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 별거 (2)
* * *
실리아에게 붙잡힌 질은 그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은근히 힘을 써봤지만, 당연하게도 쉽게 놔주지 않으려고 했어요.
어쩌다 보니 도망치려는 라피아를 잡게 된 실리아였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음에도 하지 못하는 그런 눈치였죠.
“언니, 잡는 힘이 조금씩 세지는 것 같은데, 아파요…!”
실리아가 잡은 팔을 풀어줄 기미가 보이지 않았는지, 질은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팔을 놔달라고 했어요.
핑계라니 듣기 안 좋지만, 실리아가 놔준 팔을 문지르는 걸 보면 생각보다 세게 잡고 있던 것은 맞았던 것 같으니까요.
그걸 보고는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라며 바로 사과하는 실리아에요.
“아, 미, 미안해요! 아프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탈리안이 지금, 꽤 충격을 받은 것 같아서 저도 영향을 받았나 봐요.”
“괜찮아요, 저한테 할 말이 있던 거 아니에요?”
탈리안이 충격을 받았다는 말에 잠시 생각에 빠지나 싶더니, 실리아의 눈과 시선을 맞춰 용건을 묻는 질이에요.
질도 방금 있던 일에서 탈리안과 비슷하게 기분이 상할만한 부분이 있었나 보네요.
박수를 칠 때, 한 손으로 소리를 내며 박수를 칠 수 있던가요? 아니에요.
두 손이 있어야만 소리를 낼 수 있죠, 탈리안만 기분이 나쁠 리가 없어요.
“탈리안이, 지금, 그러니까….”
“언니, 이런 말은 안 하려고 했는데…. 전부 같은 언니라지만, 이런 때에 탈리안 언니가 아니라 실리아 언니가 대신 말하려는 건 비겁해요.”
어쨌거나 변명의 말을 시작하려던 실리아는, 그대로 질이 말을 가로채는 것에 의해 말문이 막혀버렸어요.
질의 말이 그대로 가슴에 날아와 꽂히는 느낌일 거예요.
비겁하다는 말까지 써가며, 질이 자신에게 대드는 것은 처음 보는 장면일 테니까요.
덕분에 잠시뿐이지만 실리아까지 심각한 수준으로 말을 더듬게 되었어요.
“비, 비겁…?”
“…언니가 어떤 말에 기분이 나빠졌던 건지 모르겠지만, 제가 말실수한 건 죄송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방에서 내쫓을 필요까진…. 없었던 거 아니에요? 제대로 사과하려 했는데, 막무가내로….”
질의 말대로 억울할 수밖에 없었네요.
뭐 때문에 기분이 상했는지조차 알려주지 않고, 사과한다고 해도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도 않았으니까요.
억울한 이유가 부실하다고 생각되시나요?
먼저 질은 탈리안을 위해서 라피아의 집에 머물기로 하며, 자신의 자리를 양보해주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해요.
상대하기 싫은 아이펠슈에에게 나가라 하기엔 탈리안의 입장도 있으니 그것을 생각하고 억지를 부리지 않고 피해준 거죠.
탈리안과 같이 있고 싶은 마음을 잠시나마 접어두고 불편하겠지만 다른 곳에서 지내겠다는 결심까지 했는데, 돌아오는 게 대답도 해주지 않고, 사과할 기회도 없이 방에서 쫓겨나는 일이라면….
질이 아닌 누구라도 억울하고 기분 나쁠 게 분명할 거예요.
“그렇지만, 질! 탈리안도 질이 한 말에…!”
“제 말에 실수가 있었다면 사과하겠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제 말을 들어주지도 않고 내쫓은 건 탈리안 언니라구요!!”
억울함과 분노가 섞인 소리를 지르는 질이었어요.
단 한 번도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는 실리아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가 겨우 힘겹게 입을 열었지만….
제대로 된 말도 아닐뿐더러 탈리안을 불러오겠다는 말이었어요.
