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선물이에요
* * *
탈리안은 질이 방 중앙에 불편한 자세로 앉아있는 것을 보고는 문을 닫는 것도 잊어버린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어요.
혹시라도 누가 볼까 봐 라피아가 대신 밖에서 문을 닫아주면서 소리를 내야, 그제서야 질을 향해 말하는 게 가능했죠.
“…질, 그 모습은….”
“저, 저는 다른 선물을 생각해보자고 했는데요!! 라피아 언니가…!!”
당황한 질은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지 자신이 생각해낸 선물이 아니라며 극구 부인했지만, 탈리안은 그저 말없이 다가왔어요.
그리고 그대로 끌어안아 버렸죠.
“아니, 아니에요, 괜찮아요. 지금은 그것보다…. 어제는 미안했어요.”
갑작스런 사과에 질은 부끄러운 것도 잊어버리고 탈리안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하려고 머리를 열심히 굴리기 시작했어요.
분명 먼저 사과하러 온 것은 질이었으니까요.
그런데 탈리안의 사과를 받아버리면, 뭔가 이상하잖아요?
입장이 뒤바뀐 것 같은, 그런 상황이에요.
“질? 변명 아닌 변명을 조금 해보자면…. 저는 질을 새로운 가족이라 생각했어요.”
“가족이요?”
“…네, 가족. 얼마 전에 질이 마기노에게 공격받는 걸 보고 깨달았어요. 질이 있는 생활에 너무 익숙해지다 못해, 어느 순간부터 저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사람이 되어버린 거예요. 그때 만약 제때 구해내지 못했다면 저는…. 또 잃어버릴까 봐 무서웠던 거에요.”
“…저는 언니한테 소중한 사람이에요?”
가만히 듣고 있던 질은 탈리안의 말을 끊고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어봤어요.
억양만 들어보면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라 생각했으면서 방에서는 왜 쫓아낸 거냐’고 질책하는 것만 같았죠.
물론 정말 궁금해서 물어봤을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억울한 감정이 아직까지 남아있던 것일 수도 있으니까요.
“이제는, 둘도 없는 제 가족이에요. 그래서 당연히 질이 저를 이해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니었죠. 미안해요. 제가 어리석었어요.”
“언니가 미리 말이라도 해줬다면…. 저도 그때 밉다고 하지 않았을 거예요. 라피아 언니한테도 말했었지만, 저도, 저도 언니가 좋은걸요! 하지만….”
질을 말끝을 흐리면서 어딘가 서운한 표정을 했어요.
“그렇게 좋아해 주니 고맙지만, 그래서 이런…. 질이라면 하지 않을 선물을 준비한 건가요? 지금 질의 모습은 정말로….”
탈리안은 질에게서 떨어지며 차분히 관찰하기 시작했어요.
평소의 질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것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거든요.
옷은 탈리안이 선물해주었던 원피스였지만, 특이한 점은 옷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었어요.
손과 발, 그리고 머리….
전체적으로 온몸에 걸쳐 그림을 그려놓듯 휘감고 있는 빨간 색의 리본이 있었거든요.
양손은 수갑을 찬 것처럼 리본에 묶여 자유로운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되어있었고, 발목 역시 마찬가지였죠.
리본만 있었다면 모를까, 손과 발에는 보드라운 털로 짠 토끼 장갑과 신발을 신고 있었어요.
여기에 더해 전신을 휘감는 리본이 묘하게 파고들어 리본과 리본 사이로 살집이 튀어나와, 질이 날씬한 몸을 가졌음에도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했죠.
예전에 질의 몸이 성장했을 때에, 꽤나 육감적인 몸으로 변했잖아요.
얼굴이 앳되어 보이고, 탈리안보다는 크지만, 키가 보통의 여자들보다 작아 어리게 보일 뿐, 몸만 놓고 본다면 어른이라고 해도 믿겠죠.
그래서, 리본이 살을 파고드는 장소는 비단 허벅지나 배뿐만 아니라 가슴이나 허벅지 같은 곳도 있었어요.
