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화 〉 견학 (3)
* * *
탈리안과 질, 실리아는 도서관에서 돌아와 세 명이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분신까지 식사를 할 필요가 있었냐고 묻는다면.. 탈리안만이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닐까요?
실리아도 자리에 앉는 모습에 당황한 질은 얼떨결에 3인분의 식사를 만들어야만 했습니다.
"실리아 언니, 왜 다른 분들은 안 오시고 언니만..."
질이 궁금한 부분은 포인트가 조금은 다른 곳에 있었나 봅니다.
식사를 할 것이라면 왜 실리아만 도서관에서 집으로 넘어오고 다른 분신들은 사라진 것이냐는 거겠죠.
그렇지만 탈리안은 가만히 식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보아, 이 상황 자체에 큰 문제는 없는 듯합니다.
"그건 말이죠? 탈리안이 실리아들도 같이 식사했으면 좋겠다고 말한 거예요!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으면 식사를 준비하는 질이 힘들어지니까, 이번엔 실리아만 온 거랍니다."
질의 질문에 대답해주면서 손으로 여러 가지 제스처를 취해가는 그 모습은 흡사 질의 친언니를 보는 것만 같습니다.
질에게 친언니가 있는 건 아니지만, 질도 탈리안도 서로 생긴 게 비슷하잖아요? 처음부터 자매였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게다가 실리아의 태도에서 질을 소중히 대하는 게 묻어나온다고 해야 할까요.
식사 도중 질의 그릇에 반찬이 비어 있다면, 한 젓가락씩 가져다 놓아주거든요.
그게 아니더라도 식사 전 요리를 할 때 옆에서 거들어준다거나, 식탁에 접시나 수저를 놓아주는 것을 보면 그렇습니다.
가끔 머리를 쓰다듬는 건 실리아 자신의 사심을 채우는 행동 같아 보이기도 합니다만.
"그럼 다음번엔 다른 언니들도 오는 거예요?"
"그건…."
"이번이 특별한 거예요, 질. 실리아도 말했듯 식사 준비하는 데에 힘들 거 아니에요."
실리아가 대답할 타이밍에 말을 가로채는 탈리안이었습니다.
다음은 없을 거다, 라고 완전히 못을 박아버리네요.
탈리안에게 있어서 당연한 일이기는 합니다.
쓸데없이 마나를 낭비하는 일이 있다면 그만큼 귀찮고 비효율적인 일은 또 없죠.
단순히 자아 없이, 주어지는 명령만 수행하는 골렘과 같은 분신이라면 모르겠지만.. 실리아와 달리아 같은 분신들은 자아가 존재하니까요.
기억도 감정도, 전부.
아마 보통의 마법사는 불가능한 마법일 겁니다.
자신의 감정을 떼어내어 만든 또 하나의 자신.
아무리 뛰어난 탈리안이라고 해도 쉽고 간단한 마법은 절대 아닐 겁니다.
"그럼 왜 이번엔 같이 먹는 거예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어쨌든 마저 먹을까요?"
이번에도 대화를 마치면서, 질의 입가에 묻은 소스를 닦아주며 은근히 챙겨주는 실리아였습니다.
비록 요리를 만든 건 질이지만, 그게 뭐 어떻다는 겁니까.
질은 이미 실리아의 보살핌에 익숙해져 입가를 닦아줄 때에 가만히 있는걸요.
식사는 그렇게 긴 시간 유지되지 않았습니다.
질이 설거지를 하려고 하자 실리아가 거들어주려고 했지만, 한사코 거절하는 그 모습에 실리아는 뒤에 앉아 탈리안의 빈자리를 대신했습니다.
탈리안은 볼 일이 생겼다며 집 밖으로 나가버렸거든요.
만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은 사이이기 때문에 이렇게 어색하고 따로 지내는 게 이상한 건 아닙니다.
