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21화 (21/189)

〈 21화 〉 마나의 각인 (6)

* * *

각인을 새기는 일은 그다지 오래 걸리지 않았어요.

새겨주는 사람부터가 탈리안이라는 이 세계 최고의 마녀이니 오래 걸린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일 거예요.

그 과정에서 무언가 사고가 일어났거나,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면 이처럼 빨리 끝나는 게 정상이죠.

잠잠해졌던 마나의 맥도 다시 활기를 찾아 금방 폭풍이라도 만들어 낼 듯이 빠르게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탈리안이 웃음을 참지 못했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모든 게 순탄하게 끝났다고 말할 수 있었어요.

그 와중에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각인을 완전하게 새긴 탈리안이었죠.

각인도 활짝 펼쳐진 꽃의 모양을 해 손등에 이쁘게 자리 잡고 있었어요.

이는 질이 각인을 새긴 후에도 건강에 별 탈 없었다는 말도 됩니다.

한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라면 있었죠.

"질, 다 끝났으니 알아둬야 할 것을 말해주자면… 마법사는 각인의 영향으로 몸의 대사가 빨라져요."

"그런 거예요?"

"물론 그 덕에 주기가 조금 빨라지게 된다는 게 문제에요. 남자라면 별일 없겠지만… 여자는 아니거든요."

"주기?"

"그러니까… 아직 하고 있는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생리를 말하는 거예요."

그 말에 질은 뭔가 알았다는 듯이 '아.'라는 짧은소리를 냈어요.

질이 아직 10살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하지 않을 나이인 것이 분명하겠지만, 혹시 모릅니다.

이른 나이에 벌써 시작했을지 누가 알겠어요.

"이세계에서 넘어왔다고는 해도, 일단은 저도 사람이라서 각인의 영향을 받고 있거든요."

"저도 책에서 봤어요, 곧 하게 된다고… 방법은 없는 거예요?"

도대체 질의 마을에는 무슨 책이 얼마나 있던 걸까요.

모르는 게 거의 없다시피하고, 지식의 출처는 거의 다 책이라고 하는 것을 보면 더욱더 그렇습니다.

마을이 그렇게 큰 편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에요.

그 작은 마을에서 별 시답잖은 정보부터 시작해 알찬 정보까지 전부 책으로 배울 수 있다는 것은 꽤 신기한 일이에요.

그렇다고 집 몇 채가 전부인 정말 산골 마을인 건 아니지만 말이에요.

"없지는 않아요. 평소에 각인을 비활성화해두는 거예요.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모든 정리를 마치고 방을 나서려고 손을 내미는 탈리안이지만, 질은 그 손을 잡지 않았어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손을 뒤로 해 머뭇거렸죠.

"질?"

"아니 그게.. 언니, 간소화된 식이라고 하셨잖아요.. 전혀 아닌 것 같은데..."

"…네?"

"각인에 새겨진 식이 하나도 간단해 보이지가 않아요..."

사소한 문제라면 탈리안이 물려준 간소화 된 식이 질에게는 전혀 쉬워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었어요.

하지만 각인을 새기는 그 과정에서 탈리안이 말했듯이, 모든 것을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는 겁니다.

질이 재능이 있고, 책을 많이 읽어왔다지만 마법에 대해 독학을 시작한 기간은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시간이에요.

발끝만 살짝 담갔다가 뺐다고 해야 할까요.

물론 질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그 짧은 시간 동안이라고 해도 온 힘과 노력을 다해 공부한 것이었겠죠.

그럼에도, 그럼에도 마법사라는 존재는 그렇게 쉽게 다가갈 존재는 아니라는 겁니다.

탈리안이 당황하는 것도 질에게 너무 수준 높은 식을 물려준 게 아닐까 하며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에요.

"질, 마법사의 각인이라는 것은 그 마법사의 모든 것이 담긴 것을 압축해놓은 것이라고 봐도 좋아요. 그걸 한눈에 알아보는 건 재능을 넘어선 영역의 것이에요. 제가 뭘 말하려는지 알겠나요?"

마녀로서 탈리안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여 지금의 힘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겁니다.

탈리안의 나이는 최소 60세 이상, 알 수 없는 무언가의 힘으로 젊은 외형을 유지하는 '마녀'예요.

