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 돌아온 일상과 흑기사 (4)
* * *
“아, 잊고 있는 게 있었네요.”
막무가내로 연습을 시작한 탈리안은 질에게 선공을 내주었지만, 공격해올 생각을 않던 질을 보다가 무엇을 떠올린 듯 공터의 주변을 둘러싼 탑으로 향했어요.
그리고는 탑에 손을 대고서 마나를 흘려 넣었죠.
“뭐 하는 거예요?”
“마나로 이루어진 방벽을 생성하는 거예요. 발동에 마나를 소모하기는 하지만, 한번 켜두면 반영구적으로 사용 가능한 결계와도 같은 물건이죠.”
탈리안이 말을 끝마치자마자 탑에서는 투명하면서도 약간은 푸른 마나가 공터의 주변을 둘러싸, 점점 옆의 탑으로 범위를 확장하기 시작했어요.
조금 기다리다 보면 마나가 공터를 완전히 돔의 형태로 안과 밖을 격리한 것을 볼 수 있었죠.
질이 신기해하며 마나의 방벽을 만져보기도, 두드려보기도 했지만 웬만한 힘으로는 절대로 부서지지 않을 것 같았어요.
“다시 시작하죠, 질? 괜찮으니 얼른 공격해보세요.”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머뭇거리며 제자리에 서서 곤란해하는 질의 모습에 탈리안은 한숨을 쉬었어요.
그렇지만 이 문제로 인해서 질에 대해서 실망했다거나 기대 이하라거나, 부정적인 생각을 품는 건 아닌 것 같았죠.
어디서부터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막막할 때 나오는 그런 한숨 같았거든요.
“질, 당신의 착한 성격에 마을의 아이들이랑 싸워본 경험이 있을 리 만무하겠죠. 그래도 때린다는 행동이 뭔지는 알지 않나요?”
“알지만, 연습이라고 해도 어떻게 제가 언니를 때려요….”
“…질? 이런 말은 미안하지만, 당신의 주먹을 맞는다고 아프지도 않을 것이고, 애초에 맞아주지도 않을 거예요. 제 목표는 당신을 가르치는 것에 있으니 전부 막거나 흘려버릴 테니까요.”
그러니 마음껏 공격하라는 탈리안의 말에 질은 겨우 한번 주먹을 휘두르는 게 가능했어요.
하지만 질이 누구던가요? 몸이 급성장해버린 10살의 여자아이죠.
이전의 탈리안이나 라피아가 싸웠던 것처럼 머리채를 잡아볼 경험도 없었고, 그렇다고 주먹으로 누군가를 때릴 경험도 없었죠.
천천히 휘둘러진 주먹은 탈리안이 막거나 흘려버릴 가치도 없었어요.
살포시 탈리안의 손에 툭, 하고 올려진 게 전부였거든요.
때리려고 한 게 아니라 손을 맞잡으려고 했다고 해도 믿을 위력이었어요.
“…, 질. 정말 세게 때리지 않는다면 어제 걱정하던 것처럼 제가 흑기사를 빼앗아 갈지도 몰라요.”
“…세르디어.”
질은 흑기사가 언급되자마자 작게 그 이름을 중얼거리며, 결계 가장자리에 앉아서 구경 중인 흑기사를 바라봤어요.
일단은 탈리안에게 갑주를 모두 벗으라는 말에 평범한 옷을 입은, 평범하게 키가 큰 언니 같은 흑기사가 보였죠.
“으읏, 아직 멀었어요!”
당연히 질에게 망설임이 있거나, 원해서 이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탈리안도 알고는 있지만….
그럼에도 탈리안의 입장에서 다시 일어선 질의 이 공격을 공격이라고 부르기에는… 말을 아끼도록 하죠.
어쨌거나 질은 탈리안의 말을 듣고 조금 더 노력하기로 했어요.
팔과 주먹에 더 힘을 준다거나, 몸무게를 실어보기도 했는데 결과야 뭐… 뻔할 뻔 자였습니다.
수많은 시도를 하면서 점점 나아지기는 했지만, 탈리안의 손에 전부 막혀버리는 공격들이었어요.
“당신이 자라온 환경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은 알지만요, 질….”
“하으, 후으… 읏. 저, 저도… 노력하고 있는, 건데….”
“아니, 아, 알아요. 알지만! 다른 방법을 강구해보도록 하죠….”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앉아 침울해하는 질의 모습에 탈리안이 당황하며 달래기 시작했어요.
