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33화 (33/189)

〈 33화 〉 급성장 (4)

* * *

“이게! 어딜 도망가려고!”

눈치를 보고 달아나려던 식물계 몬스터는 라피아의 손에 이파리의 끝부분을 잡혀 손에 들려졌어요.

몬스터는 몬스터라지만, 이렇게까지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조금이나마 동정심을 갖지 않을까요.

이파리를 잡힌 채로 바둥바둥하는 게 생긴 것만 귀여웠다면 당장 질이 데려가서 키우고 싶다고 말했을 것 같네요.

“도망 못 가게 하려면 팔다리를 다 잘라놔야 하나….”

라피아가 몬스터를 잡고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하고 있을 때에 질은 흑기사와 실랑이 중이었어요.

뭐 때문이냐면요….

“어디 가는 거예요! 여기 있으라니까요!”

멋대로 자리를 이탈하려는 흑기사 때문이었죠.

모두가 그럴 것이라고 예상은 했겠지만, 흑기사는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타입이었어요.

왜 질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인지는 흑기사만이 알겠지만, 이로써 질이 소환사로서는 갈 길이 멀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알게 되었네요.

특히 옆에서 한심하단 눈초리로 보고 있는 라피아라던가요.

“지르니트, 너 걔 이름은 생각해둔 거라도 있어?”

“이름..이요?”

“소환사가 그렇게 막… 귀한 직업인 것도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천대받는 직업이거든? 소환수가 마음대로 부려먹을 수 있는 병기도 아니고, 비위를 맞춰줘야 하니까.”

“네에...”

“그러니까 네가 이 꼬… 으흠! 흑기사하고 친해지는 것부터가 우선 아닐까? 그러려면 이름부터 지어주는 게 제일 좋을 테고.”

그럴듯한 라피아의 말에 질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어요.

“아니, 지르니트… 굳이 지금 하자는 게 아니라! 일단은 흑기사한테 공격하라고 명령해봐. 나중에 이름을 지어준다는 약속을 하고.”

“앗, 아아! 네!”

그리곤 딴청을 피우고 있는 흑기사의 곁에 가서 팔을 붙잡고는 다시 실랑이를 벌이기 시작했죠.

얼떨결에 보모 역할을 맡게 된 라피아였지만 지금의 이 상황에는 그다지 기분 나빠하는 모습은 아니었어요.

오히려 질이 노력하려는 모습에 작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죠.

꽤 오랜 시간을 살아온 듯한, 세월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는… 물론 그 와중에도 누군가가 접근해오지 않는가 경계를 보는 것도 잊지 않았어요.

뭐어… 흑기사가 등을 돌려버리는 것을 보면 질이 설득하기에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지만요.

“미궁에서 같이 싸워주세요, 부탁할게요! 이번에 미궁의 끝까지 간다면 이름도 멋진 거로 지어줄 테니까요!”

이름을 대가로 미궁에서 대신 싸워달라고 한 질의 부탁을 듣게 된 흑기사는 고개를 돌려 몬스터를 바라봤어요.

“부탁을 들어주는 건가요?!”

이에 질이 들뜬 채로 되물었지만, 소환된 지 얼마 안 된 소환수가 대개 그렇듯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질의 말은 의미가 없었어요.

자신의 의사 표현은 가능하지만… 말을 하는 것은 많은 실전 경험치와 양질의 마나를 받고 진화한 고등 소환수만이 가능한 일이거든요.

의사 표현이 가능한데도 왜 의미가 없냐면, 안 봐도 뻔한 이야기잖아요? 자존심 문제에요.

질을 일 인분이 가능한 소환자로서 인정하기는 싫지만, 이름을 지어준다고 하니까 그러는 거죠.

“아, 근데 너… 소환수에게 이름을 지어준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는 알지?”

“당연하죠! 소환수가 진화하는 데에 필요한 조건을 무시하고 제 마나를 대가로 진화시켜주는 거잖아요?”

“진화한 소환수는 다음에 다시 소환할 때 소모되는 마나가 이전과 비교했을 때, 장난이 아닌 것도 알고 있고?”

“그건 책에 안 써져 있었는데...”

