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돌아온 일상과 흑기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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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기사가 실리아에게 참교육을 받고 난 뒤, 질은 마나 회로의 안정을 위해 도서관에서 돌아와 실리아의 보살핌을 받으며 집에서 쉬기로 했어요.
한두 번도 아니고 몇 번 경험해본 적 있으니 실리아가 보살펴주는 것은 익숙하고도 편하겠죠.
중요한 건 질이 흑기사가 입고 있는 갑주의 내용물을 보았다는 것에 있었어요.
목소리가 중성적인 편이라 질은 지금까지 흑기사의 성별이 남자인 줄로만 알고 있었거든요.
물론 정령에게 있어 성별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흑기사는 짧지만 윤기가 흐르고 찰랑거리는 보브컷의 금발을 가진, 금안의 미녀였다는 게 눈여겨볼 점이었죠.
그렇지만 표정을 한껏 구긴 채여서 기껏 아름다운 외모가 아까워질 수준이었어요.
무엇보다 정령이 사람의 형상을 했다는 것은 상당히 태생이 좋다, 잠재 능력의 한계치가 높다고 단정 지어 생각해도 된다는 의미에요.
그렇지 않은 정령은 대개 형태가 정해지지 않은 마나로 이루어진 자연의 모습이나 짐승의 형태를 하고 있거든요.
“있지, 세르디어.”
“…왜 부르지.”
“앞으로는 조금만 둥글게 말하자.”
“…알겠다.”
그리고 지금은 실리아의 옆에서 양손을 들고 무릎을 꿇어 벌을 받는 중이었어요.
당연히 질이 아니라 실리아가 세운 벌이에요, 이미 실리아에게 혼날 대로 혼나고 강제적으로 반성 중이거든요.
혼나는 중간중간 질이 불쌍해 보여서 몰래 소환을 끊을까 고민해보기도 했지만, 고민이 고민으로 끝났던 것은 실리아의 화난 모습이 무서워 질이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던 탓이에요.
아, 그래서 이렇게 표정이 어두운 걸까요? 그래도 뭐… 질이 생각대로 행동했다면 실리아에게 혼나는 것은 흑기사가 아니었겠죠.
그만큼 흑기사가 실리아에게 혼나는 모습은 상당히 공포스러운 장면이었어요.
그 장면을 잠깐 엿보도록 할까요.
… … …
“으아아악!!”
악에 받친 기합 소리를 내며 실리아에게 덤벼드는 흑기사.
보아하니 싸움이 시작된 지 꽤 시간이 흐른 것 같습니다.
머리 4개 정도의 키 차이와 체격의 차이가 있음에도 열세인 쪽은 당연하게도 흑기사였어요.
“이것밖에 안 되는 건가요? 정말로 실망할 것 같은데요.”
“시끄러워! 비겁하게 힘을 숨기고, 숨긴 걸 들켜놓고도 영광스럽지 못하게 대충 싸우며 나를 조롱하다니!!”
흑기사가 들고 있던 방패는 이미 너덜너덜해져 여기저기 패이고 구겨진 상태라 던져버린 지 오래였어요.
정령이 사용하는 방패란, 아무래도 자신을 보호해야 할 방어구이니 착용 중인 갑주보다 더 단단해야 할 거예요.
그런 방패가 주먹을 몇 번 막아냈다고 해서 걸레짝이 되었다는 것은 가공할만한 파괴력이, 실리아의 주먹에는 있었다는 뜻이었겠죠.
검은 어떻죠? 검은 말하는 게 입이 아플 정도로 상당히 맥없이 부러졌어요.
빈틈이라고 착각한 실리아의 품으로 파고들던 검은 한 손에 막혀버려 그대로 실리아가 작게 힘을 줘버리니 동강이 나버렸거든요.
검 날은 왜 나갔냐고요? 실리아의 공격을 막다가 검 날이 상해버린 거예요.
그렇기에, 흑기사는 실리아에게 육탄전을 실시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 육탄전마저 절망적인 차이를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방금 내지른 주먹이 조그마한 손에 가로막혀버렸지만요.
“어디서 이런 힘을 숨기고 있던 거냐!”
“숨기다니요? 전혀 힘을 숨긴 적이 없어요. 지금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지 않나요? 흑기사, 당신이 못 느낀 거예요.”
“뭣…! 크아악!!”
