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 돌아온 일상과 흑기사 (1)
* * *
질과 라피아가 약을 먹고 나서 며칠이 지났어요.
약은 어딘가 부족했지만, 그렇다고 또 아예 효과가 없는 건 아니었어요.
적어도 질과 라피아의 성격이 한층 유해졌거든요.
탈리안 스스로가 질과 라피아의 마나 회로와 몸의 상태를 점검해보아도 미궁에 진입하기 전의 상태로 무사히 돌아와 있는걸 확인했죠.
버섯이 빠졌기에, 모든 게 다 돌아와도 성장한 몸은 그대로지만요.
그렇지만 질도 변한 몸에 만족하고 있고, 일상생활에 있어서 불편함을 느끼진 않았으니 탈리안도 그대로 놔둬도 상관없다고 판단했을 거예요.
그러니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도 따로 버섯을 구하려 하지 않는 거겠죠.
지금은… 웬일로 아침부터 집이 아닌 도서관에 있는 질이네요.
“공부는 잘되어가나요?”
“실리아 언니! 오랜만이에요!”
“질! 쉿, 조용히! 도서관이잖아요?”
“앗, 죄, 죄송해요… 헤헤….”
이른 아침이라 아직 도서관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 건 아니지만, 들뜬 나머지 큰 소리를 내버렸네요.
만나지 못한 날이 길지는 않지만, 그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으니까요.
그리웠다면 그리웠다고 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겠죠.
“그동안 힘들지는 않았나요?”
“힘들었지만 재밌기도 했어요!”
“그래요? 실리아는 질이 보고 싶었는데, 질은 어땠어요?”
“저도 당연히 보고 싶었어요!”
서로 껴안고 부비적거리는 게 완전히 친자매랑 별반 다를 게 없네요.
뭐 질이 이상할 정도로 실리아랑 친한 사이이기는 했으니까요.
다른 분신들과는 탈리안과 비슷하게 평범한 관계로 지내지만 어째선지 실리아와는 그 깊이가 남달랐죠.
성격의 차이 때문일까요.
그런데 왜인지, 실리아는 질의 머리에 손을 얹어 자신의 키와 어느 정도나 차이가 나는지 확인하기 시작했어요.
아마 탈리안과 기억을 공유하고 있어서 질의 몸이 성장한 건 알고 있겠지만, 직접 보는 것과는 달라서 그렇겠죠.
이에 질은 그저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며 실리아가 무슨 행동을 하는지 조용히 관찰하고 있을 뿐이었어요.
“그런데 오늘은 학원에 안 가나요? 어쩐 일로 도서관에 온 거예요?”
실리아의 말이 맞아요, 의뢰의 실적 포인트를 확인하기 위해 학원에 가봐야 할 텐데요.
어제는 질이 잠든 채로 의뢰 안내소에 도착했기 때문에 의뢰 달성보고를 하지 못했잖아요?
“오늘은 도서관에서 마법 공부 좀 하려구요, 너무 흑기사한테만 의지하는 것 같아서….”
“지일… 실리아는 질이 너무 대견해요….”
“언니 울어요?!”
기특한 질의 말에 눈물을 찔끔찔끔 흘리며 우는 척을 하는 실리아에요.
우냐는 질문에는 질이 기특해서 우는 척을 했다고 대답했죠.
“그래서? 어떤 마법을 배우고 싶은가요. 실리아가 알려줄 수 있는 마법이라면 도와주도록 할게요!”
“당장은 적을 느리게 하거나 동료를 빠르게 해주는 보조 마법을 배우고 싶어요.”
실리아는 질의 말에 나쁘지 않을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어요.
앞에 나서서 싸우는 게 아닌 한, 아직 배우는 처지인 질은 뒤에서 지원가 역할을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일 거예요.
앞에서 싸우거나 험한 일은 흑기사가 대신해줄 수 있으니까요.
“그렇다면 자이트 액셀과 자이트 릴리즈가 좋겠네요, 제일 기초적인 마법이에요.”
실리아는 공중에 손을 뻗었어요.
