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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42화 (42/189)

〈 42화 〉 삐걱이는 파티 (2)

* * *

몬스터가 몰려오는 것을 처리하고 난 뒤의 승부는 누가 봐도 라피아의 것이었어요.

제리는 힘을 컨트롤하는 게 미숙했기 때문인지 몬스터와 싸우는 내내 힘을 남발하는 버릇을 숨기지 못했거든요.

결국, 끝에 가서는 제풀에 지쳐 흑기사에게 구해지는 결말을 얻었을 뿐이었어요.

제리의 자존심 강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땀만 뻘뻘 흘리며 축 늘어진 꼴불견인 모습만 보여주었죠.

이제 남은 둥지의 안쪽을 청소해야 할 텐데, 이 섬이 워낙 넓은 게 아니라서 질의 파티는 고민 중이었어요.

둥지를 무시하고 의뢰를 하러 갈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확실히 둥지를 정리하고 의뢰를 하러 갈 것인지를요.

둥지를 정리한다면 내부에 숨어있던 몬스터가 다시 번식을 하며 개체 수가 늘어날 수도 있으니 골치 아파질 수도 있는 문제였으니까요.

그렇다고 정리를 하기 위해 들어가자니 숨어서 기습해올 잔존 몬스터들이 걱정거리였죠.

“어떻게 할까요?”

“우리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이 둥지도 어쩌다 발견해서 이동에 방해가 될 것 같으니까 공격한 거고…. 학원 쪽에 말해두면 이것도 의뢰로 올라갈 거야.”

“그럼 그냥 지나칠까요?”

“그래야지. 몬스터 수도 확실하게 줄여놨고 그렇게 빨리 불어나진 않을 거니까.”

라피아는 싸움에 지친 제리를 한심하단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어요.

왜 이렇게까지 적대적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리의 무모했던 행동과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지지 못하는 것만 봐도 충분히 그럴만합니다.

“이봐, 용사 후보생. 이 승부는 내 승리로 해도 되겠지?”

“…쳇, 좋을 대로 해.”

“그런데 어쩌지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러서는… 주변에 전부 산이라 해가 빨리 질 텐데, 하루 쉬고 다시 이동할까?”

라피아의 말대로 벌써 해가 떨어지려 하고 있었어요.

이 일의 원인을 따지자면 두 명만이 둥지의 소탕에 참여했다는 것도 있고, 생각보다 몬스터의 수가 많았다는 것도 있겠죠.

라피아와 제리가 쓰러트린 수만 해도 족히 100은 넘었으니까요.

여기에 몸집이 큰 개체를 처리하는 데에 소비한 시간은 더 많았을 테니 해가 지려 하는 건 당연합니다.

“문만 있다면 다 같이 집으로 돌아가서 쉴 수 있을 텐데….”

“뭘 모르는구나, 지르니트. 이런 것도 의뢰의 재밌는 부분 중 하나라고. 물론… 누군가가 뛰쳐나가지만 않았더라도 벌써 의뢰장소에 도착했겠지만 말이지?”

“아, 멋대로 튀어 나간 건 아까 미안하다고 했잖아! 왜 그렇게 나만 가지고 뭐라 하냐, 넌? 뭐 맘에 안 들어?”

분명 제리가 사과를 하기는 했어요, 다시 싸움에 참여하기 위해 달려들던 도중에요.

자기 딴에는 사과를 했는데도 계속해서 트집을 잡는 라피아가 미워 보이겠죠.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는 안중에도 없는 채로 말이죠.

“아니? 그냥 용사라는 것들은 이름만 내세우고 하는 게 없구나 싶어서. 네가 입학 기준에는 어떻게 합격한 건지 신기할 정도라니까? 단순히 용사라는 칭호 덕분인가?”

“…나랑 한판 해보자는 거냐?”

“오~ 무서워, 무서워~ 지금의 네가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싸우지 마세요…. 그래서 하루 쉬고 가려면 어떻게 하려구요? 잘 곳도 없어 보이는데.”

