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고아의 작은 마녀와 뱀파이어-14화 (14/189)

〈 14화 〉 마나 회로 (1)

* * *

질이 처음으로 진상 손님을 맞이하고 실력 좋게 사건을 해결해버린 다음 날.

무슨 일인지 질은 분신들의 일을 돕지 않고 비밀의 방에서 탈리안과 단둘이 마주 보고 앉아있었어요.

그것도 오른쪽 팔을 탈리안에게 잡혀있는 채로 말이에요.

“아무리 집에 공짜로 얹혀사는 게 마음에 걸린다고는 해도…. 일을 도와주는 것은 도와주는 거니까, 그에 대한 대가는 주지 않으면 안 되겠죠.”

“안 그러셔도 되는데....”

요컨대, 일을 돕겠다고 나선 질에게 앞으로 고생할 테니 그에 대한 선물을 미리 주겠다는 거네요.

마녀라지만 어울리지 않게 마음씨 한번 곱네요.

어쩌다 이런 마녀가 탄생하게 된 건지 참 궁금합니다.

마녀라고 해서 자연적으로 어디선가 뿅 하고 태어난 건 아닐 겁니다.

그렇다고 일개 평민 부부의 사이에서 비범한 자식이 태어나 마녀로 자란 것도 아닐 테죠.

마녀 탄생의 비화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알게 될 기회가 있겠죠.

지금은 이 이야기에 집중하도록 합시다.

“그러니… 어제 말했던 마나 회로를 깨끗하게 청소해주도록 할게요. 아직도 저는 당신이 마법을 배운다는 것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지금은 줄 만한 것들이 이런 것밖에 없네요.”

“마나 회로를 어떻게 청소해요?”

“녹이 슬었다, 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죠? 정확히는 막혀있는 게 맞아요. 오랫동안 쓰지 않아서 기능을 상실해 낡아버린 배관처럼 말이죠. 저는 그 녹이 슨 부분에 제 마나를 흘려 넣어 뚫을 거에요.”

말을 마치자마자 탈리안의 몸 주변에서 검은빛의 오라가 일렁거렸어요.

분명 마나를 흘려 넣으면서 생기는 일종의 부산물에 가까운 것이겠죠, 하지만 질은 그에 겁먹고 탈리안이 잡고 있던 오른팔을 강하게 빼냈습니다.

탈리안이 눈치채지 못하고 놓쳐버릴 정도로 순식간에 빠르게 말이에요.

이에 완전히 동그랗게 변한 눈동자로 질을 바라보는 탈리안입니다.

“…질?”

“앗! 그게! 저, 그... 날개 달린 거하고 비슷한 느낌이 들어서....”

“….”

이건 상처가 될만한 말이 아니었을까요.

침착하면서도 힘 빠진, 빛이 없는 동태눈깔로 변한 탈리안의 시선이 방구석으로 향했어요.

반드시 상처받은 거네요.

“아니, 그게... 그러니까! 언니... 제 말은, 그게 아니라!”

눈치가 빠른 질은 그럴 의도로 말한 게 아니라며 탈리안의 기분을 신경을 쓰는 모습을 보였지만….

탈리안은 몇 분간 말없이, 움직임 없이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쯤 되니 반응이 없는 탈리안의 모습에 질은 1초 뒤에 바로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변했어요.

자신의 말실수로 인해 침울해진 상대의 얼굴을 보는 것은 보통 괴로운 일이 아닐 거에요.

그것도 자신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준 상대라면 말이에요.

“그러려고 한, 말이... 아닌데...”

“…괜찮아요, 질. 눈을 감고 몸을 맡기세요.”

“언, 앗...!”

정말 울기 1초 전쯤에 갑자기 자신의 품 안으로 끌어안으며 눈을 감으라는 말을 하는 탈리안입니다.

끌어안은 탈리안의 팔 힘이 세서 그런지, 갑작스런 행동에 놀란 질은 몇 번 저항하려다가도 어쩔 수 없이 눈을 감았어요.

“부드럽게 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아프지 않을 거니까… 처음은 오른팔이에요.”

눈을 감자마자 탈리안의 마나가 질의 팔을 감쌌습니다.

그 순간 움찔하는 질이지만, 동시에 탈리안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을 느끼고선 곧바로 얌전해졌어요.

“오른팔은 다 끝났어요, 어렵지 않죠? …다음은 가슴 정중앙.”

탈리안은 이번에는 천천히 질의 등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쓰다듬어주며 진정시켰어요.

천천히 질의 상반신을 감싸는 탈리안의 마나, 다만… 아까와는 다른 느낌을 받는 건지 질이 잠시동안 부들거리며 몸에 힘을 줬습니다.

그렇게 탈리안의 마나가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일까요, 마녀라면 이 정도는 보통이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약간 개운한 느낌이 들지 않나요? 다음은 왼쪽 허벅지에요. …긴장 푸세요, 질.”

그런데도 질이 대단하다고 느껴지는 것은 탈리안의 말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다는 겁니다.

자신을 위한 행동이라지만 이전에도 말했듯, 질에게 있어 공포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마나의 기운에 무서울 만도 한데 말입니다.

눈을 감으라는 말에 지금껏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죠.

게다가 방금의 말실수 덕분인지 이질적인 감각에도 입도 뻥긋하지 않고 조용히 탈리안의 청소를 버텨내는 중이에요.

