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 일상 속의 불청객 (6)
* * *
흑기사의 조용히 하라는 말에 모두가 숨을 죽이고 마나의 장막 안에 숨어있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누군가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고 발소리도 나지 않았죠.
그럼에도 제르반이나 질이 아무런 말 없이 조용히 있는 것에는 대단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았어요.
방금까지 들려오던 풀벌레 소리가 싹 다 사라져버렸거든요.
이렇게 된 이상 흑기사가 말한 것처럼, 누군가 와르프를 흔적도 없이 죽여버렸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야, 꼬맹이 너 괜찮아? 왜 그렇게 떨고 있는 거야?’
“괘, 괜찮아요….”
누가 봐도 정도가 지나치게 떨고 있는 질의 모습에 의문을 표했어요.
얼마나 심했냐면, 흑기사의 품에 들어가 온몸에 힘을 준 상태로 떨면서도 잡고 있는 흑기사의 팔을 놓으려 하지 않았죠.
보는 사람이 안쓰럽다고 느낄만했죠.
“괜찮은 게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일이야?”
“진짜…. 괜찮으니까, 걱정, 마세요….”
말로는 괜찮다지만 대충 보더라도 그렇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었어요.
그렇다고 이 상황에서 제르반이 질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어요.
그저 걱정이 담긴 시선으로 방관할 수밖에요.
“…이봐,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되는 거야?”
“조용히 해, 주변에 깔린 무거운 마나를 느끼지 못하는 거냐.”
“…어, 능력이 부족해서 미안하네. 그래도 네 말처럼 주변에 뭐가 있는 것 같긴 하다.”
마나를 감지하는 데에 있어선 정령이 더 뛰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니 주눅들 일까지는 아닐 텐데요.
옆에서 떨고 있는 질은 마나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니 그걸 보고 기분이 상한 걸 수도 있겠네요.
당연히 질 뿐만이 아니라, 멀리서 지나가는 흐릿한 인영을 보았기 때문이에요.
질 역시 그것을 보자마자 떠는 걸 멈추고 이제는 아예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어요.
마치 혼이 빠져나간 것처럼 눈에는 초점이 사라져 아주 일순간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도 보였죠.
이 셋은 한참을 기다렸어요.
정체 모를 인영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것을요.
“사라진 것 같지 않냐.”
“내 시야에는 보이지 않는군, 마나도 아까보다는 진정된 느낌이고….”
“그럼 이제 마법 해제해도 되는 거지?”
흑기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락하자마자 제르반은 셋을 감싸던 장막을 없애버렸어요.
그 덕에 일렁거리던 밖의 시야가 또렷해지며 주변이 더 잘 보이게 되었죠.
다시 확인해보아도 아까 보았던 인영이 없는 것을 보아, 확실히 안전해졌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적어도 지금은요.
“조용히 늪지를 빠져나가야겠는데, 이 꼬맹이는 언제 정신 차리는 거야? 애초에 왜 이렇게까지 겁을….”
“진정할 시간이 필요한 것 같으니, 조금만 기다…. 제르반! 뒤에!!”
“뭣…!? 흐억! 왜 갑자기 집어던지고…!!”
미리 위험을 알려주었지만, 제때 반응하지 못하는 제르반을 대신해, 흑기사는 그 뒷덜미를 잡아선 질이 있는 곳으로 던져버렸어요.
갑작스런 상황에 짜증을 내던 제르반은 짜증을 내다가도, 흑기사의 반짝이는 화려한 방패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공격을 막아내는 걸 보고 입을 다물었어요.
흐릿한 인영처럼 공격도 역시 경계를 알아보기 어려워 어떤 종류의 공격인지 종잡기 어려웠죠.
흑기사는 방패로 공격을 막아내면서도 줄어들지 않는 위력에 점점 뒤로 밀려났어요.
“제르반! 질을 데리고 피해! 완전히 막지 못한다!!”
곧 이형의 에너지는 흑기사의 방패를 점점 침식하듯 녹여버리려 하기에 흑기사는 방패를 기울여 공격을 흘리기로 했어요.
그마저도 완전히 흘려내지 못해 여기저기 에너지가 튀어 주변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버렸지만요.
