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일상 속의 불청객 (5)
* * *
“야, 튀어, 튀어!”
“으아아!! 왜, 왜 이렇게 된 건데요!!”
“아니 그렇게 무시하라고 했었는데, 네가 굳이 건드려서!!”
“지금 제 탓하는 거예요?! 오빠도 같이 건드렸잖아요!! 전 오빠가 건든 걸 원래대로 돌려놓으려고 만진 거라구요!”
“차라리 그대로 놔두지 그랬냐!! 모른 척했다면, 흐억!? 떠들지 마! 달려!!”
“히익?! 바, 바로 뒤에 있잖아! 세르디어! 더 빨리 뛰어어!!”
이 셋이 열심히 도망치고 있는 이유를 찾으려면 조금 전, 스플래시 밤을 발견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늪지의 중심에 들어온 뒤로 질척질척한 늪을 건널 때였어요.
질은 세르디어의 어깨에 올라타 있어 시야가 더 확장되어 있었어요.
그렇기에 제르반보다 더 쉽게 스플래시 밤을 찾는 데에 있어서는 더 편했을 거예요.
“저거, 저거! 아까 오빠가 설명한 스플래시 밤의 이미지랑 똑같지 않아요?”
“음? 으음, 비슷한데 맞나? 가까이 가봐야 알 거 같은데.”
“껍질이 뾰족뾰족하고, 껍질 사이로 투명한 물 같은 게 담겨있는 게 보이는데, 아무리 봐도 맞는 거 같아요!”
“어려서 그런지 나보다 눈이 좋냐, 어쨌든 너 저거 따는 법 모르지? 옆에서 잘 보고 있어.”
생각보다 금방 찾아내서 기쁜지 질뿐만 아니라 제르반까지도 같이 스플래시 밤을 향해 빠르게 늪을 건너가기 시작했어요.
그야 자신이 할 일도 제쳐두고 도와주러 왔는데, 이왕이면 빨리 끝내는 게 좋겠죠.
그런데 늪에서 빠져나온 그 순간, 제르반이 휘청거리며 옆의 나무에서 늘어진 덩굴을 건드렸어요.
덩굴은 그대로 늘어지며 나무에서 끊어져 제르반이 넘어졌어요.
넘어졌기만 하면 다행인데, 덩굴과 함께 뭔가가 같이 떨어졌어요.
“오빠, 여기 뭐 떨어졌어요.”
“응? 뭔데, 이게.”
상당히 커다란 무언가가 마치 새의 둥지처럼 생겼는데, 그 안엔 동그랗고 둥지보다 더 큰 무언가에 금이 가 있었어요.
“…무슨 알 같지 않아요?”
“…알이라고? 이렇게 큰 게?”
제르반은 겁도 없이 알을 들어 만져보다가 다시 둥지 안에 돌려다 놨어요.
“근데 이거, 깨진 것 같은데…. 일단 제자리에 돌려놔야 하지 않을까요?”
“냅둬, 이런 건 쉽게 건들지 않는 게 상책이야. 이미 금도 가버렸고… 안에 든 게 뭔지는 몰라도 제대로 부화하기는 글렀을걸?”
“아니에요, 그래도 불쌍하잖아요? 세르디어 나한테 넘겨줄래? 올려다 놓고 올게.”
먼저 만진 건 제르반이 맞지만, 그렇다고 또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으니까요.
질이 원래대로 올려다 놓고 오겠다는 건 상당히 위험한 말이에요.
지금이야 알이 떨어진 게 전부지만, 나무 위에 어떤 위험이 있을지 아무도 모르니까요.
이 생각은 흑기사도 똑같은 것 같았어요.
“질? 이건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냥 놔두고 자리를 떠나는 편이 나을 거 같은데.”
“얼른 가져다 놓고 오면 괜찮을 거야, 세르디어도 그렇고 제르반 오빠도 그렇고 너무 걱정이 심한걸?”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네 명령이라면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 걱정만 하게 만들고…. 위험하면 바로 뛰어내려 받아줄 테니까.”
“응! 항상 생각하는 거지만 세르디어는 듬직해서 좋아!”
자신을 걱정해주는 흑기사에게 안심이 되는 말을 건네주고는 나무를 타기 시작한 질이었어요.
이것이 산골 마을에서 살던 여자아이의 힘인 걸까요.
한 손으로 자신의 상체만 한 알을 안고는 벌써 나무의 2/3를 올라버렸네요.
“쟨 여자애가 왜 저렇게 나무를 잘 타?”
