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62화 (62/189)

〈 62화 〉 별거 (1)

* * *

질의 푸념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어요.

어쩌다 보니 점심시간이 지나, 오후 2시가 다 되어가는 중이었지만, 좀처럼 이야기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죠.

“그래서 탈리안이 집에 멋대로 다른 사람을 들이는 게 싫다는 거야?”

“언니라면 안 그러겠어요?! 지금 언니의 방에 그,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제리 씨를 들이는 거랑 똑같다구요!”

갑자기 튀어나온 제리라는 이름에 라피아는 ‘아.’라는 짧은소리를 흘리며 미간을 찌푸렸어요.

이전 파티에서 라피아만 실컷 고생시켰던 걸 생각하면 표정이 안 좋을 수밖에 없죠.

질도 이번 건 말실수라고 생각했는지 바로 대화를 이어가는 모습이에요.

“하여튼! 아이펠슈에 그 언니만 아니어도 괜찮겠는데, 왜 하필! 그리고 굳이 그 언니가 집에 머물 이유도 없잖아요! 안 그래요?”

“아니 뭐, 그 마녀가 필요하다면 필요한 일이니까 그렇게 하는 거겠지.”

“그거야, 그렇겠지만…. 탈리안 언니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물론, 그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 그래도 싫은 건 어쩔 수 없잖아요!”

어느샌가 질은 건너편에 앉아있던 라피아에 착 달라붙어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로 허리를 끌어안고 있었어요.

이 역시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 주고 있는 라피아는, 턱을 매만지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한 가지 제안을 했죠.

“흐음~ 그럼 당분간 내 방에 와서 지낼래?”

“네? 여기가 넓다고는 해도…. 아니! 그 전에 불편하지 않겠어요?”

아무리 친한 사이에 서로가 많이 익숙해졌다고는 해도, 잠시뿐인 시간이라도 동거를 시작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에요.

제일 먼저 걸리는 게 서로의 생활 방식이 맞지 않아 마찰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게다가 이 방은 학원의 기숙사이지, 완전히 라피아의 방도 아니라서 같이 지낼 거라면 따로 절차도 필요할 거예요.

그걸 알기에, 질도 고개를 들어 라피아를 빤히 바라보면서 말한 거고요.

“이런저런 귀찮은 일들은 내가 해줄 테니까 그런 건 신경 쓰지 말고, 너는 그…. 아이펠인지 뭔지가 돌아갈 때까지만 여기서 지내면 되는 거잖아?”

“그건, 네에…. 그래도 탈리안 언니랑 떨어지는 건….”

“뭐야아, 방금까지는 탈리안이 정한 일에 이것저것 불만을 말했으면서! 나랑 지내는 건 불편할 것 같아?”

자신이랑 지내기 싫은 거냐는 말에 질은 절대로 아니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강하게 부정했어요.

하긴 탈리안 다음으로 어리광을 제일 많이 받아주는 사람이 라피아인데, 싫어할 리가 없죠.

“물론? 공짜로 같이 살게 해주는 건 아니야,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겠어~”

“그거야 그렇겠죠…. 근데 저 의뢰로 번 돈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데….”

당연히 그럴 것 같았다고 말하며 질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어가며 자신이 얼마나 돈을 가졌는지 되새기기 시작했어요.

천천히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가던 질을 보고 라피아는 살금살금 다가가더니 오른손을 질의 이마로 가져갔어요.

천천히 가져가는 손을 보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려는 건가 싶어서 머리를 내민 질이었지만, 전혀 아니었죠.

딱! 소리가 나며 이마에 따끔한 고통이 찾아왔거든요.

“악!? 아프잖아요!”

“지르니트, 이 꼬맹이가! 내가 코 묻은 돈을 빼앗을까 봐?!”

“그럼 뭘 받아 가시려구요….”

딱밤이 그렇게나 따가웠던지 한참을 이마를 문지르며 시무룩한 얼굴을 하는 질이에요.

질의 질문에 라피아는 이번에는 손이 아니라 몸을 가까이 밀착해 얼굴까지도 질의 귀 옆으로 가져다 댔어요.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겁을 먹은 질은 몸을 움찔거리며 잔뜩 힘을 주고 긴장했지만….