그리고는 곧 비밀의 방의 문이 열리고 책이 하나 날아 들어왔고, 책은 실리아의 손에 착 감길 정도로 잡혀버렸죠.
실리아의 손이 원래부터 자기 자리였다는 것처럼요.
질은 한두 번 본 게 아니라는 듯이 정말 태연하게 실리아가 책상에 펼치는 책을 보고 있었어요.
“마법진부터 외워볼까요?”
“네!”
기운차게 대답한 질은 그렇게 한참을 실리아와 공부에 힘을 썼어요.
오랜만이라고는 못 하겠지만 다시 찾아온 평화로운 일상에 그동안의 긴장이 사그라드는 듯했죠.
마법진을 다 외우고 나서, 도서관의 4층 테라스에서 마법을 시험 삼아 써보려고 했을 때였을까요.
“어, 어…?”
“질?! 왜 그래요?!”
마나를 끌어모으다 말고 갑자기 바닥에 주저앉아버리는 질이에요.
다리에 힘이 풀린 건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있는 건지는 모르겠으나 무언가 문제가 있나 봅니다.
갑자기 넘어진다면 실리아가 이렇게 당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죠.
“갑자기 현기증이… 지금도 약간….”
“괜찮아요? 갑자기 왜…? 마나 회로에 문제가 생긴 건가요?”
바로 질에게 다가가 머리에 손부터 대보지만 열은 없는 걸 확인하고, 각인을 살펴보는 실리아에요.
그렇지만 겉으로 보이는 각인의 모습에는 이상하다고 할만한 점이 하나도 없었죠.
은은한 노란색으로 빛나고 있는 각인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거든요.
그런데도 실리아는 질의 각인에 손을 얹었어요.
“언니?”
“잠시 각인과 마나 회로를 살펴볼게요.”
“네에….”
눈을 감고 집중하는 그 모습은 탈리안의 외형을 하고 있음에도 성격의 차이가 묘한 갭을 불러왔어요.
이는 알고 있는 사실이라 하더라도 잠깐이라도 보지 않는다면 매일매일 새롭게 다가오는 부분이었죠.
차분해 보이면서도 눈만 뜨면 자신이 알던 탈리안과는 다른 얼굴로 접해오니 질로서는 설레지 않을 수가 없을 거예요.
얼굴을 조금만 앞으로 내밀면 서로의 코가 닿을 거리에 있으니까요.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언니? 표정이 좋지 않은데….”
“실리아의 얼굴이 안 좋았다구요? 그렇게까지 안 좋은 일은 아니에요, 회로가 조금 과열되어 있네요.”
눈을 뜬 실리아는 멋쩍게 웃으며 양손으로 잡고 있던 질의 손을 놓아주었어요.
“과열? 저 오늘은 이게 처음 쓰는 마법인데….”
“그런 의미가 아니에요. 최근에 흑기사가 스스로 소환을 끊고 돌아간 경우가 있지 않았나요?”
실리아의 날카로운 질문에 질은 그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며 대답했어요.
그 말을 듣자마자 실리아의 얼굴이 점점 차분해졌죠.
이는 실리아가 잔소리를 하려고 할 때 나오는 표정이었어요.
질도 이걸 예상했는지 실리아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았죠.
어떻게 질이 그것을 알고 있냐면, 탈리안 역시 잔소리를 할 때와 반응이 비슷하거든요.
“잘 들어요, 질. 소환수의 소환 연결을 끊을 때는 소환수가 아니라 소환자가 끊어야 하는 거예요. 그렇지 않으면 소환자의 마나 회로에 막대한 부담이 가게 되어있으니까요. 그리고 한두 번이 아니라면 이러는게 당연하죠! 각인을 새겨준 게 탈리안이라 다행인 줄 알아야 한다구요? 그렇지 않았으면 진작에 마나 회로가 다시는 쓰지 못하도록 엉망이 되어버렸을 테니까!”
마녀의 대단함이 또 이런 곳에서 튀어나오네요.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탈리안의 각인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질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고도 남았다는 거잖아요?