물론 옷을 입지 않은 것은 아니라지만, 흐트러진 자세로 손과 발이 구속되어있는 질을 본다면 누구나가 이렇게 생각할 거예요.
‘특수한 플레이라도 하려는 건가?’라고요.
그래도 너무 그런, 외설적인 쪽으로 보이지 않게, 머리에 커다란 리본 머리띠를 하고 있었어요.
나름대로 귀엽게 보일 포인트를 찾아 꾸며낸 거겠지만요, 그렇겠지만…. 의도가 어찌 되었든 질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여서는 반박할 여지조차 없었어요.
마치 맹수 앞에 제물로 놓여진 토끼라고 봐도 되겠네요.
“아, 아니! 아니에요! 이건! 라피아 언니가 억지로 끌고 나가서 선물을 고르자고 해서!”
일단은 당연히 라피아가 생각해낸 것이라며 부정하기 시작했지만, 이 상황을 본다면 결국 받아들였다는 거잖아요?
탈리안이 좋아할 거라고 예상했던 라피아지만, 효과는 없던 게 아니었을까요?
무엇보다 탈리안이 이미 말했지만, 질을 둘도 없는 가족이라고 했잖아요.
가족이 이런 모습으로 방 한가운데에 있다면 오히려 눈살이 찌푸려질 것 같은데요.
“괜찮아요, 마음에 안 들지는 않았으니까….”
뒤로 갈수록 작아지는 탈리안의 목소리에 잘 듣지 못했는지 질은 ‘네?’라며 다시 말해주길 기다렸지만, 그럴 생각은 없어 보였어요.
오히려 대화 주제를 집으로 돌려버렸죠.
“아무것도 아니에요, 집에는 언제 돌아올 건가요? 전에 말했던 것처럼…. 아이펠슈에가 돌아갈 때까지?”
“마음 같아서는 언니랑 계속 같이 있고 싶은데…. 저 그 언니는 진짜 싫어요.”
“질이 편할 때 돌아오도록 해요. 그 집은 저의 집이기도 하지만, 질의 새로운 집이기도 해요. 저는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그런데 질, 라피아가 선물을 골라줬다는 건….”
일이 잘 흘러가는가 싶더니, 역시나.
탈리안이 이걸 놓칠 리가 없죠.
“아, 어제 언니 선물도 사고…. 제 기분이 안 좋아 보였는지 억지로 데리고 나가서 라피아 언니가 놀아줬어요.”
“…놀아줬다고요? 밖에서 단둘이 놀러 다녔던 거에요?”
라피아가 친절히 선물을 골라줬다고만 말했으면 됐을 텐데, 쓸데없는 말을 해버렸네요.
질도 잘못 말했다는 자각은 있는지 바로 핑계를 댈만한 말을 열심히 골라내는 듯한 눈치에요.
“그, 그게…. 저는 어쩔 수 없이 끌려다닌 거라서….”
그렇지만 너무나 빈약한 핑계에 탈리안은 말없이 눈을 내리깔고 아무것도 없는 바닥만 바라보기 시작했어요.
자신을 봐주지도 않는 탈리안의 모습에서 질은 더욱 공포에 떨었죠.
차라리 한 소리하기라도 했다면 계속해서 핑곗거리를 찾아내기라도 할 텐데, 아무런 말도 없으니 무슨 말을 해야 될지도 모르는 상태인 거예요.
“저, 정말이에요! 저는 나가기 싫었는데, 라피아 언니가!”
결국, 질은 계속해서 라피아의 탓을 하기로 했어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라피아가 다 들릴 정도로 크게 말했지만, 그걸 신경 쓸 여유가 없는 거겠죠.
“질, 충격받은 저를 버려두고 라피아와 놀고 있었다는 건 화날만한 부분이에요. 말했잖아요? 질은 제 가족이에요. 그렇다면 질도 저를 가족으로 봐줘야 해요. 그런데 질에게 있어서 제일 소중한 가족이 마음의 상처를 받았는데, 밖에서 기분 좋게 다른 여자랑 놀아났다니 혼나도 할 말이 없을 거예요, 그렇죠? 그러니까….”