“내가 너한테서 받을 수 있는 거야 정해져 있지 않아? …피를 빨아 마시는 거 말이야.”

“히이…! 소, 소름 돋았잖아요, 언니이!”

라피아는 입을 질의 귀에다 대고 말했을 뿐이었어요.

대답을 듣자마자 라피아에게서 떨어져 귀를 문지르다, 팔을 쓸어내리는 듯한 행동도 하고….

여러모로 계속 당하기만 하네요.

질은 좋다고 웃어대는 라피아를 보니 화를 낼 수도 없었어요.

“푸후흐! 뭐 그렇다고는 해도 네 보호자인 탈리안이 허락이 있어야 가능한 거니까. 가서 화해하고! 허락받고! 그러고 돌아와!”

“…으응, 알았어요.”

“대답만 하지 말고, 자! 얼른!”

질은 라피아의 손에 의해 억지로 일으켜 세워졌어요.

탈리안에게 소리치고 나왔던 것이 마음에 걸리니까, 쉽게 돌아가지 못하고 있는 거겠죠.

버티려고 노력해봤자 라피아의 힘에는 이겨낼 수 없었지만요.

“지, 지금요?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너 마녀한테 말도 안 하고 왔을 거 아니야, 엄청나게 걱정하고 있을걸? 돌아가서 갑자기 다른 데서 지낸다고 말하는 것도 걱정할만한 일이겠지만….”

확실히 탈리안이 질을 다른 곳에서 지내게 할지 의문이기는 합니다.

마기노한테 목숨의 위협을 받고 있을 때만 해도 이성을 잃었었는데, 자신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지낸다면 더 걱정할 수밖에요.

굳이 마기노만한 위협이 아니라, 조금은 옛날로 거슬러 올라갔을 때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옵니다.

도서관에서 탈리안의 마나를 느꼈을 때 겁먹고 도망쳤던 일.

그때도 엄청 걱정해서 열심히 뛰어다녔었는데요.

“우으, 떨리는데 같이 가주면 안 되는 거예요?”

“네가 탈리안한테 잘 말했는데도 안 된다 싶으면, 그때는 도와주러 가줄게.”

“갔다 올게요….”

왜 걱정하는지는 알겠지만, 아이펠슈에와 같이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내기 싫다면 어쩔 수 없이 가긴 해야죠.

그래도 라피아의 약속을 받아내서 그런지, 열쇠를 문에 꽂아 돌리는 질이에요.

문을 열고 도착한 곳은, 당연하게도 자신의 방이었지만….

“…질? 어디 갔다가 오는 거예요!”

실리아가 침대에 걸터앉아 질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질을 보자마자 일어나서 달려와 강하게 끌어안는 실리아를 보면 상당히 걱정하고 있었던 것 같네요.

그런데 아직 문을 닫지 않지 않았던가요?

“…안녕.”

“뱀파이어 씨….”

눈이 마주치자마자 손을 흔들며 작게 인사했어요.

그 어색하다는 표현이 손짓, 몸짓, 목소리에서 다 드러났지만요.

하지만 라피아는 그 어색함 사이에서도 뭔가 낯선 느낌을 받은 것 같았어요.

“응? 뭐야 왜 그런 식으로 불러? 너 마녀 맞아?”

“네, 실리아라고 해요.”

그러고 보니 라피아가 탈리안의 분신을 만나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죠.

그렇다면 그녀와 다른 분위기에 낯선 느낌을 받는 것도 당연한 일이네요.

“…실리아? 얼굴은 마녀가 맞는데, 넌 누구야?”

“실리아 언니는 탈리안 언니가 만든 분신이에요.”

“아아, 그래서 저런 순해 빠진 표정을….”

“…순해 빠진 표정? 뱀파이어 씨….”

걱정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질을 안고 있다가 라피아에게 한 소리를 듣자마자 실리아는 바로 표정을 굳혔어요.

그와 동시에 질도 같이 창백한 얼굴을 하고, 급하게 품에서 빠져나와 문을 닫으며 인사를 했죠.

“어, 언니! 나중에 봐요!!”

“아, 잠…!”

당황하는 질의 모습에 뭔가 잘못됐음을 느낀 라피아였지만, 문을 닫지 못하게 할 시간은 없었어요.

너무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기도 했고요.

“질, 그렇게 급하게 닫을 이유가 있었나요?”

