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 일상 속의 불청객 (3)
* * *
탈리안이 재판소에서 고생을 하는 동안, 질은 다리를 침대에 올려둔 채로 바닥에 누워서는 허공을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었어요.
집에 혼자 있기에 이 정도로 흐트러진 것 정도는 문제 될 게 없었어요.
탈리안도 없었고, 시멜리도 없는 데다, 흑기사도 소환하지 않았으니 볼 사람이 없잖아요.
옷도 편하게 헐렁하게 입고서 눈치 보지 않고 있으니 간만의 휴일이겠네요.
“…학원에 가서 할 일도 없는데, 흑기사랑 연습전이라도 할까?”
질에게 새로 생긴 한가지 버릇이 있는데, 질은 탈리안과 연습전을 하게 된 이후로 자신의 실력을 올리는 일에 광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한 것이었어요.
이에 흑기사가 상당히 오랜 기간 고생을 했었죠.
물론 자신의 실력을 높일 기회와도 같은 시간이라 흑기사가 질과의 연습전 자체를 싫어할 이유는 없었지만요.
탈리안이 상대해주지 않는다면 매일매일, 시도 때도 없이, 틈만 나면 자신을 불러내었으니 피곤하기는 했을 거예요.
“세르디어! 어서 와!”
“질, 어제도 정령계로 돌아가기 전에 말했지 않나? 전투가 없는 날이면 부르는 건 최대한 자제해 달라고.”
탈리안이 황궁에 출석하기 위해 집을 떠난 날, 흑기사가 따로 부탁했었나 보네요.
소환할 때에 저렇게 밝게 인사하는 걸 보면 그동안의 훈련을 통해 거리감이 많이 줄어든 건 확실해 보여요.
그와는 별개로 질이 불필요한 이유로 흑기사를 소환하는 일이 잦다는 건 잘 알겠네요.
“응! 기억하고 있어! 근데 나도 많이 참아본 거 알지? 이번 주에는 의뢰 때문에 부른 거니까 어쩔 수 없었고… 저번 주에는 이상하게 도서관이 붐벼서 힘을 빌린 거였잖아.”
“그게 문제야, 그게! 소환수를 도서관의 일꾼으로 부려먹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그래?”
하긴 소환수를 그저 잡일에 부려먹기 위해서 쓰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는 않을 거예요.
기껏 전투에 참여시키기 위해서 계약도 맺고 소환에 마나도 소비했는데, 고작 시키는 일이 도서관의 잡일이라니….
이건 소화수의 입장도 들어봐야 하는 일이에요.
“세르디어! 우리 사이에 너무하는 거 아니야? 내 덕에 한 번 더 성장했었잖아! 그렇게 번쩍이는 무기랑 방패를 가지게 됐으면서 말이야!”
“그, 그건! 그렇지만…! 조금 더 소환수답게 써먹어 달라는 말이다!”
아, 질 덕분에 한 번 더 성장했다면, 그건 어쩔 수 없죠.
소환수의 입장에서 성장이라는 단어는 그렇게 쉽게 접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정말 오랜 시간을 소환사랑 합을 맞춰 싸워야 한번 맛볼까 말까 하는 경험인데, 그걸 계약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두 단계나 성장했다는 건….
지금 흑기사는 도서관의 잡일을 했다고 불평할 처지가 안됩니다.
잡일에 쓰이는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요.
“아~ 그래? 그럼 세르디어보다 릴리아랑 놀아야겠다, 그럼 문제없지?”
“뭐, 뭣!? 왜 나 빼고 그런 풀떼기랑!!”
“풀떼기라니! 릴리아도 내 소환수야! 내가 널 갑옷 덩어리라고 부르면 기분 좋을 거 같아?”
“크읏…!”
질투심에 전과 같은 성격이 튀어나온 것이겠지만, 흑기사는 릴리아도 자신의 소환수라는 말에 한풀 기가 꺾였어요.
완전히 어린 아이를 혼내는 듯한 자세로 말해오는 질에게 아무 대답도 돌려줄 수가 없었죠.
질의 말대로 자신이 그런 말을 듣는다면 기분이 나쁠 게 당연했으니까요.