이건 의심할 여지가 없는 명백한 질투네요.
이전에 라피아와 몸싸움을 할 때, 그 사실을 숨겼던 걸 떠올려보면 이제는 숨기지 않고 속마음을 표현하는데….
탈리안도 처음 질을 만났을 때와 비교해보면 많이 바뀌었어요.
“죄, 죄송해요, 언니!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
솔직하게 변한 거야 좋지만, 조곤조곤 말을 이어가는 탈리안을 보고 질은 완전히 겁에 지배된 상태가 되었어요.
그래서 따로 머릿속에서 단어를 골라 말할 수가 없었죠.
다음에 나올 탈리안의 벌에 대해 걱정이 되어 자신의 잘못을 용서해달라고 말하려고 했겠지만….
그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어요.
탈리안이 질을 꼭 껴안았거든요.
“다음에 시간이 난다면, 저랑 놀러 가도록 하죠. 지금은 이걸로 봐줄게요.”
“…네? 으읏…!”
그리고 충분히 질을 안는 느낌을 만끽하고 떨어지며, 탈리안은 질의 이마에 짧게 입맞춤을 했어요.
심한 벌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정작 탈리안은 그럴 생각도 없었네요.
덕분에 탈리안이 떨어진 뒤에는 개인실의 바닥에 옆으로 쓰러져 얼굴을 가리고 있는 질을 볼 수 있었어요.
누가 쓰러트린 것도 아니라 부끄럼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 넘어진 거지만요.
얼굴까지 가릴 정도면 상당히 부끄러웠나 보네요.
“…언니 너무해요. 얼마나 무서웠는데….”
“그래서 싫었던 건가요?”
“…, …오히려 좋았어요. 그렇지만, 사과도 언니가 먼저하고…. 저는 한 게 없는 거 같아요. 이러려던 게 아닌데.”
질은 얼굴을 가린 손 틈 사이로 탈리안을 훔쳐보며 대답했어요.
부끄러워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네요.
사과하려고 했는데 왜 할 시간을 주지 않냐니, 중요한 일이기는 하지만 굳이 지금 말해야 하나 싶기도 해요.
조금 더 분위기를 탔어도 됐을 텐데요.
“걱정하지 않아도 질이 어떤 생각을 하고 여기에 왔는지 다 알게 됐으니 괜찮아요.”
“언니는 다른 사람이 뭘 생각하는지도 읽을 수 있어요?”
다 알고 있다는 말에 상체를 일으켜 놀란 눈으로 탈리안을 보며 물어보는 질이에요.
이걸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아, 그야 탈리안이 여러 방면에서 대단한 마녀라는 건 사실이지만요.
마음속까지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물론이죠, 마녀는 뭐든 가능해요…라고 말하고 싶지만. 농담이에요. 그래도 어느 정도는 알겠으니까, 이제는 괜찮아요.”
그렇죠, 당연히 읽을 수 있을 리가 없죠.
그랬다면 애초에 질과 말다툼을 할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평소에 농담이라곤 한 번도 하지 않던 탈리안이 웬일일까요?
농담과는 상관없이, 탈리안이 자기를 놀렸다는 사실에 시무룩해져서는 다시 바닥에 쓰러지듯 누워버렸어요.
“놀리는 것도 아니고…. 라피아 언니도 그렇고 다 나를 놀리기만 해…. 한 번이라도 이겨봤으면 좋겠는데.”
“질은 저 모르게 무슨 승부라도 하는 건가요?”
“그건 아닌데요….”
그건 아니지만, 무슨 마음인지 이해는 갑니다.
탈리안은 토라진 라피아를 억지로 일으켜 세워 아직 몸에 남아있는 리본을 다시 떼어주기 시작했어요.
“마저 풀어줄 테니까, 오늘은 라피아랑 그만 돌아가도록 해요. 저녁쯤에 부르러 갈게요. 그땐 아이펠슈에가 없으니까 같이 식사를 하기로 해요.”