“모른다. 계약을 맺을 때의 질은 그저 나와 같은 꼬마였으니, 그 전의 일은….”
“그런데 어쩌다 너 같은 상위 정령이 계약하게 된 거야?”
제르반도 마법 학원의 학생은 학생이라고, 흑기사가 상위 정령이라는 건 단순에 알아차리네요.
그야 제르반도 누군가에게 꿀리지 않을 실력을 갖추고 있으니 몰라보는 게 이상한 일이기는 해요.
그 와중에 스플래시 밤을 따오다니,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건 제르반을 두고 하는 말 같아요.
“탈리… 질의 보호자가 계약을 도와주었지, 물론 그만으로는 부족해서 질의 마나를 위험할 정도로 빼앗아갔지만.”
“마나를 위험할 정도로 빼앗아갔다고…. 어, 야, 저거 보이냐?”
“음? 저건…. 질!! 지르니트!! 얼른 내려와!! 뛰어내려!!”
흑기사의 외침에 질은 올라가다 말고 바로 뛰어내렸어요.
보통은 왜 그러냐고 한 번쯤 물어볼 만도 한데, 나무에 올라가기 전에 걱정된다는 말을 들어서 그런 걸까요.
어찌 됐든 갑작스레 뛰어내린 질을 공주님 안듯이 잘 받아낸 흑기사였어요.
그리곤 냅다 뛰기 시작했죠.
“흐아아…!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뒤에! 거대한 몬스터가 날아오고 있어!”
“뒤에…? 저, 저게 뭐야!?”
“뭐기는 당연히 알의 주인이겠지! 이 망할 꼬맹아, 내가 분명히 가만 놔두라고 했잖아!!”
뒤에서는 늪지에서 서식하고 있는 몬스터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비늘로 덮인 괴조였어요.
흉측하거나 괴상하게 생기지는 않았지만, 학계에서는 괴조 와르프라 불리는 녀석이에요.
“저 녀석 생긴 걸 보니까 와르프 같은데! 와르프라면 눈이 좋지 못하니까 잘만 숨는다면…! 꼬맹이!! 적을 혼란시키는 마법 쓸 줄 몰라!?”
“해, 해볼게요!”
자신 있게 대답한 질은 흑기사에게 신호를 보내 높이 뛰어오르게 했어요.
날고 있는 괴조를 상대로 높게 뛰어오른다면 낚아채 달라는 것과 다를 게 없는 자살행위에요.
지금껏 우거진 수풀과 나무 때문에 쉽게 접근하지 못했던 와르프에게 기회를 주는 것과 똑같은 거죠.
“세르디어! 다음번엔 내가 저 새를 정면에서 볼 수 있게 뒤돌아서 뛰어줘!”
예상대로 바로 공격해오는 와르프의 탓에 흑기사가 회피 기동을 하느라 질은 마법을 겨냥하는 것조차 하지 못했어요.
어쩔 수 없이 흑기사는 한 번 더, 질의 말대로 새를 바라보며 뒤를 돌아서 점프했죠.
“정말 괜찮은 거야, 질?!”
“맡겨둬! 잠깐이지만 우리를 찾지 못하면 된다는 거잖아!”
“그렇지만, 탈리안 선생님께 그런 걸 배운 적도 없으면…서?! 자, 잠깐 질?!”
“이거나 먹어라!!”
흑기사의 말대로 질이 여러 가지 마법을 배워가는 중이기는 했지만, 상대를 혼란시키는 마법은 배운 적이 없었어요.
하지만 질이 한 말도 틀린 건 없었죠.
그렇다고 한계치까지 끌어모은 화염이 담긴 불의 화살을 와르프에게 쏘아낸 게 잘한 행동이란 건 아니에요.
“그 작은 마법이 맞았다고?!”
뭐… 결과만 좋으면 됐죠.
불의 화살은 와르프에게 적중해 그 큰 몸을 전부 화염에 감싸게 할 정도의 위력을 지녔어요.
괴조라 불리는 비늘 덮인 새를 통구이로 만들어버리고 있는 그 광경에 모두가 놀랐죠.
공중에서 내려오자마자 그 투덜대던 제르반이 칭찬할 수준이었어요.
“이 정신 나간 꼬맹이…! 그래도 잘했어! 이 정도면 해치웠겠지!”
한마디가 아쉬웠네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와르프는 몇 번의 날갯짓으로 화염을 다 떨쳐버렸어요.
그리고는 더 화난 모습으로 맹렬히 돌진해오기 시작했죠.
이것이, 이번 일의 전말이었어요.
