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마나 회로 (2)
* * *
도서관의 일을 돕는 것은 시작도 못 하고, 하루 쉬고 난 뒤의 일입니다.
질은 고열에 휩싸여 도서관에 출근도 하지 못한 채로 방에서 실리아의 간호를 받으며 누워있었어요.
왜 탈리안이 보살펴주지 않느냐 하면, 부끄러웠나 봅니다.
질을 실리아에게 맡기고 나가기 전에 이런 말을 남겼었거든요.
"오늘 하루 잘 부탁할게요, 실리아."
질이 아픈 게 많이 걱정되었나 봐요.
하지만 거의 모든 감정을 죽이고 살아가는 탈리안으로서는 질을 보살피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수가 없었겠죠.
잘게 부수어져 깨진 유리 파편의 알갱이만큼의 크기를 가진 감정으로는 스스로 나서는 게 부끄러웠을 겁니다.
그에 반해 분신들은 그 감정들을 부풀리고 부풀려서, 탈리안의 한계까지 극대화시켜 만든 것들이니까요.
정상적인 상태의 자신에게 그러기에는 나중에 찾아올 후폭풍이 두려운 것일 겁니다.
"질, 괜찮나요? 실리아가 덜 아프도록 열심히 치료는 해주고 있는데…"
"네... 괜찮, 아요..."
누가 봐도 힘을 쥐어짜서 대답하는 것이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는 모습입니다.
힘들어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어 침대 옆에 놓인 탁자에는 물수건과 물이 담긴 큰 그릇이 준비되어 있었어요.
이미 몇 번 갈아치운 듯한 모양을 하고 있는걸 보니 보통 힘든 게 아닌가 봅니다.
"실리아는 질이 어떤 상태인지 잘 알고 있어요, 강한 척하지 않아도 돼요!"
실리아는 어제 비밀의 방에서 탈리안이 마나 회로 청소 중에 손을 댔던 부위에 손을 대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상대로 한꺼번에 너무 많은 회로를 손본 나머지 마나가 폭주해버린 거예요.
질을 도울 생각으로 했던 회로의 청소를 한꺼번에 처리한 게 오히려 독이 돼버린 거죠.
원래라면 하나하나 청소한 뒤, 마나가 새로 정리된 마나 회로에 적응할 시간을 줘야 했습니다.
보통 사람이라고 해도 마나 회로의 청소를 그렇게 간단히 하루에 다 처리할 위인도 없는 게 당연하구요.
단지 탈리안이 마녀로서 너무 뛰어났을 뿐이었다는 게 이번 일의 전말이었어요.
"조, 금, 버티기.. 힘들어요..."
"실리아도 탈리안도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누군가의 마나 회로를 청소하는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아프지 않게 마나의 순환에 도움을 주고 있으니 한 번만 봐주세요. …나중에 질이 좋아하는 것도 사주거나 만들어줄 테니까요."
사고에 대해 사죄를 하면서 손 아래에 마법 식을 몇 겹을 겹쳐 만들어내 질의 체내 마법 순환에 보조를 계속하는 실리아였어요.
탈리안이었다면 실리아보다는 비교적 단순하게 말했겠죠.
'제 실수에요, 미안해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몰랐어요.'
…라고 할 게 뻔합니다.
워낙 차갑고 메마른 게 탈리안의 평소 모습이다 보니, 그럴 수밖에요.
뭐 그러든 말든, 지금의 질에게는 대답할 기력조차 없는 듯 조용히 실리아의 간호를 받으며 눈을 감고 있습니다.
심한 고열에 지쳐 잠든 걸지도 모르겠네요.
곤히 잠든 질을 바라보는 실리아의 눈빛이 장난이 아니지만, 이대로는 실리아의 모습만 줄창 보게 될 것만 같으니 탈리안이 있는 장면으로 넘어가죠.
"그래서 펜던트는 시간에 맞춰 들여온 건가요."
"이봐, 펜던트가 문제가 아니라고 했잖아."
"펜던트를 장식할 마수정은 제가 구하면 되니까 상관없어요."
"고집 참…. 기다려, 저기 어디 뒀을 테니까."
거구의 남자와 말씨름을 하던 중이었나 봅니다.
곧이어 펜던트를 찾으러 간다며 뒤에 있던 문 안으로 들어갔지만요.
펜던트를 과연 어디에 쓸지 모르겠지만, 마수정이라는 물건도 필요한가 보네요.
저번에 질의 가족의 묘비를 만들어 주었던 걸 생각하면 마수정인지 뭔지 하는 것도 금방 만들어내겠죠.
기억을 복사해서 보관하는 보석도 만들어내는 마녀니까요.
남자를 기다리는 탈리안은 흘러가기만 하는 시간에 지루하지도 않은지, 남자가 사라질 때와 같은 자세로만 있었습니다.
마녀라서 그렇다…. 라고 핑계를 대기에는 너무 마네킹 같은 모습입니다.
"어이, 찾아왔다. 가격은 처음 발주할 때부터 말했었지? 10만 Eli."
"쓸데없이 바가지 씌우는 건 전문가급이네요."
"펜던트 사기 싫은가 봐?"
남자의 말에 '쿵!' 하며 카운터에 돈주머니를 내려놓았어요.
그리곤 남자가 손에 든 펜던트를 손으로 낚아채 가게를 빠져나갑니다.
남자는 돈주머니를 확인도 하지 않고 카운터 아래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밖으로 나온 탈리안은 수도가 아닌 바닷가 같은 곳에 서 있었어요.
