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50화 (50/189)

〈 50화 〉 돌아온 일상과 흑기사 (3)

* * *

질은 학원에 볼일이 있는 날이 아닌데도 누구보다 아침 일찍 일어나 탈리안의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렇다고 평소에 질이 늦잠을 자거나 다른 사람들이 깨어있을 시간에 자고, 자고 있을 시간에 깨어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저 흑기사를 자신의 손으로 가르친다는 마음에 들떠있는 거죠.

질이 들뜬 나머지 놓친 사실이 있다면 지금은 새벽 5시라는 것이었어요.

“언니 언제쯤 나올까….”

탈리안이 보통 잠을 자지 않는 날이 많지만, 그렇다고 또 아예 잠을 자지 않는 건 아니에요.

처음에는 잠을 자지 않고, 휴식을 취하지 않아도 괜찮은 초월적인 마녀와 같았다고도 할 수 있었지만….

하지만 그건 탈리안이 육체적인 피로감을 무시할 수 있는 것이었을 뿐, 이제는 정신적인 피로까지는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었잖아요.

정신적으로 피로하다면 그게 마녀이건 평범한 사람이건 잠을 자서 뇌를 쉬게 해줄 필요가 있으니까요.

그래서인지 기다리다 지친 질은 책장에서 마법과 관련된 책을 하나 꺼내 읽기 시작했어요.

책은 ‘마법진의 이해와 수용’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네요.

책갈피를 끼워 넣은 걸 보니 처음 읽는 건 아닌 것 같았어요.

“저번에 읽은 부분 말고… 기초 마법이….”

마법진의 이해와 수용이라는 책이기에, 마법진에 관한 내용은 당연히 들어있는데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그 마법진이 어떤 마법의 것인지도 들어있겠죠.

질이 특히 주의 깊게 살펴본 마법은 불을 다루는 마법이었습니다.

책 자체가 기초 중의 기초를 다루기에 그려져 있는 마법진도 그렇게 어려워 보이진 않았죠.

아니, 오히려 쉬워 보였어요.

커다란 원 안에 각이 6개인 별, 육각성이 그려져 있어 중앙에는 해와 구름이 공백을 채워주고 있었죠.

“…이렇게?”

질은 옆에 준비해둔 종이에 마법진을 따라그려 보고서는, 책과 종이를 모두 엎어 새로 마법진을 다시 그려냈어요.

마법진을 한번 보고, 한번 그려낸 것으로 완전히 ‘기억’해낸 거예요.

뭐 이정도야 마법진이 쉬웠기에 그런 것일 수도 있겠죠.

다음으로 질은 책을 펼쳐 마법진에 어느 정도의 마나를 사용해야 하고, 어느 부분에 마나를 집중 시켜야 하는지를 살펴봤어요.

그리곤 책을 한 손으로 들고, 다른 한 손은 공중에 들어 마나를 모으기 시작했어요.

주변에서 주홍색의 마나가 모여들어 손 위로 모이더니 이내 완전히 둥근 구를 이뤄냈어요.

붉다는 것 외에는 냄새도 온도도 없던 마나의 구체는 작은 불씨로 변하더니 점점 커지며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앗… 뭔가 다른데….”

바로 마나를 줄여 크기를 제어해 적당한 크기의 불을 만들어 내는 것은 성공했지만, 책에 적혀있는 것과는 어딘가 달라 보였어요.

책에서는 그저 타오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양 자체를 화살과 비슷하게 만들어 유지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었거든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질은 마나를 흩뿌려 불을 점차 작게 해 끝에는 사라지게 했어요.

다시금 책에 집중하다가 또 한 번 더 불을 태우기 시작했죠.

이번에는 스스로도 느낌이 좋았는지 마나를 더 추가했어요.

그만큼 모양을 갖춰가는 불의 변형 속도도 조금씩 빨라졌지만, 그 여파로 불은 이상하게 크기가 더 커지기 시작했어요.

이건 뭔가 아닌가 싶었나 봐요.

질도 한 손으로만 제어하던 불꽃을 두 손으로 제어하려 들었거든요.

“어어! 어, 어쩌지?! 이게 아닌데! 으아아!”

자신이 키워낸 불꽃에 되레 겁을 먹으면서도 확실히 제어하려 드는 모습이에요.

저러다 애꿎은 불똥이 책상이나 책에 튀어버린다면 정말 끔찍하겠네요.

“제발, 제발 다시 작아져… 흐앗?! 어, 언니!?”

“…질, 주어진 마법진은 요리의 레시피와도 같아요.”