“미, 미안, 해요…. 탈리안을 불러올게요….”
하지만 그마저도, 실리아가 탈리안의 방으로 향하려는 순간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질이 손목을 잡은 채로 가지 못하게 멈춰 세웠죠.
그리고는 웬만한 말에도 상처를 입지 않을 실리아가 주눅이 들 말을 하기 시작했어요.
“괜찮아요, 그러지 않아도 돼요. 그냥, 그냥…. 항상 언니가 좋지만, 지금은…. 지금은 언니가 약간, 미워요….”
말을 마치자마자 열쇠를 문에 꽂아 넣고 반대편으로 건너가는 질을, 실리아는 붙잡을 수 없었어요.
그 너머가 라피아의 방이라는 것을 아까 한번 보았기 때문에 알고 있음에도, 손을 뻗는 것조차 할 수 없었죠.
문이 열리는 닫히는 소리를 듣자마자 라피아가 벽 뒤로 얼굴을 내밀어 질을 확인하고선 인사를 건네오는 듯했지만….
“어, 왔…. 어? 우, 울어!? 왜?! 무슨 일이야?!”
눈물을 흘리고 있는 질의 모습에 순식간에 달려와 안아주는 라피아였어요.
무슨 일이냐고 물어보아도 대답하지 않고 힘껏 소리를 억제하며 울기만 했죠.
어쩔 수 없이 진정을 되찾을 때까지 라피아는 한참이나 질의 등을 토닥여주었어요.
“탈리안…. 언니가, 기분이 안 좋다고, 방에서 내쫓아서….”
“뭐? 이 마녀가 진짜!! 애가 며칠 친구 집에서 지낼 수도 있는 거지…! 그렇다고 애가 지내던 방에서 내쫓을 것까진 없잖아! 가자! 문 열어! 가서 따끔하게 한마디 해줄 테니까!”
“아, 아니에요! 제, 제 방이 아니라…. 언니의 방에서 이야기하다가, 쫓겨난, 거라서…. 나중에, 나중에 제대로 다시…. 차분하게 대화하기로 했어요….”
엉뚱한 오해를 살뻔한 질은 황급히 말을 고쳐 라피아의 말을 부정했어요.
아무리 탈리안에게 억울한 일을 당했다 하더라도 쓸데없는 오해까지 받게 하는 건 심하다고 생각할 테니까요.
무엇보다 질이 그 정도로 탈리안을 싫어하게 된 것도 아니고요.
질의 말을 듣고 난 뒤의 라피아는 머리를 긁적였어요.
열심히 편을 들어주며 화까지 내주었는데, 착각한 거라니 그럴 만도 하죠.
“아, 아…. 그래? 그래도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나 마녀랑 네가 싸운 건 처음 봐서 그래.”
“괜찮아요, 정말…. 말다툼을 몇 번을 하더라도 저는 여전히 탈리안 언니가 좋으니까요.”
“…질, 네가 나랑 친한 애라서 욕 안 먹은 줄 알아. 후…. 짐은 딱 봐도 그 가방 안에 있는 게 전부 같아 보이네, 배는 안 고파?”
어이없는 대답에 질렸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아무것도 먹지 않은 질을 걱정해주는 라피아에요.
아침에는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에 의해서, 점심에는 라피아의 방에 가서 푸념을 늘어놓느라.
오늘 하루 여러 일이 있어서 질은 약간의 군것질 말고는 끼니를 제대로 먹었을 때가 없으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언니한테 그런 식으로 대해져서 그런지, 식욕이 없어요….”
“식욕이 없으면 어쩔 수 없지…. 짐은 내가 따로 집에서 쓰던 수납장 하나 가져왔거든? 뒤에 저 까만 거 보이지? 저기다 넣으면 돼.”
라피아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거의 냉장고만 한 크기의 수납장이 있었어요.
