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화 〉 일상 속의 불청객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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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기사의 교육이라는 목적하에, 탈리안이 직접 상대가 되어주는 훈련은 몇 주간 이어졌어요.
다만, 초기와는 다르게 흑기사의 교육에 중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같이 싸워가며 합을 맞추는 일에 더 중점을 두게 되었지만, 결과는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았습니다.
훈련 도중 탈리안이 흑기사의 기강을 워낙에 세게 잡아두어서 틱틱거리는 특유의 건방진 성격도 바로잡혔고, 질과 함께 싸우며 이전에 없던 친밀감도 점점 쌓아갔거든요.
이것만으로도 훈련으로 얻으려 했던 결과의 절반은 이룬 것이나 다름없었죠.
그 결과 실력이 늘어난 흑기사를 소환하는 것만 성공해낸다면 의뢰를 하든, 누군가와 전투를 벌이든 무조건 성공하거나 이길 수밖에 없었어요.
질도 구경만 한 게 아니라서, 흑기사와 함께 탈리안을 상대하느라 마법이 많이 늘었거든요.
“오늘도 의뢰 달성 축하합니다, 지르니트 씨!”
“고마워요, 접수 안내원 언니!”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가볍게 의뢰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달성보고를 하고 있던 중인 거예요.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몸으로 흑기사의 어깨에 올라탄 채로 말이죠.
그런데 실적 포인트가 얼마나 올랐는지 확인한 뒤, 돌아가려는 순간에 질은 접수 안내원에게 붙잡혔어요.
아니, 정확히는 흑기사의 망토를 잡아당겨 가지 못하게 했죠.
“아아!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오늘로 지르니트 씨의 의뢰 실적 포인트가 1,000포인트가 되었거든요? [E+]랭크까지는 시험 없이 등급이 올라가지만, [D]부터는 그 이상으로 올라갈 때에 승급 시험을 봐야 해요.”
“그 말은….”
“이 시험만 통과하면 그때부터는 아무 데서나 ‘나 아스티엘 마법 학원 다니는 학생이야!’라고 자랑하고 다닐 자격을 얻는 거라구요!”
일부러 과장되게 말하는 안내원이에요.
그도 그럴 게, 이 학원에서의 승급 시험은 존재하지 않는 학년제를 대신하는 시스템이거든요.
[E+]랭크까지는 말 그대로 입학생이 된 지 얼마 안 된 상태라서 스스로 나태해지거나, 생각보다 어려운 의뢰나, 수업에 포기하고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 태반이라 무시당하는 일이 꽤 있어요.
하지만 [D]랭크부터는 ‘학원에 입학하기 위해서 노력깨나 했구나!’라고 들을 정도의 실력을 갖춘 학생이 되었다고 말 할 수 있는데, 이는 승급 시험 덕분이에요.
“물론? 시험을 보려면 우리 시험관님이 따로 지정해주시는 특별한 아이템을 가져오셔야 하지만요!”
“아이템?”
“네! 시험을 보기 위한 자격을 알아보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렇지만 놀랍네요, 입학식이 있고 나서 얼마나 됐다고 벌써 [D]랭크에 올라가는 사람이 있다니!”
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흑기사의 어깨에서 굳어있었어요.
어느 정도 대략적인 정보를 탈리안에게 듣고, 또 따로 필요했던 수업을 듣던 도중 알게 되었던 것들이라 언젠가는 시험이 다가올 거란 예상은 하고 있던 질이지만요.
그렇다고 이렇게 빨리 승급 시험을 치르게 될 줄은 몰랐던 거에요.
안내원은 그런 질의 반응이 귀여웠는지 헤실헤실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어요.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 대답은 돌아오지 않고 아무 말 없이 뒤를 돌아 자리를 떠나는 질의 모습만을 보게 되었어요.
너무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반응하지 못하고 질을 그대로 보내준 안내원의 당황한 얼굴이 상당히 볼만 했죠.
“질, 정말 이렇게 말없이 나와도 되는 거야?”
“언니한테 제일 먼저 자랑할 거야!!”
질도 이 짧은 시간에 승급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는 것이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라는걸 모르는 게 아니에요.
단상에서 차석으로 오르게 된 소감을 말하진 못했지만, 그 차석이라는 것의 이름값을 하게 된 것과 다를 게 없으니까요.
