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64화 (64/189)

〈 64화 〉 별거 (3)

* * *

“큭큭, 푸흐흐! 아~ 정말이지, 이렇게 긁어놓을 줄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야~”

흡혈이 끝난 후, 라피아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등을 살펴보면서도 흘깃거리며 질을 훔쳐봤어요.

질은 구석에 있던 그대로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라피아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있었죠.

계속 혼자서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모습에 라피아는 피식하고 웃더니 능글거리는 웃음기를 담고 질에게 말을 걸었어요.

“꽤 따가웠다니까, 지르니트?”

“으아아! 죄송하다고 했잖아요!? 그만 해요!!”

질은 따가웠다는 말에 거의 경련을 일으키는 것처럼 떨고선 크게 소리쳤어요.

애초에 라피아가 거울을 보고 있던 건, 흡혈 도중 질이 등을 실컷 긁어놨기 때문이에요.

처음에 겪어보았던 흡혈 행위는 라피아의 배려로 그 시간이 길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돈 대신 받아 가는 것이기도 하니 제대로 했던 거겠죠.

그만큼 들인 시간도 길고, 기분 좋았던 감각이 점점 커져서 질 스스로 제어가 안 되니 무심코 손에 힘이 들어갔던 거에요.

“뭐, 이정도야 몇 시간이면 다 회복되니까~ 풉!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진짜 너무해요…. 처음 할 때는 이렇게 오래 빨지는 않았잖아요!”

계속되는 놀림에 질은 거의 울먹이듯이 소리쳤지만, 라피아는 마냥 즐겁다는 듯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어요.

그리고는 삐져있는 질이 신경 쓰였는지 옷을 고쳐 입고 뒤에서 안아주어, 귀에다 대고 속삭였어요.

“이래 봬도 나름대로 양도, 시간도 조절해서 빨아간 건데? 그래서, 별로였어?”

“조, 조오, 좋지 않았어요!! 완전 별로!!”

당연히 소름 끼칠만한 그 말에 당황하며 잘못 말할 뻔한 질은 더 격하게 부정했어요.

“귀엽기는, 앞으로 3일마다 반복할 텐데 기대되네.”

“…아? 저, 저 역시 다른, 다른 곳에서, 지낼만한 곳을 찾아봐야 할 거 같아요!”

3일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말을 더듬으며 라피아의 팔을 뿌리치며 일어났어요.

그렇지만 당장에 라피아를 제외하고는 당장 머물 곳을 제공해줄 친구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죠.

게다가 라피아가 손을 써놨기에, 질은 라피아의 방에서 지내는 거로 학원에 알려졌을 거예요.

새로 사귄 친구가 몇 있을 테지만 이미 알려진 상황에 다른 사람의 방에서 머물 수도 없는 노릇이죠.

“너무 걱정하지 마, 하다 보면 익숙해질 거야. 그리고 씻고 나와 나랑 진지한 대화 좀 하자.”

“진지한 대화? 아직 할 말이 남아있어요?”

“어, 제일 중요한 게 남아있어. 그러니까 얼른 갔다 와.”

아직도 할 말이 남았냐고 물어보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바로 씻으러 가는 걸 보면 뭔가 씻어야 할 일이 있었나 보네요.

라피아에게서 재촉받아서 어쩔 수 없이 화장실에 들어가는 질이에요.

그런데 들어간 뒤로 물소리가 잠깐 나다가 그치더니, 문이 살짝 열렸죠.

“언니, 저 가방 안에서….”

“속옷? 아래만 가져다주면 되는 거지?”

“아, 고마워요….”

고개를 내민 질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원하는 것을 정확히 집어낸 라피아는 바로 속옷을 가져다주었어요.

열린 문틈 사이로 속옷을 건네받은 질은 다시 한번 고맙다고 말하며 문을 닫았어요.

하지만 곧 문 안쪽에서 ‘응? …으응?’이라는 소리가 잠깐 들려오더니 이내 다시 물소리가 들려왔죠.