정작 질이 들고 온 짐의 양을 생각하면 반절을 채울까 말까 했다는 게 문제였죠.
그렇지만 그 외에도 질의 눈에는 다른 게 더 중요하게 보였나 봐요.
예를 들자면, 수납장 옆으로 커다란 박쥐 날개가 장식으로 달려있다든가 하는 것 말이에요.
“…언니 진짜 귀여운 거 좋아하는구나, 특히 박쥐.”
“뭐, 뭐 잘못됐냐! 나도 귀여운 거 좋아할 수도 있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발끈하는 라피아를 외면하면서 질은 딴청 피우는 척을 했어요.
귀여운 걸 좋아하는 게 뭐가 잘못됐다고 저렇게 소리칠 것까진 없다고 생각하는데요.
질 역시 같은 생각인가 봅니다.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언니 말처럼 좋아할 수도 있죠, 뭐…. 그냥 언니 처음에는 수줍음 많은 친구처럼 보이다가, 이제는 듬직해 보이는 언니처럼 보여서….”
“안 어울린다면 안 어울린다고 해, 괜찮으니까.”
“아니에요, 잘 어울려요.”
거의 삐지기 직전의 라피아를 달래기 위해 질은 잘 어울린다고 말해야만 했어요.
그 말에 작은 소리로 ‘그, 그래?’라며 대답하는 라피아였죠.
어째선지 상황이 뒤바뀐 것 같네요.
위로받거나 달래줘야 할 대상이 라피아로 변한듯한….
“…쳇, 놀리기는. 어쨌든 다음, 다음으로 잠자리에 대해서는 선택지가 두 개 있는데 불편한 거랑 편한 거. 어느 게 좋아?”
“선택지가 왜 그런 거예요? 보통은 불편한 걸 골라서 좋아질 게 없지 않아요?”
“쯧쯔쯔, 저마다 장점이 있는 법이지! 불편한 건 내 온기를 느낄 수 있고, 편한 건 자리를 넓게 쓸 수 있다는 거?”
라피아는 검지만 펴서 흔들며 질에게 뭘 모른다는 듯이 말했어요.
그렇지만 장점이라고는 해도 그다지 매력이 없거나 당연한 것들 아닌가요?
온기를 느낄 수 있다는 건 같이 자겠다는 뜻이겠지만, 라피아의 침대가 그렇게 큰 건 아니라 정말 불편할 것 같은데요.
정말 억지로 장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탈리안과 다투고 나온 질이 혼자가 아니라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것 정도?
“언니의 온기…? 언니 알몸으로 자는 거 생각하면 저 혼자 자는 게 나을 거 같은데요….”
아, 질이 말한 것도 있었죠.
항상 질이 라피아의 방에 찾아올 때면 익숙하다는 듯이 알몸으로 자고 있던 라피아.
조금, 아니 상당히 질의 교육에도 좋지 않을 것 같아요.
“야, 야! 아무리 그래도 같이 지내면 알몸으로 자는 건 그만둘 거야! 머, 뭐, 뭔데?! 그 못 믿겠다는 눈빛은!!”
“으응…. 나머지 하나는 따로 자는 거죠? 그걸로 할래요.”
“아, 진짜! 아니라니까?! 나 알몸으로 자는 거 그만둘 거라고!”
“네, 저는 언니를 믿어요.”
그야, 신뢰가 없는 건 당연하죠.
한두 번도 아니고, 찾아올 때마다 매번 알몸을 보여줬었는데요.
그 횟수가 얼마나 많은지는 몰라도 질의 반응을 본다면 고쳐지지 않을 게 분명한 버릇일 거예요.
“하아, 알았어. 이불 까는 거랑 덮는 거 하나씩 준비해뒀으니까…. 나중에 확인해봐.”
“근데 정말 여기서 지내도 되는 거예요? 언니는 제가 여기 있으면 안 불편해요?”