웬만한 수석, 차석들도 질보다 한두 달은 더 뒤에 시험을 보게 될 거예요.
웬만큼 의뢰에 미쳐 살거나, 광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게 아닌 이상에야 그 속도는 느릴 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니 질이 바로 탈리안을 찾아가는 것도 기쁜 마음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넘어가도록 해요.
“질? 어이, 질! 어디 가는 거야?”
그런데 멀리서 누군가가 부르는 소리에 질은 흑기사를 멈춰 세워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게 했어요.
그곳에는 순해 보이는 인상의 강아지가 있었는데….
특별한 점이 있다면 몸집이 흑기사보다 큰 근육질의 몸에 두 발로 서있다는 점이겠네요.
옷도 학원의 제복을 말끔히 차려입었고요.
“아, 헬리온! 나 이제 승급 시험 볼 수 있대!”
보통 사람이라면 기괴하다고 할 그 강아지에게 질은 스스럼없이 다가가 크게 말했어요.
주변에 지나가던 사람이 모두 들릴 정도로요.
“승급 시험? 야, 나도 꽤 열심히 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도 478포인트인데. 넌 1,000포인트를 다 모았다고? 제정신인가?”
“말 이쁘게 해! 봐줬으면 하는 사람이 있었단 말이야!”
흑기사가 있어서인지, 같은 학생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질은 강아… 헬리온과 상당히 친해 보였어요.
다른 종족임에도 불구하고 겁먹는 모습이 없는 걸 보면 친해진 지 꽤 시간이 흐른 뒤겠죠.
질이 학원에서 나름대로 적응을 잘 하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보나 마나 그 마녀님이겠네, 진짜 대단하다 너도.”
“탈리안 언니가 좀 대단해!”
여전히 탈리안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질은 열정적으로 변해버리네요.
그나저나 헬리온이 말하는 것을 보면 생각보다 탈리안이 유명한가 봅니다.
아니면 그저 선생님 중 한 명이라 알고 있는 걸 수도 있겠죠, 몇 주가 지났으니 알만한 사람은 다 알 거예요.
“그럼 나도 같이 갈까? 마녀님한테는 나도 볼 일이 있거든.”
“그래! 너도 옆에서 내가 얼마나 대단한지 거들어주면 되겠다!”
“아니, 그럴 생각은 없거든. 순전히 전해드릴 물건이 있어서 찾아가는 거니까.”
“너무해….”
헬리온은 다시 걷기 시작한 질의 옆에 다가와선, 손에 들린 작은 상자를 일부러 질에게 보여주고 흔들면서 말했어요.
한번 거절당한 질은 그 뒤로도 몇 번이고 도와달라며 부탁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싫다.’였죠.
계속되는 부탁에 헬리온은 대화 주제를 바꾸기로 했어요.
“야, 그럼 너 자격 아이템 구하는 것도 고생이겠네.”
“아, 깜빡했다….”
“뭘 깜빡해?”
“뭘 가져가야 하는지…. 너무 좋아서 언니한테 빨리 알려주려다가…. 그래도 괜찮아! 나중에 가서 물어보면 되니까!”
“너도 참…. 됐다, 너 알아서 하겠지. 강의실에 도착했으니 난 물건만 전해주고 갈 거야.”
해맑게 대답하는 질을 보고선 한숨을 쉬려다 마는 헬리온이에요.
좋아서 감정의 주체를 못 했었다는데 거기다 대고 한 소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아, 진짜 한 번만 도와…!”
그런데 질은 아직도 자신이 탈리안에게 좋은 모습을 보이도록 도와달라고 헬리온에게 부탁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은 것 같아요.
보통 탈리안이나 라피아라면 질의 부탁이라면 웬만해서는 다 들어줬겠지만, 헬리온은 뭔가 달랐어요.
흑기사의 앞을 막아서며 큰 몸을 이용해 위협적인 분위기를 내뿜으며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봤죠.
이 위협은 헬리온의 그 순한 얼굴이 한순간에 매서운 늑대의 얼굴로 보일 정도였어요.
“네가 귀여운 모습으로 이 사람 저 사람 홀리고 다니는 건 알겠는데, 질. 나한테는 안 먹힌다는 거 이걸로 100번은 넘게 말한 거 같다.”
“쯧.”
“뭐? 쯧?! 너 지금 쯧이라고 한 거냐?!”
“으에에!! 안들리네에! 언니!! 저 왔어요!!”