“아, 아니요! 그런데…. 언니, 탈리안 언니는 아직 집에 있어요?”

“지금쯤 2층 서재에 있을 거예요, 할 말이라도 있나요?”

“중요한 할 말이 있어요! 아주, 중요한….”

“그렇게까지 중요한 이야기에요? 흐음, 그럼 같이 가도록 해요.”

대화 주제를 돌리고 나서야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질이에요.

뭐가 그렇게 두려웠길래 허둥대며 문을 닫았던 걸까요.

“언니이… 화 안 났죠?”

“실리아가? 화를 왜 내요?”

“라피아 언니가 말할 때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잖아요, 세르디어를 교육했던 날처럼….”

이제 알겠네요.

실리아도 원본은 탈리안이다 보니까 화가 나면 무서운 거야 똑같잖아요.

순간의 표정 변화로 실리아가 화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던 거에요.

혹시라도 라피아가 쓸데없는 말을 해서 화나게 했으면 어쩌지 같은 걱정을 했겠죠.

직접 옆에서 화났던 실리아를 봤던 경험이 있는 질로서는 그보다 무서운 게 없을 거예요.

“실리아는 질이 뭘 그렇게 걱정하는지 고민하고 있었는데요? 전혀 화나지 않았어요. 그냥, 뱀파이어 씨를 실제로 보는 게 처음이라서 그랬던 거에요.”

“다행이다….”

“자, 탈리안은 이 안에 있으니 들어가 보세요.”

집의 2층에 있는 작은 도서관에 도착한 실리아는 손 위에 책을 하나 만들어내더니, 구석의 책장에 꽂았어요.

그러자 책장이 흐물거리면서 희미해지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져버렸죠.

실리아의 안내에 질은 안으로 들어가 탈리안을 찾았어요.

그렇지만 질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면서 탈리안을 찾아내기도 전에 먼저 말을 걸어왔죠.

“여긴 처음 와보는 곳이죠? 어두워서 미안해요, 바로 불을 킬 테니 기다려주세요.”

“언니, 저 할 말이 있는데요!”

질은 그마저도 기다리기 힘들다는 것처럼, 탈리안이 책상 위의 램프에 불을 키는 동안 할 말이 있다며 소리쳤어요.

당연히 라피아에게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던 게 아닌 탈리안은 짧게 탄식하며 용건을 말하라 했죠.

“아…. 그래요, 일단 들어보죠. 그 뱀파이어에게 무슨 사탕발림 말을 듣고 왔는지 궁금하긴 하네요.”

“별건 아니에요, 어, 별거…인가? 으응, 어쨌든! 저, 아이펠슈에 언니가 집에서 나갈 때까지 라피아 언니의 방에서 지내고 싶어요!”

탈리아는 램프를 켜고 난 뒤 다시 의자에 앉으려던 순간,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바닥에 떨어뜨려 버렸어요.

책이 두께도 꽤 되는 데다, 겉표지에 장식이 달린 게 좀 많기 때문에 무게가 많이 나가서 그런지 땅에 떨어지며 나는 소리가 상당했죠.

‘쿠웅!’하는 소리.

탈리안의 머릿속에서 난 소리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아무리 아이펠슈에가 싫어도 그렇지, 설마하니 질의 입에서 잠시간의 시간일 뿐일지라도 집을 떠나 타인의 방에서 지내겠다는 말이 나올 줄 상상이나 해봤겠어요?

질이 도서관에서 도망쳤을 때도 순식간에 마법진을 전개해 찾을 머리를 굴리던 탈리안이, 이번에는 한 5초간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떨어진 책만 바라보고 있잖아요.

“어, 언니?”

그런 탈리안의 모습을 보고 혹시나 화가 난건 아닌지 불안해하던 질은 조심스레 그녀를 불러보았어요.

하지만 질의 부름에도 여전히 답이 없다가, 천천히 움직이며 떨리는 손으로 책을 주워들었죠.

“가, 갑자기 다른 데서 지내겠다니…. 아이펠, 아이펠슈에가 싫어서 그런 거라면….”

탈리안답지 않게, 목소리마저 떨리고 제대로 말을 하지도 못하네요.

