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의뢰의 끝에는 질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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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피아가 탈리안에 대한 걱정을 접어둔 뒤에는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시멜리도 명령받지는 않았지만, 불침번도 성실히 서 줬으니까요.
텐트와 화로를 모두 정리하는 것도 금방 끝났으니 이제 의뢰를 끝마치는 것에만 노력하면 되겠네요.
마침 저 너머로 해안선이 보여오니 목적지에 다 와 간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다고는 해도 벌써 해가 지려고 하는 늦은 시간대지만요.
“한참 걸은 것 같은데, 이 주변 아니에요?”
“아마도? 원래라면 섬 곳곳에 준비된 워프 포인트가 있어서 그걸 통해서 갔어야 했는데, 제리 그 녀석 때문에….”
그렇다면 지금 무지하고 무식한 제리 덕분에 쓸데없이 2일이라는 시간을 허비하며 긴 거리를 걸어왔다는 거군요.
정말이지, 파티를 떠나고 난 뒤에도 민폐를 끼치는 인물이에요.
“제리 씨 일은 잊어요, 언니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잖아요? 그쵸 시멜리 씨?”
웬일로 질이 시멜리에게 먼저 말을 거는 모습을 보게 되었네요.
평소에 그렇게 싫어하면서, 무슨 이유일까요?
“어? 갑자기 나는 왜? 나랑도 친하게 지내시려고? 히힛! 나야 좋…!”
“설마요, 시멜리 씨 지금까지 전투에 참여하지도 않고 말도 안 하고 저희가 따돌리는 것만 같잖아요!”
“…은근히 엿 먹이는 방법을 알고 있네, 작은 주인님. 키히힛.”
과연, 이렇게 밝게 말하면서도 어딘가 콕콕 찌르는 듯한 말을 하기 위해서였나요.
어쩐지 시멜리를 싫어하는 질이 말을 먼저 걸 리가 없을 텐데 이상하긴 했습니다.
펜던트 덕분에 먼저 시비를 건다고 해도 시멜리의 입장에선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확실히 미궁에서의 둥지가 죽기 직전에 내뿜었던 가스의 영향인지 질의 성격이 모나진 것 같기는 합니다.
“지르니트, 저거 아니야? 의뢰서에 그려진 거랑 똑같이 생긴 것 같은데.”
“맞아요! 근데 완전 독버섯처럼 생겼네요…. 저번에 그 이상하게 생긴 미궁의 몬스터가 생각나는 것 같아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나타난다고, 이렇게 질의 말에 섞여 나타날 줄은 몰랐습니다.
어쨌든, 라피아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정말 전형적으로 생긴 독버섯이 자라나 있었어요.
빨간색을 바탕으로 흰색의 점박이 무늬가 있는 그런 독버섯이었죠.
“걱정 말고 그냥 가서, 뜯어서, 가져와.”
“…으, 알았어요.”
“이걸로 의뢰 끝이겠네, 이 주변에 워프 포인트가 하나 있던 걸로 아는데 어디더라….”
홀로 버섯을 뽑으러 가는 질을 지켜보다가 주변에 워프 포인트가 있는지 살펴보는 라피아에요.
이상하게 자고 일어난 뒤로는 몬스터를 본 적도 없기에 특히나 더 주변의 경계를 심하게 했죠.
혹시라도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라도 몬스터들이 떼거리로 기습해온다는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앗?! 엑, 콜록!! 켁…!”
“질?!”
그런데 무슨 일인지 질이 갑자기 기침을 하는 거예요.
놀란 라피아가 질을 바라보자 어디서 나왔는지 모를 엄청난 양의 먼지가 질을 둘러싸고 뭉게뭉게 떠다니고 있었죠.
누런색을 띄는 먼지는 누가 봐도 질이 채집하려던 버섯에서 뿜어져 나온 포자였어요.
포자는 계속해서 뿜어져 나와 꽤 멀리 있던 라피아의 발 앞까지 다가왔어요.