숲속에 혼자 살던 마녀잖아요, 도서관에 출퇴근하고 있다지만 일은 전적으로 분신에게 맡겨놓고, 말입니다.
아직도 질은 탈리안이 자신을 왜, 무엇 때문에 구해주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겁니다.
마녀가, 자신을, 무슨 이유로?
단순한 호기심?
원래 설거지라는 단순 노동 자체가 잡스러운 생각을 하기 좋은 일이기는 합니다.
"질, 불편한 건 없나요?"
"네? 네.. 당장은, 없어요."
"당장은, 말이죠? 실리아는 궁금한 게 있거든요. 알려주실 건가요?"
"어떤 건데요?"
"정말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만 마법을 배우려고 하는 건가요?"
항상 자신을 삼인칭으로 칭하며 밝고, 친절하고, 사근사근 말해오는 실리안이지만.. 이번만큼은 상당히 진지해 보였습니다.
목소리 톤이 달라진 것도 있지만 이번엔 탈리안의 개입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으니, 정말로 실리아 개인이 궁금해서 물어보는 것이겠네요.
이를 잘 알고 있기에 하던 설거지를 멈추고 돌아서서 실리아를 바라봤습니다.
머뭇거리면서 식탁을 바라보다가, 실리아를 한번 쳐다봤다가, 다시 바닥을 봤다가...
보다 못한 실리아는 일어서서 다가가 질의 뺨에 손을 살포시 얹습니다.
질은 낯선 손길에 겁먹어 눈을 잠깐 감았다가 뜨고선 차분히 그 손길을 느끼는 중이에요.
"질, 실리아에게 말하기 힘들다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탈리안과는 달리 저는 이해할 수 있답니다."
"...저는 탈리안 언니가 아니었다면 죽었을지도 몰라요, 실리아 언니."
갑작스러운 고백에 실리아는 대답하려 입을 뗐다가 다시 닫았습니다.
질의 뺨을 어루만지던 손도 다시 가져갔구요.
뭔가 중요한 말을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나 보죠.
"그 날개 달린 그림자가 싫어요.. 거짓말하지 않을게요, 감추지 않을게요.. 복수가 하고 싶었어요. 그 그림자들에게."
"왜 복수가 하고 싶어요? 가족들을 질에게서 앗아갔기 때문에?"
그 이유 말고 다른 이유가 더 있을까요?
아무리 어른스러운 질이라지만, 그 외에 이유로 쓰일만한 것이 있기나 할까요?
평온한 일상을 빼앗겨서.. 라는 이유도 가족을 앗아갔다는 것과 결국은 같은 의미의 것입니다.
질의 고향 마을, 페리시니에서 했던 일이라고는 부모님의 일을 돕거나 모험가들의 이야기를 듣던 게 전부입니다.
설마하니 더 이상 모험가의 이야기를 듣지 못해서인 것은 아니겠죠.
가족보다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일인걸요.
뭐 무슨 일을 못 하게 되었던,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못 하게 되었으니 복수하고 싶을 만하겠죠.
"복수라면 질, 실리아… 아니 탈리안이 도와줄 수도 있어요. 목숨이 아슬하게 붙어있는 녀석이라면 질도 간단히 복수하는 게…."
"저는 그런 복수가 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언니도 잘 알잖아요."
순식간에 할 말이 사라진 모습, 실리아는 열심히 돌려줄 말을 찾지만 결국 고개를 떨궈버렸어요.
'날개 달린 그림자를 완벽하게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싶다.'
이것이 질이 가진 욕망 중 하나였어요.
하지만 실리아는 질에게 그럴 실력이 없다는 것도 알고,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알기에 탈리안의 힘을 빌리면 어떻겠냐고 제안한 겁니다.
게다가 탈리안의 힘을 빌린다면 당장이라도 그토록 원하는 복수를 짧은 시간 안에 이루는 게 가능하니까요.
그렇지만 그 제안의 결과는... 보시다시피.