그런 탈리안의 식을 물려받아 놓고 쉽지 않은 식이라며, 너무 어렵다며 불평하는 것은 혼날 만했어요.

잔소리를 들어도 불평 한마디 못할 행동이었다는 거죠.

"...네, 이해했어요."

혼나는 모양이 되기는 했지만, 탈리안은 화를 내고 있지는 않았어요.

"그렇게 풀 죽지 마세요, 기분 나빠서 한 소리는 아니에요. 오늘은 가서 쉬도록 해요. 몸에 각인을 잘 받아들이는지 상태도 지켜봐야 하니까요."

"오늘도 쉬는 거예요...?"

"네, 대신 그리 머지않은 미래에 질이 좋아할 만한 일을 준비해 둘게요."

"좋아할 만한 일... 알았어요."

무슨 일을 준비해올지 기대감에 부풀며, 그제야 탈리안이 내민 손을 잡고 방을 빠져나가는 질이었어요.

"그리고 질, 오늘은 제가 조금 바빠서… 나가서 해야 할 일이 있어요. 대신 혼자 있으면 불안할 테니 실리아를 붙여둘게요."

"멀리 가는 거예요?"

"먼 곳에 나가는 일이기는 해요. 하지만 알잖아요? 저에게는 어디로든 통하는 문을 만들 능력이 있다는 것을요."

"저녁 전에는 돌아오실 거죠? 같이 저녁 먹을 거죠?"

"당연하죠. 꼭 제가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물어보네요."

정말 탈리안의 말대로예요.

처음에 경계하며 탈리안의 집에 왔을 때엔 우물쭈물했었는데, 이제는 언제 돌아오냐며 같이 밥을 먹자고 하는 모습이 꽤 안정된 느낌이에요.

탈리안은 적당히 안심시키며 질을 방의 침대에 눕히고서, 도서관과 문을 연결해 열어젖혔어요.

"실리아가 왔어요. 탈리안, 질!"

"…실리아, 조용히. 이미 알고 있겠지만 질이 각인을 받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안정이 필요해요."

손을 흔들며 요란하게 등장하는 실리아에요.

언젠가 탈리안에게도 이런 모습이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의외이지만요.

그렇다고 저번에 잠꼬대를 했던 때처럼 잔소리는 듣지 않았네요.

분명히 부끄러워할 것이라 질도 예상했을 텐데 말이에요.

"알았어요, 오늘도 찾으러 나가는 건가요?"

"다시 열심히 찾아야죠."

"그럴 거라면 실리아와 밀리아, 넬리아에게도 찾아보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이건 제가 해야 되는 일이니까… 어쨌든 이만 가볼게요. 잘 쉬고 있어요, 질."

침대에 누워 이불에 파묻힌 채로 자신을 바라보는 질에게 인사를 한 뒤, 다시 다른 공간으로 문을 연결했어요.

"무사히 다녀오세요,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 위험한 일도 아닌걸요."

그리곤 질의 방에서 사라진 탈리안이었어요.

방에는 이전처럼 실리아와 질만이 남았죠.

갑자기 조용해진 방 안에서 둘만 남았다 보니까 항상 활기찬 실리아도 분위기에 휩쓸려버려 조용해졌어요.

"어, 음? 질?"

"네?"

"각인은 잘 새겨졌나요?"

그래서 고른 말이 각인에 대한 뻔한 이야기였죠.

"아, 네에.. 여기 오른쪽 손등에..."

"와아, 꽃이네요? 그것도 샛노란 색의 활짝 피운 아름다운 꽃이에요."

"궁금해서 그런데 실리아 언니는 이 꽃이 무슨 꽃인지 알아요?"

"네? 아… 미안하지만, 실리아도 꽃에 대해서는 잘 몰라요."

고민하는 질에게 답을 돌려주지 못한 실리아는 답답했는지 팔짱을 끼고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그렇지만 고민한다고 모르는 정보가 툭하고 튀어나올 리가 없죠.

"언니, 꽃에 대한 건 나중에 제가 찾아볼게요. 근데 실리아 언니가 없어도 도서관은 괜찮은 거예요?"