그리고 질은 바닥에 주저 앉은 채로 그 안에서 빠져나올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어쩔 수 없겠죠.
안 빠져나온 게 아니라, 수상할 정도의 포자의 양에 연속해서 심한 기침을 하느라 ‘못’ 빠져나오는 중이었으니까요.
“이, 젠장…! 더 잔소리 들을 거리를 늘리기는 싫은데!!”
라피아는 작게 불평불만을 토해내며 한껏 숨을 참고 질에게로 달려갔어요.
자신도 포자를 들이마실 수 있고, 포자가 몸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이인데 유독 질에게만은 이렇게 몸을 불사르는 이유가 뭘까요?
분명 미궁에서도 질이 위험할 때 구해주기도 하고, 방심해서 위기를 맛보기도 했었죠.
“크읏, 무슨… 뭐 이딴 게 다 있어!”
포자가 뒤덮은 장소는 짙고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광범위했어요.
질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고, 마법을 써도 포자가 흩어지게 하는 것조차 통하지 않았어요.
오직 기침 소리에만 의지한 채로 질을 찾아야만 했죠.
작은 독버섯이라고 너무 얕봤던 거에요, 경계심이 약간 부족했던 게 이런 결과로 나타날 줄은 몰랐겠죠.
“…푸핫!! 하아!!”
그래도 뛰어난 실력은 어디 안 간다고 곧바로 질을 낚아채 포자 밖으로 빠져나오는 데 성공한 라피아였죠.
얼마나 포자가 많았으면 라피아와 질의 옷에 얼룩덜룩하게 묻어있는 걸까요.
그에 반해 시멜리는 포자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탈리안의 집을 나섰을 때와 같이 깔끔한 모습이었어요.
“지르니트! 괜찮아?!”
라피아의 질문에 질은 여전히 기침만 할 뿐 대답을 하지 못했어요.
그러다 기침이 멎는가 싶더니 곧 잠들어버렸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라피아의 입장에선 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걱정이 될 뿐이었어요.
조금이라도 더 빨리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 라피아는 질을 등에 업고 워프 포인트를 찾기 시작했어요.
신기한 건 라피아가 워프 포인트를 발견하기까지 몬스터 하나 보이지 않았다는 거예요.
아마도 질이 둘러싸였었던 포자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볼 수 있겠네요.
이런저런 고생을 하면서 도착한 의뢰 안내소에는 질이 수락한 의뢰의 발행자가 도착해있었습니다.
그는 놀랍게도 탈리안이었죠.
라피아는 탈리안의 모습을 보자마자 도둑이 제 발 저리듯, 반쯤 겁에 질려버렸어요.
새벽에 질과 자신이 했던 외설적인 일을 들키는 것은 둘째치고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는걸 눈앞에 보여줘 버렸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위험한 의뢰를 특별히, 질에게 지정해서 낸 사람이 탈리안이었다는 건 라피아에게 있어 의외였죠.
믿기지 못해서 재차 물어볼 정도였으니까요.
게다가 탈리안이 등에 업혀 잠든 질의 모습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아 한다는 것이 더 이상했을 거예요.
“…네가 등록한 의뢰라고? 아니, 그전에 지르니트는 괜찮은 거 맞아?”
“네, 버섯을 잡아 뜯자마자 포자에 둘러싸이리란 것도 예상하고 있었고요.”
“너, 너 진짜….”
기가 막힌다는 듯이 쳐다보는 라피아에요.
말도 전해주지 않고 모든 것이 전부 자신의 계획대로라는 것에 화가 났을 거예요.
질이 위험할까 봐 걱정했는데 이게 전부 탈리안의 계획에 완전히 놀아났다는 거잖아요?
“제 뜻대로 되지 않을까 봐 보험도 들어놨잖아요? 옆에 미역 머리를 한 살인자를.”
“하…. 그래서 지르니트는 알고 있던 거야? 잠든 건 왜 그러는 건데?”