하지만 제리가 실수가 한 게 있다고 하더라도 라피아의 비판은 정도가 점점 심해졌어요.

듣고 있던 질마저 나서서 말릴 정도였으니까요.

“뭐… 별거 없어. 먹을 걸 미리 챙겨왔다면 텐트만 치면 되겠지만, 지르니트 넌 처음이라 준비해온 거 없지? 어디의 누구 덕분에 준비하고 나올 시간도 없었을 거고.”

“헤헤… 근데 언니도 작은 가방 말고는 가지고 있는 게 없어 보이는데요?”

계속되는 라피아의 비꼬기를 애써 무시하는 제리는 시멜리의 장난에 어울려주고 있었어요.

질이 라피아에게 모험에 대한 특강을 듣는 동안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지쳐 진이 빠진 제리의 볼을 잡아당기면서 놀고 있었죠.

이 모습이라면 어울리기보다는 당하는 쪽에 더 가깝겠지만, 그거나 그거나… 시멜리에겐 똑같은 일이니까요.

라피아는 그런 둘에게는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고 작은 가방에 손을 넣어 뒤적거리다가, 가방보다 큰 나무 막대를 하나 꺼내 들었죠.

비단 나무 막대뿐만이 아니라, 천막, 물통… 모험에 필요한 물건 대부분이 가방에서 꺼내졌다가 다시 들어가곤 했어요.

신발 한 켤레가 들어갈 만한 작은 가방에서는 여러 가지 물건이 튀어나온 게 질에게는 신기한 경험이었죠.

불을 피우기 위한 도구부터 텐트를 세우기 위한 각종 재료들, 어둠을 밝히기 위한 마도구까지 없는 게 없었어요.

“어때, 신기하지? 나중에 신기한 걸 보여준다고 했었잖아?”

“와… 그 작은 가방에서 그 많고 큰 물건들이 어떻게….”

큰 물건들이 나오면서 가방이 찢어질 만도 한데 전혀 그러지 않았다는 것이 질의 눈에는 신기하기만 했죠.

“뭐 이런 대단한 기능에 비해서 꽤나 흔한 물건이라 값은 싸지만 말이야.”

“그런 게 흔한 물건이에요?!”

“미궁에 툭하면 떨어져 있는 게 이런 가방이야. 외관은, 내가 적당히 꾸며낸 거고….”

수줍은 얼굴로 자신이 꾸며낸 가방이라 말하는 라피아에요.

평소에 거칠고 무미건조하며 외관에 비해 소녀답지 않은 행실에 반대되는 귀여운 가방.

칠은 새로 한 것처럼 밝고 화사한 하늘색을 띠고, 장식으로 십자가를 끈에 매달아 놓았거나 가방 모서리에 스티커로 많이 미화된 박쥐를 붙여놓았죠.

“이 스티커는… 박쥐?”

“아, 그! 그건, 내가 가끔 부리는 사역마야…. 안 어울릴까?”

“아니에요, 잘 어울려요. 귀여운걸요?”

“그, 그렇구나! 어, 어쨌든! 먹을 건 충분하니까 따로 사냥하진 않아도 될 거야, 그러니까 일단 텐트를 칠 자리부터 찾아봐야 되니 이동하자.”

귀엽다는 칭찬에 얼굴을 붉히며 잘 들리지도 않을 정도로 말을 빠르게 하는 라피아였어요.

질은 여전히 흑기사의 어깨에 올라탄 채 내려오지 않고 라피아의 뒤를 따랐죠.

슬슬 흑기사가 지칠 만도 한데, 너무 무리시키는 건 아닌지 걱정되면서도 흑기사 본인이 아무 말이 없으니 괜찮은 것 같기도 합니다.

“시멜리 씨, 얼른 따라와요! 제리 씨도!”

“업어줄까, 용사 후보생? 히히….”

“…됐어, 손 치워.”

시멜리가 내민 손을 쳐낸 제리는 일어서서 흑기사의 뒤에 바짝 달라붙었어요.