이러나저러나, 흑기사도 아직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정신 연령이 낮은 소환수이기도 하고요.
“애, 애초에! 연습전은 무슨 연습전이야? 너 승급 시험은 어쩔 건데!”
“아, 깜빡했다. 그럼 승급 시험 먼저 해야지! 얼른 가자!”
“하아아…. 그래, 그래….”
그렇다고 릴리아가 당장 바로 앞에 있는 것도 아니고, 허공에 대고서 사과하기에는 좀 부끄러웠는지 화제를 돌려버린 흑기사였어요.
이제는 거리낌 없이 문을 학원의 의뢰 안내소에 연결해 건너가는 질을 따라, 흑기사도 자연스레 그 뒤를 따랐죠.
처음에는 안내소의 접수원들이 질이 문을 건너는 모습을 보고서 탈리안과 착각한 적이 있었는데요.
거기에는 두 사람의 머리카락 색이 비슷한 것도 있었고, 문을 건너는 특징마저 같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아직까지도 가끔 접수원들은 질이 나타나면 탈리안인 줄 알고 자리에서 ‘벌떡!’ 하고 일어났다가, 뒤의 흑기사를 보고는 다시 앉는 장면이 나왔죠.
지금처럼요.
“아, 하하, 하아…. 어서 오세요! 마녀님인 줄 알았네요….”
멋쩍게 웃으며 다가온 질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는 접수원이에요.
항상 그렇다고 생각하지만, 이럴 때마다 상당히 무안할 테니까요.
“이젠 익숙해져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너무 닮으셔서요, 승급 시험 때문에 오셨죠? 어제 갑자기 사라지셔서 놀랐어요.”
접수원과 질의 사이에는 유리판이 하나 있었는데, 질은 유리판 앞에까지 부담스러울 정도로 거리를 가까이했어요.
그래도 이 정도는 익숙한지 접수원이 따로 딴지를 걸어오진 않았어요.
의뢰를 받으러 오거나, 달성보고를 하러 올 때마다 이랬었나 봐요.
“앗, 죄송해요. 기뻐서 탈리안 언, 선생님한테 제일 먼저 알려주려고 했었는데, 접수원 언니 생각을 못 했네요!”
“이해해요. 모험가 랭크도 없는 상태에서 몇 주 만에 벌써 [D]랭크를 찍은 사람은 지르니트 씨가 처음인걸요.”
“그쵸?! 그래서 제가 가져와야 하는 아이템은 뭐에요?”
“아,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어제도 말했듯이 시험관님이 따로 계시거든요.”
본격적으로 승급 시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려고 하자, 접수원은 책상 아래에서 서류를 찾더니 이내 질에게 건네주었어요.
유리창 아래의 구멍으로 삐져나온 서류를 건네받은 질은 천천히 살펴보다가 접수원을 바라봤죠.
그 표정은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을 대신하고 있는 듯했어요.
“의외인가요? 좋아하실 줄 알았는데요?”
“아니, 그게…. 탈리안 언니라면 어제 황궁에 볼일이 있다고 3일간 자리를 비운다고 했거든요.”
“어, 네?! 어…. 아, 그, 어쩌죠? 시험관을 대신해줄 분이 지금은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이 반응이라면 질의 시험관 역시 탈리안이 자처했나 보네요.
알면서도 모른 척을 했었다니, 질을 놀라게 해줄 생각이었겠어요.
갑자기 황궁에서 일이 생겨버리는 바람에 기껏 세워놓은 계획이 물건너가버렸는데 아쉽겠어요.
그렇지만 탈리안이 말해두기를, 승급 시험에 합격하는 걸 기대한다고 했었는데요.
시험관인 탈리안도 없이 질이 어떻게 시험에 합격한다는 걸까요.
“일단 아이템이라도 먼저 구하러 갔다 올까요?”
“그, 그러셔도 돼요! 일단 아이템을 찾는 것부터가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고들 하니까요!”
“여기 적힌 건… 대롱풀이랑 핏츠 열매, 스플래시 밤. 이 세 가지네요?”
“대롱풀은 학원 주변의 산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핏츠 열매는 시중에서도 판매하고 있으니까 비교적 쉽겠지만, 스플래시 밤은 대륙 동남부로 가야 구할 수 있겠네요.”