“뭐, 일단 말을 꺼내긴 했으니까 추가 계약은 해야지 별수 있겠어? 옆에서 이 녀석도 들었, 어?”

라피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흑기사는 손에 들린 몬스터를 채가 바닥에 내팽개쳤어요.

‘철퍽!’하는 소리와 함께 몬스터는 기절한 듯 다시 바닥에 힘없이 드러누웠죠.

“갑자기 뺏어가는 건 뭐 하자는 거야?”

당연하게도 라피아의 짜증 섞인 말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흑기사예요.

라피아가 투덜거리든지 말든지 패대기쳐진 몬스터를 멀뚱멀뚱 바라보다가, 움찔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칼을 검집에서 꺼내 들었어요.

기절한 몬스터를 상대로 칼까지 꺼내 들 필요가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확실하게 처리하려면 이 선택이 올바르긴 합니다.

“그런데 신기하단 말이야, 저런 몬스터는 지금껏 본 적이 없었는데….”

“다른 지역에서 사는 몬스터가 아닐까요?”

라피아의 혼잣말에 몬스터 가까이에 다가가며 대답하는 질이에요.

지금은 몬스터도 기절해있고, 옆에 흑기사도 있으니 딱히 제재를 가하는 모습은 없네요.

“그건 아니야. 넌 입이 무거워 보이니까 하는 말인데, 아버지가 나한테만 장난기가 좀 많으셔…. 저번에 말했지? 나한테는 괜찮을 거라면서 가끔 이 미궁 안으로 날려 보내기도 했었거든….”

요컨대 이 미궁에는 밥 먹듯이 와봤으니 몬스터의 종류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다는 거네요.

크롬웰의 약간 지나친 장난은 둘째 치고요.

“그건 좀 심한 거 아니에요..?”

“아니 뭐, 실제로도 괜찮았었으니까…. 어쨌든 이건 됐고! 걔 이제 공격하려나 보다.”

그저 칼을 한번 휘두르거나 내려치면 되는 일일 텐데 흑기사가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린 이유가 있다면, 이런 말도 있지 않나요?

맹수는 토끼를 잡을 때도 전력을 다한다.

흑기사는 정면에 자신의 몸만 한 방패를 전개해 검을 뒤로 뺀 자세를 하고선 검에 마나를 모으고 있었거든요.

주변에서 모여드는 마나는 초록빛과 노란빛을 내다가도, 검에 가까워져 흡수될 때면 탈리안이 발하는 마나의 빛과 같은 색을 띠었어요.

그리고 마나가 충분히 모여, 검이 일렁거리는 것처럼 보일 때 순식간에 검을 위에서 아래로 휘둘렀죠.

흑기사의 이 자그마한 체구에서 그만한 힘이 어떻게 나오는지 궁금해질 정도로 라피아와 질은 입을 다물 수가 없었어요.

휘두른 검에서는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검기가 발해져, 몬스터를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한 것은 물론이고 미궁의 벽을 허물어 그 건너편의 벽에까지 검격의 상흔을 남길 정도였거든요.

탈리안이 계약을 도와주었다고는 하지만 이렇게 강한 흑기사의 공격을 보니 소환수로서의 역할은 충분히 해내겠다고 생각하는 두 사람일 거예요.

탈리안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소환마법을 배우게 했는지 고민할 필요가 없을 거예요.

소환된 직후에 이런 강함을 보여주는 소환수를 만났다면 바로 ‘마녀님 만세!’를 외쳐야 할 수준이라구요.

“와, 와아!! 대단해요!! 이렇게 강하면서..!”

“잠깐, 저 구멍 건너편에 있는 방…. 방금 죽인 몬스터의 둥지인가 본데?”

구멍 사이로 보이는 수많은 몬스터들과 둥지로 보이는 거대한 덩어리를 넝쿨이 감싸고 있는 것 하며, 방 전체가 탁한 초록빛으로 물들어 있는 것까지.

그래봤자 아무것도 못 하는 약해빠진 몬스터의 둥지인데 뭐가 그렇게 큰일이냐~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웬일일까요, 이미 둥지에서는 몇 명의 입학생이 몬스터의 둥지에서 고전하던 중인 것이었어요.

분명 약해빠진 몬스터였을 텐데요.