“야, 잠깐! 지금 보니까 왜 그 알을 지금도 가지고 있는 거야?! 그것 때문에 쫓아오는 거잖아!! 얼른 버려!!”
“버려도 쫓아오는 건 똑같을 거라구요! 그리고 왠지 버리기 싫…! 아앗!? 세르디어어!!”
“땅에 떨어진 물건은 아무거나 주워오는 게 아니야.”
단번에 질이 힘껏 안고 있던 알을 한 손으로 뺏어 뒤로 던져버렸어요.
이번만큼은 흑기사가 잘했네요.
하지만 질의 말대로, 알은 이미 한참 뒤에서 나뒹굴고 있는데도 와르프의 추격은 멈출 것 같지가 않았어요.
이제는 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겠죠.
“아니 근데 오빠는 왜 아무것도 안 해요?!”
“와르프하고 싸우는 건 [B+] 랭크 이상의 모험가나 할 짓이라고! 내 공격이 먹히겠냐?! 난 고작 [C] 랭크인데!?”
질보다 두 단계나 높은 랭크를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말이네요.
그렇죠? 쓸모없고, 하는 것도 없는 주제에 말은 잘해요.
“저는 [D] 승급 시험의 재료를 찾으러 온 거라구요! 뭐라도 좀 해보세요!!”
“아, 진짜! 그래 알았다고! 보여주지, 보이지 않는 마나의 대가를!!”
“와, 와아…. 오글거려.”
“이 꼬맹이가 진짜!! 두고 가버리는 수가 있어!!”
제르반은 투덜대면서도 와르프를 향해 핑거 스냅을 하더니, 정확하게 와르프의 눈을 노려 마나를 터트렸어요.
단순히 마나를 터트렸음에도 자욱한 먼지구름이 생겨 와르프의 시야를 방해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날아들었죠.
“이, 젠장! 역시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
“이 무능한 사람!”
“뭐?! 너도 못 했으면서 왜 나한테 그래!?”
“저는 아직 [D] 랭크도 아니거든요!”
“이익…!!”
둘이 투덜거리는 모습을 보는 흑기사는 정신적으로 피곤해지기 시작했어요.
도망치기에도 바쁜 지금 상황에 서로 말싸움만 하는 모습을 보니 머리가 아플 만도 하죠.
“잠깐, 둘 다 조용히 해봐. 뭔가 이상해.”
“뭐가 이상하다는…! 야! 지금 멈추면 위험하잖아!!”
“아니, 갑자기 와르프의 울음소리가 멈췄어.”
천천히 속도를 줄여, 완전히 멈춰버린 흑기사의 말에 제르반 역시 낌새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어요.
따라오던 와르프의 모습이 아예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게 된 것이었죠.
오던 길을 따라 도망치던 것뿐이었는데, 단순히 와르프가 쫓아오기 지쳤기에 포기했다고는 생각하기 어려웠어요.
“괘, 괜찮아진 거예요?”
“어, 어어…. 그런 거 같은데.”
“아니야, 숲의 상태가 이상해.”
안심하려는 둘의 대화에 숲이 이상하다며 긴장을 풀지 말라는 흑기사예요.
아무래도 정령이다 보니 자연의 변화에 민감한가 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세르디어?”
“와르프가 추격을 그만둔 게 아니야…. 누군가에게 죽은 거지.”
“그 괴물이 죽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우리가 마법을 써도 상처하나 입지 않던 녀석이라고.”
“그럼 갑자기 사라진 와르프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숲의 상태는 어떻게 설명할 거지.”
“그건, 이상하긴 한데….”
흑기사의 말대로 와르프가 모습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버린 것은 너무나도 이상한 현상이었어요.
그렇다고 또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했다기에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은 게 더 부자연스러웠지만요.
날고 있던 와르프의 시체가 추락해 지면에 부딪히는 소리도 나지 않았잖아요.
공중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상에야 설명이 불가능한 일이에요.
“제르반! 모습을 감추는 마법은 쓸 줄 모르는 건가!?”
“딱 한 가지 있긴 한데, 와르프 상대할 때는 너무 티가 나는 기술이라서….”
“당장 써!”
“갑자기 무스… 으아, 악! 아, 알았어! 쓸 테니까 멱살 잡지 마!!”
질을 내려놓고 위협적으로 제르반의 몸을 흔드는 흑기사예요.
뭔가 위험을 느꼈으니까 마법을 쓰라고 한 거겠죠.
제르반 역시 흑기사의 이런 급박한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바로 마법을 써서 셋의 모습을 감추기로 했어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