“그렇게 다 알려주셔도 괜찮은 거예요?”
“괜찮아요, 대신 스플래시 밤을 얻는 게 힘들 테니 이 정도 힌트는 뭐어… 괜찮겠죠?”
익숙한 열매가 하나 들어가는 걸 보니 정말로 탈리안이 시험관이었던 건 틀림없는 것 같네요.
이렇게 시험관인걸 티를 낸다면 굳이 황궁에 일이 생기지 않았더라도, 서류에 시험관인 탈리안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더라도 진작 알아챘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그렇지만 그것보다도 질은 나중에라도 접수원이 정보를 알려준 것으로 합격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지 불안한 눈빛을 보내고 있네요.
“그, 그렇게 보셔도… 진짜 괜찮을 거예요!”
“흐응, 알았어요. 일단 가볼게요.”
뒤를 돌아 안내소를 나가려던 질은 문고리를 돌리려다 말고 두 걸음 뒤로 떨어졌어요.
바로 앞에 거대한 체구의 남성이 문을 열고 질의 앞에 섰거든요.
“네가 지르니트냐.”
“마, 아, 아닌데요!!”
실수로 맞다고 대답할뻔한 질은 순식간에 말을 바꿔 부정했어요.
지극히 옳은 선택이에요.
모르는 사람이 말을 걸면 제일 먼저 해야 하는 말이 있어요.
‘아니요!’, ‘싫어요!’, ‘안 돼요!’, ‘몰라요!’.
모두 부정의 말들인데, 이게 처음 보는 무서운 사람들이 말을 걸어온다면 꼭 해야 하는 말들이에요.
질이 만나는 사람이 그런 사람 중 하나라면 특히나 더 그래야 하죠.
흑기사가 질의 앞으로 나가 보호해주더라도요.
“나를 모르다니? 너, 지금껏 내 강의는 하나도 안 들었던 거냐?”
“…선생님이세요?”
“발자르 린델이다. 검술과 체술, 대인전을 담당하고 있고… 하, 내가 왜 이런… 소개 같은 거 집어치우자고. 난 마녀가 네 시험관 일을 대신에 해달라고 부탁하고 가서 찾아온 거다.”
“앗, 진짜 선생님이셨구나! 완전히 우락부락하고, 몸에 상처가 너무 많으셔서 선생님 아닌 줄 알았어요!”
질에게 발자르를 놀릴 생각이 있는 건 아니겠지만, 해맑은 표정을 하는 질의 말에 뒤에 있는 접수원들이 킥킥거렸어요.
곧 발자르의 따가운 눈총을 받고선 일에 집중하는 척을 하며 조용해졌지만요.
“…크흠! 따라와라, 자세한 설명은 가서 하지.”
“세르디어, 우리도 가자. 괜찮은 사람인 거 같아.”
이 셋이 도착한 곳은 학원의 선생님들에게 하나씩 주어지는 개인실이었습니다.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중년 남성의 방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방은 꽤 잘 정돈이 되어있었어요.
의자에 걸쳐져 있는 외투나 책상에 굴러다니는 펜만 아니라면 흠잡을 곳이 없었죠.
생긴 것도, 몸의 근육도, 담당하는 강의도 전부 육체파라고 하는데 방에서 땀내는커녕 책장이나 종이의 나무 냄새가 진동을 했다는 게 상당히 의외였어요.
“거기 소파 아무 데나 앉아라, 승급 시험을 몇 주 만에 치루는 녀석은 처음이라 나도 시험 내용을 생각해봐야 할 테니까.”
“탈리안 언, 선생님이 정해둔 시험이 있지 않아요?”
“그 녀석을 언니라 부르는 건가?”
질의 말에 날카로운 말투로 어이없다는 듯이 되묻는 발자르 선생님이에요.
발자르가 느꼈던 그 위험했던 감각 때문에 아직도 탈리안을 견제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 녀석이라뇨! 탈리안 언니가 얼마나 대단한데! 그리고 아무리 같은 선생님이라도 그렇게 부르시면 안 되죠!”
