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 불편한 동거 (3)
* * *
방 안으로 들어온 탈리안은 질을 침대에 앉혀놓고 다시 문 앞에 섰어요.
“언니 뭐 하는 거예요?”
“보나 마나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오려 할 게 뻔하니까, 이 공간에 특수한 처리를 해놓을 거예요. 저나 질의 마나를 사용하지 않으면 문을 연다고 해도 텅 빈 공간만이 나오도록 하는….”
“그, 그렇구나….”
탈리안은 곧바로 문에 손을 대고서 마법을 사용했어요.
언제나 그렇듯이 신기하다는 시선으로 탈리안을 바라보는 질이에요.
얼마 안 가 마법은 끝이 나고, 저번처럼 질의 옆에 와서 침대에 걸터앉았어요.
이전과 같이 질이 자그만 키를 가졌다면 안겼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몸이 성장한 탓에 불가능하겠네요.
“…끝났어요, 그럼 이제 이야기를 나눠볼까요. 질이 냉정해지기를 기다렸거든요. 제가 없는 사이에 사건이 일어날 줄은 몰랐지만요.”
“이야기, 지금은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아니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요. 언니가 저 범…. 시멜리라는 사람과 아무 사이도 아니라는 걸요. 너무 흥분해서 제가 바보같이 행동했어요.”
질도 질 나름대로 여러 가지 생각과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잘못도 인정하는 모습이 꽤 보기 좋네요.
“그렇게 말하니까 제가 알던 질이 사라지고 다른 사람이 몸을 차지해버린 것 같네요.”
“…인정하지 말걸.”
탈리안의 불필요한 한마디에 질은 볼을 부풀리며 고개를 돌렸어요.
이에 탈리안은 질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으며 달래주었습니다.
‘이런다고 삐진 게 풀릴 것 같아요? 이런 거로!’라고 투덜거리기도 하지만, 몸은 솔직했어요.
바로 탈리안에게 기대버렸거든요.
질의 성장한 몸 때문에 몸무게도 같이 늘어서 그런지, 질이 기댔을 때에 탈리안의 몸은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었어요.
“어쨌든 질, 제게 설명할 기회를 주세요. 시멜리를 집에 들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탈리안의 간절한 부탁에 질은 얌전히 고개만 끄덕였어요.
“크롬웰은 시멜리의 처분에 관한 회의를 열었어요. 회의 참가자는 5대 가문 중 크롬웰, 블레이저, 언리, 데카드. 4개 가문과 황궁의 대리인이 참석했죠. 저 중에 시멜리와 시멜리가 속한 리니아 가문은 참석하지 못했어요. 물론, 저도 마찬가지.”
“어째서….”
“어째서인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감시에 관한 이야기죠. 세계는 저를 위험인물로 보고 있어요.”
“언니가 위험하다니 말도 안 돼요!”
“…그렇게 봐주는 건 질밖에 없을 거예요, 제가 잘 대해주는 사람도 질밖에 없고요. 분명 세계를 위험에서 구했지만, 강대한 힘을 가진 자가 제어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면 어떨 것 같나요?”
“…힘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는 거예요?”
“책임이라고 하기보다는 제약이나 다름없죠. 마음만 먹으면 이런 제약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렇게 된다면….”
“안될 게 뭐가 있어요! 언니는 강하니까 그런 제약 같은 건…!”
“질, 당신이 위험해지니까 그런 거예요.”
탈리안의 한마디에 질은 조용해졌는데, 그럴 수밖에 없겠죠.
자신 때문에 제약을 깰 수 없다는 말을 듣게 된다면, 아무 말도 못 할 거예요.
“저 혼자만이었다면 이전처럼 느긋하고 평온한 일상을 보내며 세계에 녹아들었겠지만, 이번 일로 단순히 제가 ‘세계를 구한 알 수 없는 누군가’에서 ‘마암석이라는 물건의 힘을 흡수하고도 멀쩡한 위험인물’로 변하게 된 거죠. 제가 안일했어요. …그 두 사람이 입이 무겁길 바랐는데.”
조금은 이기적인 발언이에요.
세계는 재앙을 겪는 중이라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자신은 질이 아니었다면 조용히 지냈을 거라니 말이죠.
그렇지만 반대로, 이는 질이 있어서 탈리안이 변하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부분이에요.
처음에는 호기심에 구해주었던 귀찮은 아이에게 이제는 정이 들고, 자신과 비슷한 모습과 경험을 한 것에 애착이 가기 때문에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거잖아요.
질이 마냥 짐 덩이 취급당해서 탈리안에게 미안한 마음만 갖지 않는 이유가 이 때문이겠죠.
“그런데 질, 왜 소라고둥은 쓰지 않았나요?”
“그, 그건… 어제 언니가 화내셔서….”
소라고둥, 그런 것도 있었죠.
방의 책상에 눈에 잘 띄도록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번도 쓰지 않았기에 있는 줄도 몰랐을 겁니다.
게다가 오늘은 범죄자와 단둘이 있다는 사실에 긴장도 했겠다, 겁도 먹었겠다… 여러모로 주변의 물건이 눈에 잘 안 들어올 상황이긴 했으니까요.