뒤에서 나타나 불꽃의 주변으로 양손을 둘러싸는 탈리안의 소리 없는 기척에 질은 화들짝 놀라 마나의 조절에 실패해 불의 크기를 키워버렸어요.

물론, 탈리안이 왔으니 불은 갑자기 생겨난 물의 장막에 갇혀 더이상 타오르지 못했지만요.

“레시피는 말 그대로 어떤 재료가 필요한지, 어떻게 요리하면 되는지 알려주는 지표와도 같은 거죠. 마법진도 똑같아요.”

“마법진도?”

“자연 속의 마나만 끌어다 썼죠? 자연 속의 마나는 여러 종류가 있어요. 다양한 속성부터 자연의 생물로부터 만들어지거나, 정령이 남기고 간 마나 같은… 하지만 지금은 그것보다 어제 실리아가 멋대로 약속해버린 교육에 관해 이야기할까요.”

물의 장막 속에 갇혀버린 불을 완전히 꺼트린 뒤, 탈리안은 문을 열고 질의 손을 잡아 이끌었어요.

어디로 이동하는지 말도 없이 자신을 이끄는 탈리안의 손에도 질은 말없이 따를 뿐이었죠.

둘이 도착한 곳은 학원의 작은 공터.

문을 열고 들어온 곳의 뒤에는

공터의 가장자리에는 이상한 모양의 얇은 탑이 여러 개가 서 있었어요.

마치 결계처럼 공터의 안과 밖을 분리하게 시키기 위한 것처럼 보였죠.

“여기서 흑기사의 교육을 할 거예요. 자, 먼저 소환부터 해야죠?”

역시 탈리안의 말이라고 곧바로 소환해내는 질이에요.

말 하나는 정말 잘 듣네요.

흑기사는 저번과 같이 공중에 나타난 마법진을 통해 소환되었어요.

그런데 이번에는 흑기사가 탈리안을 한번 바라보더니 바로 시선을 돌려 질을 바라봤어요.

“응? 세르디어, 그 갑옷은 어떻게 된 거야? 저번에 실리아 언니가 망가트렸잖아.”

“…갑옷도 내 일부이기 때문에 정령계로 돌아간다면, 충분한 시간을 가진다면 회복이 가능하지.”

“신기하네, 그래도 편하겠다.”

“으, 으음….”

질의 말대로 흑기사의 갑옷은 처음 봤을 때처럼 광이 나고 단단해 보이는 중갑 그대로였어요.

물론… 탈리안에게는 그저 종이로 만들어진 옷가지와 다를 게 없겠지만, 이건 탈리안이 괴물같이 센 탓이니까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튼튼하고 절대 부서지지 않을 중갑이 맞습니다.

그러니 절대로 탈리안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눈치만 보는 흑기사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거예요.

“잡담은 거기까지 하도록 하고, 골라보세요. 검과 손… 어떤 게 더 마음에 들죠, 질?”

“저는… 손이 더 좋아요!”

“좋아요. 손 좀 잡죠.”

밝게 대답하는 질의 손을 순식간에 잡아채는 탈리안이에요.

평소 같았다면 질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보고만 있었을 거예요.

방금 문을 건너올 때에도 별말 없이 손을 잡은 상태에서 따라왔었고요.

그런데 왜 지금은 어깨를 크게 움찔거려 놀란 눈으로 자신의 손을 양손으로 붙잡은 탈리안을 보는 걸까요.

“네? 네!? 아, 가, 갑자기?!”

“아까는 괜찮았으면서 지금은 손 정도로 왜 그러는… 설마, 이제 와서 그 뱀파이어를 생각한 건 아니겠죠?”

그런 질에게 게슴츠레한 눈으로 라피아를 생각한 것이냐고 물어보는데,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네요.

왜 라피아를 언급했는지는 질이 이런 반응을 보일만 한 일을 떠올려보면 당연한 것이었죠.

대답이 없자 그저 빤히 바라보고만 있는 탈리안이 부담스러웠는지 질은 겨우 입을 떼, 대답했어요.

“그, 그, 그럴 리가요!!”

그렇지만 간신히 대답한 것도 큰 신뢰를 주기는 어려웠어요.

표정에서부터 드러나는 거짓말을 누가 믿을까요.

게다가 답지 않게 식은땀을 흘리는 것도 한몫했으니까요.

“…그런가 보네요. 뭐, 괜찮아요. 왜, 제가 질투라도 할 것 같았나요?”

“아, 아니요! 언니가 그럴 리…!”

“의심 가득하고 떨리는 눈부터 어떻게 하고 말하세요, 질.”

“아우으… 그, 그렇지만….”