한차례 격한 전투가 일어난 뒤 다시 이어지는 지루한 여행길에 지쳐 라피아와 제리는 말이 없었어요.

질과 시멜리는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 떠들 기력은 충분했지만, 이 분위기에서 즐겁게 떠들 배짱은 질에게 없었죠.

시멜리는 뭐어… 이 파티 중에 친한 사람이 있기나 하던가요? 이렇다 보니 어색한 정적만이 파티 안에서 맴돌았어요.

이들이 입을 뗀 건 숲에서 적당한 크기의 공터를 찾아낸 뒤였죠.

“…지친다. 야, 용사 후보생.”

이제는 용사 후보생으로 불린다는 것에 별 감흥조차 없는지 말없이 라피아의 앞에 다가온 제리에요.

후보생이라 불리는 걸 그렇게 싫어했으면서, 격한 전투와 오랫동안 걸었던 것 때문에 힘이 빠져 그런 걸까요?

“너랑 저 시멜리라는 애랑 텐트 좀 쳐, 너도 가져온 거 없어 보이는데 일이라도 해야지.”

“…쯧.”

“나라고 구경만 할 건 아니니까 불만 갖지 말고 해.”

“아, 진짜… 알았다고! 하면 되잖아. 누가 안 한댔어?”

“지르니트! 나 좀 따라와, 같이 할 거 있으니까!”

“네!”

라피아는 텐트를 만들기 위한 재료와 도구들을 대충 바닥에 던져놓고는 질을 불러 데려갔어요.

제리는 돌아보며 자리를 떠나는 라피아를 보고 궁시렁거리면서도 텐트를 치기 위해 땅을 고르기 시작했죠.

말은 모나게 해도 제대로 하고 있는걸 보니 질이 무엇을 하는지 볼 차례네요.

“시멜리 씨! 빨리 가서 도와주세요! 혼자 뭐 하는 거예요!”

“아, 네네~ 갑니다, 가요….”

그 전에 저럴 줄 알았어요, 제리만 열심히 하길래 뒤에서 구경만 하던 시멜리가 한 소리 듣는 거야 당연한 일이죠.

그런데 방 안에서 먼지만 쌓여가는 소라고둥에 비해서 이번에는 펜던트를 상당히 잘 써먹네요.

탈리안이 건네줬다는 물건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은데 뭐가 다른 걸까요.

“지르니트, 이제 그만 흑기사 어깨에서 내려와. 이것도 받고.”

“읏차, 이건… 마정석? 아! 이거 책에서 봤어요! 모험의 야영에 필수적인 그거, 그니까, 어…!”

약간은 기운차게 내려온 질이 손에 건네받은 것은 별다른 색이 있지 않은 무색의 투명한 마정석이었어요.

보통 마정석은 담겨있는 마나와 마법의 종류에 따라 색이 결정되는데, 이건 아무 색도 없네요.

“몬스터의 시야를 방해하고 접근을 못 하게 하는 인식 저해 마법. 난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해서 목책도 만들어야 하고 저녁 준비도 해야 돼, 그러니 부탁해. 마법진은 이 종이에 그려진 걸 따라 그리면 될 거야. …더 편한 마도구도 있긴 한데 그건 비싸서 준비 못 했거든.”

“잘해볼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생각보다 중책을 맡게 된 질이지만 한치의 틀림도 없이 마법진을 그려내는 걸 보면 처음인데도 잘하는 것 같네요.

마정석에 마나를 넣는 것도 실수 하나 없이 꼼꼼히 해내는 것을 보면 모험에 소질이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혹시라도 몬스터가 나타날까 봐 옆에 흑기사를 세워놓는 것도 꽤 섬세해요.

“지르니트, 궁금한 게 있다.”

한동안 마법진을 그리는데 열심인 질에게 말을 걸어온 건 소환 후 말이 잘 없던 흑기사였어요.

나무 막대로 마법진을 그리는 소리, 풀벌레 소리와 처음 듣는 짐승의 소리, 작은 소음들만 들려와서 지루했나 봅니다.