물론? 소라고둥의 존재를 알고 있다고 해도 탈리안이 화냈다는 사실에 연락을 했을지는 모를 일이에요.
“이럴 때 쓰라고 준 소라고둥이잖아요, 무슨 일이 있으면 써야죠.”
“죄송해요….”
“…혼내는 것도 아니고 사과하라고 하는 말도 아니에요, 질.”
“그럼… 언니, 시멜리라는 저 사람은 언제까지 여기에 있는 거예요?”
“몰래 회의장의 내용을 들어봤지만 정해진 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았어요. 제대로 된 처분은 나중에 다시 엿들으러 가야 하겠죠.”
“엿듣다니… 평소에 내가 생각하는 언니의 이미지랑 달라….”
“그래도 질, 당신이 시멜리와 함께 지내는 것이 불편하다면 말해주세요. 시멜리를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없애버릴 수도, 거슬리는 세계를 완전히 부숴버릴 수도 있으니까.”
“안 돼요! 사양할게요!! 사람을 죽이고, 세계를 부숴버린다니 그런 무서운 소리를…!”
탈리안은 왼팔로 오른팔의 소매를 걷어붙이며 힘이 있다고 과시해왔지만, 질은 기겁하며 그러지 말라고 했습니다.
장난삼아 뱉어낸 말이겠지만 탈리안에게는 그럴 힘이 충분하고, 마음만 먹으면 해낼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까요.
둘의 대화는 한동안 이어졌어요.
앞으로는 감성보단 이성에 따르겠다거나, 배고프지 않냐며 알 수 없는 공간에서 쿠키와 차를 꺼내오기도 하며 같이 먹기도 했어요.
질의 평가는 ‘맛있지도 맛없지도 않은 그저 그런 쿠키, 쓰디쓴 차’였지만요.
미궁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자세하게 이야기해보고, 너무 자신의 일만 물어보는 게 아니냐며 탈리안의 일을 물어보기도 했어요.
선생님으로서 무엇을 하는지, 어떤 학생들을 봤는지, 무엇보다 탈리안의 성격에 학생들에게 제대로 잘 가르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마쳐, 마무리에 접어들 때는 이미 자정이 넘어 잠들 시간이 지나있었죠.
“질, 마지막으로 지금의 몸이 불편하진 않은가요? 불편하다면 이전의 몸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하니까요. 비교적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만 선택은 맡기도록 할게요.”
“눈높이가 달라져서 어색하지만 괜찮아요! 언니랑 비슷한 시야를 가져서 좋기도 하고….”
“알겠어요, 이제 그만 자야 하지 않나요? 피곤했을 텐데….”
“약간, 약간 졸려요. 그래도 조금만… 앗.”
“왜인지 모르겠지만 몸이 성장한 뒤로 더 아이 같아졌네요.”
졸려서 꾸벅대면서도 같이 있고 싶어 하는 질을 억지로 눕힌 탈리안이었어요.
질은 제대로 잠들기까지 옆에서 잠들 때까지 옆에 있어 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낸 뒤에야 얌전해졌어요.
그렇다고 잠들지 않겠다며 억지로 일어나려고 하거나 발버둥 친 건 아니지만, 아주 잠깐 동안은 탈리안의 허리를 끌어안고 버티긴 했죠.
아픔을 느낄 정도로 꽈악 끌어안은 것은 아니라 탈리안이 잔소리를 하진 않았으니 상관없는 일이지만요.
이후 질이 잠든 걸 확인한 탈리안은 방에서 조용히 나왔어요.
“선생… 느흡!”
“…쉿.”
그리고 당연히 달려들 줄 알았다는 듯이 마법으로 시멜리의 입을 다물게 했어요.
짜증을 냈던 그저께의 탈리안은 어디로 갔냐는 듯, 대화를 나눈 뒤부터는 한없이 질을 아끼기 시작하네요.
시멜리의 입을 봉인한 뒤에는 일말의 관심조차 주지 않고, 자리를 피해 작은 도서관으로 향했어요.
버리고 간다고 가만있을 시멜리가 아니라 바로 탈리안의 뒤를 따랐지만,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모습이에요.
그리고 도서관의 한쪽 벽면에 위치한 책장 앞에 섰을 때, 탈리안이 시멜리를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봤죠.
“언제까지 따라올 건가요.”
“…! ……!”
“아, 제 질문에는 말해도 돼요.”
잊고 있던 건 아닐 텐데, 일부로겠죠.
철판 100장은 깐듯한 비웃는 얼굴을 보면 확실합니다.
“…하아, 너무하세요! 선생님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렇게 매몰차게 대하시다니!!”
이런 심한 대우에도 시멜리는 한 번도 기가 죽지 않고 오히려 몸을 배배 꼬며 양손을 뺨으로 가져가 쑥스럽다고 표현해왔어요.
이에 두통이라도 찾아온 것처럼 탈리안은 한숨을 쉬며 이마에 손을 댔어요.
“도대체 왜 이렇게 저를 좋아하는 건가요. 저는 귀찮아서 어쩔 줄을 모르겠는데.”