‘질투라도 할 것 같았나요?’가 아니라 이미 질투를 했던 전적이 있었지 않았나요?

질투했던 당시 질이 막 잠에서 깨 비몽사몽 한 상태였다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하는데요.

이겨낼 사람이 없는 세계 최강의 마녀라고 하더라도 이건 보통 뻔뻔한 것을 넘어섰네요.

이미 한번 본심을 들켰던 탈리안은 어디 간 건지 궁금할 정도예요.

“괜찮아요, 지금은 그것보다 이게 더 중요해요.”

“이건, 뭘 하신 거예요? 팔이, 아니 몸에서 빛이….”

탈리안이 맞잡은 손에서부터 서서히 푸른 빛이 감돌기 시작하더니 그 빛은 곧바로 질의 온몸으로 퍼져나갔어요.

이는 완전히 마나에 둘러싸였다, 감싸졌다고 말해야 될 수준이었죠.

“손이 좋다고 했으니, 신체 강화 마법을 걸어준 거예요. 몸도 단단해지고 고통을 덜 느끼게 해주는 마법을.”

“교육에 강화 마법이 필요해요?”

“그야, 이번은 소환자가 소환수보다 더 강하다는 것을 각인시키기 위한 교육이거든요.”

“언니 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겠네요.”

이후 탈리안이 설명하는 교육의 내용은 교육이라고 부르기에는 처참하기 그지없는 것이었어요.

누군가를 가르친 경험이 있다면 모를까, 이번이 처음일테니까 어쩔수 없겠지만요.

우선 첫 번째 교육은 방금 탈리안이 걸어준 신체 강화 마법을 통해 대련을 하여 흑기사를 제압해 주종 관계를 완벽히 한다는 것이었어요.

두 번째 교육은 탈리안이 첫 번째에서 걸어준 마법을 스스로도 쓸 수 있도록 익히는 것이었구요.

세 번째 교육은 흑기사의 행동을 제한할 수 있도록 소환의 유지에 소모되는 마나를 줄여 소환에만 유지되도록 쓰이게 하는 것이었죠. 돌발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말이에요.

말이 좋아 명목상 대련이지, 계약에 묶인 소환수는 제대로 주인을 상대하는 게 불가능했으니 일방적으로 흑기사가 맞으라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이 사실을 질은 모르는 것 같지만요.

“그렇지만 질이 몸싸움을 해본 적이라고는 한 번도 없었을 테니, 처음은 저와 연습을 하는 것으로 하죠.”

“어, 언니랑 연습을요?!”

자신이랑 연습을 하자는 말에 당황하는 질이에요.

연습이라는 말과 신체 강화 마법이 걸려있다는 사실에도 충분히 놀랄만한 내용이긴 합니다.

무엇이 되었든 흑기사를 간단하게 무릎 꿇게 만든 실리아의 원본인 탈리안과의 연습이잖아요?

어떻게 맞든 아프기는 할 거라는 말이에요.

탈리안의 말대로 마법은 만능이 아니거든요.

고통을 줄여준다고 했지, 안 느끼게 해준다고는 안 했으니까요.

“걱정하지 마세요, 처음이니 상냥하게 해드릴 테니까요.”

“거, 거짓말…! 차라리 거짓말은 하지 말고 그냥, 그냥! 제가 아까 라피아 언니를 생각해서 그런 거라고 말해요!”

그래서 그런지 질은 한껏 겁을 먹고 싫다며 고개를 열심히 저으며 소리쳤어요.

이러는걸 보니 마치 주사를 맞기 싫어하는 어린아이 같네요.

주사가 아니라 탈리안의 질투심이 담긴 사랑의 손맛일 테지만요.

“…, …정말 아닌데요.”

“방금의 짧은 고민은 뭔데요?!”

“자, 시작하죠.”

“언니!? 제 말은 무시하는 거예요?!”

텀을 두고 대답하는 탈리안은 누가 봐도 머릿속에 담긴 말을 일부러 숨기고 다른 대답을 내놓은 것 같았어요.

질이 어설프게 소리친 짐작이 우연히 들어맞은 거예요.

그렇지만 이렇게까지 겁을 먹은 모습을 보니 약간 불쌍해지려고 하네요.

하긴 연습이랍시고 자기를 때리려고 하는데 겁먹지 않는 게 이상하죠.

때리는 사람이 지나가던 사람 A라고 해도 무서울 텐데, 그것도 아니고 마녀 탈리안이라니요.

“…음흠! 자세는 편하게….”

“언니이이!!”

그래도 이번만큼은 물릴 생각이 전혀 없나 봐요.

어찌 되었든 연습은 해야 하니까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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