말을 마치고 흑기사가 대답하려고 하자마자 발로 무릎 안쪽을 차버려 바닥에 꿇게 하는 실리아에요.
그 뒤, 곧바로 갑주 하나하나를 손으로 떼어내기 시작했죠.
틈새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오직 힘만으로 쥐어 뜯어낸 거예요.
금속이 종이처럼 간단하게 찢어지는 광경에 질은 입을 다물지 못했어요.
갑주가 찢어지면서 나는 소리가 마치 흑기사의 패배를 알리는 듯했습니다.
“이제는 반항할 생각이 들지 않죠? 그럼 저와 약속… 어머.”
“아직, 아직이야! 나, 나는 아직 지지 않았다!!”
몸을 보호해주고 있는 갑주가 거의 없어졌는데도 포기할 줄을 모르고 기습적으로 일어나려 한 흑기사이지만….
결과를 기다리는 것조차 사치라는 듯, 흑기사의 머리가 실리아의 손으로 눌리는 것에 의해 다시 무릎 꿇은 것으로 끝났어요.
실리아는 약간의 웃음기가 있는 표정으로 흑기사를 내려다보고 있었어요.
어디까지 반항하나 지켜보려는 의도가 있는 것 같았죠.
“근성 하나는 봐줄 만한데, 그런데 어쩌죠? 실리아도 그저 단순한 분신에 지나지 않는데….”
“분신…?”
힘껏 노력해서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친 흑기사는 그러지 못했어요.
보다 못한 실리아는 자신이 ‘단순한’ 분신이라는 것을 말해주었죠.
흑기사야 절대로 믿지 못할 말이었지만요.
“탈리안의 마나로 이루어진 복제체라는 거에요. 반응을 보아하니 눈치채고 있지는… 않았겠죠?”
“그런, 그럴 리가… 그 녀석의 마나 그대로였는데….”
다시 한번 확인을 해주기 위해 말을 꺼냈지만,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았어요.
자신이 이렇게 꼴불견으로 발악해가며 덤벼들었는데도 이기지 못한 상대가, 원본도 아니라 분신이었다니 꽤 충격일 거예요.
“실리아도 탈리안의 일부이니까 당연하죠. 오히려 이 정도로 마나의 농도와 양에서 차이가 나는데 못 알아본 것도 실리아는 신기하네요. 그리고 질? 실리아는 약간 실망했어요. 모든 것을 만족스럽게 해낼 수 없다는 것은 알지만, 이건… 기대 이하에요. 유대감도 상하 관계도 없는 이런 소환마법을 사용하고 있었다고는….”
“죄, 죄송해요….”
“자, 실리아에게 더 반항할 건가요?”
흑기사는 지금까지 제대로 된 실전을 경험해본 적이 없어요.
미궁에서 둥지를 상대할 때는 라피아의 뒤에서 몰려드는 허접한 새끼 몬스터를 상대했었죠.
의뢰에서는 어땠나요? 미궁을 끝낸 뒤 이름을 부여받아 성장한 힘으로 자신보다 작은 몬스터를 상대했었어요.
그나마도 덤벼오는 개체만 상대했죠.
흑기사는 지금까지 자신의 실력을 제대로 알 기회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해요.
이런 상태에서 실리아와 싸워 호각으로 대치한다?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도, 그럼에도 흑기사는 자신이 정령들 중에서 보통 이상의 실력은 갖추고 있다고 자부할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도 인간의 형태를 한 이상 그게 맞을 거고요.
하지만 경험 부족에, 마음가짐도 좋지 못했어요.
왜 이런 성격을 가지게 되었는가는 둘째 치더라도 무의식중에 상대를 깔보고, 이길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어요.
자신의 소환자가 방대한 마나를 가진 지르니트이니까요.
마나를 연료로 삼는 정령이니 이렇게 많은 마나를 가지고 질 리가 없다…며 자신감에 차 있었겠죠.
이런저런 요소를 다 배제하더라도 무엇보다 상대가 나빴어요.
마지막으로 흑기사는 죽을힘을 다해 몇 번 더 덤벼들었지만, 실리아에게 실컷 두들겨 맞는 것으로 교육은 끝이 났어요.
그러니까 이런 상태로는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던 거죠.
뭐, 실리아는 처음부터 교육의 목적으로 싸움을 건 것이라서 제대로 된 승부도 아니었지만요.
이 모든 요인이 합쳐져 나온 결과가, 이렇게 손들고 앉아서 실리아에게 감시당하고 있는 거예요.