“이, 이봐! 여기 좀 도와줘!!”

방금의 공격으로 벽을 허물어버린 것이 라피아와 질이었다는 것을 분위기상으로 알아차렸는지, 입학생들은 도움을 요청해왔어요.

분명히 경쟁자인 것을 교복만 봐도 알 텐데 말이에요.

그만큼 저 둥지가 위험하다는 증거일 수도 있고, 라피아와 질이 만난 개체가 유독 약했던 것일 수도 있겠죠.

“두 가지 선택지를 줄게, 지르니트.”

“선택지요?”

“흑기사와 내가 둥지로 가서 사람들을 구해올 테니, 너는 우리의 서포트를 하는 거야. 간단하게 말하면 실전 연습을 명분으로 사람들을 구해오겠다는 게 첫 번째 선택지. 다른 하나는 저 사람들을 못 본 체하고 우리는 증표를 찾아 떠나는 거지, 어때? 시간은 계속 흘러만 가고 저 사람들은 점점 위험해질 테니 빨리 정해야 할 거야.”

건넛방 둥지를 관찰하는 질은 아까와 같은 힘 없고 연약한 몬스터들을 확인했어요.

공격당할 때마다 이상한 가스를 내뿜으며 죽은 뒤에는 부풀고 끝없이 팽창하다 터져버리는 장면.

입학생들은 최대한 가스를 들이마시지 않으려고 했지만, 점점 체력적 한계에 가까워져 거칠어지는 숨에 어쩔 수 없이 가스를 흡입해버렸죠.

그리고 점점 무뎌지는 입학생들의 행동과 거대한 꽃봉오리의 모습을 한 둥지에서 뻗어져 오는 넝쿨들.

넝쿨 하나가 입학생 중 한 명의 발목을 휘감자마자 둥지는 입을 열어 삼킬 준비를 했습니다.

당황해 이리저리 무기를 휘둘러보기도 하고, 마법을 써보기도 하지만 넝쿨은 생각보다 단단해 전혀 풀리지 않았어요.

공중에 사로잡힌 입학생은 둥지의 입 바로 위에 놓였죠.

“도울래요..!”

질은 정말 간발의 차로 결정을 내렸어요.

학원이 미궁에 전이시킬 때에 입학생들을 죽게 놔둘 정도로 안전장치 하나 없이 보내진 않았겠지만요.

질이나 다른 누군가에게 보이는 그 장면은 정말 목숨을 잃기 직전과도 같이 보였는걸요.

위기감 조성에는 이만한 것이 또 없을 거예요.

“뭐, 증표를 찾으러 간다고 해도 지르니트… 널 탓하진 않았겠지만! 지금 이 선택을 후회할 일은 없을 거야! 가자, 흑기사!”

질의 만족스러운 대답을 듣게 된 라피아는 흑기사의 뒷덜미를 붙잡아 둥지 쪽으로 날려 보낸 후, 자신도 같이 뛰어 들어갔어요.

빠른 속도로 던져진 흑기사는 약간 당황한 눈치이면서도 바로 정면을 바라봐 둥지의 입에 잡아먹히려는 입학생을 구해냈죠.

발목의 넝쿨을 잘라, 입학생의 팔을 붙잡고, 멋지게 바닥에 착지.

바람에 휘날리는 검은 망토는 이 장면을 영화나 만화의 한 장면으로 만들어주기에 충분했어요.

“뭐야, 대단한데! 소환수가 저렇게 활약하면 나도 할만큼은 해야지!”

언제나처럼 자해를 해 피를 뽑아낸 뒤 검을 만들어, 입학생들이 있는 곳까지 순식간에 돌파해낸 라피아에요.

그 모습은 마법을 쓰지 않았음에도 인간의 범주를 벗어난 움직임이었죠.

아, 물론? 라피아가 인간은 아니라 하프 뱀파이어이지만 그만큼 보통 뛰어난 게 아니었다는 말이에요.

마지막에는 입학생 3명이 모인 곳의 바로 앞까지 도달했는데, 라피아가 지나온 길에는 족히 6~70의 몬스터가 쓰러져있었어요.

아무리 약한 몬스터라 해도 그 많은 수를 단시간에 처리한 속도만큼은 엄청났죠.

