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살벌한 입학생 (1)
* * *
마도구로 인해 대강당의 큰 화면에 증표를 얻은 사람의 명단이 차례차례 올라가고 있었어요.
그중에는 라피아와 질의 이름도 있었죠.
이를 보고 탈리안이 멀리서 질에게로 다가왔지만, 탈리안의 입에서 나온 말은 축하의 말이 아닌 당황과 분노가 섞인 말이었어요.
라피아는 낌새를 알아차리곤 말이 나오기 전부터 질의 뒤에 숨어서 탈리안의 분노를 피했죠.
“질?! 이게, 어떻게 된…! 당신!!”
“지르니트! 막아준다며!?”
“어, 언니 일단 진정! 진정하세요!”
필연적으로 일어날 일이 벌어졌어요.
멀리서 탈리안이 증표를 가지고 돌아온 질을 만나러 왔지만, 단번에 질에게 이상이 생겼다는 것을 알고 라피아에게 화를 내는 중이에요.
마나로 알아차린 것인지는 몰라도 성장한 질을 바로 질이라고 알아보았다는 것에는 라피아와 질 둘 다 놀랄 수밖에 없었어요.
이와는 별개로 라피아는 억울하다는 듯이 호소하기 시작했지만….
“이것도 상당히 노력한 결과라고! 미궁에 그런 몬스터가 있다는 말은 듣지도 못했는데!”
“제가 확실히 부탁드렸잖아요!”
“언니 제바알.. 일단 화 좀 가라앉히세요..”
탈리안이 이렇게 화내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라피아의 실력을 믿고 맡겼는데 그 결과가 몸이 급격하게 성장해버린 질이라니 당황스러울 만합니다.
어떤 안 좋은 영향이 있을 줄 알고 바로 데려오지 않고 증표를 얻은 뒤에야 돌아왔냐고 따질 수도 있는 일이란 거에요.
하지만 이런 모습도 평소대로라면 탈리안의 기분에 충실히 따르는 마나가 흘러넘쳐 대강당을 물들였을 테니 많이 참고 있는 거겠죠.
어쩌면 라피아가 질의 친구가 되어 줄 인물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릅니다.
“언니! 저는 오히려 지금도 괜찮아요, 아니 마음에 들어요!”
“…정말 괜찮은 거예요?”
“제가 언제 거짓말 하는 거 본 적 있어요? 옷은 좀 끼지만... 정말 괜찮은걸요.”
옷이 낀다는 것은 몸이 성장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널널했던 교복이 상당히 줄어들어 몸에 딱 맞게 되었고, 치마 역시 많이 줄어들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렇다고 와! 소리가 나올 정도로 글래머스러운 몸으로 변한 건 아니지만요.
그러니 탈리안 천천히 질의 몸을 구석구석 살펴보고 이마를 짚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죠.
“후우…. 따라오세요, 질. 교복 남는 거 있을 테니까 그걸로 갈아입어요.”
“갔다 올게요, 라피아 언니!”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는 라피아를 뒤로하고 탈리안의 뒤를 따라 걷는 질이에요.
키가 커졌으니 이제는 총총거린다고 말하기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네요.
약간의 가벼움이 담겨있어서인지 전체적으로 행동과 몸이 따로 노는 느낌이 있어요.
“질, 미궁에 다녀와 본 기분은 어떤가요.”
“정말, 정말 많은 사람이 있었어요. 사람이 아닌 분도 있었구요. 몬스터도 정말 다양하게 만나봤어요.”
질은 굳이 탈리안의 옆까지 다가와서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어요.
자신이 겪어온 경험을 남에게 이야기를 해주는 것만큼 즐거운 건 또 없거든요.
달라진 질의 키 때문에 어색한 그림이 그려지긴 했어도 말이죠.
“즐거웠나요? 질을 다치게 했던 사람이나 몬스터를 만나보기도 했는데?”
“나쁜 사람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라피아 언니만 해도 절 지켜주려는데 엄청 노력했구요. 그리고... 흑기사랑 조금 더 친해진 느낌도 있어요! 멋진 이름도 생각해놨고요!”
“그런가요…. 교복은 이 방 안에 있으니 사이즈 맞는 거로 입고 나오세요.”
게다가 자신이 성장했다는 사실을 탈리안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있을 테니 기분 좋아 보이는 모습으로 말하는 건 당연한 일일 거예요.
흑기사의 소환 유지와 전투 시에 소비되는 마나가 상당하다는 것도 깨달았으니, 흑기사가 없을 때를 대비해 따로 마법도 연습할 테고요.