"당연하죠, 실리아도 다른 분신들도 탈리안의 일부인걸요!"

질은 실리아가 혼자 고민하는 것보다는 자신과 대화를 해주길 바랐나 봅니다.

탈리안이 집을 비우거나, 질의 옆에 없을 때.

그럴 때는 대개 이런 상황이 반복되었어요.

실리아나 다른 분신들이 찾아와서는 질과 어울려주는 일상이 있었죠.

이 지루한 일상 속에서 질이 바라는 변화가 있었다면 자신이 독학 중인 마법에 대한 성과일 겁니다.

마나를 느끼는 것도, 보는 것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거나 빌리는 것도, 전부 이뤄냈어요.

다음으로 할 일이라면 작은 마법이라도 성공해보는 것일 겁니다.

“뭐가 문제라고 생각해요, 언니?”

“실리아가 보기에는 잘 모르겠어요. 탈리안도 말했듯이 질의 재능은 충분해 보이거든요.”

“그렇다면 왜...”

“어떤 마법을 써보려는 거에요?”

“책에서는 물을 자유자재로 움직여 보는 게 제일 쉽다고 해서.. 물컵을 가져다 놓고 하는데 한 번도 성공 못 했어요...”

혼자 공부하는 것은 한계를 느꼈는지 도서관에서 실리아와 함께 공부하는 모습이에요.

실리아가 질의 옆에 붙어있으면 도서관의 일이 지체 될 텐데, 다른 분신들의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겠네요.

그렇지만 다른 분신들도 질의 부탁이라면 거절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본체인 탈리안부터가 그러고 있는데 분신이라고 오죽하겠어요.

“혹시, 질. 마나를 모아 여러 형태로 만들어 보는 연습도 해봤나요?”

“네? 안 해봤을 거예요. 책에서는 안 나와서...”

“으음~ 질! 책에 의지하는 건 좋지만 책이 들려주는 말에만 의지하는 건 좋지 않아요. 실리아가 먼저 보여줄게요, 마나를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리고는 약간은 과장된 몸짓으로, 누가 봐도 질을 웃기려는 의도가 다분한 자세를 취하며 마나를 모으기 시작한 실리아였어요.

탈리안이 봤으면 한 소리 들었을 만한 행동이었지만 최근 들어서는 실리아가 어떤 행동을 해도 간섭해오지 않았어요.

그렇기 때문인지 질은 다른 분신들보다 실리아와 더 가깝게 지내는 게 가능해졌죠.

오히려 탈리안이 지금의 이 상황을 만들어냈다고도 할 수 있을 거예요.

실리아를 제외한 다른 분신들이 자신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은 아니냐며 걱정했겠지만, 그 전에 탈리안이 적당히 간섭해오며 관계를 조율해왔거든요.

“자, 봐요. 제일 쉬운 동그란 모양은 그저 마나를 끌어모으기만 해도 가능한 일이에요. 따라 해볼래요?”

“으응... 이, 이렇게요?”

실리아가 마나를 끌어모아 얼굴만 한 구체를 만들어내자, 질 역시 그것을 따라 해 자신의 손만 한 마나의 구체를 만들어냈어요.

양은 실리아보다 현격히 적지만, 모양만큼은 완벽히 실리아를 따라 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일 쉬운 것이라고 했어도, 모난 곳 하나 없이 정말 동그랗게 만들었으니까요.

“잘했어요, 마나를 끌어모으는 연습은 조금 더 했으면 좋겠네요! 다음으로는 약간의 각을 만들어서 별을 만들 거에요. 하지만 조금 어려울 테니 실리아가 조금은 도와줄게요. 일단 이것도 받아요.”

실리아는 자신이 끌어모았던 마나를 옆에 있던 작은 구체에 옮겨서는 서로 합쳐, 제어를 질에게 완전히 맡겨버렸어요.

그 뒤 질의 뒤로 와서 양팔을 손으로 살며시 잡았죠.

“질은 그저 별을 만들겠다는 이미지를 머릿속으로 그려내기만 하면 돼요, 그리고… 제가 모양을 잡아낼 테니 그 느낌을 익히는 거예요.”

“네에.. 해볼게요.”

“자, 집중!”

