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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47화 (47/189)

〈 47화 〉 질투의 끝에는 상처와 부끄러움이

* * *

한참을 투닥거리며 뒹굴거려도 좀처럼 끝날 것 같지 않았던 탈리안과 라피아의 싸움.

이는 시멜리의 응원 아닌 응원, 부추김으로 인해 끝이 났어요.

“후우, 후욱… 망할, 저년은 파티에서 봤을 때부터, 하아… 마음에 안 들었어….”

“그건, 동감… 이에요. 흐읏, 으으… 이렇게 격하게 움직인 게 몇 달만인지….”

웬일로 두 명의 생각이 일치하는 순간이 찾아왔네요.

하긴 옆에서 아무나 이기라고 난리를 피워대는데 좋아할 리가 없죠.

그러다 싸움이 끝나자마자 시멜리는 후폭풍을 피하기 위해서 바로 도망쳐버렸거든요.

두 사람은 그런 시멜리를 잡으러 가기에는 너무 지쳐있었어요.

땀에 절어있어 움직이는 것조차 불쾌해하기도 했고요.

“맨날 집에만 처박혀 있으니까 그렇지.”

“또 한 번 싸워보자는 거에요? 집에만 처박혀 있다니 말을 어떻게 그리 천박하게 할 수 있는 건지….”

“내가 뭐 틀린 말이라도 했나? 너 가벼운 운동도 안 하지?”

“조용히 하세요! 뱀파이어면서 운동도 안 하는 마녀한테 이기지도 못했잖아요!”

라피아의 말에 화를 내면서도 부정은 하지 않는 탈리안이에요.

다른 세계에서는 얼마나 격하게 움직였었는지는 몰라도 이 세계로 넘어온 뒤로는 그렇게 움직일 일이 없었을 테니까요.

고작 해봐야 재앙을 막기 위해서 움직였다는 것 정도가 가장 최근에 격하게 움직인 일이 아니었을까요?

“할 말은 많은데, 진짜 내가 지르니트 앞이라서 참는다.”

“이미 하고 싶은 말 많이 했잖아요, 누구는 질의 앞이 아니라서 이렇게 말하는 줄 알아요? 저를 놀리는 거예요!?”

“이야~ 그걸 판단한 머리는 있구, 어?”

지치지도 않고 다시 싸우려는 탈리안과 라피아는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어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와 쳐다보니 질이 잠에서 깨려는 것 같았거든요.

그만큼 이 두 명이 오랜 시간을 싸웠다는 겁니다.

둘 다 적지 않은 나이를 먹고 질투심에 뭐 하는 짓일까요.

“으응… 언니?”

“하아… 질도 일어났으니 그만두죠. 진짜 지친다고요.”

“나도 싸우고 싶지 않았는데, 네가 먼저 시작한 거였잖아.”

빈정거리며 말대답을 해오는 라피아를 지긋이 쳐다보는 탈리안이에요.

그만하자고 해도 계속해서 덤벼오니 질리는 거겠죠.

“당신, 질을 저한테서 뺏어가고 싶은 건가요?”

“피 맛이 상당하더라고, 평생 옆에 끼고 있고 싶을 만큼 말이야.”

아무런 흑심이 없는 건 아니었네요.

그렇지 않다면 탈리안과 이렇게까지 싸울 이유가 없기는 했죠.

다만, 애정의 감정보다는 식욕의 범주에 가까운 감정을 가진 것 같아요.

그렇다고 애정이 아예 없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 라피아만이 알겠죠.

맛이 좋아서, 라는 이유로 이렇게 싸울 정도라면 정말 맛있다는 건데 궁금해지네요.

“우응… 뭐 하는 거예요, 언니들….”

“별거 아니에요, 질. 마음 같아서는 더 자라고 하고 싶지만… 슬슬 제가 만들 약을 먹어야 하니 일어나세요.”

“약? 무슨…. 근데 이 방은 왜 이렇게 어질러져 있는 거예요?”

“일단 질, 그건 신경 쓰지 말아요. 그것보다는 당신이 고생해서 가져온 버섯이 여기… 어라?”

탈리안은 들고 있는 버섯을 보여주기 위해 손을 펼쳐보았지만, 그 손에는 먼지밖에 없었죠.

당연해요, 지금껏 라피아와 머리채를 잡고 실컷 싸워댔는데 버섯이 손안에 있을 리가 없거든요.

버섯의 행방을 찾은 것은 라피아였어요.

하지만 완전히 납작해져서 형태를 알아볼 수 없게 된 고무와도 같이 변해있었죠.

질의 노력과 라피아의 고생이 무용지물이 되어버린 순간이었어요.

뭐… 이 일을 자초한 건 라피아지만요.

“어, 탈리안 언니?”

“괘, 괜찮아요! 버섯이 없더라도 일단 약은 만들 수 있으니까!”