다 씻고 난 뒤의 질이 나오자 한 말은 라피아가 어떻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맞추었는가에 대한 의심의 말이었어요.

“…생각해보니까, 언니 어떻게…. 어떻게 알고 있던 거에요?”

“응? 뭐를?”

제대로 들어놓고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며 침대에 기대앉아있는 라피아에요.

그야 어떤 걸 알고 있냐고 하는지 말하지 않았으니 라피아가 이렇게 되묻는다고 해도 질은 할 말이 없긴 하죠.

다시 제대로 물어보는 수밖에요.

“모르는 척하지 마세요! 속옷이요! 어떻게, 그, 언니!! 제가 뭘 말하는지 알잖아요?!”

질의 손에 손빨래를 마친 후의 속옷이 들려있는 걸 보면 갈아입어야 할 이유가 있던 것 같은데….

하고 싶은 말인즉, 어떻게 갈아입어야 했던 건지 알고 있었냐는 거겠네요.

어떻게 알고 있던 것일까요, 궁금하네요.

“내가 냄새를 좀 잘 맡거든.”

모기 같은 걸까요?

맛있는 피 냄새를 잘 맡는 것처럼 피뿐만 아니라 다른 냄새도 잘 맡는다는, 그런 뜻인가요?

그런데 라피아의 말을 듣고 난 뒤의 질의 표정이 또 하얗게 질려있네요.

“그, 그럼…. 처음 했을 때에도…?”

“처음에? 아, 그랬던가? 기억이 안 나는데.”

“하아…. 그래서 할 말이 뭔데요?”

뭐가 그렇게 다행인 건지, 라피아의 말을 듣자마자 잔뜩 긴장했던 표정을 풀고 자리에 앉는 질이에요.

뭔지는 몰라도 상당히 중요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나 봐요.

라피아는 궁금증이 다 풀렸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질을 보고 나서야 제대로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먼저…. 중요한 건 이거야. 너, 마녀랑 언제 화해할 거야?”

“…, 저도 몰라요.”

질문에 한참을 고민하다가 어렵사리 꺼낸 말은 모른다는 대답이었어요.

설마하니 라피아가 자신에게 먼저 사과하라고 할 줄은 몰랐을 거예요.

화해의 방법도 모르고 있을 테고요.

만족스럽지 못한 대답이 나와서인지, 라피아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어요.

“마녀랑 몇 번을 말다툼해도 너는 마녀를 좋아할 거라며? 한번 틀어지기 시작하면 끝없이 틀어지는 게 사람 간의 관계야. 할거라면 빨리하는 게 좋을걸.”

“그렇지만, 이번에 제가 언니한테 소리친 것 때문에…. 언니도 많이 화났을 거예요….”

그렇다고 아예 화해할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네요.

화해는 하고 싶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앞에 서서 얼굴을 마주하며 말하기에는 탈리안이 화가 나 있을 것 같아서 무섭다는 게 질의 생각이었어요.

이쯤 되니 라피아는 질이 무엇 때문에 쫓겨났는지 점점 궁금해지기 시작했죠.

뭘 어떻게 말했길래, 탈리안의 방에서 쫓겨나게 되었는지.

“애초에 걔는 왜 너를 방에서 내쫓은 건데? 어느 부분에서 화가 난 거야?”

“조금 길어질 텐데…. 괜찮아요?”

“아침에 네가 찾아왔을 때부터 일정은 다 비워놨었으니까, 편하게 말해.”

아침에 봤을 때도 그렇지만 너무 익숙하다는 듯이 하루의 일정을 모두 비워놨다는 것은….

질과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이렇게 잘 대해줄 필요가 있나 싶네요.

예전에는 피가 맛있어서, 음식으로 보는 게 아니냐는 탈리안과 질의 감상이 있었지만….

이제 와서는 식욕을 넘어서 애욕의 범주에 들어선 느낌이네요.

어쨌든 라피아의 배려에 질은 오늘 있던 일들을 전부 이야기했어요.

하나부터 열까지, 손짓까지 해가면서요.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구나.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는 이해했어. 탈리안이 왜 충격을 받았는지도 말이야.”