제르반은 아슬아슬하게 질을 데리고 피하는 것에 성공했지만….
“크아악…! 망할, 망할! 저거 강의로만 듣던…! 뿔 3개짜리잖아!!”
“아냐, 아니야…. 왜, 여기에….”
“정신 차려! 꼬맹이!!”
왼쪽 다리에 튕겨 나온 에너지를 맞게 되어서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검게 물들어버려 다리를 절게 되었어요.
그럼에도 흑기사가 열심히 싸워주는 동안 질을 지키기 위해 다리의 고통에도 굴하지 않고 질을 들어 안은 채로 다시 달리기 시작했죠.
미궁에서 만났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이라면 질의 몸이 성장해서 꽤 무거울 텐데 절뚝거리면서도 빠르게 도망치는 게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네요.
“꼬맹이!! 뿔 3개짜리가 무서운 거야 알겠지만! 이렇게 겁먹을 필요까진 없잖아! 나도 슬슬 힘들다고…!!”
흑기사가 싸우는 소리가 희미해질 때까지 한참을 달린 제르반이었지만, 그만큼 그의 몸은 한계가 찾아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까도 같이 표현했었지만요, 제르반은 그 나름대로 상당한 노력을 했어요.
온몸은 이미 땀으로 범벅이 되어 옷이 흠뻑 젖어있고요.
목에서는 쉰 것 같은 가쁜 숨소리만이 새어 나오고 있어요.
다친 다리는 점점 침식되어가듯이 확장되더니, 거의 하반신을 전부 검게 물들였죠.
거의 죽기 직전에 마지막 불씨를 피워 생명을 불사르는 것과도 같은 모습이에요.
질을 위해서 이렇게 노력할 필요가 있냐고 한다면, 그저 그 심성이 곱기 때문이 아니겠느냐고 밖에 하지 못하겠네요.
그런데 잘 달리다가 갑자기 옆의 나무에 기대선 질을 내려놓는 제르반이었어요.
“크읏! 야, 솔직히, 나도…. 후, 많이 노력했다, 그렇지?”
옷은 풀에 베이고, 늪의 물이 튀어 꽤 더러워져 꼴이 말이 아니에요.
질을 내려놓은 뒤로는 자기도 주저앉으며 도망칠 생각조차 못 하고 있어요.
그러다 갑자기 질이 ‘핫?!’같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제르반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습니다.
다친 사람에게 이런 행동은 좋지 못하지만, 그에 준하는 일이 벌어졌다는 걸지도 모릅니다.
“…세르디어! 세르디어는 어디…. 어디에 있어요?!”
“뭐야, 이제야 정신 차린 거냐?”
“세르디어 어디 있어요!!”
“세르디어, 세르디어 시끄럽네…. 흑기사라면 우리 대신 싸우고 있잖….”
“아니야!! 소환이 끊어졌다구요!!”
제르반의 말에도 꼼짝하지 않던 질이 정신을 차린 이유가 뭔가 했더니, 흑기사의 소환이 해제되어서 그런가 봅니다.
대신 싸우고 있던 흑기사의 소환이 해제되었다면 가능성은 몇 가지 없죠.
치명상을 입고 정령계로 돌아갔거나, 질의 상태가 좋지 않아 소환의 유지가 되지 않아 돌아갔다거나.
어떤 가능성이든지 이걸로 질과 제르반이 위험해졌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요.
“…꼼짝없이 죽게 생겼네, 내가 한가지 바라는 게 있다면 다음 생에는 조금 이기적으로 살아보는 거야.”
“지금 그런 소릴 할 때에요?!”
“귀 아프다, 너 지켜주느라 다리도 다쳤는데 귀까지 못쓰게 하려고?”
“미, 미안해요. …이제 어떻게 할거에요? 저 마기노한테서는 도망치지 못할거에요. 겪어봐서 알아요….”
다시 한번 흔들리며 촉촉해지는 질의 눈동자를 보고 제르반은 한숨을 흘렸어요.
계속해서 도망가려고 해도, 이미 제르반의 다리는 제대로 서지도 못할 상태가 되었거든요.
그의 다리를 한번 본 질은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닦고 제르반에게 등을 지고,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어요.
“뭐하냐? 너.”
