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 돌아온 일상과 흑기사 (5)
* * *
연습이 끝날 때쯤에 질과 흑기사는 녹초가 되어있었어요.
말린 오징어처럼 축 늘어져서는 바닥에서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죠.
공터의 주변에는 이 셋이 싸우는 소리를 듣고 몰려온 구경꾼들이 넘쳐났는데도 말이에요.
몰려든 구경꾼들을 신경 쓰지도 못할 만큼 힘들었다는 뜻이었겠죠.
탈리안의 조언을 받아들여 자신의 마나까지 써보았는데도 마법은 통하지 않아 배리어에 막히거나 튕겨 나갔었으니… 오늘 하루는 충분히 노력했다고 말해도 될 거예요.
마나도 거의 다 써서 얼마 남지 않았을 때는 마법을 쓰지 않고 육탄전을 걸기로 했지만, 자신의 속도와 힘을 주체하지 못해서 공격을 맞춰도 흘려질 뿐 아니라 대부분 빗나갔었어요.
질은 흑기사를 가르치기 전의 연습전이라는 목적도 새하얗게 잊어버리고 흑기사와 함께 힘을 합쳐 탈리안에게 제대로 된 공격을 맞추는 데에만 온 신경을 쏟아부었는데도 불가능했어요.
하지만 탈리안이 마녀라는 이름값을 하기 때문이지, 결코 이 둘이 약했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쨌든 하루 연습한 결과로서는 이보다 더 좋은 결과를 보기 힘들다는 겁니다.
탈리안이 생각하던 목표치에는 충분히 도달하고도 남았다는 것이 이번 연습의 결과물이었어요.
“질? 이제 돌아가야죠, 날도 저물었는데.”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좋아 보이는 표정을 한 탈리안이 다가와 질에게로 손을 내밀었어요.
잡고 일어나라는 의미였겠지만, 질은 탈리안의 손을 고개를 들어서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바닥에 드러누웠죠.
“온몸이 쑤셔요….”
“그런 애늙은이 같은 말은 어디서 배운 거예요?”
“애늙은이라니 너무해요… 그렇지 세르디어?”
“어? 어, 글쎄….”
아무래도 보통 힘든 게 아니었나 봅니다.
그럴 만도 하죠, 점심시간을 제외한 온종일 마녀를 상대했으니까요.
구경하던 사람들도 얼마나 대단하다고 생각하면 연습전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안 떠나고 있잖아요.
“아, 이참에 흑기사를 정령계로 돌려보내세요. 이번에도 흑기사가 멋대로 돌아가 버리면 하루 꼬박 돌봐준 의미가 없으니까.”
“아, 네에…. 세르디어 고생했어, 내일… 또 볼 수 있으면 좋겠다.”
“그래, 오늘 네가 날 따라 몸으로 싸운 건 꽤 나쁘지 않았다.”
“부끄럽게 왜 칭찬하고 그래…. 어쨌든 안녕!”
전투 중일 때를 제외하고 말수가 적은 흑기사가 칭찬을 해와서 그런지, 질은 얼굴을 붉혔어요.
그 덕분에 흑기사는 1초라도 빨리 더 정령계로 돌아가는 게 가능했습니다.
의도한 건 아니었겠지만 말이에요.
“자, 여러분! 저희 연습전은 끝났으니 모두 기숙사로 돌아가세요!”
아무래도 일단은 탈리안이 교사로 알려져 있고, 복장 또한 교사가 입는 옷을 입고 있으니 학생 대부분이 그 말에 따라 공터에서 떠나는 도중이었어요.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인파 속에서 작은 여자아이가 나타나 탈리안에게 말을 걸었죠.
“응? 누가 이렇게 싸우나 했는데 이 소리, 마녀였어?”
“…뱀파이어.”
당연하게도 학원에서 이들을 알아볼 사람이라면 이사장인 크롬웰이라거나 그의 딸 라피아밖에 없겠죠.
탈리안과 면식이 있는 발데르 린델과 크리스티나도 있겠지만, 선생님들 중에서는 반말을 해오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온종일 싸우고 있다는 사람이 있다길래 이제 막 보러 왔는데, 지르니트를 너무 험하게 굴리는 거 아니야?”
“괜한 참견이에요.”
“아, 그러셔? 뭐 오늘은 너한테 볼일이 있는 게 아니거든요~ 지르니트, 이거 받아.”
역시 이 둘이 만나면 꼭 한번은 신경전을 펼치네요.
둘의 사이에서 고생하는 질만 불쌍해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뭘 받은 걸까요.
“이거 귀걸이예요? 귀걸이라기에는 조금 커 보이는데….”
“이어커프인데, 귀에 구멍 안 뚫어도 되는 걸로 사 왔어. 저번에 피 빨게 해줬잖아? 그 뒤로 뭔가 몸이 개운하더라고? 그래서 보답할 겸 선물로 가져온 거야.”
“아, 감사해… 읏! 바, 받아도 되는, 거에요?”
선물이라는 말에 감사 인사를 전하려다가 질은 갑자기 뒤를 돌아보며 탈리안의 눈치를 살폈어요.
그야 그럴 수밖에요.
오늘 연습전을 하며 처음으로 탈리안에게 맞아봤거든요.
당연히 팔이나 다리 같은 맞아도 덜 아픈 부분을 맞았고, 맞았다고는 해도 공격을 흘리기 위해 살짝 쳐낸 정도였지만.
질에게 중요한 건 탈리안에게 맞았다는 그 사실이니까요.
그러니까 이렇게 탈리안의 질투심을 유발하는 라피아의 선물을 받아버리면, 나중에는 또 이걸 빌미로 어떤 일을 겪을지 두려운 겁니다.