“고, 고마워…. 이름이?”

“그런 건 됐고, 살고 싶으면 피 좀 내놔.”

“뭐, 뭐? 아파, 아, 아아…!”

돌발적인 라피아의 행동에 피를 빨리는 입학생은 피할 생각도 못 하고 옆의 두 명은 구경만 할 수밖에 없었어요.

키 차이가 크게 나는데도 불구하고 상체에 매달려서 ‘쯉, 쯉….’ 거리며 피를 빠는 모습은 충분히 놀랄 장면이니까요.

더 놀라운 건 피를 빨면 빨수록, 라피아의 몸이 성장했다는 거예요.

피를 빨리는 입학생의 피부가 사알짝 창백해질 때쯤에서야 라피아는 그만두고 입학생에게서 떨어졌죠.

완전히 성장해 바뀐 모습으로요.

“…쯧, 맛없기는.”

“미쳤어? 뭐 하는 거야! 우릴 돕는 게 아니라 죽이려고?!”

입안에 남아있는 피를 땅바닥에 뱉어내며 투덜거리는 라피아는 꽤나 큰 키의 성숙한 여성으로 변해 있었어요.

적발의 머리는 조금 더 길어져 키가 자랐음에도 허벅지까지 내려왔고, 가슴도 적당히 나와 이전과는 확실히 커졌고 허리는 얇아져, 골반도 커졌죠.

얼굴은 귀엽다기보다는 아름답다는 말이 어울리게 변했고요.

특히 변한 후로 더 날카롭게 변했으면서도 깊이 있는 눈동자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느낌을 들게 했어요.

의문인 점은 어떻게 라피아의 커진 몸에 맞춰 옷까지 변화했냐는 것이겠지만… 지금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정신 놓지 마라, 큰 거 온다.”

“무시하지 말…! 라고…? 뭐야, 갑자기 웬 진동이….”

라피아의 말에 미궁이 크게 흔들렸어요.

그 사이에 흑기사는 라피아의 곁으로 잡혀갔던 입학생을 들쳐메고 왔죠.

“고생했어, 꼬마기사.”

이번에는 꼬마기사라고 불렸는데도 고개를 끄덕이곤 입학생을 동료들에게 던져버렸어요.

얼떨결에 동료를 건네받은 입학생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어요.

소환수가 잡혀간 동료를 구해줬기에 순식간에 길을 만들고 다가온 소녀도 도와주러 왔나 싶었는데 갑자기 피를 빨고 성장해서는 고압적인 자세로 바뀐 거예요.

누가 이 상황에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있을 수 있을까요.

“보통 둥지는 아니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베는 맛 좀 있겠는걸.”

“이, 이봐… 저걸 이길 수 있겠어?”

“못할 건 뭔데? 보아하니 넌 픽클울프잖아, 그 정도 깡도 없어?”

“시, 시끄러워! 누구나가 아직 모자라니까 이곳에 입학한 거잖아!”

“음…. 틀린 말은 아니네, 그럼 구경만 하고 있던가.”

진동이 끝날 때쯤에는 둥지가 넝쿨을 휘둘러 주변의 지형을 멋대로 파괴해 완전히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뒤였어요.

지금껏 봐온 몬스터의 강화판… 아니, 모체라고 하는 게 맞겠네요.

닫혔던 꽃봉오리는 활짝 열려 그 아래로는 거대한 뿌리에 울끈불끈 해 보이는 팔다리가 달려있어 충분히 위협적으로 보였죠.

힘이나 맷집 면에서 모든 게 뛰어나리라는 게 예상 가능한 부분이에요.

게다가 꽃잎받침에서는 수많은 넝쿨이 접근을 방해하고 있었으니, 이 모체와 싸운다면 고전을 면할 수가 없을 겁니다.

솔직히, 이 전투가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났는지는 중요하지 않았어요.

중요한 것은 질이 서포트를 완벽히 해냈는가…인데, 정작 질이 끼어들 전투가 아니었거든요.

라피아가 너무 잘 싸운 나머지 전투는 10분을 채 넘기지 못했어요.

다 좋게 끝났다는 거예요, 질이 서포트를 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과 몇 개의 사소한 문제만 제외한다면 말이에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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