무엇보다 제일 큰 성장의 증거로 흑기사와의 사이가 좋아졌다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니까요.
나중에 탈리안에게 보여주겠다며 눈앞에서 흑기사를 소환할지도 모를 일이에요.
“언니! 이거 입는 것 좀 도와주세요!”
바뀐 몸에 적응하지 못해서 그런지, 탈리안에게 도움을 요청하네요.
뭐 그에 군말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 바로 도와주는 탈리안을 보고 있자면 신기할 뿐이에요.
다른 사람에게는 차갑기 그지없으면서 오직 질에게만 이런 태도로 대하니까요.
이 정도로 바라는 대가 없이 행동하는 것은 애정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질, 팔을 올려보세요.”
둘이 붙어있는 모습을 본다면 이제는 생명의 은인보다는 더 가까운 무언가, 라고 해야 어울릴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피가 이어지진 않았더라도 가족이라거나, 자매라거나….
밥도 같이 먹어, 잠도 한 집에서 같이 자, 도서관에서 일도 같이… 아니 탈리안은 쉴 뿐이고 분신들이 일하니까 넘어가죠.
어쨌든 함께하는 것이 이렇게 많다면 가족이라고 칭해도 되는 거 아닐까요?
“그러고 보니 속옷은 어떻게 했나요? 교복만 갈아입은 것 같은데.”
“가슴 쪽은 원래부터 조금 컸었거든요… 불편하긴 하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라서 괜찮아요….”
“…그, 그런가요.”
떨떠름한 반응을 보이며 눈썹을 구기는 탈리안의 행동은 당연한 것이었어요.
애초부터 탈리안의 가슴은 너무 작았으니, 원래부터 조금 컸었다는 질의 말을 들어보면 그럴 수밖에요.
게다가 본인의 눈으로 직접 봐왔던 질의 가슴은 자신의 것보다 컸었으니, 성장하고 나서 조금이나마 더 커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안 그래도 나던 빈부격차 때문에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탈리안이 질투를 한다는 일은 없을 거라구요? 그것도 질에게 가슴 크기로? 차라리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말을 믿겠네요.
마녀로서의 품격이 있는데 그럴 리가요.
심지어 친동생 같은 아이한테?
“키도 저보다 더 커졌네요.”
“그래도 큰 차이는 안 나잖아요?”
“손 한 뼘 정도의 차이라면 유의미한 차이라고 생각해요, 질.”
손 한 뼘이면 충분히 시선에서부터 차이가 나서 변화를 느낄 수 있을 거예요.
항상 내려다보던 탈리안이 이제는 올려다봐야 하니 더 크게 와닿겠죠.
“그런..거에요?”
“물론이죠. 어쨌든 다 됐어요, 혹시라도 속옷이 불편하면 나중에 꼭 말하세요. 몸 어딘가에 문제가 있거나… 아픈 곳이 있어도 말하시고요.”
“걱정 마세요! 정말 건강하니까요!”
“…읏!”
“앗, 숙일까요?”
“돼, 됐어요!”
탈리안은 무심결에 질의 머리를 쓰다듬기 위해서 손을 머리로 향했지만 이내 다시 거둬들였어요.
누군가가 굽히거나 까치발을 들지 않는 이상 자세가 은근히 불편할 거에요.
팔의 길이도 영향을 주겠지만 중요한 건 질의 순진한 배려에 탈리안이 자존심에 상처가 났다는 것이겠죠.
빨리 따라 나오라며 말하고는 등을 돌려서 방을 나서는 것을 본다면 틀림없을 거예요.
“질, 마지막으로… 미궁 돌파한 것 축하해요.”
“고마워요, 언니!”
“아! 전해야 될 말이 더 있었는데…. 미궁의 마지막 테스트는 조금 더 길어질 것 같으니 집에 돌아가 있는 게 좋을 거예요. 안 좋은 사건이 하나 일어나서.”
안 좋은 사건이라는 단어에 반응한 질은 굳이 어떤 내용인지에 대해서 물어보지 않았어요.
미궁에서 벌어질 안 좋은 일이라면 딱 하나 정해진 게 있으니까요.
질은 짧게 대답하며 품속에서 바로 열쇠를 꺼내 들었어요.
“착하네요, 라피아라고 했던가요? 그 뱀파이어랑 같이 가 있으면 일이 끝나고 데리러 갈게요.”
“언니도 조심하세요!”
라피아와는 다르게 엄청나게 큰 각도로 손을 흔들며 탈리안에게 인사하고 있네요.
저렇게 과하게 흔들면 팔이 아플 텐데요.
그런데 한참을 기다리고 있어도 질은 자리에서 떠나지 않고 손을 흔들고 있었어요.
