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저녁 식사였던 것 (2)
* * *
싸움은 한참이나 지속되어, 먼저 패배를 인정한 것은 의외로 탈리안이었어요.
때려도 때려도 쓰러지지 않는 쓰러지지 않는 라피아 때문에 지쳤다고 보는 게 맞을 거예요.
짓밟히고, 찢어지고, 뽑혀도 다시 일어서서 덤벼드는 그 모습을 탈리안이 아닌 다른 사람이 본다면 분위기에서 압도되었을 테죠.
그만큼 라피아는 끈질기고 독했어요.
그렇다고 탈리안에게 맞기만 했느냐면 그건 또 아니거든요.
여기저기 베이고, 맞고, 찔리기도 했으니 둘 다 나름 잘 싸웠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다만, 근성은 라피아가 더 좋았을 뿐인 이야기죠.
“이봐, 살아있지?”
싸움은 진작에 끝났는데도 전혀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탈리안의 모습에, 라피아는 걱정이 되어 물어봤어요.
눈도 감고 있고,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걸 보면 죽었다고 의심할 만하니까요.
아무리 힘 조절을 했다지만 이 싸움에서 탈리안과 라피아가 보여준 격렬함은 그 어느 때보다 진심인 것 같았으니, 이렇게 걱정하는 것도 당연합니다.
“…버블 캐논.”
“응?”
“아! 라피아 언니! 위에!!”
질의 외침에 라피아가 고개를 들어보면 그곳에는 질에게는 익숙한 거대하고 엄청난 양의 물이 공중에 떠 있었어요.
예전에 탈리안이 질을 씻기기 위해서 썼던 그 마법이에요.
“뭐, 뭐야 이건…?”
그렇지만 라피아가 탈리안이 이 마법을 쓰는 것을 본 적이 있는 것도 아닐 테고, 곧바로 맹렬한 기세로 쏟아지는 물들을 그대로 맞을 수밖에 없었어요.
다른 사람이 듣기에 우스운 소리를 내며 물을 맞는 라피아였지만, 이는 마법을 쓴 탈리안 자신도 마법의 범위 안에 들어갈 위력이었어요.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쏟아져 내린 물이 탈리안과 라피아를 가둔 채로 공중으로 떠올랐다는 거예요.
그리고, 불순물을 아래로 떨어뜨리면서 물이 방금보다도 더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죠.
마치, 세탁을 하는 것처럼요.
“으, 와아….”
한번 당했던 경험이 있던 질은 그 모습에 웃을 수가 없었지만, 질이 아닌 다른 사람이 본다면….
물의 흐름에 몸을 맡긴 탈리안과 라피아가 꽤 웃길 거에요.
마치 흠뻑 젖은 세탁물처럼 물속을 이리저리 돌아다녔으니까요.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숨이 제대로 쉬어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마법이 금방 끝났다는 거였어요.
마법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탈리안과 라피아도 물 밖으로 던져진 생선처럼 물과 같이 땅에 떨어졌거든요.
“괜찮, 괜찮아요?!”
둘이 걱정이던 질은 바로 그 곁으로 달려갔는데, 바닥이 워낙 젖어있던 탓에 뛸 때마다 찰박, 찰박거리는 소리를 냈어요.
요리를 잊어버린 질의 걱정과는 달리, 탈리안은 바로 일어섰지만….
라피아는 일어나려다 시야가 흔들리는 것처럼 몸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는 느낌이었어요.
“이, 으윽, 너! 너, 뭐한, 거야!”
“…집에 더러운 꼴로 들일 수는 없으니까요. 적당히 씻긴 거예요.”
“뭐 이런, 비상식적인…!”
겨우 정신을 차리고 물어봤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저렇다면, 기가 차는 것도 당연하겠죠.
질만 하더라도 처음에 도망가려고 했으니까요.
정상적인 방법은 아니잖아요.
“저는 잠시 쉬고 있을 테니까, …둘이서 제대로 씻고 나오세요.”
“…둘이서?”
그런데 탈리안의 입에서 나왔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말이 나왔어요.
‘둘이서’, 자신은 쉬겠다고 했으니 아마 질과 라피아를 뜻하는 말이겠죠.
하지만 방금까지 질을 걱정해서 라피아와 싸우고 있던 거 아니었나요?
질을 피주머니로만 보고 있었기에, 견제를 시도하다가 시비가 붙어 싸운 거잖아요?
그런데, 둘이서?
“정말 둘이서 씻으라는 거야?”
“…네.”
다만 탈리안의 표정이 그렇게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어요.
