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20화 (20/189)

〈 20화 〉 마나의 각인 (5)

* * *

질의 도서관 탈주 소동이 있었던 날로부터 며칠이 지났습니다.

그 소동으로부터 질과 탈리안의 사이가 어색해진다거나 멀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거리를 벌렸어도 질이 했을 텐데 오히려 다가오는 모습을 보였었거든요.

그렇게 무서워했는데도 말이에요.

하지만 그 방향성이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올바르지 않은 길로 나아간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요, 오히려 탈리안은 좋아했거든요.

사이가 좋아졌다고도 말할 수 있게 된 이후 질은 눈에 띄는 성과를 거두었어요.

재능이 있었다고 말했던 탈리안의 눈은 잘못된 게 아니었습니다.

몸 안으로 마나를 거둬들이는 것은 물론, 자신의 것으로 다시 만들거나, 특정 포인트에 마나를 집중시키는 것도 가능해졌으니까요.

이게 단순히 며칠 만에 독학으로 습득한 결과물이라곤 생각하지 못할 거에요.

이 정도의 성과를 얻어낸 주체가 10살이라는 여자아이, 질이니까요.

심지어 탈리안으로부터 마나의 맥 중심에 들어가도 된다는 허락까지 받았으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슬슬 준비가 다 된 것 같네요, 질."

"어떤 준비요?"

"마나의 각인을 새기는 것 말이에요."

며칠 전에 했던 약속을 잊었던 것인지, 질은 마나의 각인이라는 말을 듣고서도 바로 반응하지 못하고 몇 초간 탈리안을 바라보기만 했어요.

"앗, 아아! 해줄 거예요?! 해도 되는 거예요?!"

"이전에 말했잖아요? 저는 질이 복수하려는 것에 대해서 반대할 생각도, 권리도 없어요. …시작부터가 위험한 일이라 걱정이야 하겠지만요."

"할래요! 해주세요! 지금 당장 하고 싶어요!"

힘껏 걱정해주는 탈리안에 비해서 각인을 새겨주겠다는 말에 들떠버렸네요.

질이 저렇게 기뻐하니 걱정해주는 의미가 없다며 잔소리를 하기에도 무안할 거예요.

"그럼 일단 도서관은 분신들에게 맡기고, 집에 가도록 해요. 지하에서 해야 되는 일이니까요."

"네!"

평소라면 질이 독학하고 마나와 가까이 지내기 위해서 지하에 박혀있었을 시간이었어요.

오늘은 꽤 많은 걸 이뤄내기도 했고 일도 더 배울 겸 도서관에 나와 있던 거였죠.

그래봤자 점심시간 이전에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지만요.

다만 저번에 이미 탈리안이 지하에서 어디로든 통하는 마법의 문을 연결해두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굳이 집의 현관으로 갈 필요가 없었어요.

"마지막으로 물어볼게요, 질. 정말 괜찮겠어요? 많이 아플 거예요. 비명도 못 지를 정도로 아플 거예요."

"저는 괜찮아요, 언니."

마지막 걱정이라는 말에도 단호하게 괜찮다며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탈리안을 바라보는 질이에요.

역시, 어중간한 각오를 하고 온 것은 아닌 것 같네요.

항상 그렇지만 10살짜리 어린 아이치고는 상당한 용기와 강단을 가진 것 같아요.

"각인을 새기고 난 뒤에도 문제에요. 갑자기 순환이 빨라진 마나에 회로나 몸이 적응하지 못하고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탈리안은 좀처럼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는 게 불가능했나 봅니다.

뭐, 그런다고 포기할 질이 아니라는 것을 모두가 알겠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겠죠.

"저 정말 괜찮아요."

"하아… 정말 질에게는 이길 수가 없네요."

괜찮다는 말에 그제야 포기하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탈리안이에요.

"…알았어요. 그렇게까지 새기고 싶다면 적어도 각인을 새길 동안은 통각을 마비시켜 둘게요."

통각을 마비시킨다는 말이 나온 것을 보면 지금껏 아프다고 했던 건, 일부러 질이 각인을 새긴다는 생각을 포기하게 하려고 한 말이었을까요?

"어.. 그럼 지금까지 괜히 겁준 거예요?"

"그럴 리가요, 통각을 차단하는 마법을 아무나 할 수 있을 것 같나요? 고통스러운 과정이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은 사실이에요."

"앗, 아.. 네.."

"침대는 미리 준비해뒀으니 가서 누우세요."

탈리안이 가리킨 곳은 마나의 맥이 한곳에 모이는 방의 중심이었어요.

그곳에는 적당히 푹신해 보이는 침대가 놓여 있고, 침대 아래에 마법진이 음각으로 파여져 있었어요.

