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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45화 (45/189)

〈 45화 〉 의도하지 않은 것 (2)

* * *

질과 라피아가 텐트로 돌아왔을 때에는 시멜리와 제리가 어색한 분위기를 풍기며 불멍을 때리고 있는걸 볼 수 있었어요.

정말 말 한마디 없이 불멍만 때리고 있었죠.

질과 라피아가 돌아온 걸 보고 나서야 그 둘의 어색한 정적이 사라졌어요.

“응? 너 설마 라피아인 거냐? 갑자기 왜 그렇게 커진 거야?”

“그럴 일이 있었어.”

시멜리는 굳이 인사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는지 질과 눈빛 교환만 했어요.

그런데 뭔가 이상한 걸 느꼈는지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며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기도 했죠.

질은 시멜리의 표정을 눈치채지 못한 채로 제리에게 다가갔어요.

“…왜?”

한동안 말없이 쳐다보기만 하자 용건이 뭐냐는 듯 퉁명스럽게 물어보는 제리에요.

건방지게 나와서 좋을 게 없을 텐데, 왜 이렇게 애처럼 구는 걸까요.

“언니한테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죠?”

“내가 뭘….”

이제는 아예 고개를 돌려버리고 모른 척을 해버리네요.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은 아닐 테고, 제리도 찔리는 구석이 있으니까 이러는 거겠죠.

사과는 빠르면 빠를수록,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 인지하고 할수록 좋은데 안타깝네요.

“사람의 아픈 구석을 찔러놓고 모른척하기에요?”

“…모른 척은 누가 했다고 그래.”

“그럼 사과할 거죠?”

“…미안.”

어떻게든 힘겹게 사과는 했지만, 대상이 틀렸네요.

게다가 소리도 작고, 고개도 숙이지 않았으며, 진심이 담겼는지조차 모를 사과에요.

이를 당연히 질이 그냥 넘어갈 리가 없겠죠.

“제가 아니라 라피아 언니한테 해야죠.”

“아, 진짜! 네가 뭔…! 데….”

하지만 질처럼, 이런 훈계하는 듯한 말을 듣는다면 분명 제리가 자신의 성격에 휘둘릴 테니 가만있을 리는 없죠.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버린 제리는 손찌검하려는 제스처를 취했지만, 공중에 들어 올려진 손은 그대로 멈춰버렸어요.

질의 뒤에서 당장이라도 자신을 죽이기라도 할 듯이 노려보는 라피아 때문이었죠.

시선만으로 타인에게 겁을 줄 수 있다니 대단한 능력이에요.

“손 안 내려?”

“…크윽, 됐어, 안 해! 난 이 파티에 더 이상 못 있겠어! 갈 거야!!”

“제리 씨!!”

평소와는 다른 라피아의 차가운 말에 겁을 먹은 건지 제리는 땅을 발로 차고 나선 뒤를 돌아 텐트를 떠나려 했어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도 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마법진의 경계선 밖으로 나가버렸죠.

질이 곧바로 위험하다며 붙잡으려 했지만, 라피아는 질의 손목을 잡으며 만류했어요.

“내버려 둬, 지르니트. 저 녀석은 운이 좋아서 이 학원에 입학했을 뿐이지, 학원에서 뭔가를 제대로 배울 그릇은 되지 않았던 거야.”

“그렇지만….”

“정말로 세계를 구할 용사의 후보생이라면 어떤 파티라도 잘 어울리거나, 탁월한 리더십으로 모두를 이끌어야 했는데 저 꼴을 봐. 너는 저게 용사의 그릇으로 보여?”

실제로도, 동화로도 그렇고 전해져 내려오는 용사의 모습을 보면 모두의 앞에 서서 역경과 시련을 이겨내며 희망을 가져옵니다.

그런 용사의 곁에는 항상 그를 따르는 파티원들이 적으면 하나에서, 많으면 수백 명 단위의 군대까지도 모여들죠.

그들은 모두 용사의 모습에 반하거나, 동경해, 존경심을 갖는 등 모두 제각각의 이유로 용사를 따릅니다.

그런 면에서 따져보자면 제리는 용사 후보생이면서도, 용사에 어울리지 않는 그릇을 가지고 있었어요.