아마 그 문을 사용한 것이겠죠.
높고 파란 하늘에는 새들이 날아다니고, 바닷가의 모래사장을 따라가 보면 한쪽에는 잘 정돈된 회색빛의 부두가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 멀지 않은 조금 더 깊어지는 바다 쪽에는 배들이 띄워져 있었죠.
이런 바닷가라고 한다면 계절 중 여름이 머릿속에 이미지 하기에 더 쉽지만, 이곳은 온통 눈으로 덮여있었습니다.
탈리안은 주변의 모래사장에서 굴러다니는 자갈 중에서 적당한 것을 골라 들었습니다.
그 뒤, 마법을 써서 바람으로 돌을 깎아내었어요.
깎아낸 돌은 곧 질에게 선물했던 보석이 되었고, 펜던트의 보석이 들어갈 만한 자리에 끼워 넣었죠.
"마나헤바인."
보석을 손으로 덮고 한 번 더 마법을 주창하는 탈리안.
탈리안의 몸에서 평소 그녀의 것이라 보기 어려운 색을 가진, 마나의 오라가 흘러나와 보석으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무엇이든 가뿐히 해내는 마녀이기 때문에 어떤 마법도 실패할 일이 없음에도, 탈리안은 굳이 보석을 덮고 있는 손을 떼어 확인했습니다.
초록빛…그보다는 약간 탁한 빛의 보석이 펜던트에 끼워져 있었어요.
이 보석이 다른 보석들과 다른 점이라면 보석 안에 담긴 빛이 특정 방향을 가리키는 듯하다는 것이었죠.
일종의 나침반과도 같은 모습이에요.
너무 쉽게 단정 짓는다고 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탈리안이 보석의 빛이 가리키는 향하는 방향을 따라 걷고 있으니 나침반과 다를 게 없을 겁니다.
무슨 이유로 이런 것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탈리안의 저 진지한 얼굴을 보니 가벼운 마음으로 만든 장난감은 절대 아니겠네요.
"…빛이 약해."
혼자서 중얼거리며 한마디를 내뱉고선 아무 민가의 문고리를 돌려 장소를 옮깁니다.
어디로든 통하는 문을 사용하여 탈리안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사방팔방 성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성과도 같은 곳이었어요.
오전 시간이라 그런지, 그다지 많은 사람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만… 보이는 사람들도 대부분 같은 모양을 한 제복을 입고 있어 학생처럼 보였죠.
그에 탈리안은 적당히 눈치를 보고 마법을 사용해 옷을 그들과 같은 옷으로 바꿔버렸어요.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보지 못했을 거예요.
봤다면 마녀보다 뛰어난 인물일 텐데, 과연 탈리안보다 뛰어난 일반인이 있을까요?
"아까보단 강하지만…."
옷을 바꿔입었다지만, 놀러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바로 펜던트를 보고 빛의 방향을 확인합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돌아다녀도 원하는 건 보이지 않는지, 또다시 장소를 바꿨어요.
그렇게 한번, 두 번, 세 번… 정말 많은 장소를 뛰어넘었을 때일까요.
무언가를 찾는 탈리안의 이 행동은, 도서관이 폐관하는 시간까지 끝나지 않았어요.
집에 돌아온 탈리안은 찾던 것도 찾지 못하고 허탕만 쳐서 돌아왔지만, 제일 먼저 질이 있는 방으로 올라갔죠.
끼익, 거리며 열리는 문소리에 실리아가 제일 먼저 탈리안에게 인사를 건넸습니다.
"어서 와요, 그는 찾았나요?"
"…질은 어떤가요, 돌아올 때 확인했을 때는 잠든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실리아가 지극정성으로 간호하고 있는데 얼마나 편하면 잠들기까지 하겠어요. 근데 그 옷은 뭔가요?"
"…마법 학교라는 곳의 제복이에요. …그를 찾으러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었으니까요."
실리아와 대화를 하면서도 질에게서 눈을 떼질 못하네요.
그렇게까지 걱정되는 걸까요.
"…정말이지, 그렇게 기죽지 마세요! 언젠가는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저희가 그렇게 쉽게 죽는 존재도 아니잖아요?"
"알아요, 하지만 그가 없으면 저는… 질보다 약한 존재인걸요."
"가서 쉬도록 해요, 탈리안. 질은 실리아가 계속 돌볼 테니까."
"알겠어요, 그리고 이거… 질이 일어나면 전해주세요. 펜던트에요."
"이건… 실리아의 원본이 되는 사람이 이런 사람이라 다행이라니까요."
탈리안이 건넨 펜던트는 지금껏 들고 있던 펜던트와는 다른 새로운 것이었어요.
모양만 본다면 수수하기 그지없어 일반 펜던트와도 같아 보이지만, 실리아의 반응을 보니 또 그런 단순한 물건은 아닌가 봅니다.
자신의 분신이 칭찬해오는데도 무시하며 방을 나가는 탈리안이에요.
"…질을 부탁해요."
탈리안답지 않게 여기저기 돌아다녔으니, 피곤할 만할 겁니다.
그러니 실리아의 제안을 이렇게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겠죠.
질을 그렇게 걱정하면서도 말이에요.
원래라면 질이 잠든 지금이라면 고생하는 실리아 대신해, 자신이 직접 간호하겠다고 했을 텐데 말입니다.
이렇게 피곤할 정도로 찾아다닌 걸 보면 '그'가 상당히 중요한가 봅니다.
실리아의 말대로 언젠가는 찾겠지만, 반드시 찾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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