물론 이런 수많은 시도 끝에 자세도 잡혀가고 괜찮아졌지만, 탈리안이 생각하는 기준에는 한참을 못 미치는 결과라는 것이겠죠.
그래서 탈리안이 새롭게 생각해낸 것은 가속 마법을 더해 질을 힘에 이끌리도록 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질이 힘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반대로 질이 힘에 휘둘리도록 하면 될 일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새롭게 손에 가속 마법을 걸어주었으니, 마나를 적당량 손에 집중시키기만 하면 원하는 순간에 빠르게 타격하는 게 가능할 거예요.”
몸이 밝게 빛나는 게 신기한지 계속해서 몸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질이에요.
그리고는 전투에 임하기 전에 다시 엉성하게 두 주먹을 들어 올려 자세를 잡았죠.
“그리고 질, 일단 새로운 마법을 걸어주기는 했지만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하는데… 아무래도 옆에서 제대로 싸우는 사람이 있어야만 그를 보고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면, 힘이 아니라 마법을 통해서 흑기사를 교육한다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같이 싸우며 유대감을 깊이 하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있을법한 방법은 죄다 꺼내 보는 탈리안이에요.
뭐 쓸 수 있는 방법이 많다면 하나하나 다 시험해보는 게 올바르긴 합니다.
지금 탈리안과 질에게 있어서 차고 넘치는 게 시간이니까요.
“옆에서 보고 배우라는 거에요? 누구를….”
“저한테 무참히 패배하긴 했더라도 훌륭한 참고서가 옆에 있잖아요? 그렇죠, 흑기사?”
“어!? 어, 그, 그렇지, 아니 그렇죠…! 내, 제가 옆에서 싸우는 모습을 보고 배우라는… 그런 말이군…요.”
실리아의 본체인 탈리안이 말을 걸어서 그런지 1초의 공백도 없이 바로 대답하는 흑기사예요.
분신인 실리아에게 무참히 패배했었는데 탈리안에게 안 좋은 모습을 보여서 좋은 것이 없다고 판단한 거겠죠.
정말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그냥 단순히 겁먹은 거예요.
저것 보세요, 탈리안이 손짓하니까 바로 뛰어서 달려오잖아요.
이제는 완전히 말 잘 듣는 대형견이랑 다를 게 없네요.
이런 모습을 질이 명령했을 때 보여주어야 할 텐데요.
“흑기사는 갑주는 팔과 다리에만 착용하고, 둘이 힘을 합쳐서 저를 상대해보세요. 적당히 상대해줄 테니까, 질은… 마법을 같이 사용해도 괜찮아요.”
“이러면 되는 건, 가요.”
흑기사는 팔과 다리에 마나를 집중시켜 한순간에 사라졌던 갑주를 만들어냈습니다.
참 편리한 기능이네요.
“마법도 사용해도 되는 거면, 어떤 마법이든 괜찮은 거예요?”
“네, 전력으로 부딪쳐와도 상관없어요.”
“…알겠어요! 노력해볼게요!”
질은 자신의 공격이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마자 탈리안에게 덤벼들던 도중부터 전력을 다해왔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적당히 상대해주겠다고 하니 안 그래도 먹히지 않던 공격이 이제는 더 소용없는 짓이 되어버리겠죠.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근성만큼은 칭찬할 만했어요.
탈리안도 자신 있게 말하는 질의 모습에 다가와서 머리를 쓰다듬어 줬으니까요.
“자, 여러분이 좋을 때 덤벼오세요.”
“세르디어! 가자!”
“하아, …그래.”
아무런 자세도 잡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는 탈리안에게 제일 먼저 달려든 것은 흑기사였어요.
다시 연습을 시작하기 전에도 탈리안이 말했지만, 질에게 흑기사를 보고 배우라고 했었잖아요?
이에 적당히 눈치껏 흑기사가 먼저 나선 거였어요.
평소였다면 보고 따라 하는 것조차 불가능했을 일이 지금은 마법으로 신체가 강화되어서 가능할 테니까요.
“질이 보기에 너무 복잡한 공격은 하지 말도록 하세요, 알죠?”
“…알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한 공격은 정말 단조로우면서도 흑기사에서부터 탈리안까지 도달하는 선이 깔끔한, 주먹을 내지르는 것이었어요.