“응? 응…. 아마도? 이번엔 특별히 아버지 힘을 빌렸거든, 웬일이냐고 기뻐하면서 도와주던데? 그리고 전에도 똑같이 말했지만, 불편한 걸 참는 대가로 피를 빨겠다고 했었잖아?”
“앗, 아…. 그랬죠.”
라피아는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어요.
당연히 피를 빤다는 말만 나오면 예전에 있던 일을 생각해내는 질은, 손으로 자신의 목을 감싸버렸죠.
어지간해선 잘 겪지 못할 부끄러운 일이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피를 빠는 건 3일에 한 번으로 할까 해. 너무 자주 해도 너나 나한테 좋을 건 없고….”
“아, 다, 다행이네요….”
“응, 그러니까 이리 와.”
슬며시 목에서 손을 떼던 질은 화들짝 놀라며 라피아가 양팔을 벌리는 것을 봤어요.
설마하니 바로 피를 빨겠다고 할 줄은 몰랐을 테니까요.
“그, 그러고 보니까! 언제까지 있어도 되는지는 얘기하지 않았잖아요?!”
“있고 싶은 만큼 있어도 돼, 보아하니 마녀나 그 동료나 중요한 임무를 수행 중인 상태라며? 짧은 시간 안에 끝나진 않을 테니까. 한…. 두 달에서 세 달까지는 괜찮아.”
‘이렇게까지 두려워할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구석으로 도망가버리는 질이에요.
그렇지만 그런 작은 저항들도, 라피아가 순식간에 코앞까지 다가오는 것으로 의미 없는 행동으로 변해버렸어요.
당황해서 도망갈 구석을 열심히 찾아보지만, 있을 리가 없었죠.
“어! 언니! 너무 가까운데요!? 지금 말고 나중…! 히이익?!”
완전히 구석에 몰려, 자신보다 더 큰 몸집으로 도망칠 곳조차 없애버린 라피아는 질의 목을 천천히 한번 핥아냈어요.
질이 소름 돋아 하며, 몸을 부르르 떨고, 이상한 소리를 내는 거야 어쩔 수 없는 일이었죠.
덕분에 자세가 흐트러진 질을 품 안에 안는 게 가능했던 라피아에요.
“뭘 그렇게 겁을 먹고 그래? 처음 해보는 것도 아니면서, 오히려 빨렸을 때는 기분 좋았지 않아?”
“그, 그게 문제라구요…. 부끄럽단 말이에요. 그리고 지금은….”
몸을 비트는 것도 불가능한 질은 기껏 한다는 저항이 시선을 마주 보지 못하도록 고개를 돌리는 것이었어요.
그마저도 라피아가 억지로 손을 써서 너무 강압적이지 않게 자신을 보게 함으로써 무력한 기분만이 늘어갔죠.
“부끄러워할 거 없어. 몸에 힘을 빼고, 눈 감고, 나한테 모든 걸 맡겨.”
“진짜, 진짜 안 돼요…! 지그므읏?!”
이번엔 귀를 살짝 물려, 질은 몸에 잔뜩 힘을 줄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잠깐 떨어지는 듯한 라피아의 모습에 질은 천천히 눈을 떠보니, 라피아가 나름 진지한 눈빛과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어요.
뭔가 중요해 보이는 말을 전할 것 같은 모습에 시선을 피하는 것도 할 수 없었어요.
이렇게 가까이서 뚫어져라 쳐다보는 건 처음이었으니까요.
“마녀 때문에 그래? 계속 생각나서? …그렇다면 굳이 말하겠는데, 지금은 나만 생각해. 그렇지 않더라도 피를 빨리는 동안에는 다른 사람을 생각할 여유 같은 거…. 절대 주지 않을 거니까.”
내려앉은 라피아의 목소리에 질은 침을 삼켰어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위협적인 말투 속에서 뭔가 느꼈기 때문일 거예요.
그래서 가만히,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는 질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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