“아아… 그래, 그래 알았다. 승급 시험에 도전하기 전, 아이템을 모아오는 건 잊지 않았겠지?”
“그럼요, 근데 조건은 없는 거예요? 혼자 가야만 한다거나….”
“뭐? 그러다 죽으면 내 탓이라고 노발대발 달려들 마녀가 눈에 선한데 그런 조건을 붙여서 뭐 해? 스플래시 밤은 생각보다 위험한 지역에 있으니 파티를 꾸리든, 소환수랑 같이 가든 알아서 해.”
그렇지만 견제 외에도 탈리안이 시킨 일이라고 문제가 생길만한 일은 만들려 하지 않는 걸 보면 질에게 위급한 상황은 생기지 않을 것 같네요.
억지로 떠안은 일이기 때문에 오히려 사건·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하려는 태도는 바람직해요.
보통 그렇게 된다면 온전히 발자르의 탓이 될 테니까요.
“시험 내용은 내가 귀찮은 걸 정말 싫어하니까, 그러니까 아이템 감정의 끝나면 나랑 한판 붙어보는 거로 하지. …궁금한 것도 있고.”
“선생님이랑요?”
“그래, 그러니까 어서 가 봐. 마녀의 양녀랑 같이 있는 것도 불편하니까.”
“앗, 으, 네에….”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발자르의 눈치를 살피던 질은 곧바로 열쇠를 꺼내 들어 문 건너편으로 사라졌어요.
한껏 긴장했던 질이었지만 발자르가 전한 내용이 별거 없어서 그런지 방을 빠져나온 질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쉬었죠.
그리고는 흑기사를 곁눈질로 보고 늘어지는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어요.
“세르디어어….”
“응?”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힘없는 모습을 하는지 궁금해하는 흑기사였지만, 그다음으로 나온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어요.
“갑주 벗어봐.”
“어, …뭐? 잘못 들었나?”
아무리 학원의 거대한 마법 방벽 안쪽이라지만, 갑주를 벗으라는 말을 듣는다면 이런 반응이 당연했어요.
평소에는 자신이 갑주를 입고 있든지, 벗고 있든지 신경 쓰지도 않던 질이었으니까요.
훈련 중일 때나 가끔 팔과 다리에만 갑주를 착용하라고 하지, 그 외에는 갑주를 벗으라고 명령하라 한 적은 없었거든요.
“얼른.”
“아, 어, 알았다…. 돼, 됐어?”
그래도 명령을 재촉하자 흑기사는 얼떨떨한 기분을 가지면서도 순순히 질의 말에 따랐어요.
“하아아…! 저 발자르라는 선생님 마음에 안들어어….”
갑주를 거두어들이자마자 질은 흑기사의 품에 안겨 맹렬한 기세로 얼굴을 비벼댔어요.
흑기사는 평소 갑주의 안쪽에는 외부에서 가해지는 충격을 조금이나마 더 흡수하기 위해 폭신한 옷을 입고 있거든요.
“지, 질!? 여기서 이러는 건 그만둬줬으면 하는데!”
“사람도 별로 없잖아…. 그리고 세르디어는 나보다 키가 커서 딱 적당히 안기기에 좋을 거 같았단 말이야, 직접 해보니까 내 예상도 맞았고!”
“흣, 으…! 자, 잠깐마, 아읏!”
당황하는 흑기사를 보고도 질은 계속해서 흑기사의 배에 얼굴을 비비는 걸 멈추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인지 흑기사는 갑자기 안절부절못하며 몸을 배배 꼬기 시작했어요.
그럴수록 질은 흑기사의 허리를 세게 안아 더 격렬하게 비볐죠.
“지일, 잠, 깐…!”
“좋아! 이 정도면 다됐어! 가자!”
거의 흑기사의 다리에 힘이 풀리기 직전이 돼서야, 질은 흑기사를 놔주고 헝클어진 자신의 머리를 정돈했어요.
흑기사가 이렇게 곤란해하는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눈치 못 챘다는 게 더 신기하네요.
“하으, 으…. 으응.”
“그럼 이제 라피아 언니부터 만나러 가자! 아직 점심 전이니까 분명 방에 있을 거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