그 속도나 위력이 아슬아슬하게 질이 따라 할 수준은 되었죠.
탈리안은 자신의 옆구리로 들어오는 주먹을 한 손으로 막아내며, 동시에 가볍게 제자리에서 뛰어올라 흑기사의 머리에 손을 뻗어 그대로 지면에 처박으려 했어요.
체구에서 차이가 나다 보니 점프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탈리안의 민첩함은 그 차이를 무의미하게 만들었어요.
“…당하지 않는, 않습니다!!”
“그래야죠,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요.”
순식간에 반격이 들어온 것에 당황하지 않고 흑기사가 몸을 비틀며 빠져나와 거리를 벌렸어요.
이 모든 것을 질은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아냈어요.
흑기사의 공격을 탈리안이 막아내고, 반격까지 한 일이 10초가 채 되지 않은 짧은 순간이었는데도요.
“조금 빨랐을지도 모르겠네요, 다시 공격해오세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리고 질도 보고만 있지 말고 마법이라도 사용해보세….”
이번에는 탈리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빠르게 접근한 뒤, 태클을 걸어와 탈리안의 자세를 무너뜨리려 한 것 같았지만, 이 역시 탈리안이 두 걸음 뒤로 물러나며 소용없는 일이 되었어요.
기습을 시도한 건 좋았다며 칭찬한 탈리안이에요.
탈리안은 보답으로 바로 달려들어 흑기사의 팔을 잡아 공중으로 던져버렸습니다.
그리고는 상당히 높이 뜬 흑기사가 있는 방향으로 손을 위로 뻗어 마법을 준비하는 것 같았죠.
이어서 구경만 하고 있는 질을 보고는 살짝 웃으며 입을 뗐어요.
“자, 질? 저를 막지 않으면 흑기사가 위험할 거예요.”
차분하면서도 짓궂은 표정을 하는 탈리안은 말 그대로 마녀와 똑같았어요.
흑기사가 위험하다는 말에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도 곧바로 발동할 것만 같은 탈리안의 마법에, 질도 바로 마나를 모아 불의 화살을 만들어냈어요.
도서관에서 실패했던 그 마법이었죠.
어쨌든, 달려들기보다 마법을 사용한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봐도 될 거예요.
가속 마법을 부여받았다지만 달려든다고 해도 탈리안의 마법을 막아낼 수 있는가는 또 다른 별개의 문제니까요.
그렇다면 질이 할 일은 한 가지밖에 없죠.
“제 마법에 도전하는 건가요? 마나 배리어를 뚫을 수조차 없을 텐데…. 그래도 그 도전 정신만큼은 칭찬할 만하네요.”
너무 높게 뜬 나머지 흑기사는 이제서야 지면에 떨어지려고 하고 있어요.
이와 같은 때에 탈리안의 마법은 거의 막바지에 다다라, 언제든 흑기사를 공격할 준비가 되어있었죠.
이는 질도 마찬가지였어요.
질의 손 위에서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불의 화살은 도서관에서 봤던 것보다 더욱 크기를 키워가기만 하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거든요.
지금의 질의 실력으로는 크기가 제어되지 않는 마법인 것 같았지만, 오히려 이 순간만큼은 그러지 않으면 탈리안의 마법을 막아낼 수 없는 것 같았어요.
“공격해오지 않는다면, 제가 먼저 흑기사를 공격할 뿐이에요.”
화살의 촉이 탈리안을 향하고 때를 기다리기만 하는 걸 참기 어려웠는지, 탈리안은 평소에 흔히 볼 수 있던 깊은 배려의 ‘ㅂ’조차 보여주지 않고 마법을 쏘아 올렸어요.
손 위의 마법진에서 쏘아 올려진 단순한 마나로 이루어진 탄환이지만, 그렇기에 그 어떤 것보다 빠르고, 그 어떤 것보다 크기가 컸습니다.
그러나 질은 당황하지도 않고 흔들리지 않는 눈빛으로 불의 화살을 흑기사와 마나의 탄환 사이로 날려 보냈어요.
처음부터 그것이 목적이었다는 듯이 말이죠.
“저를 공격하려던 게 아니었나요?”
“언니한테 공격해도 통하지 않을걸 알고 있으니까요!”
질의 불의 화살은 처음 선보인 마법치고는 확실히 속도도 빠르고 위력도 강해 보였지만, 탈리안이 쏘아 올린 마나의 탄환보다는 느리고 약해 보였어요.