서서히 마나가 일렁이기 시작하더니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고무공처럼 부들거리기 시작했어요.

놀란 질이 제어에 신경 쓰지 못하고 실리아를 돌아보지만 앞을 보고 집중하라는 말에 다시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죠.

침착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질의 손 위에는 어느샌가 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커다란 마나의 구체가 떠 있었어요.

그제야 제대로 집중하고 감각을 익히려는 질이었어요.

시간이 조금씩 흘러갈 때마다 구체는 서서히 모양이 변해 선이 생기고, 각이 나오고 들어갔어요.

“질, 지금의 느낌을 잘 기억해요.”

거의 완전하게 별이 다 되어갈 때쯤에 질은 마법에 홀린 듯 마나를 쳐다보고 있었어요.

감탄과 놀라움, 경이로움… 그 모든 것이 담긴 표정을 하고 있었다고 해도 될 거예요.

본인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겠지만, 그 얼굴은 흡사 질이 구해졌을 때와 비슷한 얼굴이었어요.

“자, 별이 완성됐네요. 어때요? 할 수 있을 것 같나요?”

“...해볼게요, 어느 정도 알았으니까 할 수 있을 거예요.”

“실리아가 지켜보고 있을 테니 열심히 해봐요!”

보통 이런 말을 듣게 된다면 부담감이 늘어나기만 하는데요.

그나마 질이 그런 경우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겠네요.

방금과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마나의 구체가 모습을 바꾸는가 싶더니 실리아가 손을 잡아주었을 때와는 다르게, 다시 조용히 구체의 모양으로 돌아갔어요.

“어, 어? 왜 이러는 거예요...?”

“괜찮아요, 미세하게 마나의 흐름을 조절하는 데 익숙하지 않아서 그런 거니까… 다시 천천히 해보겠어요?”

“네에...”

다시 시도해보라는 실리아의 말에 성공할 때까지 몇 번을 실패해도 계속 도전했어요.

점심시간에 밥도 먹지 않으며, 자리에서 한 번도 움직이지 않고, 도서관이 폐관할 시간이 되어도 말이에요.

이미 문을 닫고 모든 손님이 빠져나갔지만, 그래도 질은 혼자서 계속해서 마나로 별을 만들 때까지 도전했죠.

실리아는 질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게 밖으로 나가선 다른 분신들이나 탈리안에게 사정을 설명했어요.

너무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니까 방해하기 미안했던 거겠죠.

“돼, 됐다! 언니! 됐어요!!”

그 배려가 결실을 보는 것도 확실하네요.

문을 박차고 나오자마자 탈리안과 분신 5명이 질을 맞아주었어요.

아무리 질이라도 똑같은 모습을 한 사람이 6명이나 되는 걸 보니 긴장되고, 들떴었던 게 부끄러워졌나 봅니다.

똑같은 표정과 시선으로 한 번에 바라보는 그 행동은 마법의 실패와는 다른 수준의 수치심을 주기 충분했을 거예요.

“앗, 아... 그, 어... 그게..”

앞으로 내맨 손바닥 위의 별을 보여주려 했던 질이었지만… 6명의 시선 앞에서 손을 거두어 뒤로 숨겨버렸어요.

이에 탈리안이 적당히 질의 상황을 눈치채고 분신들을 전부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게 했죠.

“뒤에 숨기지 않아도 알 수 있어요. 꽤 예쁜 모양이네요, 질.”

“...정말요?”

“네, 각인을 새겨준 의미가 있었네요.”

기대감 반, 기쁨 반으로 대답하는 질은 아직도 칭찬을 듣게 된 게 와닿지 않는 모양인가 봅니다.

“그리고 질이 좋아할 만한 일을 준비해 둔다고 했었죠?”

“네? 아... 네! 있었어요!”

“질을 위해서 아스티엘 마법 학원에 입학서를 넣어놨어요.”

“...네?”

선물을 받기 전의 아이처럼 들떠있던 질은 한순간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어요.

무슨 좋은 선물을 받을까 고민하며 얼굴에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는데 말이에요.

갑자기 마법 학원에 입학서를 넣었다니,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나와 놀랐을 겁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저녁을 먹으면서 하기로 하죠, 질.”

“어, 언니 잠시만요...!”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