“보면 몰라요? 저 혼자 도망가기도 싫고, 오빠랑 같이 죽기도 싫으니까요. 제르반 오빠가 이대로 죽으면 저, 평생을 후회하고 살 거예요. 그리고 신체 강화 마법에는 자신이 있으니까.”
자신에게 업히라는 거겠죠.
그 말대로 질이 자신을 구해준 제르반을 두고 혼자 도망갈 사람은 아니잖아요.
“나 참, 이럴 거면 조금 더 빨리 정신을 차리던지…. 자기 소환수가 멋대로 소환을 끊었다고 정신을 차리는 건….”
“그건 미안해요, 그리고 버리고 가지 않아 줘서 고마워요….”
“인사는 살아남은 뒤에 받을 테니까 도망갈 거면 빨리 도망가자고, 살아남는다고 해도 감각이 없는 걸 보면 하반신은 앞으로 못 쓸 것 같지만.”
“듣기 안 좋은 소리 하지 말고, 업히기나 하세요!!”
질은 제르반을 등에 업자마자, 강화 마법을 차례대로 사용했어요.
처음은 근력 강화 마법과 다음으로 가속 마법.
그리고는 냅다 달리기 시작했죠.
바람 소리가 날카롭게 들려올 정도로요.
“근데 왜 마기노가 여기에 나타난 거예요?”
“너 그 소문 모르냐, 남동부…. 그러니까 리니아 가문이 마암석을 유통한다는 소문. 그 뒤에는 마기노를 가둬놓고 실험하는 연구소가 있다…고.”
“그럼 지금 저 마기노가 연구소에서 도망쳐 나온 개체라는 거에요?”
“그렇지 않으면 이런 도시 가까이의 늪지에 마기노가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서 웬만하면 도시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고 싶었는데 승급시험이라고 하니까…. 못 본 체를 할 수도 없고 말이야…. 이럴 줄 알았다면 그냥 가지 못하게 말리기만 하는 거였는데, 내가 멍청했어.”
“미안해요, 저 때문에….”
“이제 와서 후회해서 뭐하겠…. 머, 멈춰!”
“네? 갑자기 무슨, 읏?!”
의문을 제기하기도 전에 질의 바로 앞에서 폭발이 일어났어요.
그 짧은 순간에 반응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질은 얇은 마나의 장막을 펼쳤지만, 위력이 생각보다 강했는지 질은 제르반과 함께 뒤로 날려졌어요.
둘은 지면에 몇 번 구르고 나서야 엎드린 채로 멈추는 게 가능했습니다.
“아파…. 제르반 오빠는…?”
제르반은 질의 옆에서 신음을 흘리면서 옆구리를 부여잡고 있었어요.
그래도 제르반이 죽지 않은 것을 보고선 다행이라고 생각한 질은 조금씩 다가오는 마기노의 앞에 섰어요.
점점 또렷해지는 마기노의 모습은 흑기사와 싸운 뒤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너무나도 멀쩡해 보였어요.
그 때문에 겁을 먹었는지, 질은 떨리는 손으로 급하게 마법진을 그려냈어요.
“리, 릴리아…!”
마법진 안에서 고개를 내민 것은 새롭게 계약했다던 소환수였어요.
머리에 비스듬하게 노란빛의 꽃을 모자처럼 얹어 얼굴이 보이지 않게 하고, 사람의 형태를 했지만, 손과 발 대신 넝쿨이 있는 정령이었어요.
그렇지만 겁먹은 질의 영향인지, 앞의 마기노의 영향인지, 발끝만 마법진에서 나오면 완전히 소환되었을 텐데….
주변을 잠깐 관찰하다가 화들짝 놀라며 다시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소환을 거부당한 거예요.
하지만 계약된 지 얼마 안 된 소환수에게 마기노와 싸우라는 것은 죽으라는 것과 같으니까요.
거부당해도 할 말은 없죠.
“하아…. 진짜아…!!”
“꼬맹이, 너만이라도 도망가!”
제자리에서 발만 구르다 마법을 쏘아대는 질이었지만, 그 마법은 마기노에게 상처하나 주지 못했어요.
보다 못한 제르반이 노력하는 질에게 소리쳤지만, 누군가를 버리고 간다는 건 질이 쉽게 하지 못할 일이었죠.