라피아의 말처럼요.

“있잖아? 작은 주인님, 나 피곤한데 먼저 자도 괜찮겠어?”

“네, 괜찮아요. 그래도 라피아 언니의 말처럼 불침번을 서야 되니까 몇 시간 지나면 깨울 텐데 괜찮죠?”

“하음…. 그래, 작은 주인님.”

시멜리는 뒤도 안 돌아보고 텐트 안으로 들어가 버렸어요.

시간이 시간인지라 웃음기도 없이 하품 한 번만 한 걸 보면 걸어 다니기만 했더라도 피곤하긴 했나 봐요.

본의 아니게 질과 라피아가 숲속에서 야릇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동안 자정은 훨씬 지났을 테니까요.

원래라면 제리와 같이 자게 되었을 텐데, 파티를 무단이탈해 버렸으니 혼자 자느라 쾌적한 잠자리를 갖겠네요.

굳이 제리가 떠나지 않았더라도 질이 명령하면 불편하더라도 어쩔 수 없이 자야 했겠지만요.

“펜던트인지 뭔지 때문이라곤 해도… 엄청 말 잘 듣네.”

“효과가 엄청나더라구요! 말을 안 듣거나, 저를 상처입히려고 하면 데굴데굴 구르던데요?”

“하긴, 그 녀석이라면 못 만들게 없겠지.”

“우리 언니가 좀 대단하죠!”

마치 자기가 해낸 업적인 것처럼 탈리안이 대단하다고 자랑하는 질이에요.

라피아가 이를 어떻게 보는지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모양새였죠.

그러자 라피아는 무시당한 것만 같은 기분에 앉으라며 살며시 질의 어깨를 눌렀어요.

“너, 그 녀석을 진심으로 좋아하는구나? 나랑 은밀하게 나눴던 정사가 무의미해질 정도야.”

“저, 저, 정사라니!! 그런 거 아니었잖아요?!”

“큭큭, 반쯤은 농담이야. 놀리는 맛이 있으니까 나도 모르게….”

정사란 남녀가 서로 사랑하는 생각, 사랑에 관한 일, 육체적인 사랑의 행위.

질이 그런 쪽으로 관심이 있던 건 마을의 책에 어쩌다 좋지 못한 책이 흘러 들어갔던 거겠죠.

우연히 그 책을 읽게 되었을 테고 말이에요.

다만 이런 별것 아닌 사실들보다는 허둥대며 아니라며 부정하는 질이 귀엽다는 사실이 더 중요합니다.

“에휴… 탈리안 언니는 제 생명의 은인인걸요, 언니는 안 그래요? 그, 양아버지인 이사장님한테.”

“나야, 고맙긴 한데…. 나이 차이가 심하다 보니까 대단하고 감사하다는 생각만 가질 뿐이지. 무엇보다 난 남자랑은 어울리기 싫어서…. 그리고 너처럼 매일매일 질리도록 연정을 갖지는 않아.”

한참의 고민 끝에 전해 듣게 된 라피아의 생각은 감사하다는 것뿐, 질처럼 상대방에게 연정을 갖지 않는다는 놀림이었죠.

오늘따라 질이 라피아에게 계속해서 괴롭혀지네요.

“네?! 뭐라는 거에요! 저는 그냥 생명의 은인으로서, 가족으로서 좋아하는 것뿐인…!”

그런데 이번 반응은 뭔가 다른 게 허둥댄다기보다는 핑계를 대는 듯했어요.

사실이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가 아니라… 분명 비슷한 종류의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럴 마음이었던 게 아니다…라면서 핑계를 대는 것 같았죠.

“야, 거짓말을 하려면 제대로 해. 너 그 녀석을 볼 때 눈이 어떤지 알아? 눈에서 꿀이 떨어져, 꿀이.”

노력이 가득 들어간 질의 변명에도, 라피아는 꿋꿋이 자기 할 말만 했어요.

이게 정답이니까 넌 그냥 인정만 하라는 듯이 말이죠.

“진짜 아니거든요!!”

“그래, 그렇게까지 부정하는데 아니라고 쳐줄게.”