“정말요? 알겠어요!”
“그리고…. 질이 싫다고 하니까, 지금 하고있는 임무는 최대한 빨리 끝내도록 할게요. 오래 안 걸릴 거에요.”
“아, 잠깐만요! 언니한테 건네줘야 하는 선물이 아직 하나 남아있어요!”
질은 머리띠를 제외한 모든 리본을 풀어버리고 일어서는 탈리안을 불러세웠어요.
준비했던 선물이 자신 이외에 하나 더 있었다는데, 지금까지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나 봅니다.
황급히 일어서서 탈리안의 책상 뒤로 달려가는 질의 머리 위에서는 질의 얼굴보다도 큰 리본이 좌우로 흔들거렸어요.
그 모습만으로도 탈리안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었어요.
“언니라면, 분명히 필요할 거 같아서, 여기 숨겨놨었는데!”
책상의 아래에 숨겨둔 선물을 꺼내오기 위해 바닥에 엎드리다시피 한 질은 힘겹게 말을 이어갔어요.
굳이 그 상태에서 말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요.
그만큼 빨리 탈리안에게 건네주고 싶은 걸지도 모르겠네요.
“여기요!”
질은 상자를 찾자마자 순식간에 탈리안의 앞에 다가와 두 손으로 건네주었어요.
상자는 탈리안의 손에도 한 손으로 잡힐 크기였어요.
머리 위의 리본은 여전히 크게 흔들리다가 그 움직임이 점점 잦아들었죠.
“꽤 아기자기한 상자네요. 지금 열어봐도 될까요?”
자신을 위한 선물일 텐데 굳이 물어보는 이유가 있을까요?
오히려 질은 탈리안이 자기 앞에서 선물을 열어보고 마음에 들어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걸 더 좋아할 텐데요.
당연하게도, 질은 크게 ‘물론이죠!’라고 답했어요.
이에 상자의 포장을 조금씩 뜯어가는 탈리안은, 내용물을 보고 멈칫했어요.
“…책갈피인가요?”
“그, 그게 원래 주려던 선물이었는데…. 마음에 안 들어요…?”
만월의 형상을 한 달이 장식으로 들어간 책갈피에는 고리 형식으로 달린 게 하나 있었는데.
고리의 끝에는 작은 손바닥보다도 작은 천 조각에, 질의 손등에 있는 것과 같은 노란 꽃이 자수로 그려져 있었어요.
이 책갈피에는 시중에서 파는 물건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이상하게 정성이 들어간 듯한 분위기가 담겨있었죠.
“이 꽃은, 파는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아, 제가 만들었어요! 마을이 무사했을 때에는 할 게 없어서 자주 연습하곤 했거든요.”
“…이걸 직접? 꽤 좋은 실력을 가지고 있네요. 고마워요, 소중히 할게요.”
꽤 놀란 표정을 한 탈리안은 주머니 속에 손을 집어넣듯, 허공에 팔을 뻗었어요.
쑥 집어넣는 듯한 팔은 그대로 알 수 없는 공간에 들어가 무언가를 쥐고선 그대로 잡아당겼죠.
신기하죠, 팔을 뻗으면 세계와 분리된듯한 경계면과 공간이 생겨, 자신만이 접근 가능한 공간을 만들어낸다니.
그 경계는 마치 유리 파편이 깨진 것처럼 공중에 흩날리다가 원하는 것을 꺼내고 나면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가듯 원래대로 돌아갔어요.
“항상 보던 거지만, 언니 마법은 조금 신기하네요….”
“이건 저만이 할 수 있는 마법이니까요.”
알 수 없는 공간에서 꺼내 든 것은 평소에 집에서 자주, 아니 항상 읽던 기괴한 느낌의 두꺼운 책이었어요.
탈리안은 책을 펼쳐, 선물 받은 책갈피를 끼워 넣고 접은 뒤에는 머리 위로 던져버렸어요.