탈리안이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갔는지 확인을 했지만 계속 같은 자리였죠.
“질! 어서 라피아랑 함께 가 있으세요!”
“앗, 네에에!!”
보다 못한 탈리안이 꽤 먼 거리에서 소리치자 그제서야 뒤를 돌아 라피아를 찾으러 가는 질이었어요.
“탈리안 선생님 볼일은 다 끝나셨나요?”
“선생님은 이름이… 크리스티나라고 했던가요? 다른 분들은?”
자신을 부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면, 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의 포니테일을 한 여성이 있었어요.
왜인지 모르게 빛이 가득하면서도 흐린 듯한 눈에 한쪽 눈을 안대로 가린 특이한 사람, 그럼에도 인상 자체는 둥글둥글했어요.
그 덕분인지 탈리안은 평소처럼 차갑게 대하려다가도 그저 사무직에 앉혀진 사람처럼 딱딱하더라도 차갑지는 않게 굴 뿐이었어요.
정말 필요한 대화만 주고받으면서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죠.
“다른 분들은 이미 미궁에 들어가셨고, 나머지 한 분이 저희를 기다리고 계세요.”
“이미 한번 공지를 들었기에 무의미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목표를 발견하면 그 즉시 죽여야 되는 건가요?”
“아니에요, 이사장님께서 리니아 가문의 장녀가 이번 사건의 주범이라고 하셨거든요. 어렵겠지만 생포해야 해요.”
“리니아 가문…. 의외네요.”
“역시 그렇죠? 재앙 이후로 신출내기 모험가와 모험가 길드에 지원을 해주는 가문에서 이런 참사를 일으킬 인물이 나올 거라고는 저도 생각 못 했으니까요.”
“사람 속은 모르는 법이에요. 그런데, 기다린다던 분이 저분인가요? 상당히…”
“근육질에 키도 크고 완전 남자답지 않아요? 거기다 얼굴까지 잘생겨서는…! 유부남인 게 아쉬울 정도예요! 발데르 선생님! 저희 왔어요!”
“…뭐라고요?”
유부남이어서 아쉽다는 말에 놀라 크리스티나를 바라보지만, 정작 발데르와의 대화에 정신이 팔려 이조차 눈치를 채지 못하네요.
오가는 대화를 엿들어보면 방금까지의 추잡한 웃음기와 생각을 갖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정상적인 내용이었어요.
왜 탈리안에게 속내를 비친 건지 모르겠지만요.
“…그래서, 리니스 가의 장녀님께서는 마암석을 쓰고 계시는 것 같다고 합니다.”
“마암석이라면 그거죠? 마정석을 설계부터 다시 짜서 불법 개조한….”
“맞습니다. 어떠한 경로로 얻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으나, 전투나 기습을 한 장소에 남긴 흔적을 본다면 틀림없을 겁니다. 슬슬 미궁으로 들어가도록 하죠.”
“아! 탈리안 선생님, 오전에 그랬던 것처럼 갑자기 사라진다거나 하진 말아주세요?”
발데르와의 대화를 마친 크리스티나가 갑작스러운 이탈은 하지 말아달라는데요.
이건 아마 질이 위험했을 때 구하러 갔던 것을 의미하는 거겠죠.
하지만 뭣 때문에 그랬는지는 말하지 않는 것을 보면 숨기기로 했나 봅니다.
솔직히 알려져서 좋을 것은 없긴 하죠.
교사가 테스트에 개입했다는 것이 알려지게 된다면 큰 이슈가 생겨, 이사장인 크롬웰조차 탈리안을 보호해주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네? 교사가 개입하는 것은 수석과 차석을 미리 정해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요?
그건 저기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하는 크롬웰에게 따지면 좋을 것 같아요.
“이번엔 그럴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자, 하실 말 다 하셨으면 갑니다.”
발데르가 전이 마법을 사용하는 순간, 모두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탈리안이 그의 마법식에 간섭했어요.
약간의 위치를 조정하는 수준이겠지만요.
원래 이들이 가려던 곳은 미궁의 최심부로서, 발데르는 크롬웰로부터 증표를 얻는 곳을 봉쇄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받았어요.
리니아 가문의 장녀를 생포하는 것은 우선순위에서 밀려져 있었죠.
세계 최대의 크기를 자랑하는 마법 학원인 만큼 선생님들의 수는 차고 넘치니까요.
하지만 탈리안과 선생님들은 발데르가 임의로 지정한 장소로 전이되기는커녕, 막다른 길을 뒤로하고 정면에는 복도가 꺾여 빛이 새어 들어오는 골목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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