보험까지 제대로 들어놨다는 말에 한숨을 쉬고서 이참에 궁금했던 모든 것을 물어보기 시작하네요.
탈리안은 질도 알고 있었냐는 질문에는 고개를 젓고 왜 잠들었냐는 질문에는 테이블과 문을 바라보며 선택하라는 손짓을 했어요.
“질과 당신이 본 몬스터가 내뿜는 가스에 대해 알아봤어요, 일단… 자리에 앉으세요. 아니면 편하게 저희 집으로 갈까요?”
“…네 집으로 가자.”
라피아가 결정하자마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바로 안내소의 뒷문을 자신의 집과 연결했어요.
아직도 탈리안이 질과 자신을 감쪽같이 속였다는 게 믿기지 않는지, 표정이 풀리지 않는 라피아에요.
그런데 문을 넘어 도착한 탈리안의 집은 평소에 못 보던 공간이었어요.
수많은 약병과 마정석, 수상한 액체가 든 시험관과 천장을 가득 채운 보라색의 연기까지.
마녀의 실험실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풍경이었죠.
“저희 집의 1층에 이런 곳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죠?”
“지르니트는 언제 깨어나는 건데?”
그렇지만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이 질이 괜찮은지를 묻는 라피아에요.
하긴 뭐 라피아가 탈리안의 집에서 살게 될 것도 아니고 말이죠.
이런 공간이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는 일이니까요.
그래서인지 일단은 자신에게 업혀있는 질을 방 한구석에 침대에 눕혀놓았어요.
꽤 오랫동안 업고 있었으니 힘들었겠죠.
“상당히 신경 쓰네요, 질과 사이가 좋아질 일이라도 있었나요?”
“아, 아니!? …으흠! 없었는데. 그리고 괜찮다고는 하지만 저렇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자고 있을 수가 있냐고 묻고있잖아.”
라피아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커녕 좋은 일이라도 있었냐는 말에 크게 당황했어요
이상한 낌새를 느끼지는 않았을까 탈리안의 눈치를 살피지만, 아직 평소의 표정을 하고 있는걸 보면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네요.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고 화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너무 긴장한 모습을 보여주면 수상하다 여겨질 테니 여러모로 곤란하겠어요.
“정말로 괜찮아요. 제가 질에게 안 좋은 일이 일어나도록 가만히 보고만 있을 리가 없잖아요?”
“…쯧, 그래서 왜 저러는 건데?”
“몬스터의 이름은 중요하지 않으니 넘어가고, 가스의 효과가 뭔지 말해드리자면…. 응? 이게 무슨, 당신 설마 질의 피를 빨았나요?”
질의 손에 꽉 쥐어져 있는 버섯을 집으러 온 탈리안은 멈춰서서 질의 목에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했어요.
정말 우연히, 눈길이 갔을 뿐인데 그걸 발견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죠.
그 단서 하나로 피를 빨았다는 결과까지 도출해낸 탈리안은 정말이지….
이에 라피아가 선택한 행동은 자신은 하지 않았다며 잡아떼는 것이었어요.
모른다고 해야 했는데, 하지 않았다고 했죠.
“어어? 응? 아니! 안 그랬는데? 누가 그래?”
“목에 이 붉은 마크…. 그리고 하지 않았다니? 누군가는 했다는 건가요? 그게 누구일까요, 이 뻔뻔한 뱀파이어가.”
“윽, 젠장! 그래, 내가 했다! 뭐 잘못됐냐!”
탈리안이 다 알고 있으면서도 비꼬며 말하는데, 이러면 라피아가 찔릴 수밖에 없죠.
스스로 자백할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네, 큰 잘못을 했네요. 몸만 컸지 10살짜리 어린애한테 이런…. 하아….”
“야! 내가 아니라 질이 해달라고해서 한 거였거든?!”