갑자기 책을 던지는 것에도 질은 놀라지 않았는데, 공중에서 책이 보라색을 띤 안개의 형태로 변해 흩어져버릴 것을 알고 있었다는 눈치였어요.
“정말 가볼게요. 저녁에 보도록 해요. 아! 그 머리띠, 꽤 잘 어울려요.”
“아, 아아!? 잊고 있었…! 언니?!”
질은 부끄러움 때문에 한껏 소리쳤지만, 탈리안은 돌아보지도 않고 문을 건너는 동안 작게 웃으며 손 인사만 했죠.
그래도 질은 탈리안이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머리띠를 벗었어요.
“언니가 마음에 들어 했으면 됐지, 뭐….”
이건, 몰랐던 게 아니라 알고 있던 것 같은데요.
일부러 모르는 척을 했던 것 같네요.
밖에까지 질이 소리 지르는 게 들렸던 모양인지, 얼마 뒤 라피아가 들어왔어요.
“표정을 보니까 무사히 끝났나 보네?”
“언니 덕분에 잘 풀렸어요.”
질은 혹시라도 라피아가 볼까 걱정되어서인지, 머리띠를 허리 뒤로 감췄어요.
어차피 탈리안에게 보인 거, 라피아에게 보인다고 닳는 건 아닐 텐데요.
밤에 한 번 해봤다는 걸 보면 라피아에게도 보여줬을 테고요.
그렇다고 숨긴 걸 라피아가 보지 못했느냐면 그것도 아닌 것 같습니다.
일부러 못 본 척해주는 것 같아요.
“그것참 배가 아픈 소리인걸.”
“배가 왜 아파요?”
“그런 게 있어, 우리도 돌아가자. 고생했으니까 맛있는 거 해줄게.”
질의 질문에 대한 답은 내주지도 않고, 집으로 돌아가자는 라피아에요.
중요한 내용도 아니다 싶으니 질도 굳이 캐묻지는 않았죠.
“언니한테 맛있는 건 제 피밖에 없지 않아요?”
“오, 알고 있네? 맞아, 고생한 나한테 수고비로 피 좀 빨게 해주려고.”
의외로 단번에 정답을 맞힌 질에게 라피아는 뻔뻔하게 웃으며 말했어요.
그 웃음기가 담긴 얼굴은 평소에 라피아가 장난치기 직전의 것과 똑같았죠.
그래서인지 항상 그 장난에 당하기만 하던 질은 진심이 아니란 걸 눈치챘어요.
“…으, 언니 장난치지 마요.”
그렇지만 갑자기 질을 벽으로 몰아세워, 자신의 양손으로 벽을 짚어 도망갈 구석을 주지 않도록 공간을 좁힌 라피아에요.
“이게 장난으로 보여?”
그 후 이어지는 특유의 고혹적이면서도 내려앉은 목소리에 질은 침을 삼켰어요.
“…진짜예요?”
그 분위기에 삼켜져 어깨를 움츠리고, 고개를 반쯤 숙여, 조심스레 물어보는 질이었죠.
그러자 라피아는 한 손으로 질의 턱을 살짝 쥐어 목이 잘 보이도록 틀고선 입을 가까이에 가져다 댔어요.
“어, 언니…! 여기서는!!”
질은 저항하려 해도 라피아를 향해 폭력을 휘두를 수도, 휘두른다고 이길 수도 없으니 가만히 있어야만 했죠.
“장난이야.”
그리고 질의 목에 라피아의 입술이 닿자마자, 라피아는 두 손을 떼고 두 걸음 물러나며 장난이라 말했어요.
온몸에 힘이 들어가 잔뜩 긴장 중이던 질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어요.
“진짜아…! 언젠가는 탈리안 언니도, 라피아 언니도 다 이겨 버릴 테니까아아!!”
억울함에 서러움까지 폭발한 건지, 질은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건물 전체가 울리도록 소리쳤어요.
뭐…. 언젠가는 이길 수 있겠죠.
언젠가는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