이러는 와중에도 마기노는 마법을 튕겨내지도 않고 전부 맞아가면서 착실히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오고 있었어요.
“어떻게 그래요!? 오빠는 절 구해놓고!!”
“너도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고서 도망친 거잖아! 말 들어!! 최대한 막아줄 테니까 가라고!!”
이미 다칠 대로 다친 제르반은 자신이 짐 덩이가 된다는 걸 충분히 알고 있어서 하는 말이겠죠.
그 희생적인 모습에 질은 울먹거리기 시작했으면서도 마기노를 향해 공격하는 걸 멈추지는 않았어요.
“그동안 그렇게 노력했는데! 왜, 왜 상처 하나 내지 못하는 거야!”
자신이 그동안 해왔던 연습의 모든 것이 부정당했다는 사실에 분했을 거예요.
짧은 시간이었다지만 그래도 상처 하나쯤은 낼 수 있지 않을까.
발을 묶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겠냐고 생각했을 테죠.
그런데 현실은 그게 아니었고, 오히려 제르반이 자신을 구해주겠다니 복잡한 기분일 거예요.
“말 더럽게 안 듣네! 가라고, 이 썩을 꼬맹아!!”
“으읏…. 그, 그렇지만…!”
‘그렇지만, 그렇지만….’이라며 말하는 질도 제르반의 호통에 조금씩 뒷걸음치기 시작했어요.
울먹거리던 것도 정도를 넘어서 주체하지 못할 만큼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죠.
제르반은 이미 감각이 없다던 다리로도 멀쩡히 서서 질의 앞에 섰어요.
죽을 각오를 다지고 선만큼, 제르반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도 용감하다고 할 수 있겠죠.
“아, 아으…. 이번, 이번에는…! 윽…, 흐윽! 잃고 싶지, 않은데…!!”
“질질 짜기는, 그래도 나이에 어울려서 보기는 좋네…! 동생들 생각도 나고…. 모험가 길드에 가서 말해, 하즈빈 늪지에 마기노가 나타났고 제르반이 용감히 맞서다 죽었다고.”
“바, 바로…. 사람을 구해서, 올 테니까요…!!”
“오지 마! 임마!! 얼른 가!!”
그의 말에 질은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어요.
마기노가 도망치려는 질에게 달려들려고 했지만, 제르반의 공격에 시야가 가려져 쫓지 못했어요.
질은 방해가 들어오는 일 없이 달리고, 달리고, 또 달려서, 늪지가 끝나고 숲과 평원의 경계를 이루는 지점에 도착했죠.
마법을 사용해 전력으로 달려왔기에 지친 몸으로도 생각보다 빨리 숲을 빠져나오는 게 가능했어요.
도망쳐오면서 마법과 마법이 충돌하는 소리가 몇 번이고 들려왔지만, 뒤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앞만 보고 달렸었죠.
마음 같아서는 돌아가고 싶을 거예요.
당장이라도 돌아가 제르반을 도와주고 싶었겠지만, 그럴 수가 없었겠죠.
제르반의 희생을 헛되이 하는 것과 같을 테니까요.
그리고 이는 질이 처음으로 경험하는, 자신과 친분이 있는 사람의 희생이니 받아들이기 더 힘들 거에요.
재앙을 겪었을 때는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하기도 어려울 만큼, 순식간에 모든 일이 지나갔으니까요.
하지만 이번에는 그 사실을 곱씹기에, 충분한 시간이 있었어요.
“나,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제르반, 오빠가…!”
슬픔에 젖어있을 시간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이 모든 일이 자신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며 자책하지 않을 수가 없을 거예요.
승급시험 때문이라지만, 도와달라며 제르반을 끌어들인 것은 질 자신이었으니까요.
만약 혼자 왔다면 질이 대신 제르반의 자리에 있었겠지만, 자신 때문에 누군가가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엔 질은 너무 어렸어요.
더 멀리 도망가도 모자랄 시간에 자책을 하는 것은 이 때문이었죠.
사실 나이를 상관 않고 이 상황에 누가 자책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누구나가 자기 탓이라고 했을 거예요.
그렇지만 주저앉아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됐던 거에요.
