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화 〉 급성장 (1)
* * *
질은 뒤편에서 들려오는 제르반의 비명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라피아의 손을 붙잡았어요.
“그런데 언니는 어떻게 저를 찾은 거예요?”
“체향으로 찾았어, 난 코가 좋으니까.”
“그거.. 좋게 말해서 체향이지, 결국 땀 냄새라는 거네요...?”
“신경 쓰지 마, 너한테서는 맛있는 냄새가 났거든.”
맛있는 냄새가 났다고는 하지만 질은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곤 고개를 라피아의 반대 방향으로 돌려버렸어요.
그야 칭찬을 들었다 하더라도 어딘가 이상한 칭찬이고, 그 칭찬의 대상이 땀 냄새니까요.
정작 칭찬한 라피아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앞만 보고 걸어가고 있어요.
“언니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응, 물어봐.”
“알렉세이 님은 일부러 마법을 사용할 때 마나를 안 보이게 하더라구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예요?”
부끄러움을 숨기기 위한 것인지 질은 대화 주제를 돌려 제르반의 안 보이는 마나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어요.
아직도 알렉세이 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보면 아마 호칭은 이대로 굳어버린 것 같네요.
다만, 질이 놓친 게 있다면… 라피아는 제르반의 풀네임은 커녕 이름조차 모른다는 거였어요.
“그게 누군데?”
“언니가 팔 부러뜨린 사람이에요..”
“아~ 아…. 그렇구나…?”
“그 사람이 누군지에 대해 관심 없죠, 언니?”
이에 잠깐 멈춰서서 질을 바라보다가 작게 끄덕이는 라피아였죠.
이걸 보니 관심이 없는 상대는 한번 마주쳤더라도 금방 잊어버리는 타입인가 봅니다.
“뭐… 그 녀석 이름은 알고 있더라도 도움이 되진 않을 테니까.”
“언니 너무 태연하게 말하시는 거 아니에요?”
질의 잔소리에도 라피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어요.
잔소리를 듣는 사람이 탈리안이었다면 대꾸라도 했겠지만… 평소와 다른 반응에 질 역시 무안해졌는지 바로 조용해졌죠.
조용해진 질에게 대답을 하지 않은 게 미안해졌는지 라피아가 갑자기 손을 놓고선 머리를 쓰다듬어줬지만, 효과는 미미했어요.
질이 작은 소리로 뭔가 웅얼거리는 게 전부였으니까요.
“어쨌든, 마나를 보이지 않겠다는 건 말이야. 자신이 싸울 상대에게 내가 언제 공격을 준비하고, 언제 공격할지, 어떤 종류의 마법을 사용할지 알려주지 않겠다는 말과 같아. 보통, 정말 보통의 경우에는 공격 준비 시간 동안 마나를 보여주는 건 퍼포먼스용 외에 아무것도 아니거든. 그게 아니라면 마나가 쌓여있다 못해 흘러넘쳐서 그러는 것일 수도 있고, 언뜻 보기엔 공격에 쓰이는 마법으로 보일지 몰라도 마나 배리어인 경우도 있어.”
“보여주기의 용도가 아니면 마나를 보여주는 사람은 뛰어난 실력자라는 거네요?”
“그렇지, 그런데 그런 경우가 흔한 것도 아니고… 있다면 현자라 불리는 아버지 정도의 수준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마나가 흘러넘치는 거야 그냥 마나가 많은 사람이라면 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이중 캐스팅은 자칫 잘못하면 회로가 과부하 되어서 준비 중인 마법도 취소돼버리거든. 나도 약간 애먹는 수준이라고 해야 될걸. 한 손으로는 사자 얼굴을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호랑이를 그린다고 생각하면 편해.”
순식간에 제르반을 제압했던 라피아가 말하기를 보통의 경우 보여주기식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면 상당한 실력자, 그것도 현자라는 칭호와 맞먹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고 합니다.
라피아도 실력자인 건 틀림없는 사실인데 자신도 애를 먹는다고 한 걸 보면 어려운 건 확실한가 봅니다.
그림에 비유한 것만 들어본다고 해도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겠지만 말이에요.
일반인 중에서 그 누가 손쉽게 양손으로 동시에 다른 그림을 그리는 게 가능하겠어요, 일반인이라면 불가능할 게 분명합니다.
“그럼 언니, 마나를 숨기는 건 쉬운 거예요?”
“간단히 설명하자면 체내에서 마나를 모아 식을 만들다가, 지면 아래로 이동시켜서 마법이 발동될 자리, 혹은 대상의 위치까지 안 보이게 이동시킨 뒤 발동시키는 거야.”
“그것도 어려워 보이는데...”
“이중 캐스팅보단 쉬운 일이야. 게다가 마법사를 한다면 기초 중의 기초라고 해도 돼…지. 멈춰봐.”
마지막 말에 멈춰서는 질, 어디선가 봤던 장면 아닌가요?
누구나가 다 예상하고, 질도 지레짐작으로 알고 있듯이 누군가가 근처에 숨어있는 거예요.
“이번에 입학하는 애들은 다 비겁하게 숨어서 기다리고만 있는걸 좋아하나 봐? 그것도 아이들 상대로…!”
“어이쿠! 위험하잖냐!”
라피아는 말을 마치면서 오른쪽 벽을 주먹으로 때렸어요.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벽을 때린 주먹이 아프지, 벽이 아프진 않을 거예요.
