있는데….”

아무래도 서로 같은 기분을 느낀 것 같아요.

훈련장의 한가운데에 서 있던 학생은 굳이 가까이 오지 않아도 충분히 말이 전달될 거리인데도, 도도한 걸음걸이로 질의 앞에 섰어요.

“그렇지? 이름이 뭐야?”

“지르니트에요. 지르니트 페어차일드.”

“들어본 것 같은데…. 내 이름은 벨루아 알마야.”

“아! 미궁에서 만났었던 그 언니구나! 제르반 오빠랑 싸웠었던!”

벨루아 알마, 이전에 미궁에서 사소한 오해로 제르반과 싸웠던 그 학생이에요.

라피아에 의해서 싸움이 허무하게 끝나버렸지만, 둘 다 입학한 것을 보면 별다른 문제는 없었나 봐요.

그렇지만 역시 질만 알마를 알아볼 뿐이었어요.

질이 성장한 뒤의 모습을, 알마는 본 적이 없으니까요.

“제르반…. 네가 걔를 어떻게 알아?”

“저, 그 뒤에 숨어있었던 꼬…. 숨어있었던 입학생이에요!”

꼬마라고 칭하려다가 급하게 입학생이라고 돌려 말하는 질이에요.

사실이라 하더라도, 몸이 성장한 지금은 꼬마라 불리기 싫은 것일 수도 있어요.

“네가 그 꼬마라고…?”

“꼬, 꼬마 아니거든요! 이제 키 크잖아요! 저도 다 컸어요!”

질은 자신을 꼬마라 부르는 알마에게 소리쳤지만, 알마는 듣는 체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면서 태연하게 주머니에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내 질에게 보여주었죠.

“사탕 먹을래?”

알마의 손바닥 위에는 분홍색 비닐에 싸인 알사탕이었어요.

손가락 한마디만 한 작은 크기의 알사탕이었지만, 질은 그 사탕을 보고 멈칫하다가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알마를 노려보며 소리쳤죠.

“꼬마 아니라니까요!”

“핏츠맛인데? 달콤하고 맛있는 사탕인데?”

하지만 알마가 핏츠맛이 나는 사탕이라 말하자마자 한 번 더 어깨를 움찔거리고는 망설이는 듯했어요.

그 모습에 알마의 입꼬리는 점점 올라갔죠.

꼬마가 아니라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맛이라는 걸 듣자마자 고민하는 모습 때문에요.

“피, 핏츠맛…. 그래도 저, 저는! 꼬마가 아니에요!”

“후훗, 그래! 미안하게 됐어, 꼬마 아닌 거 맞는 것 같네. 대신에 사탕은 내가 먹어야지.”

순순히 인정해주는 알마의 모습에 의아해하던 질은 곧바로 사탕의 비닐을 까는 손가락을 보고 아쉽다는 눈길을 보내기 시작했어요.

마지막에 사탕을 입에 넣자마자 질은 자신도 모르게 입으로 소리까지 내버렸죠.

“아! 아아….”

“흡, 크흡…. 그렇게 아쉬워? 하나 더 남았는데, 줄까?”

알마는 질을 보고 힘껏 웃음을 참는 듯했어요.

꼬마가 아니라면서 사탕 하나에 이렇게 아쉬워하는 모습을 보이면, 누가 안 웃을 수 있겠어요?

말로만 강한 척을 할 뿐이지, 온몸으로 ‘나는 꼬마예요.’라고 광고를 하는걸요.

“언니는 왜 그렇게 사탕이 많아요…?”

“내가 달콤한 걸 좀 많이 좋아해, 똑같은 핏츠맛이야. 먹을래?”

알마의 호의에 질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어요.

그리고 이번에도 같은 주머니에서 부스럭거리며, 같은 사탕을 꺼내 질에게 건네주었죠.

비닐을 까서 사탕을 한입에 넣은 질이에요.

그렇게나 핏츠맛이 좋은 걸까요.

“잘 먹으니까 보기 좋네, 연습하러 온 거지? 도와줄까?”

“언니도 연습하려고 온 거 아니었어요?”

“난 네가 오기 전부터 하고 있었거든, 잠깐 쉬다가 이제 다시 하려던 참이야.”

“그럼 조금만 도와주세요! 저 스태프 처음 써보는 날이에요!”

알마는 질의 스태프를 보더니 자기 키보다 더 큰 걸 사용하냐며 대단하다고 말하고는 자세부터 잡으라고 했어요.

제대로 각을 잡고 연습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니까, 오늘은 집에 늦게 들어가는 날이 되겠네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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