지쳐서 그런 것인지, 싸운 뒤 뭔가의 변화가 있던 것인지는 몰라도 그 표정을 보고 라피아는 별말 없이 질을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죠.
그런데 마지막에, 잠깐 뒤를 돌아본 라피아는 탈리안을 훔쳐봤어요.
찰나의 순간이지만 확실하게 눈과 귀로 확인했죠.
머리에 한번, 가슴에 한번 손을 가져다 대고선 ‘작고 싶어서 작은 게 아닌데요….’라는 말을 하는걸요.
하지만 오랜 세월을 살아오고도 지금의 모습을 유지하는 걸 보면 탈리안은 더 이상 성장의 여지가 없는 게 아닐까요.
“질, 혹시 탈리안이 작다는 말에 민감해?”
궁금함을 참지 못한 라피아는 질에게 물어봤지만,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었어요.
그런데 질은 대답을 끝내고 나선 입술을 삐죽 내밀고 말을 하지 않았어요.
라피아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본 뒤에야, 갑자기 라피아 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며 소리쳤죠
“요리 어떻게 할 거예요?! 다 식었을 텐데!!”
요리라는 말을 듣자마자 지금껏 잊고 있었다는 것처럼 발걸음까지 멈추고 멍청한 표정을 짓는 라피아에요.
뭔가 잘못됐다 싶었는지, 식은땀까지 흘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죠.
하지만 이미 늦었어요.
질이 삐진 걸 풀어주려면 꽤 많은 노력이 필요할 거예요.
“어, 음, 질? 일단 같이 씻고….”
“씻긴 뭘 씻어요? 이미 마법으로 깨끗해졌으면서! 일부러 언니가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따로 준비한 요리도 있었는데….”
자신을 위해서 특별한 요리까지 준비해놨다고 말하는 걸 보고 라피아는 더더욱 할 말이 없어졌어요.
어쩐지 라피아가 탈리안과 함께하는 자리에서 잠자코 앉아있을 리가 없지 싶었는데, 맛있는 냄새가 나서 참고 있었던 건가 보네요.
결과는 이렇게 되어버렸지만요.
“아, 그, 그래…? 미안해서 어쩌지….”
“몰라요! 언니는 벽난로 앞에 가서 물기나 말리세요! 저는 씻고 올 거니까!”
질은 완전히 삐져서는 혼자 빠른 걸음으로 집 안에 들어가 버렸어요.
제 딴에는 확실하게 삐졌다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해서 발걸음에 힘을 줬겠지만, 라피아가 보기에는 그저 뻣뻣한 인형이 팔다리를 휘적이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먼저 들어간 질의 모습이 사라지자, 라피아는 어쩔 수 없이 몸부터 말리기로 했어요.
탈리안의 집을 나오면서 거실에 있는 벽난로를 봤었거든요.
“…다시 봐도 본가랑 다를 게 없네, 질도 사는 곳만 본다면 축복받았다고 해야 할지….”
다시 집 안으로 들어온 라피아는 옷을 한 꺼풀씩 벗어가면서 중얼거렸어요.
거의 뱀이 허물 벗듯이 하나, 하나 벗어 팔에 걸치고선 벽난로 앞으로 걸어갔죠.
속옷 차림으로 벽난로 앞에 선 라피아는 이상하게 준비가 잘 되어있는 기다랗고 커다란 수건과 옷걸이에 당황하다가도 바로 수건으로 몸을 감쌌어요.
옷은 옷걸이에 걸어, 벽난로와 가까운 곳의 거치대에 걸어놨죠.
“…추워, 그냥 질이랑 같이 목욕할 걸 그랬나.”
벽난로일 뿐이지만, 불 앞에서 멍을 때리는 것에서는 이보다 더 좋은 환경이 없었어요.
그래서 라피아도 앉아서 몸을 말리면서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꾸벅거리기 시작했어요.
불멍을 때리기 좋은 환경이라면, 졸기에도 딱 좋은 환경이거든요.
나무가 타닥거리며 타는 소리, 벽난로와 램프에만 의지하는 잔잔한 불빛, 몸을 데워주는 따뜻한 온도.
결정적으로 탈리안과 싸우느라 체력을 크게 소모했으니, 얼마 안 가서 라피아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졸기 시작했죠.
질이 다 씻고 나올 때까지요.
처음에는 불러도 대답이 없어서, 조용히 뒤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다가간 질이었지만….
라피아가 잠든 걸 확인하고 나서는 조용히 부엌으로 향했어요.
“…질? 혼자 씻은 건가요?”
“앗, 언니!”
이미 다 식어서 차가워진 요리들을 어떻게 할까 고민 중이던 질은 탈리안의 부름에 뒤를 돌아봤어요.