하지만 라피아가 누구죠? 하프 뱀파이어, 그것도 상당히 강한 축에 드는 뱀파이어죠.
벽은 순식간에 조각나며 무너져버렸어요.
질은 보지 못했겠지만, 주먹이 벽에 닿기 전에 투명한 무언가가 벽 앞에서 피한 걸 라피아는 확인했어요.
게다가 그 무언가는 자신의 입으로 소리를 내기까지 했으니 쓸데없이 애꿎은 벽을 부순 건 아닐 거에요.
“냄새로 따라가도 되지만 너도 계속해서 마나를 소비하기 싫을 텐데, 그냥 모습을 보이는 게 어때?”
“쪼그만 게 성깔 하난 죽여주는군! 좋다! 보려면 보아라!”
투명한 입학생은 호탕하게 소리를 지르고는 제자리에서 발로 지면을 세게 차, 복도를 크게 울리게 했어요.
그리곤 점점 불투명해지더니 발끝부터 머리까지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했죠.
그렇지만 지금껏 질이 봐왔던 입학생들과는 차이점이 존재했어요.
덩치와 키에서 엄청난 차이가 존재했죠.
미궁의 천장이 그렇게 낮은 편은 아니거든요, 그렇지만 이 입학생의 키는 아슬아슬하게 천장에 닿을 높이의 키였어요.
덩치 역시 복도의 절반을 채울만한 크기였죠.
반드시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이종족이 분명할 거예요.
“와, 내가 넌 안 잊어버리겠는데…. 잊어버릴 수는 있을까 모르겠다. 정체가 뭐야?”
“여신 헤브니아의 축복을 받아 새로운 종으로 태어난 바르바니안 사티로스, 징크스다!”
“징크스…. 어울리는 이름이네, 염소 다리.”
“하핫, 칭찬 고맙군! 경쟁자라서 의미 없는 칭찬이 되어버린 게 안타까워!”
라피아가 말한 것처럼, 징크스는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으면서도 하반신 아래로는 염소의 다리를 붙여놓은 듯한 모양을 하고 있었죠.
발굽부터 새까만 털, 머리에는 염소의 뿔까지 달고 있었으니 이종족이 확실해졌네요.
게다가 꼬리로 뱀의 몸과 머리를 달고 있었으니, 그 꼬리만 해도 질을 단번에 집어삼킬 만한 크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에 우락부락한 근육에 미형이라고 부를 수 없는 얼굴까지 더해지니 그가 풍기는 위압감은 장난이 아니었어요.
종합해보자면 이종족이라기보다는 지성을 가진 키메라에 더 가깝겠네요.
“그래서, 너도 우리를 방해하려고 숨어있던 거겠지?”
체격의 차이, 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나는 둘인데도 라피아는 눈을 치켜뜨며 물어봤어요.
얼굴을 올려다보느라 목이 상당히 위를 향했지만, 그에 상관 않는 듯했죠.
“아니라고 하면 믿어줄 건가? 나는 이래 봬도 평화주의자라서 말이야.”
“이것저것 섞인 녀석치고는 머리가 좋네, 밖에서 만났다면 친구 했을지도 몰라.”
“나도 그렇게 생각 중이었는데 말이야! 갈수록 호감이군, 작은 친구.”
“호감 같은 소리 하네, 제일 듣기 싫은 말을…. 같잖은 소리 그만하고 얼른 덤벼!”
“그 말에 따르도록 하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라피아와 징크스는 서로 맞부딪혔는데, 그 여파가 미궁을 뒤흔들 정도였어요.
질은 진작에 라피아의 수신호를 보고서 저 멀리 제르반의 때와 같이 기둥 뒤에 숨어있었어요.
그런 질에게 단순히 맞부딪힌 것으로 생겨난 충격파가 전해질 수준이었다면 믿을 수 있겠나요?
심지어 둘이 맞부딪히는 장면은 마치 다윗과 골리앗이라고 말해도 될 그림이었어요.
“힘도 좋군!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에게 대적하기엔 무리라고!”
“끄윽?!”
질이 사람의 몸에서 ‘으드득, 우지끈’하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은 건 이번이 처음일 거예요.
징크스의 주먹이 정통으로 라피아의 옆구리를 가격했으니 그런 소리가 나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순발력을 발휘해서 라피아 역시 제대로 맞는걸 피하고자 두 팔로 옆구리를 방어했지만… 효과는 없었다고 봐도 될 거예요.
오히려 방어에 쓰인 팔이 아작나는 결과만이 있었죠.
그리고는 말도 안 되는 속도로 공중에서 미궁의 벽에 처박혔을 뿐이었어요.
제르반과 알마의 눈에 보이지도 않을 순발력과 속도를 자랑하던 라피아였지만 갑자기 파고든 주먹에는 반응하지 못했나 봅니다.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징크스가 라피아보다 더 강한 존재라는 말이 되겠네요.
“아… 흑, 케흑!”
“미안하게 됐어, 작은 친구. 첫눈에 보기로 한 실력 할 것 같아서 한 방에 끝내야겠다고 생각했거든! 나머지는 저 꼬마 친구뿐인데… 죽이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경쟁자는 하나라도 더 줄인다. 어쩔 수 없지 않겠어.”
징크스는 그대로 라피아에게서 등을 돌려 질에게로 향했어요.
당연히 겁에 떨며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는 질은 이번엔 도망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다가오는 징크스를 보고만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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