게다가 탈리안도 자신의 잘못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당황하며 혹시 몰라 질을 달래듯 말했어요.

그리곤 바로 어질러진 책상으로 다가가 어딘가 부족해 보이는 약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정말로 괜찮은 거 맞나, 저거.”

“괜찮을 거예요, 탈리안 언니는 대단하니까요.”

“…질투 나네.”

“뭐라 했어요?”

“으응? 아니, 잘못 들은 거 아니야?”

모른척하며 자신은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며 잡아떼는 라피아에요.

얼마나 들키기 싫었으면 어질러진 남의 집을 청소까지 해주는 걸까요.

방이 너무 넓어서 혼자서는 힘들 거라고 생각했는지 홀로 청소하는 라피아를 돕기 위해서 침대에서 일어나는 질이었어요.

청소가 거의 끝날 때쯤 탈리안이 만드는 약도 완성되었어요.

“질, 이리 와 보세요.”

이리 오라고 말했다고 또 쪼르르 빠른 걸음으로 걷는 게 참 탈리안을 잘 따르네요.

대상이 친근한 주변 인물로 한정되지만, 라피아의 말대로 말 하나는 잘 듣는 어린아이예요.

“이게 당신의 몸을 원래대로 돌려줄 약인데, 버섯이 들어가지 않았으니 제대로 된 효과는 보장하지 못해요.”

“잠깐만, 마녀. 그래서 그 몬스터의 둥지가 내뿜었던 가스는 효과가 뭔데?”

무슨 효과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중요하죠.

버섯이 무사했다면 모르겠지만, 여자아이를 두고 일어난 몸싸움 때문에 약이 불완전해졌으니까요.

다시 봐도 참 어이없는 일이네요.

“…아, 마법 주문 중에 광폭화 효과를 가진 게 있죠? 그거랑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좋아요.”

“몸을 성장시키는 게?”

“방식은 다르지만, 몸을 생명의 빛이 가장 밝게 발하는 시점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성격은 광폭화라는 효과에 걸맞게 점점 난폭해져 가죠. 그리고 그 상태에서 오랜 시간이 지나버린다면, 천천히 힘을 잃어가다 죽게 되는 거예요.”

“그 가스에 맞은 사람 중에는 노인으로 변한 입학생도 있었는데?”

중요한 부분만 콕 집어서 물어보는 걸 보면 라피아도 그렇게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에요.

입학생 중에서 노인이 되어버린 사람도 있었던 걸 용케 기억해냈네요.

“생명의 빛이 가장 밝게 발하는 시점이란… 그 사람이 자신의 인생의 크기에 맞는 뭔가를 이뤄낸 때라고 적혀있었어요. 그 시점이 노인이라면 그게 그 사람의 인생 업적을 이뤄낸 때겠죠.”

“고작 몬스터 주제에 그런 게 가능하다고….”

“미궁의 몬스터가 자신이 죽을 때 물귀신처럼 누군가를 같이 데려가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그것도 둥지급 몬스터라면 더 쉬운 일이겠죠. 그러니까 이 약은 그 가스를 구성하던 요소를 배출해내는 역할을 하는 역할을 하는 물건이에요.”

“미리 물어보는데, 나도 마셔야 하는 거지? 배출 방식은?”

“가스는 가스로 빼야 한다면 거부감이 들 테니 자연스레 땀으로 배출되도록 약을 재설계했어요.”

“그래, 능력 하나는 대단하네.”

충분할 정도의 설명을 들은 질과 라피아는 바로 약을 흡입했어요.

거의 한꺼번에 입에 털어 넣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목숨을 잃어버릴지도 모르는데 약의 냄새가 독하고 맛없다고 한들 무슨 상관이겠어요.

당장에 살아남는 게 중요한 거죠.

“즉효 약은 아니니 둘 다 침대에 누워서 쉬고 있으세요. 약으로 고쳐지지 않는 게 있다면 알아둬야 하니까요.”

“있을 수밖에 없지 않아? 재료 하나가 빠져있잖아.”

“당신도 가스를 마셔서 그런지, 말 하나하나에 가시 돋친 게 다 느껴질 정도네요.”

탈리안의 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네요.

라피아가 약간 틱틱거리면서 말하는 게 있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탈리안에게 싸움을 거는 사람은 아니었잖아요?

가스를 많이 맞지 않았는데도 이 정도라면, 질을 빨리 구해온 건 정말 잘한 일이었네요.

질이 단시간에 성격이 변한 건 가스의 효과가 장난이 아니었다는 거니까요.

“미안한데, 마녀. 이건 일부러 너 기분 나빠지라고 말한 거야.”

“언니들 서로 싸웠었어요? 사이가 왜 그렇게 안 좋아요?”

“…아냐, 안 싸웠어.”