“아니 진짠데…!”

“그럼, 탈리안이 아니라 나하고 사랑이라도 나눠볼래?”

“네에?! 그, 그건! 조금….”

아무래도 질이 인정하지 않아 답답했던 모양인지, 라피아는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며 피를 빨았을 때와 같이 밀접한 채로 귀에 속삭였어요.

라피아가 약간 상처받을 수도 있겠지만, 소름이 돋은 것처럼 부들거리듯 떨면서 라피아의 곁에서 빠져나온 질이었죠.

“것 봐. 뭐… 네가 누굴 좋아하든 다 좋은데, 하나 명심해둬. 그 녀석은 사람이 아니니까 나이를 안 먹거나 늙는다고 해도 그 속도가 너보다 훨씬 느릴 거야. 반면에 넌 하루하루가 다르게 나이를 먹어가겠지. 종족이 다르니까. 그걸 생각해둬.”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것처럼 라피아는 다시 자리로 가서 앉아 질에게 조언을 건넸어요.

뉘앙스는 다르지만, 탈리안도 한 번쯤 했던 이야기였죠.

당시 질이 수긍하면서도 떨떠름한 표정을 짓던 것을 보면 딱히 이런 부류의 이야기를 좋아하지는 않는 듯해요.

시간에 관련해서는 유독 싫어하는 모습이네요.

“…네.”

“거봐, 대답 잘하는 거 보니까 좋아하는 거 맞네.”

“언니 진짜!!”

그래도 라피아는 마지막까지 질을 놀리는 건 절대로 잊지 않았죠.

이에 소리를 지르는 질이지만, 적당히 넘기기 위해서 라피아는 화로 주변에 두었던 또 다른 냄비에 손을 뻗었어요.

화로에 얹어진 냄비에서는 곧 군침이 도는 냄새가 돌기 시작했어요.

“와, 무서워라~ 배고프지? 밥 먹다가 쫓아온 거니까… 요리 하나 더 준비해온 거 있거든? 데워줄게.”

“감사합니다….”

“이건 약간 핏기가 있는 건데 괜찮아? 굽기는 했지만 아주 살짝 구운 거거든.”

핏기가 있다면 자신이 먹기 위해 준비해둔 요리겠네요.

라피아가 하프이기 때문에 다른 요리들을 먹을 수는 있더라도 배를 채울 수 있는 건 오직 피밖에 없을 테니까요.

“어떤 고기인데요?”

“그루퍼라는 녀석 알아? 엄청난 근육질의 몬스터인데, 그 녀석의 다리 안쪽 살이야. 굳이 짚어주자면, 이쪽.”

라피아는 자신의 제복 치마를 들쳐 허벅지 사이를 가리키며 알려주었어요.

아슬아슬한 부분까지 올려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면 동성이라 할지라도 과하지 않았나 싶네요.

봐요, 질도 라피아의 시선을 피해 엉뚱한 곳을 보며 대답하잖아요.

그러면서도 흘끔흘끔 보는걸 보면 라피아의 피부가 깨끗하고 아름다워 보이기는 하는가 보네요.

“으응, 네…. 모험가 중에서 한 분이 말해주는 걸 들어본 적 있어요, 엄청 크다면서요?”

“아는구나? 아마 크기만으로 따지면 네가 사는 저택만 할걸? 미궁에서 서식하는 녀석이니까.”

“정말 큰 거네요, 그럼….”

“그렇지? 근데 이 녀석이 또 고기로 먹으면 근육질인데도 사르르 녹는 데다가 그 맛이 엄청나거든! …아, 근데 넌 안 졸려?”

실컷 떠들다가도 크게 하품을 하는 질을 보고 물어보는 라피아에요.

평소에 탈리안의 집과 도서관만을 오가던 몸이니 한 번에 많은 시간을 돌아다닌다면 피곤한 건 어쩔 수 없을 거예요.

미궁에 다녀왔을 때만 해도 질은 라피아와 함께 집에 돌아오자마자 잠들었으니까요.

“네? 네,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누워도 못 잘 거예요.”