그 모습이 신기했는지 질은 한 번에 눕지 않고 몇 번을 주변을 돌아다녔어요.

"어제만 해도 이런 건 없었는데..."

"저한텐 가벼운 일이니까요."

"우와..."

"…질?"

탈리안이 질을 부르는 목소리에는 조금 언짢은 듯한 기분이 섞여 있었어요.

그야 질이 탈리안의 말에 '굉장한 자신감이네.'라는 듯이 반응했거든요.

그런데 탈리안은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요?

자기 편할 대로 어디로든 통하는 마법의 문을 만들 수 있고, 사람 하나 찾겠다고 허공에 수도를 뒤덮는 마법진을 전개하며, 황제의 기사단에 속해있는 부기사단장과 맞먹을 정도의 힘을 가졌으니까요.

그러니 질이 저런 반응을 보였을 때 기분 나빠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합니다.

“앗... 와, 와아! 얼른 각인을 새기고 싶어요, 언니!”

탈리안의 낮게 깔린 목소리에 금방 자신의 실수를 눈치채고 말을 돌려보지만 이미 늦었던 것 같습니다.

“어설픈 국어책 읽기는 그만두고 어서 누우세요, 질. 약간은 아프게 해도 될 것 같아요.”

“죄, 죄송해요, 언니! 말실수였어요..! 진짜루요! 이렇게 빌게요!”

“질? 누워요.”

“와, 와아아~ 언니는 웃으니까 더 이쁜 것 같아요오...!”

질의 아부가 먹혀들었던 걸까요?

탈리안은 한동안 말없이 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질을 바라봤어요.

어쩌면 낯선 칭찬에 부끄러워졌을 수도 있었겠네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어설픈 칭찬이라지만 그렇다고 또 아예 진심이 담기지 않은 느낌은 아니었거든요.

“안 아프게 해줄 테니 누워요, 질. 얼른 끝내도록 하죠.”

“네!”

어쨌든 위기를 피하긴 했네요, 다행이에요.

“위를 바라보고 편한 자세로 누우면 돼요. 통각을 마비시킨다고는 했지만, 따끔한 정도의 수준은 느껴지게 할 거예요. 그래야 이상이 생기면 알아차리고 대처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이상한 느낌이 들면 말해주세요. 예를 들면 신체 중 어느 한 부위가 따뜻해져 온다거나… 그런 것들을요.”

침대 위로 올라간 질은 짧게 대답하며 정말 말 그대로 잘 때와 같이 편한 자세로 누웠어요.

이불도 준비되어 있어 목까지 끌어당겼는데도 탈리안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저 침대 위에 눕기만 하면 되는 건가 봅니다.

하긴, 준비한 것도 탈리안인데 이불을 덮는다고 뭐라 하는 것도 이상하겠네요.

“이제 시작할 건데, 서로 긴 시간 심심할 테니 각인에 대해 할 말이 있어서 들어주었으면 해요. 대답해도 상관없으니 말동무 좀 해주세요, 질.”

탈리안은 질이 준비를 마치자마자 시작한다고 말했어요.

각인을 새기는 것은 집중을 요하는 고도의 기술인 것으로 알고 있을 텐데, 질이 불안해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질이 질문을 하기도 전에 침대 주변에 그려진 마법진은 이미 빛나기 시작했어요.

그리곤 탈리안도 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했죠.

마법진은 빛나기 시작했는데, 탈리안은 별다른 제스처도 없이 의자를 가져와 질의 옆에 앉아버렸어요.

“일전에… 아비가 찾아왔던 건 기억하죠? 그녀가 찾아와서 하는 말이 저보고 마법사를 양성하는 일에 힘쓰라 하더라구요.”

“저, 언니 각인을 새기는 건....”

“괜찮아요, 제대로 실수 하나 없이 하고 있으니까요. …하여튼 저는 그 제안에 반대했어요, 왜인지 알 것 같나요?”

역시 질은 불안함에 떨고 있었지만, 자신은 실수 없이 해내고 있다며 말하고 있습니다.

딱히 질에게서 이상한 징조가 보이는 것도 아니니 아예 틀린 말은 아닙니다만….

조금 더 질이 안전하다는 느낌을 받게 해줄 수는 있었을 텐데요.

신기한 건 질이 탈리안의 말을 듣고 나서는 바로 안심했다는 듯이 고개를 위로 향해 천장으로 시선을 옮겼다는 겁니다.

이를 보면 한순간의 불안함이었을 뿐, 둘의 신뢰 관계는 충분해 보이기도 해요.

“각인을 새기는 건 위험하다면서요, 그래서예요?”

“그건 당연한 거예요, 각인은 말이죠. 각인을 새기는 사람이 각인을 새겨주는 사람의 영향을 받아요.”