“…언니가 충격을 받았다구요? 딱 봐도 화를 내는 것처럼 보였었는데?”

“바보 같기는, 마녀는 예전에도 네가 마지막 남은 가족과도 같다면서 뭐라 했었는걸. 그런 너한테 화를 낸다고? 이번 일은 단순히 네가 집을 나와 지낸다고 해서 마녀가 충격받은 게 전부야. 내가 제안하기도 했으니까 내 잘못도 절반 정도 있겠네.”

“집을 나온다고 해서…?”

그럴 수 있겠네요.

마음에 들지 않는 손님이 집에서 머물러야 한다고 유일한 가족과 같은 질이 가출해버린다면,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요.

가출이라 표현하기엔 조금 그렇지만, 10살인 어린 아이가 처음으로 한 반항적인 일이니까요.

무엇이든 처음 겪어보는 충격은 그 여파가 다른 일들보다 더 와닿을 수밖에 없어요.

‘지금까지 흠잡을 데 없이 착했던 질이 가출을?’

‘내 행동을 그렇게 잘 이해해주던 질이 이번엔 이해해주지 않았다고?’

…라고 생각했다면 탈리안이 묵직했던 책을 떨어트린 것도, 그렇게 말을 더듬었던 것도 이상할 일은 아니죠.

“집에 온 손님이 싫다는 이유만으로 집을 나온다고 할 줄은 마녀조차 생각 못 했던 일이겠지, 게다가 이제 막 10살이 지난 애가 집 말고 지낼 곳이 어디 있다고? 낮에 그 실리아인가? 분신이 날 봤었으니까 엄청나게 원망하고 있을걸. 왜 순진한 너를 속여넘겨서 집에서 나오게까지 했냐면서 말이야.”

제삼자의 관점에서 바라보았기 때문인지 라피아가 하는 말은 정확했어요.

별다른 첨언이 필요 없을 정도로요.

그렇지만 질에게는 아녔나 봐요.

하긴, 질은 평소에 자신이 알고 있던 탈리안의 이미지가 있을 테니까요.

아직 다 알지 못한, 숨겨져 있는 탈리안의 뒷모습과 속 모습은 둘째치더라도요.

“그건 아닐 거 같은데요? 탈리안 언니가 저에 대해서 좀, 그런, 과보호하는 게 있다는 건 알지만요…. 저 때문에 누군가를 미워할 정도까지는….”

“너 저번에 성장했던 몸을 되돌리기 위해서 약을 먹었던 날, 나랑 마녀랑 몸싸움한 걸 못 봐서 그래. 그 마녀가 질투가 얼마나 심한지 넌 모르지?”

“모, 몸싸움까지 했었어요…?”

처음 듣는 이야기에 질은 눈을 동그랗게 떴어요.

그때야 싸웠다는 사실을 알려서 좋은 것이 없으니 숨겼었지만, 이제는 말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했겠죠.

그때 바로 말했다면 질에게 ‘싸움은 나쁜 거예요!’라며 잔소릴 들었겠지만, 지금의 질에게는 그럴 여유가 없거든요.

어떻게 해야 탈리안의 기분 나쁜 상태를 풀어줄지 걱정하느라 바쁘잖아요.

“뭐어, 거기에 같이 어울려서 싸워버린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그 마녀, 너랑 관련해서는 질투심이 상당해.”

“그 말은, 언니도 저를….”

갑자기 들려오는 날카로운 말에 한껏 당황한 라피아에요.

질투로 인해 몸싸움까지 했다면 라피아 역시 질에게 보통 이상의 호감을 느끼고 있다는 말이니까요.

“어, 어!? 아니, 물론? 친구로서는 좋아하지? 친구로서는 말이야! 친구로서는!”

다만…. 아직은 속마음을 들키는 게 부끄러운지, 같은 말만 3번 반복해서 말하고 있네요.

그 다급한 모양새를 한 라피아를 보고 질은 어깨를 축 늘어뜨렸어요.

“그렇게까지 부정하면 상처받는데….”

