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화 〉 마나의 각인 (3)
* * *
질이 처음 마나의 맥을 보고 나서 하루, 이틀은 별 소득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뭐든 잘하면 그건 마녀와 같은 천재일 테니까요.
질에게는 재능이 있다고 했지, 천재라고는 하지 않았잖아요? 그렇다고 세 번째 되는 날에 어떤 소득이 있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나마 다행인 건 마나와 조금은 친해져서 질은 마나의 맥이 지나는 방이 아니라, 평소에도 원할 때면 마나를 볼 수 있게 되었다는 겁니다.
하지만 이건 소득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웠어요.
자연의 마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거나, 혹은 자연으로부터 빌리는 형식으로 체내에 옮겨야만 소득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질은 아직 제자리걸음만 반복하고 있었어요.
그래도 나쁜 일만 있는 건 아니에요, 일이 잘 안 풀리다 보니 도서관에 나와 잡일도 하며 일에 익숙해지고… 이렇게 탈리안과 잡담도 할 시간이 늘어났으니까요.
"근데 언니, 마나의 각인은 무슨 역할을 하는 거예요? 마법을 쓸 수 있게만 해주는 거예요?"
"당연히 한가지 능력만 있다면 고통을 감내하며 새길 이유가 없죠. 각인을 새겨주는 사람이 사용하는 기초적인 마법의 식을 간소화해서 압축해 놓았다고 보면 편해요.
하지만 마나 회로를 직접 건드리는 만큼 그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예요. 사람마다 다르긴 하겠지만, 말했었죠? 죽을 수도 있다고 했던 거.
이 세계의 모든 생명은 고유의 마나 회로를 가지고 있어요. 혹시 골렘을 알고있나요?"
뜬금없이 골렘의 이야기를 꺼내는 탈리안이지만, 쓸데없는 말을 꺼낼 그녀가 아니죠.
그렇지만 질은 그 의도를 모르는 게 당연했어요.
"알고 있어요, 마나를 담은 인공적인 핵을 동력으로 움직이는 인형이죠?"
하지만 골렘에 대해 모르는 것은 아니었죠.
왜? 질은 항상 모험가들의 이야기를 들어왔으니까 당연한 일입니다.
모험가들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듣다 보면 여러 가지 유용한 정보들이 머릿속에 들어올 테니까요.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질 자신도 몰랐겠지만 말이에요.
"…의외네요, 모를 줄 알았는데… 어디서 알게 된 건가요?"
"마을에서.. 헤헤.."
"…어쨌든, 그 골렘은 마나의 핵만 있다고 해서 움직이는 게 아니에요. 정교한 마나 회로가 세세하게 짜여있기 때문에 마나를 통해 움직이는 거죠.
골렘이야 고통을 못 느끼고 부여된 보조 마법 때문에 핵이 파괴되기 전까지는 자가수복을 하며 절대로 죽지 않지만… 사람은 다르죠.
마나의 각인을 새기다가 회로가 잘못되어 흐름이 바뀌면 어떻게 될 것 같나요?
몸 한 곳이 움직이지 않게 된다면 다행인 일이고, 보통은 제대로 된 마나의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아 죽음에 이르게 돼요."
마을이라는 단어가 질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탈리안은 잠깐 당황하는가 싶더니 빠르게 설명을 이어갔어요.
당사자야 아무렇지 않은 듯한 모습을 겉으로 나타내지만, 그게 강한 척하는 것일지 누가 알겠습니까.
"하지만 탈리안 언니는 마…. 실력이 엄청난 마법사잖아요.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이건 실력 문제가 아니에요, 질. 각인을 새긴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어요."
"다, 다른 능력은요?"
질이 말을 급히 돌린 데에는 다른 이유가 없었습니다.
단순히 탈리안이 실력 문제가 아니라고 단정 짓는 말을 한 것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일 거예요.
마음 한구석에는 이런 생각도 했을 거예요.
'탈리안은 실력이 굉장한 마법사니까 죽을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같은 것을 말이죠.
지금껏 봐온 탈리안은 그러고도 충분한 마법사의 모습을 보여줬거든요.
실제로 탈리안의 실력이 뛰어나거나 뛰어나지 않더라도, 이미 보여준 퍼포먼스만으로 질에게 그런 인식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했을 거예요.
"기본적으로는 마나 회로의 각성과 각인에 따라 고유 능력이 부여되기도 해요. 저는…. 짧은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과 그 미래와 이어지는 시간에 간섭하는 게 가능한 힘을 가졌죠."
역시 마녀다운 힘을, 탈?인간급의 힘을 가졌네요.
“미래를 알면 미래에 일어날 일을 바꾸는 건 간단한 거 아니에요?”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질. 일단 제 능력에 대한 설명은 나중에 해줄게요. 원래 하던 이야기로 돌아가서 마나의 각인이 하는 일이 또 뭐가 있냐면….”
똑, 똑.
“탈리안, 손님이 찾아왔어요.”
“지금은 바쁘니까 돌려보내세요, 실리아.”
“그게…. 실리아도 거절하려 했는데, 황궁에서 보내신 분이라서….”
황궁이라는 말에 탈리안의 무미건조했던 표정이 한순간에 짜증으로 범벅되었어요.