하지만 ‘그런 일’이라고 칭하는 라피아와의 일 때문에 잠들지 못할 거라 말하네요.

그 말에 라피아는 다가와서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한곳에서 시선을 멈췄어요.

“흐응, 잠깐 눈 좀 볼까?”

“눈은 왜요?”

“잔말 말고, 이리 와봐.”

“…이상한 거라도 있어요?”

눈을 유심히 바라보던 라피아는 얼마 안 가 바로 떨어졌어요.

그리곤 땅이 꺼질듯한 한숨을 쉬며 어떻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죠.

“그, 있잖아, 지르니트…. 내가 의도한 건 아니거든? 분명히 이런 상황도 염두에 두고 피를 빨았던 건데. 아니, 내 말은 그러니까….”

“언니? 뭘 말하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까, 어… 아 씨! 이거 이러면 그 녀석한테 들킬 수밖에 없잖아?!”

혼자 머리를 싸매고 불안해하는 라피아는 ‘전혀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충분히 자제하고 빨았던 건데’라며 중얼거렸어요.

질에게 있어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이었죠.

“저, 언니?”

“그게… 아까 내가 네 피를 빨았잖아?”

“네,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네 피가 맛있다 보니까 내가 방심했었나 봐, 잠깐 맛있다고 한눈팔았던 때가 있었는지… 힘을 조금 나눠준 느낌인데.”

짧은 설명을 듣고도 이해가 따라가질 않는지 잠시동안 멍을 때리는 질이었어요.

그래서인지 라피아는 계속 설명을 이어갔죠.

“그러니까, 뱀파이어로서 가진 내 힘과 특성이 약간이나마 너에게도 생겼다고…. 너 지금 평소라면 잘 시간인데 너무 오래 깨어있잖아.”

“…정말이에요?”

못 믿겠다는 듯한 의심 가득한 눈으로 라피아를 바라보지만, 라피아가 언제 질에게 거짓말을 한 적이 있던가요?

이는 누구보다 질이 더 잘 알고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다른 관점으로 본다면 질에게는 좋은 상황이 아닐까요? 별다른 수고스러움 없이 또 다른 힘을 얻게 된 거니까요.

아, 피를 빨리면서 느낀, 빨린 뒤에 느낀 부끄러운 감정이 대가였다면 약간의 수고스러움은 있었네요.

“거울이라도 줄까? 당장 네 눈만 봐도 눈동자가 조금 날카로워져서… 이거 분명 그 마녀한테 들킬 거라고! 그 녀석한테 잔소리 듣기는 죽어도 싫은데, 설마 죽이려 들지는 않겠지? 설마….”

“이거, 언니 말대로면 새로 얻은 능력이나 힘들은 평생 가는 거예요?”

탈리안이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할지, 어떤 책임을 물어올지 걱정하고 불안에 떠는 라피아와는 반대로 질은 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떴어요.

능력을 얻었다는 사실에 질이 한가지 간과하고 있는 게 있다면, 어쩌면 바람을 피웠다는 증거를 광고하고 다니게 된 것과 다름이 없다는 거죠.

물론? 탈리안이 질처럼, 질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품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요.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상당히 큰일이 난 상황인 거예요.

“말했지만 조금만 줬다고 했잖아? 게다가 나는 하프니까, 그러니까 아마 일시적일 수도… 평생 간다고 하면 밤에만 그럴 수도…. 그런데 좋은 게 아니라고! 왜 그렇게 기대하는 눈빛을 하는 거야?”

질이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둘째치고 라피아의 말을 자세히 살펴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아무리 어중간한 권속이 되었다지만 뱀파이어의 힘과 특징을 얻게 되었다면, 당연히 그에 합당한 종족의 특성까지 물려받았을 테니까요.

가령 햇빛에 약해 아침부터 오후까지는 기운이 없어진다거나, 피를 보면 빨고 싶어진다거나… 그런 것들 말이죠.

탈리안이 이 사실들을 알게 되었을 때가 기대되는 순간이네요.

뭐 사실 아직은 질의 마음이 확실한지 모르기 때문에 이런 가정은 의미가 없지만… 질이 나중에 더욱 솔직해지고, 당당해지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다를지도 모르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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