“아아! 어쨌든, 질! 내일 같이 가서 마녀에게 말하자, 네가 했던 말이 마녀가 싫어서 그렇게 말했던 건 아니라고.”

“이미 밉다고 했었는데…. 알았어요.”

그랬었죠.

분명히, 라피아의 집에 들어올 때였나요?

‘지금은 약간 언니가 미워요.’라고 했던 일이 있었으니까요.

“그건 별거 아니야! 깊게 생각할 거 없이 그때보다 몇 배는 더 좋아한다고 해주면 돼!”

틀린 말은 아니네요.

이미 입 밖으로 꺼낸 밉다는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으니, 그때보다 더 좋아한다고 말해주면 되는 거예요.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 신경 쓴다면 그 순간부터 그 말은 힘을 잃어버릴 테니까요.

그냥, 무작정 좋아한다고만 몇 번이고 말해주면 되는 거죠.

하지만 탈리안과의 일을 어떻게 처리할 건지에 대해서 대충이나마 방향이 잡힌 둘은, 급한 일이 해결되자마자 순식간에 말이 없어졌어요.

그야 당연한 게 질은 평소라면 푸념을 늘어놓고 이미 집으로 돌아갔어야 할 시간이거든요.

그런데 아예 며칠, 길어지면 몇 달간 여기서 지내기로 했으니….

라피아에게서 빌려야 할 물건과 짐의 정리를 끝마치고 나면 할 일이 없었으니까요.

친한 건 친한 거고, 일정을 다 빼버려서 할 일이 없는 건 없는 거예요.

둘 다 양털 러그가 깔린 바닥에 누워 천장만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서로 눈치만 보다가 심심하고 지루한 걸 참지 못해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라피아였죠.

“있잖아, 질.”

자신을 부르는 말에 고개만 옆으로 돌려 바라보는 걸 보니 꽤 움직이기 귀찮은가 봅니다.

하기야 이렇게 쉬는 날이 얼마나 있었겠어요? 최근 의뢰다, 마기노다, 장례식이다 해서 바쁘고 피곤했을 테니까요.

“그 뒤로 흑기사는 어때?”

“세르디어요? 수행이 부족한 거 같다면서 한 달의 시간을 달래요.”

다행히도 흑기사가 마기노에게 죽는 일은 없었던 것 같네요.

그런데 수행이 부족하다기엔 계약한 지 얼마 안 된 소환수로서는 충분히 잘 싸운 게 아니었을까요.

이건 누구나가 다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소환수가 뿔 3개짜리랑 싸워서 살아남은 것만 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죠? 저는 아무리 공격해도 막는 것조차 못했었는데, 세르디어는 시간을 벌어다 줬잖아요. 자기만 모르는 거 같아요, 세르디어는 이미 엄청나게 강하다는걸.”

어쩌면 실력 면으로 보면 계약자인 질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탈리안의 도움이 있었다지만, 그런 소환수가 어떻게 질과 계약한 건지 신기할 정도네요.

“근데 너 장례식에서 이런 말도 했지 않았던가? 새로 계약한 소환수가 하나 더 있었는데 마기노를 보자마자 소환을 강제로 끊었다며.”

“릴리아는…. 제가 무리한 부탁을 했던 거니까요. 그때 당시에는 릴리아가 미워서 계약을 끊을까 고민도 했었어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제가 멍청했었던 거니까….”

급박한 상황이니 뭐든 해야겠다는 생각에 판단을 잘못한 거죠.

소환에 제대로 응해주었다고 해도 릴리아가 제대로 싸워주었을지는 굳이 보지 않더라도 알 수 있으니까요.

그 앞에 섰다면 마을이 전멸당했을 때처럼 한순간에 공격당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겁니다.

“멍청하기는 뭐가 멍청해, 살려면 뭐든 해야지.”

“그건 맞지만, 그래도 제 실수인 건 몇 번을 다시 생각해봐도 변하지 않더라구요.”

“그래도 흑기사를 잃지 않아서 다행이네, 난 또 마기노랑 만났다길래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었지, 장례식에서는 네가 너무 슬퍼해서 말도 못 걸겠더라고.”

