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의도하지 않은 것 (1)
* * *
텐트를 떠난 라피아는 무작정 앞으로 걷기만 하면서 지나온 길의 풀숲이나 거치적거리는 나뭇가지들을 다 아작내놨어요.
덕분에 질이 따라오기는 편했지만, 도중에 몬스터라도 만나지 않을까 계속 긴장해야만 했죠.
따라가면서도 계속해서 ‘언니, 언니!’ 하며 부르는데도 쉽게 멈춰서질 않으니 그저 열심히 따라갈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그렇게 잘 따라가던 것도 조금의 시간이 흐르면 점점 뒤처지는 일밖에 남아있지 않았죠.
아무리 산골 마을에서 생활하던 질이라지만, 종족에서부터 차이가 나는데 텐트를 나선 지 한참이 지나고도 잘 따라다닐 리가 없잖아요.
가쁜 숨을 몰아쉬는 질의 고생을 아는지 모르는지, 라피아는 말없이 멈춰서서 땅을 보고만 있었어요.
“하아, 흐으…. 언니…! 저희 이제 돌아가요….”
라피아가 멈춰서자마자 질 역시 멈춰서서 돌아가자고 권유했어요.
하지만 역시 대답 없이 가만있을 뿐인 라피아였죠.
그러다 갑자기 주저앉아 옆의 나무에 기대버렸어요.
“언니?”
“…지르니트, 내가 잘못했겠지? 손이 먼저 나가면 안 되는 거였는데.”
“아니에요, 그럴 만했다고 생각해요.”
자책하듯 힘이 빠진 목소리를 듣자마자 위로해준 질이었지만, 효과는 별로 없어 보였어요.
게다가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라피아가 미세하게 떨고 있는 것도 알 수 있었죠.
제리에게 손찌검을 했다는 것 때문은 아닌 것 같았어요.
그보다는 기억 속에 각인된 무언가가 밖으로 튀어나와 겁을 먹어버린 모습이었어요.
“미안, 잠깐….”
“왜 그래요?”
“잠깐만….”
몇 번이고 잠깐, 잠깐만이라며 되뇌이는 모습에서는 안쓰러운 생각이 들 정도였어요.
질 역시 쉽게 위로하려 들지 못하고 한 발자국 뒤에서 바라보기만 하고 있어야 했죠.
질은 라피아가 진정되기까지 한참 주변을 맴돌기도 하고, 애꿎은 돌을 발로 차기도 했어요.
정말 지루할 정도로 긴 시간이 필요했거든요.
“…미안. 진정됐어. 흉한 꼴을 보였네.”
“괜찮아요, 그리고 이거….”
“이건 또 언제 챙겨온 거야?”
“밤바람이 차가우니까 추울 것 같아서, 헤헤….”
질이 두 손으로 공손히 건네준 것은 여벌로 가져온 자신의 외투에요.
외투의 두께가 얇아서 차가운 밤바람을 막아주지는 못하겠지만, 라피아의 하얀 피부와 흉터를 가려주기에는 충분했으니 상관없는 일이겠죠.
라피아도 고맙다고 답하며 외투를 입었으니까요.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제리 그 녀석이 나한테 지킬 힘이 있었으면 과연 뱀파이어가 멸족당할 위기에 처했겠느냐고 말한 걸 듣자마자,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서….”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아요. 제리 씨가 말이 심하긴 했어요.”
같은 처지에 놓인 질은 라피아의 기분을 바로 이해한듯했어요.
굳이 그때의 기억이 어떤 것인지 물어보지 않아도 다 알아버린 눈치였죠.
하긴 자신의 종족이 멸족당할 위기의 기억을 떠올렸는데 바로 멀쩡하게 일어서는 것도 이상하긴 합니다.
고작이라고 표현하기는 미안하지만, 질이야 고작 마을 하나일 뿐이잖아요?
그에 비해서 라피아는 안 그래도 개체 수가 적던 뱀파이어의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혈통이고요.
“계속 여기에 있기는 위험하잖아요, 돌아갈까요?”
“…그래, 너무 걱정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질은 말없이 손을 건네 라피아가 일어서는 것을 도왔어요.
“근데 언니 몸은 자유자재로 크기를 키우고 줄일 수 있는 거예요?”
“피만 빨 수 있다면 내가 원할 때면 아무 때나 가능하지, 옷은 불가능하지만 그만큼 크기가 늘고 줄어도 상관없는 헐렁한 것만 골라 입잖아?”
그리고 텐트로 돌아가며 대화 주제를 바로 돌려버렸죠.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서 좋을 게 없다는걸 아는 거예요.
질 자신만 해도 그때의 기억만 하면 겁에 잡아먹혀 아무것도 못 하게 되니까요.
눈물겨운 노력이에요.