“야, 야!! 질, 너 이 자식이!!”
그렇지만 그런 위협에도 겁 한 번 먹지 않고, 오히려 질은 혀를 차며 강의실 안으로 들어가는 질이었어요.
수업 중이면 민폐인 일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다행히도 수업이 끝난 뒤였던 것 같네요.
여러 도구와 교재를 정리하던 탈리안이 갑작스런 질의 등장에 놀란 것 같은데, 질이 여기까지 찾아왔던 일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나 보네요.
“질? 여기는 무슨 일로 온 거예요?”
“저 승급 시험을 볼 수 있게 됐어요!”
질은 흑기사의 어깨에서 뛰어내려 탈리안에게 달려들었어요.
덕분에 탈리안은 정리를 멈추고 품 안에 달려든 질을 안아줄 수밖에 없었죠.
“승급 시험? 벌써 [D]랭크가 되는 건가요? 이렇게 빨리….”
“잘했죠?! 어서 칭찬해주세요!”
이 몇 주간의 시간이 흐르면서 질에게 작은 변화가 하나 더 있었다면, 그건 탈리안을 향한 행동이 꽤 적극적으로 변했다는 것이었어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탈리안에게서 칭찬을 바라고 애정을 바라게 되었다는 것이었죠.
잃어버린 부모의 사랑을 바라게 된 건지는 본인만 알겠지만, 뒤에서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헬리온에게는 알 바 아니었어요.
탈리안이 질을 칭찬할 틈도 주지 않고, 물건을 건네주는 헬리온이었어요.
“탈리안 선생님, 물건 전해드리러 왔습니다.”
“아, 고마워요. 헬리온…이었나요?”
양손으로 헬리온에게서 상자를 받아든 탈리안은 조심스럽게 그 이름을 불러주었어요.
입학생만 1만 명이었다면 학원에 다니고 있는 학생은 더 많을 텐데, 대단하네요.
“제 이름도 외워주시고, 영광이네요. 이 물건은 발자르 린델 선생님께서 보내신 겁니다.”
“그 고릴라가?”
“고, 고릴라라니…. 어쨌든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는 걸 보면 서류가 들어있을 겁니다. 문양도 황궁의 직인이 찍혀있으니까요.”
“짐작 가는 게 없지 않아 있네요, 수고하셨어요.”
이어 탈리안은 다음에 차라도 대접하겠다고 하는 낯선 모습까지 보여주었지만, 헬리온은 괜찮다고 사양하며 강의실을 나가버렸어요.
정말로 자신을 거들어달라는 질의 부탁을 한결같이 무시해버렸네요.
마녀도 홀리고, 뱀파이어도 홀리게 했던 질의 매력에 이끌리지 않았다는 거니 대단하기도 합니다.
대신 헬리온의 뒤통수가 약간 따갑긴 하겠네요.
질이 시선만으로 구멍이라도 내버릴 것처럼 매섭게 노려보고 있으니까요.
“바로 열어보는 거예요? 칭찬은요?”
“잘했어요, 질. 제가 도움을 줬다고는 하지만 상당히 빠르네요. 정말로….”
“전부 언니한테 배운 건데, 이정도야 당연한 거죠! 헤헤….”
탈리안은 칭찬 몇 마디를 하고선 바로 상자에 걸린 봉인을 풀어냈어요.
방금의 칭찬에는 진심이 담기지 않은 것 같지만 이는 탈리안 나름의 해결방법이었어요.
탈리안은 질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들이대는 것을 보고 쳐내는 것이 불가능했었어요.
혹시라도 거부한다면 주눅 들거나 기분이 상할 것을 알고 있기에 그러질 못했죠.
그렇다면 적당히 칭찬해주고 얼마나 작더라도 그에 대한 보상을 주면 된다고 생각한 것이었어요.
그게 평소에 질리도록 해주던 껴안아 준 상태에서 머리를 쓰다듬는다거나 하는 행동이었던 거죠.
실제로는 단순할지도 모르지만, 질에게 이게 먹혀들었어요.
노력과 비교해 받는 보상이 너무 짠 거 아니냐는 생각을 품고 있을지는 몰라도 말이에요.
“질, 잠시만 떨어져 주겠어요? 내용물을 조금 살펴봐야 할 것 같은데요.”
“5분만 이러고 있으면 안 될까요? 딱 5분만!”