몬스터가 다가오는지 경계해야 하는 일을 맡고 있다곤 하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정말 많은 수의 몬스터를 처치했거든요.

“응, 말해봐 세르디어.”

“처음 봤을 때…. 넌 날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 왜 그랬는지 말해줄 수 있을까. 말은 하지 않아도 나를 대하기 어려워했던 것에서 다 티가 났었으니까.”

아무래도 처음에 자신을 꺼려했던 질을 마음에 두고 있었나 봅니다.

소환 직후나, 미궁에서 질에게 까칠하게 대했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던 건가요?

먼저 까칠하게 대했던 건 흑기사였던 것 같은데, 흑기사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질에게 문제가 있었나 보네요.

하지만 과거에 일이 있었다면 왜 굳이 성장한 뒤인, 지금에서야 물어보는 걸까요.

성장 전에는 말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성장하면서 사이가 가까워질 일이 있었기 때문에?

“내 마나로 소환한 게 바로 너 세르디어, 흑기사라는 정령이잖아. 나를… 소환사를 대신해서 싸워주는 정령.”

“직접 싸우고 싶다고 말하는 건가?”

“내 손으로 세계의 아픈 사람들을 구해주고, 겸사겸사 내 복수도 이루기 위해서는 내 손으로 하는 게 정답 아닐까?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버리면 의미가 없어.”

“…복수, 무엇을 이루기 위해? 미리 말해두지만, 정령은 소환사의 기억을 일부 공유하게 되어있어. 알기 쉽게 말하자면 네 복수의 대상이 이미 사라졌다는 것도 알고 있다는 거야. 이 세계에 내려온… 네가 부르는 방식대로 부르자면, 그 그림자에게 더는 덤벼들 이유가 없다는 뜻이지.”

흑기사의 말에 마법진을 그리던 질의 손이 잠깐 멈췄어요.

고민할 시간이 잠깐 필요했던 걸지도 몰라요.

질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려줄 준비가 되었는지 다시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내 작은 욕심이야.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말해준다고 해도 이해 못 할걸? 그래도 탈리안 언니가 말한 것처럼 복수라는 감정에 휘둘려서 허무하게 죽을 생각은 없어. 걱정해주는 거였다면 고마워, 세르디어.”

“지르니트, 탈리안이라 불리는 그녀는….”

“대단하지? 나한테는 한없이 다정하고, 화를 낼 때는 그 누구보다 무서운데… 항상 내가 위험하거나 다쳤을 때만 화를 내준다니까. 무서운 사람이나 몬스터도 눈 깜짝할 새에 혼내주고 말이야.”

흑기사의 말을 다 듣지도 않은 채 자신의 할 말을 해버리는 질이에요.

이런 질을 보고서는 흑기사는 거기서 더 말을 이어가지 않았죠.

하고 싶은 말이 더 있는 것 같았는데도, 말을 꺼내길 머뭇거리는 것 같았어요.

“지르니트! 마법진 만드는 거 다 끝났으면 와서 맛 좀 봐봐!”

“네에! 곧 가요! 세르디어, 같이 가서 먹어볼래?”

“…그래.”

정령은 마나만 충분하다면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섭취한다는 행동을 취할 필요가 없습니다.

소환의 유지에 필요한 것도 마나, 힘을 쓰는 데 필요한 것도 마나, 몸을 구성하는 요소도 마나.

모든 것이 마나로 이루어진 것이 정령이라는 존재이기 때문이죠.

그런 의미에서 흑기사가 같이 저녁을 먹자는 말에 동의한 것은 정령답지 않은 대답이었어요.

냄비가 올려져 있는 화로 앞에 오자마자 라피아가 흑기사를 보고 의아하단 표정을 지은 이유도 이 때문이었죠.

그래도 뭐, 질이라면 흑기사도 같이 가주었으면 하고 마음속으로 바라고 있었을 테니 잘된 일이죠.

마법진을 다 그린 질은 흑기사의 손을 잡고 캠프의 중앙으로 이끌었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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