조금 진정이 된 뒤에서야 문제의 원인인 아이펠슈에의 이름을 입에 담았지만, 질이 그게 문제가 아니라며 말을 끊었어요.

“아니에요, 언니도 언니만의 일이 있을 거예요. 저는 지금도 언니의 집에서 얹혀사는 입장이니까, 집에 누굴 들이든지 언니 마음대로잖아요?”

“그런, 그건….”

그런데 머뭇거리며 질에게 다가오려던 탈리아가 질의 말을 듣고 멈춰서며, 뒤통수를 세게 후려 맞은듯한 얼굴을 했어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요.

“그러니까, 아이펠슈에 언니가 돌아갈 때까지만 라피아 언니의 방에서 지내겠다는 말이에요.”

“네, 에? 왜, 어째서…? 그런, 그런 말을…?”

“아이펠슈에 언니도 제가 계속 짜증 내고 노려보는 걸 좋아하지도 않을 거예요. 저도 그 언니 눈치를 보면서 지내기 싫으니까….”

중요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탈리안과 아이펠슈에.

그 임무의 효율을 높이려면 거점을 한군데로 잡는 게 더 수월한 거야 당연합니다.

게다가 탈리안도 질에게 이해해달라고 말할 정도라면, 그 임무의 중요도 역시 다른 일상적인 것에 비교할 수 없는 큰 차이가 있다는 거겠죠.

그렇다면 질이 억지를 부린다고 해서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이 아니라는 것도 맞아요.

이런 것들을 종합해보면 질이 말하는 것 역시 틀린 건 없습니다.

중대사를 앞두고 있다면 자리를 피해 주는 게 맞죠.

지낼 곳이 없다면 어쩔 수 없이 참아야 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라피아가 대신 머무를 곳을 마련해주겠다고 하니 거절할 이유가 없잖아요?

하지만, 탈리안의 넋이 나가버린 듯한 모습에 질은 당황했어요.

뭔가 말을 잘못했기에 탈리안을 화나게 해버렸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어, 언니, 제가 뭐 잘못 말한 건 아니죠…?”

“얹혀산다니, 누… 누구를, 들이든지, 제 마음대로…. 라니, 그런 말은….”

탈리안은 질이 알아듣지 못할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며 바닥을 내려다봤어요.

화났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언행에 질은 탈리안에게 가까이 다가가 양어깨를 붙잡고 말했어요.

무언가 말실수가 있지 않았냐며 말이죠.

“저 역시 뭔가 언니를 기분 나쁘게 한 거죠?! 말해줘요!”

“아니, 아니에요…. 알았어요. 질이, 하고 싶은 대로 해요….”

그렇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질이 보더라도 회피성 가득한 마음대로 하라는 말뿐.

납득하지 못한 질은 계속 탈리안에게 자신이 한 잘못을 알려달라고 했죠.

“그럴 리가 없잖아요, 언니도 제가 뭔가 말실수를 했으니까 그런 식으로 말하는…!”

“괜찮아요, 잠시, 아주 잠시만, 혼자 있게 해주세요….”

“언니…? 언니!”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질을 본 탈리안은 자신의 어깨에서 질의 손을 떼어내고선, 공중을 한번 휘젓는듯한 손짓을 했어요.

그러자마자 질이 보고 있는 풍경은 일그러지면서, 정신을 차려보면 탈리안의 방 밖의 작은 도서관에 있었죠.

강제적으로 방 밖으로 내쫓긴 질은 처음 겪어보는 탈리안의 냉대에 풀이 죽어 자신의 방으로 갔어요.

그리곤 라피아의 방에서 지낼 동안 쓸 짐을 챙기기 시작했죠.

“옷이랑…. 옷이랑…. 옷….”

질이 짐을 챙기며 살펴본 물건들은 옷과 약간의 마정석이 전부였어요.

이외에는 따로 들고 갈만한 짐이 없는 것 같아 주변을 둘러보는 듯했죠.

그러다가, 질은 실리아가 들어오는 걸 눈치채고는, 미리 라피아에게서 받아놓은 가방을 챙겨 방을 한시라도 더 빨리 빠져나가려고 했어요.

지금은 탈리안이든 분신이든 상대하기 껄끄럽다는 거겠죠.

그렇지만 그대로 보내줄 그녀가 아니었기에, 질은 팔을 붙잡혀버렸지만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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