“…아.”
분명히 상당한 거리를 도망쳐왔을 텐데도, 그 긴 거리를 순식간에 따라잡아 자신의 앞에 선 마기노.
‘차라리 계속 도망갔더라면.’…이라고 중얼거리다가도 희생된 제르반을 떠올리면 그마저도 시간을 낭비할 뿐인 사치스러운 순간이었어요.
얼굴을 눈물과 콧물로 범벅을 만든 질에게로 마기노의 손길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으니까요.
질은 눈을 질끈 감았어요.
정말 마지막이구나 싶었을 테죠.
그렇지만 몇 초를 기다려도 질이 걱정하는 그 순간은 찾아오지 않았어요.
중간에 지면에 뭔가 충돌하는 듯한 큰 소리가 났지만, 그 외에 특별하다 할 점은 없었거든요.
살며시 눈을 떠보면, 그 앞에는 탈리안이 서 있었죠.
“…언, 니?”
마기노의 머리를 땅에 처박고 밟은 상태로, 뒷모습만을 보여주는 탈리안은 대답조차 없었어요.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짙은 마나를 몸 전체에서 뿜어내며 서서히 다리에 힘을 주고는 마기노의 머리를 으깨려고 했죠.
그 힘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지면에 금이 가서 바스러지고 있을까요.
평소에는 찾아볼 수 없는 그 메마르고 잔학해 보이는 모습에 질은 말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어요.
탈리안이 숨기고 있던, 마녀 본연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고 해도 믿을 것만 같았죠.
어느샌가 마기노의 머리는 까득, 으드득거리는 소리를 내고, 피가 뿜어져 나와, 곧 으깨질 것만 같은 낌새를 보였어요.
그 장면을 계속해서 보기 어려웠던 질은 고개를 돌려버렸어요.
마기노의 손과 발이 파들거리며 같잖은 저항을 하다가 이내 움직임을 멈춰버렸거든요.
마침내 콰직, 하는 소리가 나며 머릿속의 내용물이 튀어나오며 탈리안의 다리를 더럽혔죠.
여기서 멈추지 않고 탈리안은 발을 한번 떼었다가, 지면이 울릴 정도로 ‘쿵! 쿵!’ 소리를 내며 마기노의 시체를 짓밟기를 반복했어요.
굳이 마법을 쓰지 않고 무력으로 마기노를 처리하는 탈리안이 이해가 가지 않을 수준으로 잔학한 행동으로 보였어요.
“어, 언니…. 그, 그만해도 돼요….”
마기노의 것인지, 탈리안의 것인지 모를 두려움에 가득 찬 질이 말려보려고 말을 걸었지만 듣는 체도 하지 않는 것 같았어요.
자신의 눈앞에 있는 것이 정말로 탈리안일까 싶은, 그런 의혹이 들 정도로요.
“어, 언니…!!”
다가가서 말려보려 한 질이었지만, 얼핏 보게 된 탈리안의 눈은 분노로 가득해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였어요.
그러잖아도 흐릿한 평소의 눈은 초점이 사라져 이성을 잃은 것 같았기에 질은 흠칫거리며 탈리안에게로 향하던 손을 거뒀어요.
탈리안을 부르는 그 소리도 지금의 그녀에게는 닿지 않았죠.
게다가 질이 손을 거두었던 것에는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어요.
진하디진한, 탈리안의 탁한 마나 때문이에요.
흡사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리는 듯한….
아니, 실제로도 마나가 땅에 흘러내려 닿자마자 마기노의 시체를 제외한 모든 걸 불태우고 있었어요.
탈리안에게서 배운 마나의 장막을 두르고도 계속해서 장막을 수복해야만 겨우 옆에 서 있는 게 가능했으니까요.
마치 마기노에 공격당한 제르반의 다리가 침식당하듯, 장막 역시 침식당해 먼지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지금의 그녀에게는 질이 보이지 않는 것 같았어요.
“언니, 제발…. 제발 그만 해요!!”
결국, 고민 끝에 질이 선택한 것은 탈리안을 마기노의 시체에서 떼어놓기 위해 달려들어 껴안고 그대로 넘어지는 것이었죠.
그렇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탈리안은 꼼짝도 하지 않았어요.