어린아이치고는 상당하다고 봅니다.

“착하네요, 질. 거의 다 끝나갑니다.”

이렇게 애쓰는 질을 대견하다는 듯이 달래는 모습을 보면… 항상 언니로 불리는 탈리안은 언니보다는 어머니가 더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합니다.

키를 생각하면 전혀 안 어울리긴 합니다만, 키는….

아니! 외모부터가 너무 아름다워서 어디 자식을 둔 부모라고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나이도 젊어 보이다 못해 어려 보이니, 전혀 그렇지 않을 겁니다!

“…허벅지도 끝났어요, 질. 이제 마지막으로 머리만 하면 끝나요.”

…탈리안의 말에 역시 대답하지 않고, 눈을 뜨지도 않은 상태로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질입니다.

탈리안은 한 손으로는 질의 등을 받쳐주고, 한 손으로는 질의 뒷머리를 쓰다듬는 자세를 취하며 마나를 다루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전에 비할 데 없이 깊게 집중하기 시작해, 마나와 오라를 천천히 질의 몸 전체를 감싸버렸어요.

완전히 뒤덮여버린 질은 탈리안을 있는 힘껏 안아, 온몸에 힘을 주었습니다.

“겁먹지 마세요, 괜찮아요. …하나도 무섭지 않으니까.”

지금 이 둘이 있는 비밀의 방만큼은 온 세상에서 격리된 것만 같은 조용함을 가졌습니다.

그뿐일까요, 시간이 멈춘 것만도 같았어요.

서로가 서로에게 안겨있는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으니까요.

어찌 보면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아 보입니다만, 원체 두 명의 외모가 뛰어나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되니 당연하다면 당연합니다.

이대로 몇 분간 시간이 지났습니다.

“질, 끝났어요.”

“….”

“질?”

불러도 대답이 없는 질, 한 번 더 불러보는 탈리안이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습니다.

다시 한번 질을 부르려 탈리안이 입을 떼려는 순간 질이 대답했습니다.

“…조금만 더 안겨있을래요.”

“알겠어요.”

질이 진정을 되찾기까지 또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시간.

똑같은 자세에서 한 치의 움직임 없이 안겨있기만 하는 것은 탈리안에게 있어 지루한 시간일 만도 한데, 불만 하나 없습니다.

오히려 마나 회로를 청소할 때처럼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거나, 토닥여 주기도 합니다.

하염없이 길고 긴 시간이 지나, 도서관의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릴 때가 되어서야.

그제야 질은 탈리안의 품 안에서 나왔어요.

출근했을 때부터 마나 회로의 청소를 시작했으니, 청소가 늦게 끝났다고 가정해도 최소 몇 시간은 서로가 안겨있던 셈입니다.

마녀인 탈리안이야 사람의 범주에서 벗어난 존재이니 가능한 일이라 치지만, 질은 탈리안의 품 안에서 졸지 않았을까 예상해봅니다.

뭐, 탈리안도 평소라면 이 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을 테니… 중간중간 서로 낮잠을 잤을지도 모르는 일이네요.

“이제 충분한가요?”

“...네. 너무 오래 안겨있었던 거 같아요, 죄송해요. 언니 안 힘들어요?”

“괜찮아요, 저는 마녀니까요.”

말을 마치며 자리에서 일어나 모자를 고쳐 쓰는 탈리안은 질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일으켜 세웠습니다.

“질, 오늘 나머지 시간에는 어떻게 할 건가요?”

“도서관 일을 돕는 건 무리일 거 같아요...”

“이해할 수 있어요, 마나 회로 청소 중에 그토록 떨었으니….”

확실히, 질은 마나 회로의 청소 도중 힘껏 안겼던 적이 있었죠.

다시 떠올려야 할 점은… 질이 힘을 너무 준 나머지, 탈리안의 옷을 꽈악 쥐어 주름까지 만들어냈었다는 점입니다.

구겨진 부위가 탈리안의 등 쪽 부분이라 본인은 기억하지도 못하겠지만요.

“그건...”

“꾸짖는 게 아니니 주눅 들지 마세요. 오늘은 폐관 시간까지 여기서 쉬고 있으세요. 저는 가볼 곳이 있어서 외출해야 하니, 저에게 용건이 있다면 분신들을 불러 말하면 될거에요.”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질을 본 탈리아는 손가락을 튕겨, 방 한쪽에 질이 쉴만한 침대와 베개, 이불을 만들었어요.

이후 비밀의 방의 문고리를 돌려 나가기 직전, 탈리안은 무언가 생각난 듯 질을 돌아봤습니다.

“질, 잊은 게 있어서 그러는데… 오늘은 웬만하면 돌아다니지 마세요. 마나 회로가 안정을 취해야 하니 편히 쉬어야 해요.”

“저 말 잘 듣잖아요,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

“네, 잘 알죠…. 착하네요.”

탈리안이 문 너머로 사라진 이후, 질은 탈리안이 만들어둔 침대로 가선 누웠습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상당히 힘들었을 거에요.

그래도 마법에 한걸음, 아니 몇십 걸음은 더 나아간 셈이니 만족하고 있을 겁니다.

이불을 턱 바로 아래까지 올려 덮으면서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헤매는 듯한 저 얼굴을 보세요.

분명 탈리안도 저런 질을 위해서 도움을 주는 거겠죠.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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