상자를 열어 안에 들어 있는 서류를 보자마자 제대로 각을 잡아 읽으려던 탈리안이었지만, 이를 질이 허락할 리가 없었죠.
아무리 봐도 힘을 가지고, 보호자인 사람인 것은 탈리안인데….
실권은 질이 쥐고 있는 모양이네요.
어쩔 수 없이 안고 있던 손을 상자로 가져가 꺼내 읽기 시작한 탈리안이에요.
“…질? 미안하지만 중요한 일이 생겼어요.”
“중요한 일?”
“네, 시멜리의 일로 황궁에 출석하라는 서신이에요. 이제야 어떻게 처리할지 정해졌나 보네요.”
시멜리와 관련된 일이라고 말하자마자 바로 탈리안에게서 떨어지네요.
어리광은 좀 부려도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하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오래 걸리는 일이에요?”
“오래 안 걸려요, 3일 정도 집을 비워야 할 것 같네요.”
“오래 걸리잖아요!”
이건 탈리안이 나빴네요, 오래 걸리는 일이 아니라면서 3일씩이나 집을 비운다니.
질에게 있어서 탈리안이 없는 3일간은 정말 지옥 같을 거예요.
아마도.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쓸쓸하고 외롭겠죠.
항상 곁에 있었는데 갑자기 없으면 옆이 허전할 겁니다, 분명해요.
“착한 아이라면 기다리고 있을 수 있잖아요? 집에 먹을 것도 충분하고, 시멜리도 같이 출석해야 해서 집에는 질밖에 없겠지만… 흑기사랑 새로 계약한 릴리아도 있잖아요?”
모르는 사이 소환수 하나랑 더 계약을 했었나 보네요.
진로를 아예 소환사로 확정지은 걸까요?
“그건, 알겠어요…. 대신 언니가 돌아올 때쯤엔 제가 먼저 승급 시험을 끝내놔서 멋진 모습을 보여줄 거니까요!”
“알겠어요, 기대할게요.”
탈리안은 자신만만하게 큰소리치는 질의 모습에 작은 웃음을 흘렸어요.
시멜리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미간에 생겼던 주름이 바로 풀리다니, 탈리안도 꽤 중증이에요.
“근데 생각해보니깐, 승급 시험에 합격해서 랭크를 올리면 언니한테서 선물을 받고 싶어요!”
그런데 갑자기 선물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면 여전히 탈리안과 떨어지는 일이 싫은가 봐요.
뭐든 그동안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한 보상을 바라는 느낌이에요.
질의 표정을 살펴봐도 승급 시험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으니까요.
“네? 선물, 선물…. 제가 직접 제작한 스태프는 어떤가요?”
“그걸로 할래요!!”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바로 수긍해버리는 질이에요.
이쯤 되면 선물의 내용물도 중요하지 않은 것 같네요.
탈리안이 주는 거라면 뭐든 다 받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아니, 분명 그렇겠죠.
“그럼 제가 없는 동안은 잘 지내고 있을 거죠?”
“당연하죠!”
다시 확인차 혼자서도 잘 지내고 있을 수 있냐는 말에 힘차게 대답하는 질이에요.
탈리안은 그런 질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질이 고개를 갸웃거리니 양팔을 벌렸어요.
“황궁에 다녀오기 전에 3일간 못 볼 테니… 이리 오세요, 질.”
“헤헤… 언니 진짜 좋아요!”
다시 안기라는 말을 듣자마자 탈리안이 약간 휘청일 정도로 달려들어 품에 안기는 질이에요.
탈리안보다 큰 몸으로 가슴팍에 얼굴을 부비적거리는 거리기가 한참이었을까요.
등 뒤에서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질이 고개를 돌려보니, 흑기사가 빈 의자에 앉아선 자세를 편하게 잡고 둘을 구경하고 있었어요.
“세르디어, 눈치가 있으면 조용히 해줘야지!”
“왜, 난 괜찮으니 하던 거 마저 하지 그래?”
멋쩍은지 질은 흑기사를 탓했지만, 흑기사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계속해서 둘을 구경하기로 했어요.
질의 말이 약간 기분 상하게 할 말이었을 수도 있는데, 오히려 이젠 익숙하다는 듯이 대답하고 넘어가는 모습이었죠.
몇 주 동안 꽤 많이 봐오던 장면인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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