“영향?”

“예를 들면 지금 제가 당신에게 각인을 새겨준다면, 질에게 제 마나가 일부 흡수되어 둘의 마나가 공명하기도 해요. 서로의 마나 궁합이 맞지 않는다면…. 이 과정에서 위험해지기도 하고요. 그래서 거절했던 거에요,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제 일부를 공유하는 거니까요.”

“언니의 마나가 저한테...”

탈리안의 마나를 무서워하던 질에게 있어서는 안 좋은 소식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그 무서운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의 모습을 본다면 또 모를 일이니까요.

말끝을 흐리면서도 크게 당황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극복해낸 걸 수도 있습니다.

그게 아니라도 그만큼 유대관계가 있어야만 각인을 새겨준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으니까, 무서운 일인 것만은 아닐 겁니다.

각인을 새기는 것을 공적인 일로만 바라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탈리안은 아닐 거에요.

“각인을 새기는 것도 마나 회로를 건드는 것의 일종이니까요. 마나의 회로에 자신이 즐겨 쓰는 마법의 식을 새겨 넣는 것이 마나의 각인이라고 했죠. 하지만 마법 한번 못 써본 신인 마법사들이 식을 어떻게 알겠어요. 전부 위에서부터 물려져 내려온 거예요.”

“그럼 지금 언니가 쓰는 식을 저에게 물려주는 거예요?”

“전에도 말했지만, 모든 것을 넘겨주는 게 아닌 간소화 된 식을 주는 거예요. 물론 그나마도 처음 주어지는 정보를 다 받아들이지는 못하겠지만, 처음부터 다 잘할 수는 없는 게 정상인걸요. 당연히 알고 있는 지식이라도 식을 사용해내지 못할 거에요.”

두 명이 대화를 이어가던 사이, 방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마나의 맥은 어느 순간 잠잠해져 선선한 산들바람처럼 바뀌어 있었어요.

밀폐된 방인 이곳에서 산들바람이라니 상당히 모순적이긴 하지만, 마나가 가져다주는 기적은 일반적인 상식을 초월했으니까요.

보통 마법은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게다가 여기에 더해 마법진의 틈에서 형형색색의 마나가 새어 나와 방을 가득 메웠습니다.

자연의 마나가 흘러넘치는 이곳에서는 탈리안의 방대한 마나가 흘러나오고 있음에도 분위기가 어두워지지 않았어요.

“저, 저도 금방 언니처럼 강해질 거에요!”

“이런 말을 하면 기분 나쁠지도 모르겠지만,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부디 그런 날이 찾아오기를 바랄게요.”

“아...”

탈리안의 말에 질은 깊은 고민에 빠진 듯했습니다.

고민하다가도 몸을 약간 배배 꼬기도 하고, 뒤척이기도 했어요.

무슨 이상이 있는지 탈리안이 물어보기도 했지만 따갑거나 따뜻해지지는 않았다고 답했죠.

그저 간질거리기만 한다고 대답하는 것에 탈리안은 그 정도는 괜찮다며 말했어요.

“아, 미리 말해두는 걸 잊었는데… 각인의 모양이나 위치는 임의로 지정할 수 없어요. 신체 중에서 마나의 순환이 가장 잘 이루어지는 곳에 각자 고유 특성을 가지고 새겨지기 때문에 그래요.”

“언니가 물려주는 거라면서요, 그럼 모양은 비슷한 거 아니에요?”

“마나 회로의 구성이 다르니까 모양도 다르겠죠, 위치 역시 그러하고요. …반 정도 진행된 거 같은데, 몸에 이상은 없나요?”

“네, 괜찮아요. 아직 약간 간질거리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버틸 수 있어요!”

“착하네요, 혹시 모르니 팔이나 다리를 움직여 보세요.”

이상이 없는지 확인해보라는 말에 질은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어요.

그런데 그 행동이 조금 많이 어설펐을까요, 탈리안이 그 모습을 보고 힘껏 웃음을 참는 것처럼 손으로 입을 가리고 고개를 질이 누운 방향의 반대로 돌렸어요.

팔과 다리를 한꺼번에 들어서 공중에서 허우적거리기도 하며, 손을 쥐었다 폈다 하기도 하고, 앞뒤로 흔들거나….

어쨌든 보기에 좀 많이 웃겼나 봅니다.

“그, 그만해도 돼요, 질….”

“네? 네에...”

평소라면 조금 더 관찰하며 웃었을지도 모를 탈리안이었지만, 이번에는 곧바로 그만두게 했어요.

분명 각인을 새기는 데에 집중하기 어려웠던 거겠죠.

그렇지만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참는 것도 각인을 새기는 것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를 때쯤이 돼서야 가능했어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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