"그쯤 하세요, 실리아."
"언니?!"
"탈리안…."
어느 순간 부엌의 문 뒤편에서 몸을 드러낸 탈리안을 보고 놀라는 질과 애처로운 눈빛으로 실패해버렸다는 말을 전하는 실리아.
어느 쪽이든 안쓰럽네요.
"어차피, 질이 쉽게 포기하리란 생각을 하고 있지도 않았어요. 질도… 제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요?"
"그렇지만 언니..!"
"질, 내일부터 도서관에 같이 나오세요. 제가 해줄 말은 그게 전부입니다. 실리아도 이제 그만 쉬세요."
탈리안의 말에 실리아는 다시 형체가 무너져 그림자로 돌아갔습니다.
실리아는 탈리안의 그림자로 빨려 들어가듯 흡수되었어요.
질은 멀뚱멀뚱 가만히 그걸 지켜보기만 하고 있습니다.
"질도 오늘은 그만 올라가서 쉬는 게 어떤가요? 내일부터 도서관에 같이 나가야 할 텐데요."
"네? 네에.."
무슨 생각으로 도서관에 같이 나가자는 말을 했는지, 질은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었습니다.
하지만 탈리안이 그렇게 하라니 시킨대로 해야죠.
탈리안의 말에 대한 거부권이 있기는 할 겁니다만, 없는 거나 마찬가지 아닐까요.
마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더니 도서관에 나오라 한 거잖아요?
그 말은 도서관에 마법을 배우는 것과 관련된 무언가가 있다는 뜻일 겁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도서관에 나오지 않으면 질 스스로가 마법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것을 거부하는 것과 같으니까요.
따를 수밖에 없는 말이네요.
"아, 그리고 질. 저는 도서관에서 당신이 무엇을 해도 신경 쓰지 않을 거예요. 당신이 마나를 다루는 법에 관한 책을 읽든, 마법의 식을 짜는 법에 관한 책을 읽든… 뭘 하든 말이에요."
"아, 네!"
이제야 알겠네요.
구해준 자신은 질을 또다시 죽을 가능성이 있는 길로 들이기 싫지만, 부탁은 들어주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 도서관에 따라오는 것만큼은 허락해준 겁니다.
도서관에서 어떤 걸 하든 그걸 막을 권리까지 가지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질이 마법을 독학으로 배워낼 수 있을지는 또 모르는 일이고 말이죠.
마법이란 게 어디 10살인 꼬마가 쉽게 독학으로 배워 사용할 수 있는 편리한 거던가요.
질의 입장에서야 집에만 있으라고 말하는 것보다 약간의 희망이라도 주는 것이 다행이겠지만요.
"아, 깜빡할뻔 했다... 언니 고맙습니다!"
"…고마운 일을 한 기억은 없네요."
계단을 타고 올라가려던 질은 돌아서서 탈리안에게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재빠르게 뛰어 올라갔습니다.
다음날, 탈리안의 말대로 질은 함께 탈리안과 도서관에 출근했습니다.
출근.. 출석이 더 맞는 말이겠네요.
질에게 있어 도서관은 이제 학교와 다름없는 공간이 될 테니까요.
하지만 한가지 탈리안과 질은 잊어버린 게 있었습니다.
아침을 먹지 않은 탓에 질의 공복이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는 것이었죠.
마법을 독학하려는 순간 꼬르륵거리는 배로 인해서 오늘의 공부는 제대로 시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면 실리아가 질을 데리고 수도를 구경시킬 겸, 밥을 사주기로 했거든요.
이번 경험은 질에게 새롭고 멋진 경험이 될 겁니다.
헤븐즈 왕성이 다스리는 수도 헤브니아는 정말 아름답거든요.
그래봤자 배가 고픈 질에게 그런 풍경이 눈에 쉽게 들어올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뭐 어때요.
고픈 배만 잘 달래주면 되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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