“팔은 언제 내려도 되는….”
“실리아 선생님, 이잖아요?”
“…으윽, 시, 실리아… 선생님… 저는 언제 팔을 내려도 되는 겁니까.”
“착하네요. 앞으로 한 시간 정도는 더 그러고 있어야겠죠?”
“그런! …히윽! 아, 아닙니다.”
흑기사는 실리아의 손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다가오는 것에도 움찔거리며 말을 아꼈어요.
얼마나 혼났으면 그 거대한 체구에서 나오던 위압감을 뽐내는 흑기사가 이렇게 변해버린 걸까요.
한껏 움츠러든 모습이 불쌍한 것을 넘어서 안쓰럽네요.
“언니, 그만하면 안 될까요? 세르디어도 반성하는 중일 거예요.”
질의 말에 흑기사는 구원의 빛이라도 본 것처럼 눈을 반짝이며 질을 바라봤지만….
“질, 막 계약한 소환수는 보통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기들이에요. 숙련된 소환자라면 다르겠지만 질은 아니잖아요? 이런 건 초기에 바로잡아주지 않으면 안된다구요.”
“그렇지만….”
흑기사에게 구원의 빛은 없었네요.
실리아의 말은 정령으로서 살아가는 데에 있어 필요한 지식은 거의 다 있지만, 성격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어린아이와 같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초기 교육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은 맞습니다.
한창 성장 중인 때라서 서로 약간 친한 친구 같은 관계이기에, 질이 흑기사를 가르친다는 것은 잘 상상이 가지 않는다는 게 문제겠지만요.
흑기사를 가르친다면 교육자로서 어울리는 것은 탈리안과 그녀의 분신들이겠죠.
질이 흑기사와 유대감을 깊게 할 중요한 사건이 생긴다면 모를까, 아직까진 그럴 일이 없을 것 같으니까요.
“그렇지만 언니가 세르디어를 가르친다면, 저는요? 계약상 세르디어의 소환자는 저잖아요.”
“설마… 질, 세르디어를 실리아에게 빼앗길까 봐 걱정하는 건가요?”
“네? 그, 그럴 리가요! 저는 그냥, 세르디어가 저를 소환자로 인정하지 않을까 봐….”
질이 하는 걱정은 충분히 있을 만한 것이었어요.
교육을 대신해주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탈리안과 그 분신들에게 교육을 받다 보면 질의 소환자로서의 입지를 점점 잃어갈 수도 있는 이야기이니까요.
교육은 제대로 받았다고 치더라도, 자신이 교육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겠죠.
“질, 그런… 걱정하지 마세요. 실리아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잖아요?”
“언니를 믿지만, 세르디어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잖아요….”
질이 하고픈 말은 교육자가 어떤 생각을 갖고 교육을 하더라도, 교육을 받는 흑기사의 생각이 중요하다고 하고 싶은 겁니다.
질이 하는 게 없으니 소환자 취급을 해주지 않을 수도 있다, 뭐 그런 의미겠죠.
솔직하게 말해서 질도 스스로가 소환수를 다루는 것도 자신의 힘이라고 인지는 하고 있을 거예요.
그렇기에 당장에 마법을 배우고 싶다는 욕망도 숨기고서 흑기사를 빼앗기지 않을까 걱정부터 하는 거 아니겠어요?
“으음, 하아… 알겠어요! 그럼 실리아가 보조 마법 대신 신체를 단단하게 하는 마법을 알려줄 테니까 제가 알려주는 대로 교육하기로 해요.”
“그런 거라면, 언니 말대로 할게요.”
“좋아요, 그렇지만! 오늘은 쉬도록 해요. 충분히 안정된 뒤에야 제대로 된 교육이 가능하지 않겠어요? 그렇죠, 흑기사?”
자신을 부르는 말에 움찔거리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는 흑기사예요.
굳이 대답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이는 것은 실리아에게 호되게 당했기 때문이겠죠.
실리아가 꼭 말로 대답하라고 하지 않는다면 말소리조차 내기 싫다는 의미일 수도 있어요.
무서우니까,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나버려서 말이에요.
그러거나 말거나 질은 하루 동안 충분히 쉬라는 실리아의 말에 이불을 제대로 덮고 누웠어요.
교육을 자신에게 맡기겠다는 말을 듣자마자 안심한 걸지도 모르죠.
어떤 식의 교육이 이뤄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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