“하긴, 저번에 언니 학원 제복을 입은 것만 봐도 조금 커 보이더라구요.”
“왜? 지금은 작아서 불만이야? 큰 게 더 의지하기 쉬워서 그래?”
“설마요! 언니야 언제든 듬직한걸요? 그냥, 그… 키 컸을 때 언니가 좀 더 아름다웠다고 해야 될까, 그런 게 있어요.”
얼굴을 붉히며 칭찬하는 질이에요.
“뭐? 뭐야 그게… 맘에도 없는 소릴 하기는, 그럼 잠깐 피 좀 빨게 해줄래?”
칭찬을 듣고 나서 말은 이렇게 하는 라피아지만, 질과 같이 새빨갛게 얼굴을 물들였어요.
칭찬이 아예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아니었나 봐요.
결정적으로 부끄러운 걸 숨기기라도 하려는 듯이 일부러 과장된 손짓으로 입술을 옆으로 늘여 당겨 송곳니를 보이게 했죠.
“에, 아플 것 같은데… 요.”
“하나도 안 아파, 오히려 기분이 좋다 못해 환상적이어서 가볍게 절정 해버릴지도 몰라. 그래야 피를 빨리는 대상이 저항도 안 하고 얌전해지니까. 간단하게 매료 능력이라고 해둘까.”
“…절, 정?”
“모르는 건 아닐 텐데? 이제 슬슬 관심 가질 나이 아니야?”
“….”
잠깐이지만 질이 듣기에는 불건전한 단어가 오간 것 같은데요.
입을 꾹 다물고 라피아의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굴리는 걸 보면 확실한 것 같네요.
그래도 라피아의 말에 거짓은 없는 것 같아요.
피를 빨려면 대상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해야 하는데, 모든 뱀파이어의 외모가 아름다운 것도 호감을 갖게 하기 위한 진화의 한 방향일 거예요.
그렇다면 피를 빠는 동안 상대방의 기분을 좋게 하는 것이나 가벼운 절정감을 갖게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진화의 한 방향이겠죠.
“푸훗, 모르는 척하기는. 그래서 어쩔래?”
“목이면, 되는 거죠?’
“솔직해서 좋네.”
라피아의 질문에 스스로 목의 리본 넥타이를 풀어, 제복의 재킷과 셔츠를 어깨까지 내려 걸치는 질이에요.
목적이 라피아의 키가 큰 모습을 보는 것에서 약간 변질된 느낌이지만 말릴 사람도 없는데 어쩌겠어요.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라피아라면 나중에 제대로 교육해줄 테니까요.
뭐… 라피아가 질을 놀리기 위해 도발하는 느낌도 없지 않아 있었지만요.
다르게 생각하면 라피아도 자신의 트라우마를 덮으려고 일부러 강한 척을 연기하는 것일 수도 있겠네요.
“갑자기 성장한 사람의 피부치고는 상당히 깨끗하네.”
“그런 말은 됐어요, 부끄러우니까….”
“흐응? 그럼 나한테 피를 빨아달라고 한 당돌한 지르니트는 어디 갔을까? 응?”
이런 말들을 하는 것도 일종의 분위기를 잡는 데 쓰이는 것들이겠죠.
당장 질의 꼼지락거리기만 하는 손을 보면 라피아의 말이 꽤나 성공적이라는 것을 알려주니까요.
“으으, 진짜! 계속 이러면 없던 일로 하고 바로 갈 거예요!”
“미안 미안, 그만 놀릴 테니까… 눈 감아.”
마지막에는 거의 속삭이듯이 귀에 대고 말한 라피아였어요.
라피아는 곧 질을 끌어안고선 바로 어깻죽지에서 돋아난 거대한 날개로 크게 감쌌어요.
이전에 입학생의 피를 빨아들일 때에는 급해서였는지 날개를 꺼내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여유가 있어서일까요.
짐승의 날개가 전신을 휘감는 이질적인 느낌에 몸서리를 치던 질은 라피아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곧바로 얌전해졌어요.
그리고 라피아의 손이 질의 목을 살며시 젖히고, 송곳니가 목에 닿았죠.
“읏! 흐윽….”
질은 살을 파고드는 고통에 짧게 신음을 흘리며 움찔했어요.
라피아는 적응할 시간을 주려는지 바로 피를 빨아들이지 않고 잠시 기다려주는 모습에 질은 달뜬 숨만 내뱉었죠.
지금, 이 순간이 라피아가 말했던 기분이 좋아지는 것의 스위치일지도 몰라요.
슬쩍 눈을 뜬 질은 텅 빈 것 같은 눈동자로 자신을 감싸고 있는 라피아를 봤어요.
라피아의 빨간 머리카락이 길게 늘어선 것을 보니 묘한 기분이 들었을 거예요.
탈리안을 제외하고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가까이서 본 적이 있던가요?