“맞아요, 안 싸웠어요.”

질의 질문에 서로 눈치를 보더니, 합을 맞춘 것처럼 동시에 말을 맞추는 두 사람이에요.

그렇지만 누가 봐도 티가 나는 거짓말에 속을 질이 아니죠.

게다가 바닥에 뒹굴면서 몸싸움을 했었잖아요?

몸과 옷에 붙은 먼지들과 꼬집고 잡아당기면서 발갛게 부어오른 피부들을 보면 속는 게 멍청한 거예요.

“안 싸운 게 아닌 것 같은데요? 왜 싸운 거예요, 말해줘요.”

“질, 때로는 모르는 일을 못 본채하고 넘어가는 방법도 알아야 하는 법이에요.”

“네가 그렇게 솔직하지 못하니까 다른 사람한테 빼앗길 기회나 주는 거야, 마녀.”

책상에 앉아 책을 읽던 탈리안은 폼을 잡으며 질의 궁금증을 잠재우려 했어요.

그렇지만 라피아의 눈에는 싸운 이유를 제대로 말해주지 않아 솔직해 보이지 않은 것처럼 보였겠죠.

라피아에게 한마디 듣게 된 탈리안은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고 난 뒤 천천히 입을 열었어요.

“신경을 써주셔서 감사하지만, 제 말에 거짓 하나 담지 않고 말하자면… 저는 질이 저를 좋아해 주지 않는다고 해도 괜찮아요.”

“제가 언니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그거야 흡혈 한번 했다고 아끼는 동생을 빼앗긴 것처럼 군 게, 저 잘난 척하는 마녀거든. 그러니까 속으로는 나한테 엄청나게 질투 중이고 화나 있는데, 너한테는 부끄럽다고 알려주기 싫으니 무게를 잡는 거야.”

뭐… 라피아가 계속 옆에서 끼어드는 것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과할 정도로 자신의 본심을 숨긴 채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데 옆에서 보면 얼마나 답답하겠어요?

그렇다 쳐도 너무 잘 꿰뚫어 본 게 아닐까 싶기는 합니다.

싸우면서 이런저런 말다툼을 해서 그런지… 거의 탈리안의 속마음을 다 알고 있는 듯하네요.

“조용히 하시라니까요! 계속 그러면 약값 청구할 테니까!”

“사이가 안 좋은 게 아니라 좋은 거였구나….”

확실히 이런 모습을 보고 사이가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는 법이죠.

그리고 싸우면서 정이 든다는 말도 있잖아요?

마냥 질의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보는 눈이 틀렸다고는 못하는 거죠.

“하아, 이런 걸 사이좋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질… 아직 사람 간의 관계를 주제로 공부가 더 필요할 거 같네요.”

“말은 그렇게 해도 탈리안 언니, 라피아 언니한테 약도 나눠줬잖아요? 그리고 조금, 기뻐요. 언니가 그런 생각을 해주셔서….”

질은 자기가 한 말인데도 부끄러웠는지 침대의 이불을 머리끝까지 다 뒤집어썼어요.

게다가 탈리안도 질의 예상하지 못한 말에 당황했는지 눈이 크고 동그랗게 변했죠.

“무, 무슨…!”

“저거, 저거 봐, 네가 솔직하게 말하니까 금세 얼굴이 빨개져서는 쯧쯧….”

정말 빨가네요.

질을 만난 이래, 처음 보는 강렬한 빨간색이에요.

정말 온몸의 피가 얼굴에 다 몰렸다고 해도 될 정도로요.

부끄러움에 나오는 자연스러운 행동이겠지만, 탈리안은 책상에 얼굴을 파묻어도 귀까지 빨개져서 전부 감출 수는 없었어요.

“아, 근데 여기 진짜 덥네!”

“…약 때문인가 보죠.”

“그런가? 좀 땀이 나는 거 같기도 하고.”

손부채로 열심히 열을 식혀보려 하지만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아서 그런지 라피아는 아예 움직이기를 포기했어요.

곧 질도 참기 힘들었는지 더운 이불속에서 빠져나와 옷을 한 꺼풀 벗어던졌어요.

뭐 부끄러움보다는 뜨거운 열기를 참지 못해서겠죠.

“차, 창문이라도 열어줄게요.”

“와, 진짜 평소의 마녀는 어디 가고 저런 평범한 소녀가 나타났다니.”

질의 기분 좋은 말을 들어서인지, 아직도 자신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일어나서 창문을 열어주러 가는 탈리안이었어요.

눈을 가린 채로 어디 모서리에 걸리지도 않고 단번에 창문까지 걸어가는 게 마녀답다지만, 라피아가 비꼬는데도 기분이 주체가 되질 않아 대답을 돌려주지 못하는 걸 보니… 그 말대로 정말 소녀 같기도 하네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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