탈리안이 황궁과 무슨 관계를 이어가고 있길래 질이 탈리안의 얼굴이 아닌 방 한구석을 쳐다보고만 있는 걸까요.
아마 까다로운 일인 것은 분명할 겁니다.
“질, 미안하지만 자리를 좀 피해주시겠어요?”
“알겠어요, 저.. 너무 기분 나빠하지 마세요... 언니.”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탈리안은 자신을 걱정해주는 질에게 작은 미소를 지어주며, 마법을 이용해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이 방에 손님과 단둘이 있게 된다면 곧바로 얼굴이 험악하게 바뀔 것이 뻔해 보이는데요.
질이 방을 나선 뒤로 5분 후, 딱 봐도 귀족 중의 귀족으로 보이는 키가 큰 여성이 들어왔어요.
이 여성이 황궁에서 왔다는 것 자체가 지겹다는 듯한 탈리안이었지만, 섣부른 말은 하지 않기로 했나 봅니다.
입을 꾹 닫고서, 먼저 말을 꺼내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그 증거였죠.
“…오랜만입니다.”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신 거죠. 간섭하지 않기로 했던 약속은 어떻게 된 거예요? 아비.”
아비라고 불린 여자가 먼저 인사를 해왔지만, 질을 처음 구했을 때와 같이 차가운 말투로 대답하는 탈리안이었어요.
질의 걱정을 덜기 위해 거짓말을 했었다지만 너무 당당한 거 아닌가요, 이건.
하지만 둘이 서로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 상황을 보아하니, 탈리안에게 있어 아비라는 여성은 악연에 위치해 있는 사람일 겁니다.
“금, 아니…. 당신은 이 이름을 싫어했었죠. 제가 당신을 신경 써주는 만큼 그 아비라는 별칭도 안 쓰면 안 되겠습니까, 그렇게 귀여운 별칭은 어울리지도 않을뿐더러….”
“굳이 이런 작은 도서관에 찾아온 용건이나 말하세요. 황제 루스 아발테인 직속 기사단의 부기사단장님.”
“후우…. 우리의 존재 이유와도 같은 것인데, 이를 거부하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아비, 협력관계라고는 하지만 저는 당신들과 함께 있는 매 순간이 역겨워요. 한 번 더 무의미하게 시간을 낭비했다가는…!”
급격하게 변하는 탈리안의 분위기와 함께 잡담을 이어가던 아비의 입도 다물어졌어요.
한번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는 아비의 모습에, 그제야 탈리안은 적의를 감추고 다시 기분을 가라앉혔습니다.
이후 아비의 태도도 탈리안과 별반 다를 게 없었죠.
서로가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품지 않은 듯한, 정말 사무적인 용건으로만 만나고 있는 모양을 하게 됐어요.
“…일전에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처음에 이 세계의 주민들이 재앙의 침공에 대항했던 것은 알고 계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저희 직속 기사단은 기사단장과 수많은 인재들을 잃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혹시, 만약에라도 인재 양성을 도우라는 말은 꺼내지도 않았으면 하네요.”
“…언제까지 현실에서 도망칠 거죠? 그는 언젠가 이 세계에서 재앙보다 더한 상황을 불러올 것입니다. 그 전에 조금이라도 더 인재를 모아놔야만…!”
“아비, 당신이 저에 대해서 모를 리는 없겠으니…. 당신이 저에게 원하는 것은 마법사의 양성에 관한 것이겠죠. 그렇다면 더 잘 알고 있을 텐데요. 마나의 각인을 새기다가 죽어 나간 마법사가 몇이나 되는지.”
“대를 위해서라면 소는 희생할 수밖에 없는…!”
“조용히 해요! 협력관계를 끝장내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만 해요.
당신은 너무 가식적이에요, 아비. 그 모습에 휘둘리는 것도 한두 번이지…. 지금은 공통의 적이 있으니까 참을 뿐이라는 것을 당신도 알잖아요.
저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걸 보고 싶지 않아요. 각오도 없는 사람들이 힘에 혹해서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는 모습을 몇 번을 봤다고 생각하나요.
그런데 이제는 이 세계의 주민들을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그저 장기 말로 써먹기 위해 각인을 새겨달라? 웃기지 마세요.
그뿐만이 아니에요. 당신도 알고 있을 거예요, 퓨이에게 일어난 일에 대해서…. 저도 당신의 가식적인 모습에 당한 피해자에 속한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해요.”
몇 번의 말이 오가고 탈리안의 마지막 말에, 아비는 자신의 말을 들어줄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문으로 향했습니다.
“슈트리니 폰 퓨이의 일에 대해서는 유감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곤 탈리안의 기분을 신경 쓰지도 않는 말을 내뱉으며 방에서 나갔어요.
탈리안은 그저 아비가 사라진 자리를 매섭게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어요.
자신도 눈치채고 있지 못하고 있는 거겠지만, 그 정도로 화가 난 게 분명할 겁니다.
방 안이 탈리안의 탁한 마나로 가득 차 이글거리고 있었거든요.
언제나처럼 차분한 탈리안이지만, 그 어느 때보다 화가 났다고 할 수 있을 거예요.
문 뒤편에서 질이 엿듣는 것도, 아비가 나올 때에 맞춰 자리를 피한 것도 모르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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