질이 애매한 자세로 탈리안에게 안기는 모습이 되었죠.
“어, 어라…? 아, 안 뜨거워…?”
그런데 탈리안에게 안겼다면 마나에 몸이 불타고도 남았어야 할 질의 몸이, 아직도 멀쩡했어요.
달려들면서도 무서운 마음에 눈을 감았던 질이 눈을 뜨면 탈리안의 마나가 어느 순간 잦아들어 있었어요.
마나의 장막은 거의 구멍이 나버리기 직전의 너덜너덜한 상태였지만요.
“언니, 정신 차렸어요…?”
탈리안은 말없이 가만히 서서 질을 바라보지도 않고, 대답하지도 않았어요.
“언, 느흐앗?!”
약간 꼴사나운 소리가 질의 입에서 흘러나왔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탈리안이 갑자기 돌아서서 강하게 질을 껴안았거든요.
이전에 이렇게 격하게 안아준 적이 없었으니까요.
“언니, 숨, 숨 막혀요…!”
“…얼마나,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요? 베리아의 냄새가 나서…. 급하게 날아왔더니, 이런! 이런! 진흙과 상처투성이의 모습으로! 그래도 다행이에요. 무사해서….”
질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약간 갑갑할 정도로 강하게 껴안아 주는 탈리안이 등을 토닥여주는 그 느낌에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거든요.
다시 한번 탈리안에게 구해지는 것으로 살아났다는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경험을 또다시 하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어요?
“죄송, 해요…. 흑, 으으…. 죄송해요…! 저, 저 때문에…. 언니도, 오빠도…! 흐윽!”
“…잠깐, 오빠도? 이곳에 같이 온 사람이 있었나요?”
질을 제때 구해냈다는 사실에 안심하려던 탈리안은 이상함을 눈치채고 되물어봤어요.
“제르반 오빠가, 저, 대신에…. 죄송해요….”
“제르반, 제르반…. 분명 학생 중에 그런 이름이 있던 것 같은데…. 저 숲으로부터 빠져나온 거죠? 기다리고 계세요.”
“가, 같이 가요….”
“안 돼요. 이번은 제 말을 듣지 않으면 화낼 거니까, 여기서 기다리세요.”
탈리안은 무서운 얼굴로 명령했어요.
질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탈리안이 말한 것은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었죠.
이는 질의 안전을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질의 기분을 위한 것이기도 했어요.
제르반의 시체를 본다면 질이 어떤 기분을 갖게 될지, 모르는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잃는다는 것의 기분을 알고 있는 탈리안이 일부러 제르반의 시체를 질에게 보여줄 리가 없죠.
그런데 탈리안이 자리를 뜨려는 순간에, 저 멀리서 누군가가 소리쳤어요.
“야아아!! 내가 그렇게 사고 치지 말라고 했는데, 그새를 못 참고 뛰쳐나가냐아?!”
“누, 누구세요…?”
하늘에서 땅으로 멋들어지게 한쪽 무릎을 꿇고 착지한 아이펠슈에는 옆의 질을 쳐다보더니 이내 탈리안을 바라봤어요.
질의 질문에는 대답하지도 않고 탈리안에게 다가갔죠.
“탈리안, 이 조그만 건 뭐야?”
“자기가 크다고 해서 남을 비하하는 말은 하지 마세요.”
“아비가 너한테 중요한 게 생긴 거 같다고 하던데, 설마 그게….”
“쓸데없는 소리를…. 그건 상관없어요. 그리고 제가 돌아올 때까지 질을 부탁할게요.”
“뭐, 뭐?! 얼마 안 있으면 다시 재판이 시작될 텐데!! 탈리아아안!! 재판소로 돌아가야 한다고오!!”
“자기들 멋대로 진행하는 재판에는 관심 없습니다!”
막무가내로 질을 떠안게 된 아이펠슈에는 원망 섞인 큰소리를 냈지만, 이미 그 모습이 작아질 정도로 먼 거리까지 이동해버린 탈리안이었어요.
탈리안이 사라지고 나선 어색해진 두 명은 서로 말없이 바라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고개를 돌리기에 바빴어요.
먼저 다가간 것은 이 상황이 답답했던 아이펠슈에였어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