라피아도 제르반의 장례식에 참가했었나 보네요.

뭐, 스쳐 지나가는 인연이었더라도 라피아도 제르반과 미궁에서 한번 싸웠었으니까요.

그런데 말을 들어보면 장례식에서 질이 남들 보기 흉할 정도로 실컷 울었었나 봅니다.

당장에 라피아의 반대 방향으로 돌아눕는 질의 반응을 보더라도 알 수 있죠.

“이, 잊어주세요…. 제르반 오빠 때문에 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요.”

“놀리는 거 아니야, 오히려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는걸?”

“대단하다구요? 제가?”

평소처럼 놀리는 게 아닌가 싶던 질은 의외의 말에 몸을 휙 돌려 라피아를 바라봤어요.

말투에서도 거짓이 아니라는 게 느껴져서 그렇겠죠.

“으응…. 말했지 않았던가? 나도 마기노한테 가족이랑 동족들을 다 잃어버렸다고 했잖아. 나는 그 기억이 떠오르면 아직도…. 응, 조금 힘들어. 그런데 넌 다시 한번 마기노랑 마주쳤는데도 맞서 싸우기도 했잖아.”

라피아의 말대로 자신이 두려워하는 대상과 맞서는 것은 대단한 일이에요.

질만 하더라도 끝에는 제르반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지만, 처음에는 공포에 떠느라 아무것도 못 했잖아요?

저항 할 수 있는 무기와 힘을 줄 테니 맹수와 싸우라고 하면 누가 알겠다고 하겠어요.

이길 수 있는 싸움이라고는 그 누구도 말하지 않았는걸요.

“언니는, 못할 거 같다는 말이에요?”

“나는 마군주를 하나 마주쳤거든, 마기노를 이끄는 우두머리 같은 녀석들 말이야. 강의 들어봐서 알잖아?”

“알죠, 마기노 하나만으로도 그렇게 강했는데 마군주라면….”

“그, 뭐야, 뱀파이어는 수가 적은 대신 엄청 강하니까…. 마기노한테는 어느 정도 버티는 게 가능했는데, 뒤에서 구경만 하던 마군주 놈은…. 다 죽고 내 앞에 선 그때 보니까 알겠더라, ‘아, 이 녀석은 내가 손끝 하나 건드리지 못할 괴물이다.’라고. 정작 나는 숨어있다가 들킨 것밖에 한 게 없지만.”

힘없이 말하는 라피아의 모습에 질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빤히 쳐다보기 시작했어요.

갑자기 대꾸도 안 하고 반응이 사라진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질에게 이상함을 느낀 라피아도 상체만 일으켜 앉았죠.

“왜?”

“아, 그게…. 아, 안아줄까요?”

질은 쭈뼛거리며 양팔을 벌리며 물어봤어요.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듣고 라피아는 머릿속이 백지상태가 되었죠.

질이 취한 자세도 엉성하기 짝이 없어 꽤 볼만했죠.

“…뭐? 흐, 푸흣, 푸후흐! 피를 빨게 해준다면 생각해볼게.”

그래도 라피아에게는 역시 피가 제일 좋은 선물이겠죠.

질이 거부할 거라는 걸 알고도 말한 건 놀릴 생각이 가득하다는 거고요.

“그건 안 돼요! 오늘분은 이미 했잖아요! 또 씻는 것도 싫고….”

“기분은 좋았잖아?”

“언니!!”

소리만 칠 뿐이지 부정은 않는데, 확실히 기분은 좋았나 봐요.

싫었다면 거절부터 했을 테니 부끄러워서 이러는 거겠죠.

몽롱한 얼굴로 야릇한 소리를 내면서, 라피아를 힘껏 끌어안고 등을 긁어놓기까지 했으니….

나이에 안 어울리는 외설스러운 짓이기는 합니다만, 어쩌겠어요.

본인이 상관없다고, 하고 싶다는데.

“장난이야, 근데 안기는 것보단 내가 안는 게 더 좋을 거 같아.”