라피아가 반박을 위해 한 말도 틀린 건 아니에요, 질 스스로가 해달라고 한 것이었으니까요.
자신은 그 말에 따르기만 했을 뿐이니 잘못이 없다…고 말하고 싶은 거겠죠.
“그래도 거절했어야죠! 당신이 한 짓이 성적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한테 자기를 위로하는 방법을 알려준 거랑 뭐가 다른가요!”
“자, 자기 위로…?! 말 좀 가려가면서 해! 아무리 그래도 내 흡혈이 그만큼 야하지는 않거든!! 그리고 지르니트도 이제 그런 거 다 알 나이라고!!”
자신의 능력을 성적인 것으로 표현하는데 화내지 않을 수가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요?
방금까지만 해도 억울하다고만 말하고 있었는데, 이번엔 약간의 분노가 섞인듯한 억양으로 말하는 라피아에요.
이에 탈리안은 더 차가운 태도로 말하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지금 잘했다는 건가요? 저의 마지막 남은 가족이나 다름없는 질에게 손을 댔다는 사실이, 정말 잘했다고요?”
“야, 미안하긴 한데 내가 꼬신 것도 아니고 지르니트가 해달라고해서 해준 거야. 그리고 저 녀석도 알 거 다 알 나이라니까? 왜 그렇게 귀를 닫고 살아?”
“질이 그럴 리가…!”
자신의 앞에서는 착하고 순하디순한 모습만 보여준 질이었으니 탈리안이 믿을 수 없는 거야 당연한 일이죠.
일단은 가족이니 질이 자신을 보살펴주는 탈리안에게 모든 모습을 보여주기는 꺼려지는 마음이 들 테니까요.
부모에게 자신의 그렇고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과 같다고도 할 수 있겠네요.
탈리안을 부르는 호칭은 언니라고 하지만요.
“하! 지르니트를 너무 말 잘 듣는 어린애로만 생각한 거 아니야? 애가 속상해하겠다, 야.”
“말조심하세요! 질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탈리안은 자신이 모르는 질의 모습을 타인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분했나 봅니다.
갑자기 라피아에게 큰소리를 내버렸어요.
하긴 지금껏 열심히 아껴주었는데, 자신이 아니라 타인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것은 약간 상처받을 만도 합니다.
‘나한테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았으면서,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뱀파이어 따위에게.’…라고 생각 중이겠죠.
“너야말로 흡혈 한번 한 게 뭐 그렇게 큰 잘못이라고 이러는 건데? 머릿속이 음란한 것들로 가득 찼냐!”
“으, 음란?! 이, 이 도둑고양이가!!”
“열 받으니까 이제서야 본심을 드러내시네, 고작 흡혈 한 번에 빼앗기는 기분을 느끼다니 참 속도 좁지!”
“뭐, 뭐라고요?! 다, 당신! 아니, 너!! 용서 못 해!!”
계속되는 라피아의 돌려 까는 말에 탈리안은 빠르게 달려들어 라피아의 머리채를 쥐어 당겼어요.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라피아는 반응도 하지 못했죠.
“악!! 이거 안 놔?!”
“감히 질에게 불순한 일을 가르쳐놓고 나보고!! 꺄악?! 넌 뭘 잘했다고 내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는 거야!!”
“그럼 그냥 당하고만 있으라고!?”
당연히 가만히 반격하지 않고 당해줄 라피아가 아니라서 똑같이 머리를 붙잡아 당겨버렸어요.
그런데, 질의 급성장한 몸을 고치기 위해서 이 장소에 모인 것이 아니었나요?
왜 갑자기 질을 두고 싸우는 일이 되어버린 걸까요.
아무리 포자의 영향을 받았다지만… 두 명이 시끄럽게 싸우든지 말든지, 곤히 잠들어있는 질이 대단할 정도네요.
아, 둘 다 바닥에 넘어졌으면서도 독하게 서로의 머리카락을 끝까지 놓질 않네요.
역시 마녀와 뱀파이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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