“강한 힘에 끌리는 게 잘못된 건가요? 적어도 제가 지금껏 봐온 마기노들은 그러지 않았는데요. 후후…!”
“이 녀석도 저 녀석도 다 안다는 듯한 말투로, 질리지도 않고…. 그래놓고는 뻔뻔하게 필요 없는 걱정을 하는 것까지 모두 똑같아.”
“…저는 제 어리석은 어머니가 선생님과 같은 존재에게 매료된 이유를 알 것 같은데요? 아닌가요, 군단주 금서의 주…!”
시멜리의 말은 한순간에 터져 나오는 탈리안의 마나에 의해 완성되지 못했어요.
그 마나에 도서관이 진동하고, 소리는 천둥·번개가 울리기라도 한 것처럼 울려퍼졌어요.
마법을 쓴 것도 아니고 그저 마나를 뿜어낸 것뿐인데, 보통의 사람이라면 서 있기도 힘들어 바로 쓰러질 위력이었죠.
이는 시멜리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라, 시멜리 역시 다리를 부들거리면서 벽에 손을 짚어 기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창백해진 얼굴에 웃음기를 잃지 않았죠.
“말하지 않았던가? 다시 한번 더 그 입을 놀리면 좋은 일은 없을 거라고, 네 머리는 붕어만도 못해? 이참에 사람 같지 않은 너를 사람으로 만들어줄까.”
“아핫, 하하핫… 끄으윽!! 무서워라…! 정말 무서워요! 이게 진정한, 진정한! 크흣! 흐흐흐!”
이어지는 탈리안의 매도에도 웃음을 잃지 않자, 가까이 다가가선 시멜리의 머리에서 돋아난 뿔을 잡아 뜯어버렸어요.
우지끈하는 소리와 함께 뿔의 절단면에서는 검붉은 피가 흘러나왔습니다.
신경이 연결되어있기라도 한 듯 고통 섞인 비명을 냈지만, 그럼에도 웃음은 멈추지 않았어요.
“웃지 마.”
“히, 히흣, 흐흐…! 아악!! 아으, 흐…윽!”
경고에도 조금씩 웃으려고 하자마자 이번에는 뒤로 돌아가 날개를 잡아 뜯었어요.
찌직, 찌지직하는 그로테스크한 소리가 나며 바닥을 피로 물들였죠.
손에 들린 날개는 곧바로 재와 같은 먼지가 되어 공중에서 사라져버렸고, 시멜리의 등에 난 상처는 곧바로 회복되어버렸어요.
사람의 범주를 벗어난 회복력에도 탈리안은 놀라지 않고 다음엔 어디를 다치게 할지 고민 중인 눈치였습니다.
“웃지, 마.”
“흐으… 아, 알겠어요. 눈을 보니까 정말 죽이겠네요… 으읏.”
‘알면 처음부터 말을 잘 들었으면 됐잖아.’라며 정면으로 돌아와 시멜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탈리안이에요.
시멜리가 정신 나간 살인마라고는 하지만, 세계 최강의 마녀를 앞에 두고 이렇게까지 말을 듣지 않는 타입일 줄 누가 알았겠어요?
그래도 겁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는지 웃음기가 싹 사라졌네요.
“몸에 새긴 복종의 맹세를 쓰면 편할 텐데라고 생각했지? 너한테 미안하지만 앞으로 내가 널 교육하며 맹세를 쓸 일은 없을 거야. 말을 듣지 않는 들개에겐 매가 약이니까.”
“어쩜, 훈육 방법도 이렇게… 매력적이실까.”
“헛소리하지 마. 너도 마기노와 가깝게 변한만큼 여기가 민감하겠지?”
헛소리를 남발하는 시멜리의 모습에 탈리안은 부러진 뿔을 잡아 어루만졌어요.
지금까지 신경이 이어졌을지도 모를 뿔을 부러뜨리고, 날개의 뼈가 부러질 정도로 쥐어 잡고 뜯어버린 주제에.
그 모든 가학 행위를 눈감아달라는 것처럼 살살 쓰다듬었죠.
그러다 갑자기 손에 마나를 두르고는 뿔의 남은 밑동까지 잘라내 버렸어요.
깔끔하게 잘려 나간 뿔에서는 더 많은 양의 피가 흘러내려 거의 얼굴 전체를 적셔버렸는데 생각보다 시멜리가 고통을 잘 참네요.
“끄흣! 아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적극적이시네요….”
“약간의 선정적인 말도 하지 마, 누구의 앞에서든. 특히 질의 앞에서.”
“질투 나는걸요, 선생님….”
“난 너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 없어. 1층 난로 앞, 작은 깔개가 하나 있을 거야. 앞으론 거기가 네 침대니까 거기서 자도록 해.”
“…네에, 손톱만큼의 애정도 받지 못하는 한심한 제자는 물러가도록 하죠. 하지만 포기하지 않을 거니까요… 선생님.”
시멜리가 절뚝거리며 떠나간 이후 탈리안은 전에 했던 것과 같이 책을 꽂아 비밀의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복잡한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나는 상황에 머리가 아픈지 바로 침대에 누워선 팔을 얼굴에 올려 시야를 가려버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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