“저보고 안기라는 거에요?”

“응, 이리 와.”

질은 안기라는 말에 다가가려다가도 이리오라는 말에 흠칫거리며 멈춰 섰어요.

라피아는 멈춰선 질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보자 몰라서 그러냐며 잔소리를 들었죠.

“그 ‘이리 와’는 안 하면 안 될까요…? 피를 빨 때가 떠오르는 말이라서 좀, 부끄럽단 말이에요….”

“하항~ 그런 거였어? 익숙해지면 괜찮아질 거야. 어쨌든 얼른 와서 안겨!!”

“에휴….”

한숨을 내쉬며 아까 전의 자신처럼 양팔을 벌린 라피아의 품에 스스로 들어가 안기는 질이에요.

앉아있는 라피아의 몸에 딱 맞게 들어가는 걸 보면, 인형과도 같이 보입니다.

탈리안에게 하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투덜거리면서도 라피아에게도 잘 따르네요.

볼을 만져지거나, 머리를 쓰다듬어지는데도 가만히 있잖아요.

“있잖아, 안기자마자 미안한데. 쇼핑하러 나가지 않을래?”

“쇼핑이요?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고, 아까부터 생각하던 건데. 사과를 할 거라면, 선물도 하나 필요하지 않을까? 겸사겸사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네 기분도 풀고, 옷도 사줄게.”

성의를 표하려면 물질적인 무언가를 선물해주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죠.

역시라면 역시겠지만, 끝에 질을 챙기는 걸 보면 라피아가 질을 좋아하는 건 확실해졌어요.

무슨 계기가 있었길래 식욕에서 애욕으로 바뀌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탈리안 언니한테 줄 만한 선물…. 저는 책밖에 모르겠어요.”

“그러니까, 내가 옆에서 도와줄 테니까 같이 고르자는 거야. 솔직히 그 마녀에게 좋은 일은 해주고 싶지 않지만, 빚진 것도 있고 네가 그렇게 축 쳐져 있어서야 마녀에게서 빼앗는 맛도 없고.”

“빚?”

“약 말이야, 약. 어쨌든 나가자! 준비해!”

라피아의 손에 억지로 끌려 일어나게 된 질은 간만의 휴식이 방해받았는데도 불만 없이 입을 옷을 가방에서 꺼내 고르기 시작했어요.

온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만 있어도 행복할 것만 같았는데…라는 불만 섞인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요.

“내 생각에 탈리안은 굳이 책이 아니더라도 네가 주는 선물이라면 다 좋아할 것 같은데.”

“정말요? 그래도 딱히 생각나는 건….”

“평소에 탈리안이 뭐하고 지내는지, 불편해 보이는 건 없는지, 가지고 싶어 하는 건 없었는지 생각해봐.”

옷을 늘어놓는 질의 옆에 다가와서 어떤 선물을 줄지에 대해서 고민해보라는 라피아에요.

“어차피 놀러 나갈 거라면 귀찮으니까 항상 입던 거로….”

“어허! 질, 아무리 그래도 학원 제복은 아니지!”

“아, 네에….”

그러면서 제복을 고르려던 질을 뜯어말리고는 직접 옷을 골라주기 시작했죠.

라피아가 집어 든 옷은 성장한 질의 몸에 맞춰서 탈리안이 다시 만들어준, 검은색 원피스였어요.

맞아요, 질이 탈리안의 집에 처음 왔을 때 선물 받은 옷 중 하나였죠.

리본도 예전과 비교해 훨씬 커져 있어 나름 포인트를 만들어 귀여움을 챙겨준 느낌이었어요.

“아….”

“왜 그래?”

“아니에요, 금방 갈아입을게요.”

애써 괜찮은 척을 하지만, 누가 봐도 처음에 탈리안의 집에 왔던 때가 기억났을 거예요.

한층 어두운 얼굴을 한 채로 옷을 갈아입는데 라피아가 눈치가 없는 사람도 아니니까요.

적어도 지금 입는 원피스와 관련해서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것만큼은 알겠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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