설마하니 탈리안이 연습이나 교육을 하는 중도 아닌데 질을 때릴 리는 없겠지만, 굳이 폭력 말고도 정신력을 깎아 먹는 일은 넘쳐나니까요.
예를 들자면….
“왜 제 눈치를 보는 거예요, 질? 그런 거 받는다고 제가 신경이나 쓸 것 같나요?”
“아, 으…. 고, 고마워요, 라피아 언니….”
신경 엄청 쓰고 있다고 구겨진 표정이 말해주고 있네요.
표정뿐인가요? 자세도 평소랑 다르게 삐딱해서는….
“너도 참 고생이다, 마녀한테 사랑받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뭐라구요?”
“이야 무서워라~ 어쨌든 용건은 이걸로 끝, 나중에 또 보자!”
이런 식으로도 질의 정신력을 깎아낼 수 있는 겁니다.
선물만 줘놓고 도망가버린 라피아는 이런 질의 기분을 알기나 할까요.
질은 라피아가 주고 간 이어커프를 보고 있었어요.
모양은 비교적 단순하면서도 모서리에 보석이 박힌 박쥐 날개를 하나, 나비의 날개를 하나… 총 두 개의 이어커프를 받았네요.
그런데 넋을 놓고 있었는지 뒤에서 탈리안이 가깝게 다가온 것도 모르고 있었어요.
“박쥐 날개는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나비 날개는 꽤 괜찮네요. 저 뱀파이어가 이런 감성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어요.”
“핫!? 어, 언니….”
“정말이지, 제가 뭘 했다고 그렇게 겁을 먹는 거예요?”
“네? 아, 네….”
한때는 기겁하며 놀라기까지 하는 질이었지만, 이내 천천히 머리를 쓰다듬는 탈리안의 손길에 몸을 맡겼어요.
탈리안도 알기는 아는 거예요.
질투심을 부딪칠 사람은 질이 아니라는 것을요.
오히려 지금까지 라피아와 친하게 지낸다고 해서 질에게 진심으로 화를 낸 적은 없었잖아요?
어울리지 않게 질의 반응을 즐기며 장난을 쳤던 거죠.
아니, 마녀라는 이명을 생각한다면 장난을 친 것이 더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오늘 저녁은 제가 해줄게요, 질.”
“…평소처럼 제가 해도 되는데요?”
어딘가 불안하다는 표정으로 이어커프를 옷의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대신하겠다는 탈리안을 만류하는 질이에요.
아직도 라피아가 이어커프를 선물했던 일을 신경 쓰는 거겠죠.
탈리안이 그것에 관심을 두고 있을 것이라고.
“오늘 고생했잖아요? 생각보다 마법도 잘 썼고, 흑기사가 덤비는 모습을 보고 잘 따라하기도 했으니까요. 편히 쉬어요.”
“저, 언니… 진짜 괜찮은 거 맞죠?”
그렇지만 탈리안이 평소에 보여주는 그 모습은 질의 걱정을 쓸데없는 걱정이라며 깔끔하게 치워버리는 것 같았어요.
평소와 한치의 다름도 없는 차분하고 상냥한 모습의 탈리안을 보고서도 불안했는지, 이번에는 아예 라피아의 일을 신경 쓰지 않는 거냐고 물어봤습니다.
아무리 장난이었고, 연습전이었기에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탈리안에게 맞은 건 처음이었으니까요.
탈리안이 질에게 반격하고 나서 아파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괜찮냐며 걱정한 일도 있었지만, 지금 그게 생각이 나겠어요?
지금의 질에게는 탈리안의 질투심이 정말 사라졌는지 판단하는 게 더 중요한걸요.
질에게 확답을 준 적이 없잖아요.
‘이 모든 것은 질의 반응이 좋으니 장난을 쳐본 것이고, 질투심을 누구에게 향해야 할지는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어요.’라는 식의 답을요.
“제가 요리에 독이라도 탈까 봐 그래요?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까지 질의 반응이 좋아서 장난 좀 친 거니까. 미안해요.”
“…아, 네? 진짜예요? 정말? 선물 받은 것도 써도 되는 거예요?”
바로 이에 대한 답이 나올 줄은 질도 몰랐겠죠.
그렇기에 몇 번이고 되물어보는 것일 테고요.
“네. 저를 신경 써주고 있는 게 표정으로, 몸짓으로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귀엽던걸요.”
“아, 우으… 너무해요…. 진짜, 너무해요… 흑.”
“울 정도였어요?! 왜?! 아니 울지 마세요!! 제가 다 잘못했으니까, 아니, 아… 어쩌지? 진짜 왜 울고 그래요…. 미안해요, 질. 제가 장난이 심했어요.”
몸은 다 컸는데 정신적 나이는 면은 아직 어린아이라 감정에 휘둘리는 게 참 언밸런스하네요.
물론 원인은 탈리안에게 있으니 우는 것도 어쩔 수 없긴 합니다만.
그것보다는 사람들이 다 돌아간 뒤에 울어서 다행이네요, 만약 아직 사람들이 남아있었다면 관심이 끌렸을 테니까요.
질의 울음은 탈리안이 한참을 어르고 달래야 멈출 수 있었어요.
집에 돌아온 뒤에는 시멜리가 질의 얼굴을 보고 눈이 왜 이렇게 부었냐고 물어볼 정도로 오래 울었었죠.
이후 탈리안이 차려준 밥을 먹으면서 질은 탈리안에게 자신과 한가지 약속을 하자고 했어요.
다른 사람이 곤란해하거나, 착각할만한 장난은 치지 않기로요.
탈리안이 자신에게 이런 장난을 쳤다는 사실이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나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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