완성된 음식은 기름이 굳어 하얀 덩어리가 져버렸고, 만드는 도중이었던 요리는 다시 요리할 수도 없기에 버려야 하는 것들이었죠.
질은 그런 요리를 보여주기 싫었는지 몸으로 가려버렸어요.
“…, …미안해요. 제가 조금만 참았더라도 제때 먹을 수 있었을 텐데.”
“괜찮아요! 요리야 다시 만들면….”
“질, 라피아가 당신에게 주는 관심과 애정은 어떤 형태를 하고 있던가요.”
“네? 어어…. 으응….”
급변하는 대화 주제에 질은 열심히 기억을 되새겨봤어요.
가벼운 주제도 아니고, 탈리안이 굳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뭔가 생각이 있어서일 테니까요.
짧은 고민 끝에 질이 내놓은 대답은….
“저를 많이 좋아하고, 챙겨주고, 아껴준다고 생각해요. 언니한테는 말 안 했지만…. 몇 주간 언니 집에 자주 놀러 갔었거든요? 그런데…. 라피아 언니의 집에서 지내게 되기 전까지는 피를 빨려고 한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그렇단 말이죠.”
탈리안은 깊게 생각에 잠긴 듯 중얼거리며 대답하고는 의자를 빼내어 식탁 앞에 앉았어요.
그리고는 질과 그 뒤의 요리를 한 차례씩 번갈아 봤죠.
“질, 완성된 음식…. 지금 데워줄래요?”
“괜찮겠어요?”
“질이 만든 음식이라면 식은 것도 맛있게 먹을 수 있지만, 질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언니도 진짜….”
얼굴을 붉게 물들이고선 요리를 다시 데우는 질이었어요.
그래도 기분 좋은 말을 들었다고 헤실거리는 표정을 지으니 보기는 좋네요.
“그리고 라피아 언니는요. 집에 찾아갈 때마다 저한테 과자를 준다거나, 마실 걸 내준다거나, 항상 저한테 뭔가 주려고 했었어요. 뭔가 받아 가려는 그런 건….”
“이미 충분히 이해했어요, 아까의 대답으로 충분해요. 그것보다, 질?”
라피아에 관한 이야기는 더 듣기 싫다는 것처럼, 고개를 저었어요.
탈리안의 부름에 짧게 대답한 질은, 이어지는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죠.
“저는 그 누구에게도 질을 빼앗길 생각은 없어요.”
“빼, 빼앗긴다니, 누구…한테요?”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만약의 일을 걱정하는 걸 보니 어지간히 싫은가 봐요.
질이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게 누구냐며 묻자마자, 탈리안은 거실 쪽으로 시선을 옮겼어요.
그리고는 남 듣기 안 좋은 말들을 꺼내 늘어놓기 시작했죠.
“저기 무방비하게 한심한 표정으로 졸고 있는 라피아라거나, 바보같이 근성만 믿고 공격해오는 무식한 라피아라거나, 시도 때도 없이 질을 빼앗아가려고 생각 중인 발칙한 라피아한테서요.”
“알고는 있었지만, 언니…. 다른 사람에게 조금만 친절하게 대하는 건….”
“질, 저는 저에게 적대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친절하게 대하는 편이에요.”
질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탈리안을 바라보고 있기는 합니다만, 저 말에 신뢰가 가지 않는 것은 질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일 거예요.
하지만 마냥 거짓말은 아닌 게, 강의실에서 마기노가 나타났으니 조심하라고 걱정해주는 모습도 보였었잖아요?
만족스럽지 않은 질의 표정을 보고 잔소리를 하려던 탈리안은, 요리가 다 데워진 것을 보고 가만히 입을 다물었어요.
“질도 같이 먹을 거죠?”
“양이 약간 부족하지 않을까 걱정이 돼서….”
“저 많이 안 먹는 거, 질도 잘 알고 있잖아요?”
질은 탈리안이 먹을 만큼의 양을 데웠기 때문에 탈리안의 호의를 거부했지만, 알았다며 혼자 먹을 탈리안이 아니었죠.
“알았어요, 같이 먹을게요.”
결국, 질은 데우지 않고 먹을 수는 있어도, 밥이라 보기에는 부족한 샐러드를 가져와 탈리안의 앞에 앉았어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탈리안은 찬장에서 그릇을 하나 가져와 자신의 음식을 덜어 질에게 나눠주었어요.
거실에서 졸고 있는 라피아가 따돌림을 당하는 느낌은 지울 수 없지만, 피곤할 테니 질이 배려해준 거겠죠.
절대로 잊은 게 아니라고, 그렇게 믿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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