만약에 상대가 탈리안이 아니었다면 질을 칭찬해도 차고 넘칠만한 그동안의 노력이 성과를 보였다는 거예요.
혼자서 마법과 관련된 책을 읽고, 마법을 연습하며, 남들 모르게 노력해왔던 것들이 이제야 성과를 보였다는 거죠.
재차 말하지만, 상대가 탈리안만 아니었다면 충분히 칭찬할 만한 일이에요.
“세르디어! 방패 꺼내애!!”
그리고 이 역시 처음으로 세르디어에게 제대로 된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죠.
자신의 마법만으로는 탈리안의 막지 못할 것이라는 걸 제대로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마법끼리 부딪쳐서 생기는 폭발의 여파를 방패로 막아내라는 의미일 겁니다.
질의 생각 그대로, 마법과 마법이 부딪히면서 생긴 폭발은 그 위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어요.
불꽃과 탁한 마나가 섞여 공중에서 흩뿌려지는 광경은 누가 봐도 대마법사 둘이 싸우고 있다고 생각해도 과언이 아니었거든요.
약간 과장을 좀 보태서 표현했지만, 이 일로 인해 지금껏 소환수인 흑기사만 다뤄오던 질은 스스로 마법에 재능이 있다는 걸 증명한 것과 다름없었죠.
“으앗! 저렇게, 저렇게 크게 터질 줄은 몰랐는데…!!”
“그러게요, 저도 의외네요. 힘 조절을 해서 쓴 마법이라지만… 질의 마법을 관통조차 못 하고 서로 부딪혀 상쇄될 수준의 위력이었다니, 놀라워요.”
폭발이 얼마나 굉장했냐면, 하늘의 구름이 폭발 한 번에 다 모습을 감춰버릴 정도였어요.
한 번으로 콰광, 하고 끝이 아니라 마나끼리 특이한 연쇄 폭발을 일으키며 거센 돌풍을 일으켰는데….
그 돌풍이 질이 있는 지상으로까지 도달하려 하기에 탈리안이 보호 마법을 써서 질을 지켜줘야 했죠.
“아, 그, 그래요? 세르디어는….”
“저기, 결계 밖의 수풀에 떨어졌네요. 역시 정령이라 그런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크게 다치진 않네요.”
폭발의 위력을 본다면 흑기사 역시 무사할 리는 없었다고 봐도 되었겠지만, 정령은 생각보다 튼튼한가 봅니다.
아, 튼튼하다고 해서 완전히 멀쩡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왼손에 들린 방패가 어제보다 더 처참하게 중앙이 푹 들어가 찌그러져 있었거든요.
질의 말대로 방패로 몸을 보호했기에 다친 곳은 없어 보였지만 방패의 내구성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 같습니다.
2개의 강한 마법이 맞부딪혀 생긴 폭발에 근접해 있었음에도 방패가 찌그러지는 것으로 끝났다면 보통 단단한 게 아니겠죠.
마법이 격돌해야 이런 모습이 되는데, 그렇다면 어제 방패가 걸레짝이 되었던 일은… 실리아의 주먹이 약간 매웠던 걸로 생각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래도 상당히 공포스러운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건 변하지 않습니다만.
“아?! 세르디어! 괜찮아?!”
“아, 아아… 괜찮아.”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걸 보니 확실히 멀쩡한 것 같네요.
“그럼 다시 덤비세요, 마저 해야죠? 질이 배울만한 건 아직 나오지도 않은 것 같은데요.”
“아, 저기, 그게, 탈리안… 선생, 님? 저 더 이상은 무리일 것 같습니다.”
탈리안이 뻔히 쳐다보며 다시 들어오라고 하자마자 흑기사는 눈을 내리깔며 바닥을 본채 자신 없이 말을 꺼냈어요.
“하나, 둘….”
“가, 갑니다!”
“…결국 올 거면서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는지.”
뭐, 질에게만 관대한 탈리안에게는 먹히지도 않을 말이었네요.
흑기사도 그렇지만 질도 앞으로 조금 더 고생하게 생겼어요.
뒤에서 관찰만 하기에는 혼자서 탈리안을 상대하는 흑기사가 불쌍해 보였을 테니까요.
스스로 나서서 흑기사의 근접전을 보조하기 위해 마법을 쓰기 시작했으니 이제부터 시작이겠네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