그것도 평범한 이유가 아니라 처음으로 외설적인 이유를 통해 가까워진 것이라면, 그런 일은 더 없을 거예요.
그 때문인지, 라피아가 말했던 매료의 효과 때문인지 격한 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질의 한 번 내뱉은 숨은 끊이질 않았어요.
그렇다고 너무 격하지는 않은, 흥분으로 달아올랐을 때나 나올법한 느릿하고 따뜻한 숨이었죠.
주체되지 않는 기분에 질은 라피아를 절대 놓지 않을 것처럼 꽉 끌어안았어요.
그리고 자신을 끌어안은 것이 신호인 것처럼, 동시에 피를 빨아들이기 시작한 라피아에요.
“흣…. 언니, 으응…. 잠깐, 마안….”
“힘 빼.”
다른 먹잇감들과는 다르게 질이 사소하게나마 반항을 해서인지, 라피아는 목소리를 낮게 깔고 명령조로 말했어요.
라피아가 명령해서인지, 겁을 먹어서인지는 몰라도 다시 몸에 힘을 빼다가 화들짝 놀라는 질이었죠.
“으읏!? 왜 핥는 거예요….”
“괜찮으니까, 나한테 몸을 맡겨.”
“앗, 헤으….”
라피아는 잠깐 목에서 입을 떼어 상처 부위를 한 번, 두 번 핥아냈어요.
진정하라고 한 행동이라기엔 올바르지 않은 행동이지만, 거짓말처럼 질은 다시 한번 온몸에 힘껏 들어간 힘을 빼버렸어요.
상처 부위에 발라진 침에 진정효과라도 있는 거겠죠.
그렇지 않은 이상에야 이렇게 몽롱한 얼굴, 반쯤 풀린 눈을 할 리가 없으니까요.
라피아는 그런 질의 모습을 상관 않고 다시 피를 빨기 시작했습니다.
사랑을 속삭이거나, 미래를 약속하는 그런 것 없이 이루어지는 행위지만 질은 그 어떤 때보다 행복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어요.
상황의 전후를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죠.
점차 피를 빠는 속도가 줄어들어 가고 충분한 피를 빨아들인 라피아가 목에서 떨어지는 순간, 질은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설 수 없는 것 같았어요.
“충분해?”
“후으, 몰라요….”
밤바람의 찬 기운에 정신이 돌아오는지, 라피아가 넘어질 뻔한 자신을 품에 안기게 한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아예 더 파고드는 질이에요.
눈치채지도 못하는 틈에 자신보다 더 커져 있는 라피아에게 알 수 없는 기분을 가졌을지도 모를 일이에요.
평소에 침착하고, 착하던 지르니트가 이런 일을 경험했다는 것부터가 상당히 위험한 모험이긴 했어요.
이런 쾌락에는 자칫하면 쉽게 중독이 될 수 있기도 하고, 탈리안이 알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때는….
뭐 질도, 라피아도 서로서로 알아서 하겠죠.
지금은 그저 질이 부끄러운 마음을 잠재우는 것이 더 급해 보이니까요.
“흉터는 걱정하지 마, 내가 흡혈한 상처는 곧바로 나으니까.”
라피아는 입가에 묻은 혈흔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말했지만, 질은 말없이 작게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어요.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과 기분에 머리가 복잡해서 터질 것 같겠죠.
원래의 목적인 키가 큰 라피아를 본다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이니까요.
아, 원래의 목적도 그게 아니었던가요?
“…빨리고 난 뒤가 문제네요. …부끄러워서 얼굴을 못 들겠어요.”
“괜찮아, 나한테 피를 빨린 녀석들은 전부 다 같은 표정을 지었었으니까. 너무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그런 쓸데없는 걱정을 해야 하기보다는 자랑스러워 해야 할걸? 지금껏 맛본 피 중에서 제일 맛있었으니까.”
“그, 그래요?”
“앞으로 종종 빨고 싶을 만큼 맛있었다고 하면 믿겠어?”
“사, 사양할게요! 기분 좋긴 했지만, 했지만….”
말을 잇지 못하는 질을 보고 ‘했지만?’이라며 되묻는 라피아에요.
뭐 당연히, 가까스로 마주치던 시선을 피해 다시 라피아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지만요.
그렇게 부끄러웠던 걸까요? 단순히 피를 빨린 게 전부였는데 말이에요.
사랑을 속삭인 것도, 미래를 약속한 것도 아닌데 이상하네요.
“그래도, 덕분에 기분이 좀 나아졌어. 고마워 지르니트.”
“그건… 맛있는 걸 먹어서 기분 좋아졌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데요?”
“오! 정확해, 똑똑한걸?”
“언니! 제가 음식이에요?!”
“어, 아니. 근데 맛있었는걸.”
“언니!!”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