그렇지만 이 거리감은 너무 가까운 게 아닐까요?
너무 들이댔다 싶을 정도로 질과 실리아의 코와 코의 거리가 1cm도 안 되는 것 같은데요.
질이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걱정이네요.
“그렇지만 세르디어가 말해주지 않았는걸요….”
“질? 이럴 때는 ‘앞으로 그러지 않을게요, 조심할게요.’라고 말하면 되는 거예요.”
이럴 때 핑계를 대는 건 좋지 않지만, 실리아의 잔소리가 어지간히 길어야죠.
이해는 가도 좋지 못한 선택이요.
봐요, 실리아가 질의 양 볼에 손을 가져가 직접 고개를 돌려서는 자신의 얼굴을 똑바로 보라고 하잖아요.
“우으… 네에….”
“착하네요. 이건 흑기사에게도 말해둬야겠네요. 이번에는 제가 소환의 보조를 해드릴 테니까, 바로 만나보도록 해요.”
기운이 없어 보인다기보다는, 거리감을 잃어버린 실리아 때문에 기분의 주체가 되지 않는 모습의 질이에요.
그래서인지 소환을 할 때 일정 주기로 발생하는 질의 마나의 파동이 심하게 흔들렸던 걸지도 모릅니다.
이를 실리아가 눈치채지 못했을 리도 없고, 바로 질에게 물어봐 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당연히 발뺌이었죠.
‘별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라고 말하는 거죠.
당황한 질의 모습에 의아함을 느끼는 실리아였지만, 본인이 괜찮다는데 어쩌겠어요.
더 캐묻는 것도 배려가 부족한 행동이니까요.
“…불렀나.”
“어서 와, 세르디어.”
그러는 사이 흑기사가 공중에 나타난 마법진에서 빠져나왔죠.
흑기사는 지면에 발을 붙이자마자 질에게 인사를 하고 주변을 살폈어요.
장소도 장소이지만, 질의 옆에 딱 붙어있는 실리아를 보자마자 자신이 싸우기 위해 불려온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챈 듯했어요.
“용건은?”
“흑기사, 보아하니 소환의 연결을 스스로 끊는다면서요?”
“문제라도 있나?”
당당하다 못해 뻔뻔한 태도로 되묻는 흑기사의 모습에 잠시동안 할 말을 잃어버린 실리아였어요.
그래도 바로 정신을 차리고선 질에게 훈계할 때처럼 표정을 굳혔죠.
“흑기사 씨 소환수잖아요, 문제가 있냐니…. 마나 회로에 부담이 가는 걸 몰라서 하는 말이에요?”
“그런가, 처음 알았는데. 다음부터는 조심하도록 하지.”
잘못된 방법이라고 설명해줬는데도, 흑기사는 여전히 뻔뻔한 태도로 대답했어요.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지만 그게 뭐 대수냐는 듯한 말투였죠.
계속되는 불량한 태도에 실리아는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받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 같았어요.
“조심하는 게 아니라, 소환의 연결을 끊는 건 질이 해야 되는 거라니까요?”
“이봐, 지금 보니까 계약에 도움 좀 줬다고 나와 지르니트의 일에 간섭하는 것 같은데… 내 소환자도 아니면서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애초에 문제가 있다면 질이 말했을 거다.”
까드득, 하는 소리가 났어요.
자신을 깔보았기 때문인지 실리아의 턱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죠.
흑기사는 아마 분신인 실리아를 탈리안이라고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엄한 오해를 하고 있네요.
“…질?”
“네, 네?”
“실리아가 질을 대신해서흑기사의 교육을 좀 해야 될 것 같네요.”
“앗, 아…. 그, 네, 저어…너무 심하지만, 않게….”
“네, 물론…. 대신 흑기사가 스스로 소환을 끊지 못하도록 해주세요, 질.”
이날, 흑기사는 처음으로 타인의 손에 의해서 갑주가 벗겨지고 육탄전으로 패배하는 쓴맛을 겪어보았습니다.
그리고 질도 실리아는 물론 탈리안을 상대로는 절대로 화나게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한 날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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